각염법(榷鹽法)

각염법

한자명

榷鹽法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어업

집필자 정연식(鄭演植)

정의

1309년(충선왕 원년)부터 고려 말기까지 시행된, 국가가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여 그 수익을 취하는 소금 전매제도.

개관

고려에서 소금생산은 대개 소금 굽는 일을 전업專業으로 하는 염호鹽戶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집단적으로 염소鹽所에 편적編籍되어 생산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염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국가에서 염분鹽盆에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징세제徵稅制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궁원宮院·사사寺社와 권세가에게는 국가에서 염세를 징수할 수 있는 수세권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강력한 권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염분을 점탈하고 사사로이 염분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차지하였다. 바다의 어장이나 염분을 중앙과 지방의 기관이나 권세가 및 지방의 토호들이 장악하여 그 이익을 취함으로써 징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국가 재정에 손실을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바로잡아 과도한 수취를 막고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려는 노력이 종종있었는데, 그러한 조치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소금 전매제도였다.

소금 전매는 이미 1288년(충렬왕 14) 때 시도되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충선왕이 즉위한 후로 실질적으로 시행되었다. 충선왕은 1298년에 즉위하자마자 궁원·사사·권세가들이 염분을 점유하고서 세금을 내지 않는 불법행위를 적발하여 근절하겠다고 하였으나, 즉위 7개월 만에 원나라에 소환되어 왕위에서 물러남으로써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러다가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계획이 다시 가동되어 1309년 2월에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관리하는 각염제榷鹽制의 시행이 선포되었다.

충선왕이 소금 전매제를 시행한 이유는 당시에 국가 재정이 너무도 어려운 지경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고려 중기 이후 권세가들의 토지 겸병과 인구집중으로 인해 농장이 발달하였고, 그 결과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다. 게다가 30여 년간 몽골과 전쟁을 치르면서 국토가 황폐해져 백성들이 사방으로 떠도는 유민이 되어 재정 기반도 매우 취약해진 상태였으며, 몽골에 복속된 후로는 일본 원정에 소요되는 경비까지 감당해야 하였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시기에 원의 소금 전매제도에 주목하여 유심히 살펴보고 이를 고려에서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부수적인 목표는 염분을 장악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던 권세가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안정적인 국가 재정 수입원을 확보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내용

각염법하에서는 왕실의 내고內庫를 비롯하여 상적창常積倉, 도염원都鹽院, 안국사安國寺와 여러 궁원 그리고 지방의 사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염분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곳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관리도 모두 중앙의 민부民部에 맡겨 민부의 일원적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사로이 염분을 설치하고 소금을 사고파는 사람은 모두 엄벌에 처하였다. 소금값도 국가에서 책정하여 은銀 한 근에 소금 64석, 은 한 냥에 소금 4석, 베 1필에 소금 2석으로 정하였다. 개성 사람들은 개성에 있는 네 곳의 염포鹽鋪에서 소금을 사도록 하고, 지방 군현의 백성들 가운데 소금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의염창義鹽倉에서 사서 쓰도록 하며, 의염창이 가까이 없는 경우에는 고을 관청에 베를 내고 소금을 받아 가도록 하였다. 바닷가 고을에는 염창을 지어 염호鹽戶로 하여금 공염貢鹽을 납부하게 하고, 염창에서는 공염을 보관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바닷가의 염창에서 고을 백성들에게 소금을 팔거나 일부 소금은 염장관鹽場官의 감독하에, 또는 상인들에게 운반을 위탁하여 내륙의 고을로 운반하고 내륙 고을의 주민들은 관에 베를 주고 소금을 구입하도록 한 것이다.

이 조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백성들 가운데 염호를 차출하여 소금 생산의 역을 부과하고 생산된 소금은 염창을 건설하여 그곳에 보관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 도에 일정한 수의 염호와 염분을 배당하였다. 염호와 염분은 양광도에 231호 126좌, 경상도에 195호 174좌, 전라도에 220호 126좌, 평양도에 122호 98좌, 강릉도에 75호 43좌, 서해도에 49호 49좌로 하여 총 892호의 염호에 616좌의 염분이 배당되었다. 이때 염호와 염분의 7할이 소금 생산이 수월한 양광도·경상도·전라도에 집중 배정되었다. 각염제하에서 염호가 국가에 내는 공염은 전세와는 달리 1년에 두 차례 봄·가을로 나누어 납부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소금을 팔아 거둬들이는 수입은 매년 베 4만 필에 이르렀다고 한다.

징세제하에서는 염호가 소금을 팔아 얻은 수입 가운데 일부를 세금으로 내고 남은 소금을 팔아 생계를 렸지만, 각염제하에서는 모든 소금을 국가에 공염으로 납부하고 그 대가를 받아 생활해야 하였다. 개중에는 농업에도 종사하는 염호가 있었다. 하지만 소금 굽는 일이 고되고, 염호의 경제적 사정이 토지를 소유할 정도로 좋은 경우도 거의 없었으므로 농사일과 소금 굽는 일을 겸하는 염호는 아마도 소수에 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각염제를 오래 유지하기에는 적잖은 문제가 있어서 초기에는 강력한 조치로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소금 생산량의 감소였다. 본래 염창의 염장관은 소금값으로 베를 받아 소금을 내어주어야 하는데 베만 받고 소금을 내어주지 못하는 일이 속출하였다. 이것이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아 결국 소금을 사기 위해 내는 소금값이 염세鹽稅라는 세금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소금 생산이 줄어든 근본적인 원인은 염호의 도산逃散에 있었다. 염호에는 다른 부역이 부과되지 않았지만, 소금 굽는 일 자체가 상당히 고된 일이라서 염호의 차출도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확보된 염호 중에도 생산 활동과 이익 추구를 강력하게 통제당하고, 과다한 공염을 납부해야 하는 부담을 견디지 못해 도망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도망간 자들의 공백은 남은 염호들에게 떠넘겨져 염호의 도산이 가속화되었다.

고려 말에는 바닷가에 왜구의 침입과 약탈이 빈번해져서 염호들이 내륙으로 피난하여 소금 생산 활동이 장기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초기의 강력한 감독과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틈을 타고 권세가들이 염분을 탈점奪占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번졌다. 소금의 공급 부족과 소금의 판매를 담당하는 관리들의 부정으로 인해 소금 전매제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그 결과 공민왕 대 이후로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소금의 사사로운 생산과 매매 가 다시 등장하여 각염제는 더욱 제 기능을 잃어가게 되었다. 결국 고려 말 각염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소금의 생산과 유통은 실질적으로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각염제는 폐기되었고, 소금의 사적인 생산과 유통을 허용하며 염분에 세금을 부과하는 징세제로 돌아갔다.

특징 및 의의

14세기 초 고려 충선왕 때 시작된 각염제는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단 한 차례 시행된 소금 전매제도였다. 소금 전매제가 국가 재정에 큰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예상되지만 이를 정상적으로 장기간 운영하기에는 실제 시행과 정의 어려움이 상당히 많았다. 그것이 국가에서 선뜻 소금 전매제를 시행하지 못한 이유이다. 충선왕 때는 고려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중첩되어 있었던 시기이고, 특히 재정적인 취약성이 매우 높아서 비상한 조치가 필요한 때였다. 충선왕은 원에 체류하던 시절에 눈여겨보았던 소금 전매제를 고려에 도입하여 난관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 과도한 통제를 가하는 각염제는 오래지 않아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14세기 중반 공민왕 시기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결국 조선의 개국과 함께 폐기되었다.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다시 대폭 감축되어 징세제로 복귀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14세기 각염제의 성립과 운용(권영국, 한국사론13,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1985), 충선왕의 염법개혁과 염호(강순길, 한국사연구48, 한국사연구회, 1985).

각염법

각염법
한자명

榷鹽法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어업

집필자 정연식(鄭演植)

정의

1309년(충선왕 원년)부터 고려 말기까지 시행된, 국가가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여 그 수익을 취하는 소금 전매제도.

개관

고려에서 소금생산은 대개 소금 굽는 일을 전업專業으로 하는 염호鹽戶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집단적으로 염소鹽所에 편적編籍되어 생산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염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국가에서 염분鹽盆에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징세제徵稅制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궁원宮院·사사寺社와 권세가에게는 국가에서 염세를 징수할 수 있는 수세권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강력한 권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염분을 점탈하고 사사로이 염분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차지하였다. 바다의 어장이나 염분을 중앙과 지방의 기관이나 권세가 및 지방의 토호들이 장악하여 그 이익을 취함으로써 징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국가 재정에 손실을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바로잡아 과도한 수취를 막고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려는 노력이 종종있었는데, 그러한 조치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소금 전매제도였다.

소금 전매는 이미 1288년(충렬왕 14) 때 시도되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충선왕이 즉위한 후로 실질적으로 시행되었다. 충선왕은 1298년에 즉위하자마자 궁원·사사·권세가들이 염분을 점유하고서 세금을 내지 않는 불법행위를 적발하여 근절하겠다고 하였으나, 즉위 7개월 만에 원나라에 소환되어 왕위에서 물러남으로써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러다가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계획이 다시 가동되어 1309년 2월에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관리하는 각염제榷鹽制의 시행이 선포되었다.

충선왕이 소금 전매제를 시행한 이유는 당시에 국가 재정이 너무도 어려운 지경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고려 중기 이후 권세가들의 토지 겸병과 인구집중으로 인해 농장이 발달하였고, 그 결과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다. 게다가 30여 년간 몽골과 전쟁을 치르면서 국토가 황폐해져 백성들이 사방으로 떠도는 유민이 되어 재정 기반도 매우 취약해진 상태였으며, 몽골에 복속된 후로는 일본 원정에 소요되는 경비까지 감당해야 하였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시기에 원의 소금 전매제도에 주목하여 유심히 살펴보고 이를 고려에서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부수적인 목표는 염분을 장악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던 권세가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안정적인 국가 재정 수입원을 확보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내용

각염법하에서는 왕실의 내고內庫를 비롯하여 상적창常積倉, 도염원都鹽院, 안국사安國寺와 여러 궁원 그리고 지방의 사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염분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곳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관리도 모두 중앙의 민부民部에 맡겨 민부의 일원적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사로이 염분을 설치하고 소금을 사고파는 사람은 모두 엄벌에 처하였다. 소금값도 국가에서 책정하여 은銀 한 근에 소금 64석, 은 한 냥에 소금 4석, 베 1필에 소금 2석으로 정하였다. 개성 사람들은 개성에 있는 네 곳의 염포鹽鋪에서 소금을 사도록 하고, 지방 군현의 백성들 가운데 소금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의염창義鹽倉에서 사서 쓰도록 하며, 의염창이 가까이 없는 경우에는 고을 관청에 베를 내고 소금을 받아 가도록 하였다. 바닷가 고을에는 염창을 지어 염호鹽戶로 하여금 공염貢鹽을 납부하게 하고, 염창에서는 공염을 보관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바닷가의 염창에서 고을 백성들에게 소금을 팔거나 일부 소금은 염장관鹽場官의 감독하에, 또는 상인들에게 운반을 위탁하여 내륙의 고을로 운반하고 내륙 고을의 주민들은 관에 베를 주고 소금을 구입하도록 한 것이다.

이 조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백성들 가운데 염호를 차출하여 소금 생산의 역을 부과하고 생산된 소금은 염창을 건설하여 그곳에 보관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 도에 일정한 수의 염호와 염분을 배당하였다. 염호와 염분은 양광도에 231호 126좌, 경상도에 195호 174좌, 전라도에 220호 126좌, 평양도에 122호 98좌, 강릉도에 75호 43좌, 서해도에 49호 49좌로 하여 총 892호의 염호에 616좌의 염분이 배당되었다. 이때 염호와 염분의 7할이 소금 생산이 수월한 양광도·경상도·전라도에 집중 배정되었다. 각염제하에서 염호가 국가에 내는 공염은 전세와는 달리 1년에 두 차례 봄·가을로 나누어 납부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소금을 팔아 거둬들이는 수입은 매년 베 4만 필에 이르렀다고 한다.

징세제하에서는 염호가 소금을 팔아 얻은 수입 가운데 일부를 세금으로 내고 남은 소금을 팔아 생계를 렸지만, 각염제하에서는 모든 소금을 국가에 공염으로 납부하고 그 대가를 받아 생활해야 하였다. 개중에는 농업에도 종사하는 염호가 있었다. 하지만 소금 굽는 일이 고되고, 염호의 경제적 사정이 토지를 소유할 정도로 좋은 경우도 거의 없었으므로 농사일과 소금 굽는 일을 겸하는 염호는 아마도 소수에 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각염제를 오래 유지하기에는 적잖은 문제가 있어서 초기에는 강력한 조치로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소금 생산량의 감소였다. 본래 염창의 염장관은 소금값으로 베를 받아 소금을 내어주어야 하는데 베만 받고 소금을 내어주지 못하는 일이 속출하였다. 이것이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아 결국 소금을 사기 위해 내는 소금값이 염세鹽稅라는 세금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소금 생산이 줄어든 근본적인 원인은 염호의 도산逃散에 있었다. 염호에는 다른 부역이 부과되지 않았지만, 소금 굽는 일 자체가 상당히 고된 일이라서 염호의 차출도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확보된 염호 중에도 생산 활동과 이익 추구를 강력하게 통제당하고, 과다한 공염을 납부해야 하는 부담을 견디지 못해 도망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도망간 자들의 공백은 남은 염호들에게 떠넘겨져 염호의 도산이 가속화되었다.

고려 말에는 바닷가에 왜구의 침입과 약탈이 빈번해져서 염호들이 내륙으로 피난하여 소금 생산 활동이 장기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초기의 강력한 감독과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틈을 타고 권세가들이 염분을 탈점奪占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번졌다. 소금의 공급 부족과 소금의 판매를 담당하는 관리들의 부정으로 인해 소금 전매제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그 결과 공민왕 대 이후로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소금의 사사로운 생산과 매매 가 다시 등장하여 각염제는 더욱 제 기능을 잃어가게 되었다. 결국 고려 말 각염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소금의 생산과 유통은 실질적으로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각염제는 폐기되었고, 소금의 사적인 생산과 유통을 허용하며 염분에 세금을 부과하는 징세제로 돌아갔다.

특징 및 의의

14세기 초 고려 충선왕 때 시작된 각염제는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단 한 차례 시행된 소금 전매제도였다. 소금 전매제가 국가 재정에 큰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예상되지만 이를 정상적으로 장기간 운영하기에는 실제 시행과 정의 어려움이 상당히 많았다. 그것이 국가에서 선뜻 소금 전매제를 시행하지 못한 이유이다. 충선왕 때는 고려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중첩되어 있었던 시기이고, 특히 재정적인 취약성이 매우 높아서 비상한 조치가 필요한 때였다. 충선왕은 원에 체류하던 시절에 눈여겨보았던 소금 전매제를 고려에 도입하여 난관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 과도한 통제를 가하는 각염제는 오래지 않아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14세기 중반 공민왕 시기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결국 조선의 개국과 함께 폐기되었다.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다시 대폭 감축되어 징세제로 복귀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14세기 각염제의 성립과 운용(권영국, 한국사론13,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1985), 충선왕의 염법개혁과 염호(강순길, 한국사연구48, 한국사연구회,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