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

황두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주강현(朱剛玄)

정의

북한 지역의 청천강 하류 열두삼천리벌의 건답에서 행해지던 공동노동조직.

내용

건답직파에 쓰인 황두는 신라시대의 향두가 오랫동안 꾸준히 이어진 것이며, 남한지역에서 이앙법이 발달하면서 일찍이 사라진 농법이 건답직파를 행할 수밖에 없는 청천강 유역에서 특수하게 잔존한 사례이다. 여러 측면에서 두레와 비교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북쪽의 청천강 인근에서는 여전히 모를 내는 이앙법 대신 마른 땅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건답직파법乾畓直播法으로 농사지었다. 안주•문덕•숙천•평원을 포괄하는 너르디너른 ‘열두삼천리벌’이 그곳이다. 황두는 광복 전후 시기까지도 이들 서북에 남아있던 공동노동풍습이었다.
황두와 향도는 밀접하다. 즉 ‘향’이 ‘황’으로, ‘도’가 ‘두’로 전음된 것으로 보인다. 향도는 노동조직 황두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향도-상두’로 변천되어 상두꾼에 잔존된 향도의 유제를 남겼다. 북한의 민속학자 황철산은 향도와 황두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함경도 지방과 그에 인접한 강원도의 일부 지방에서는 대체로 다른 지방의 상여계에 해당하는 조직을 향도라고 하였으며, 평안도 열두삼천리벌을 중심으로 한 논벼를 건직파乾直播 하는 소위 건갈이(함북지역 방언으로 표준어는 ‘마른갈이’) 지대에서는 농번기에 조직하는 김매기를 공동으로 하는 조직체를 황두라고 하였다.

향도, 황두, 상두 그리고 두레와의 연관성 속에서 황두의 위상을 유추할 수 있다. 신라시대의 향도로부터 조선시대의 상두꾼과 황두 공동노동조직 등 장기지속으로 이어진 한국사상의 민중생활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한다. 조선 후기 이앙법 확산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두레 역시 북상을 거듭하였다. 평안도 지역은 건답이 그대로 존재한 가운데 이앙법이 확산되었다. 황두 노동관행이 병존한 가운데 두레 관행이 19세기 말에서 심지어 20세기 초까지 이 지역으로 북상하였다. 건갈이 지대에서는 두레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으므로 황두가 잔존하였다. 따라서 건갈이 지대에 남은 황두 노동관행은 두레 발생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오래된 노동관행임을 말해 준다.
황두는 마을당 20~30명의 농민이 하나의 작업단위가 되어 김매기 작업만을 수행하였다. 호수가 크면 여러 개의 편대로 나누어 조직하였다. 한 마을에 한두 개의 황두가 조직되었다. 황두 지휘체계는 농사경험이 많은 황두꾼 중에서 계수契首와 부계수副契首를 역원으로 뽑았으며, 신망 있고 경험 많은 황두꾼을 선출하였다.
주된 작업대상은 김매기이다. 황두가 활동한 계절은 보통 하지부터 김매기 작업이 끝날 때까지였다. 노동활동은 규율이 있고 능률적이었다. 황두 작업은 계수나 부계수의 통일적인 지휘 밑에 공동노동의 우월성이 발휘되도록 조직되었다. 황두꾼은 새벽에 박주라꾼이 신호용 나팔인 박주라를 불면 이른 시간 안에 일정 장소에 모여 계수의 점검을 받고 작업장으로 갔다. 황두꾼의 모든 행동이 달리기처럼 진행된 데서 얼마 전까지도 평안남도 문덕 지역에서는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을 황두꾼 같다고 말하였다.
황두꾼의 일상 소지품은 호미, 늬역(짚, 혹은 장풍으로 나래식으로 엮은 비옷), 조삿갓(갈로 엮은 삿갓), 겨블(담뱃불) 등이었다. 비옷인 도롱이와 담뱃불인 마른 쑥 뭉치를 들고 다니는 두레 풍습과 동일하다.
물론 주된 작업도구는 호미였으며 개별적으로 관리하였다. 황두꾼이 쓰던 호미는 남쪽의 두레꾼이 쓰던 섬세한 호미와는 모습이 달랐다. 건갈이 지대에서 쓰였던 ‘베루개’ 같은 호미는 평안도의 고유 호미이다. 황두의 제초작업은 맨땅이라 작업 강도가 고되었다. 따라서 기경 작업만 아니라 제초작업에도 축력을 이용한 ‘칼거’가 등장하였고 중복 무렵에 비가 와서 물을 댈 수 있게 되면 ‘물후치질(무논에서 극젱이로 땅을 가는 일을 뜻하는 북한어)’을 하였다.

특징 및 의의

작업장 이동은 계수契首의 지시에 따라 박주라 소리에 맞추어 이동하였다. 두레농기를 들고 다니면서 두레풍물을 쳤지만 황두는 그러한 풍습이 약했다. 악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두레의 나발에 준하는 박주라로 신호를 보냈고 선소리로 일과 놀이를 즐겼다. 황두의 공동식사는 점심과 오후 한때, 즉 오후 3~4시경에 곁두리(참)를 즐겼다. 식사나 휴식이 끝나면 역시 박주라 신호에 따라 일제히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황두를 짜는 회의는 김매기 전이었다. 계수를 뽑는 회의가 있었을 것이고 작업을 마무리하는 회의가 있었다.

참고문헌

17•8세기 향도조직의 분화와 두레발생(이태진, 진단학보67, 진단학회, 1988), 두레, 농민의 역사(주강현, 들녘, 2006), 조선후기 황두공동노동연구(주강현, 국사관논총99, 국사편찬위원회, 2002), 향도에 관하여(황철산, 문화유산2,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1961).

황두

황두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주강현(朱剛玄)

정의

북한 지역의 청천강 하류 열두삼천리벌의 건답에서 행해지던 공동노동조직.

내용

건답직파에 쓰인 황두는 신라시대의 향두가 오랫동안 꾸준히 이어진 것이며, 남한지역에서 이앙법이 발달하면서 일찍이 사라진 농법이 건답직파를 행할 수밖에 없는 청천강 유역에서 특수하게 잔존한 사례이다. 여러 측면에서 두레와 비교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북쪽의 청천강 인근에서는 여전히 모를 내는 이앙법 대신 마른 땅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건답직파법乾畓直播法으로 농사지었다. 안주•문덕•숙천•평원을 포괄하는 너르디너른 ‘열두삼천리벌’이 그곳이다. 황두는 광복 전후 시기까지도 이들 서북에 남아있던 공동노동풍습이었다.
황두와 향도는 밀접하다. 즉 ‘향’이 ‘황’으로, ‘도’가 ‘두’로 전음된 것으로 보인다. 향도는 노동조직 황두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향도-상두’로 변천되어 상두꾼에 잔존된 향도의 유제를 남겼다. 북한의 민속학자 황철산은 향도와 황두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함경도 지방과 그에 인접한 강원도의 일부 지방에서는 대체로 다른 지방의 상여계에 해당하는 조직을 향도라고 하였으며, 평안도 열두삼천리벌을 중심으로 한 논벼를 건직파乾直播 하는 소위 건갈이(함북지역 방언으로 표준어는 ‘마른갈이’) 지대에서는 농번기에 조직하는 김매기를 공동으로 하는 조직체를 황두라고 하였다.

향도, 황두, 상두 그리고 두레와의 연관성 속에서 황두의 위상을 유추할 수 있다. 신라시대의 향도로부터 조선시대의 상두꾼과 황두 공동노동조직 등 장기지속으로 이어진 한국사상의 민중생활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한다. 조선 후기 이앙법 확산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두레 역시 북상을 거듭하였다. 평안도 지역은 건답이 그대로 존재한 가운데 이앙법이 확산되었다. 황두 노동관행이 병존한 가운데 두레 관행이 19세기 말에서 심지어 20세기 초까지 이 지역으로 북상하였다. 건갈이 지대에서는 두레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으므로 황두가 잔존하였다. 따라서 건갈이 지대에 남은 황두 노동관행은 두레 발생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오래된 노동관행임을 말해 준다.
황두는 마을당 20~30명의 농민이 하나의 작업단위가 되어 김매기 작업만을 수행하였다. 호수가 크면 여러 개의 편대로 나누어 조직하였다. 한 마을에 한두 개의 황두가 조직되었다. 황두 지휘체계는 농사경험이 많은 황두꾼 중에서 계수契首와 부계수副契首를 역원으로 뽑았으며, 신망 있고 경험 많은 황두꾼을 선출하였다.
주된 작업대상은 김매기이다. 황두가 활동한 계절은 보통 하지부터 김매기 작업이 끝날 때까지였다. 노동활동은 규율이 있고 능률적이었다. 황두 작업은 계수나 부계수의 통일적인 지휘 밑에 공동노동의 우월성이 발휘되도록 조직되었다. 황두꾼은 새벽에 박주라꾼이 신호용 나팔인 박주라를 불면 이른 시간 안에 일정 장소에 모여 계수의 점검을 받고 작업장으로 갔다. 황두꾼의 모든 행동이 달리기처럼 진행된 데서 얼마 전까지도 평안남도 문덕 지역에서는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을 황두꾼 같다고 말하였다.
황두꾼의 일상 소지품은 호미, 늬역(짚, 혹은 장풍으로 나래식으로 엮은 비옷), 조삿갓(갈로 엮은 삿갓), 겨블(담뱃불) 등이었다. 비옷인 도롱이와 담뱃불인 마른 쑥 뭉치를 들고 다니는 두레 풍습과 동일하다.
물론 주된 작업도구는 호미였으며 개별적으로 관리하였다. 황두꾼이 쓰던 호미는 남쪽의 두레꾼이 쓰던 섬세한 호미와는 모습이 달랐다. 건갈이 지대에서 쓰였던 ‘베루개’ 같은 호미는 평안도의 고유 호미이다. 황두의 제초작업은 맨땅이라 작업 강도가 고되었다. 따라서 기경 작업만 아니라 제초작업에도 축력을 이용한 ‘칼거’가 등장하였고 중복 무렵에 비가 와서 물을 댈 수 있게 되면 ‘물후치질(무논에서 극젱이로 땅을 가는 일을 뜻하는 북한어)’을 하였다.

특징 및 의의

작업장 이동은 계수契首의 지시에 따라 박주라 소리에 맞추어 이동하였다. 두레는 농기를 들고 다니면서 두레풍물을 쳤지만 황두는 그러한 풍습이 약했다. 악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두레의 나발에 준하는 박주라로 신호를 보냈고 선소리로 일과 놀이를 즐겼다. 황두의 공동식사는 점심과 오후 한때, 즉 오후 3~4시경에 곁두리(참)를 즐겼다. 식사나 휴식이 끝나면 역시 박주라 신호에 따라 일제히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황두를 짜는 회의는 김매기 전이었다. 계수를 뽑는 회의가 있었을 것이고 작업을 마무리하는 회의가 있었다.

참고문헌

17•8세기 향도조직의 분화와 두레발생(이태진, 진단학보67, 진단학회, 1988), 두레, 농민의 역사(주강현, 들녘, 2006), 조선후기 황두공동노동연구(주강현, 국사관논총99, 국사편찬위원회, 2002), 향도에 관하여(황철산, 문화유산2,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