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문화(農耕文化)

농경문화

한자명

農耕文化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배영동(裵永東)

정의

땅을 일구어 농작물을 재배하는 노동·기술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농기구 제작과 이용, 가축 사육 그리고 이런 활동과 관련된 의례·세시·신앙 등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

역사

농경이란 용어는 논이나 밭을 갈아 농사를 짓는 것을 한정하는 좁은 의미를 지닌다. 농업은 직업으로서 농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농경에 비해 사회제도적, 산업적 의미가 강한 용어이다. 따라서 농업은 반드시 농경을 기본요소로 하며, 농경이 서구에서 들어온 산업이라는 개념과 결합된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농경과 농업이란 용어는 혼용되지만, 농경은 다분히 고대적인 용어로, 농업은 현대적인 용어로 쓰인다.
원시농경은 굴봉掘捧·괭이·삽 등 단순한 손도구hand tool의 인력농기구를 이용하여 농작물을 재배하며, 대체로 화경농법火耕農法처럼 윤작을 통하여 곡물을 생산하는 이동 농경shifting cultivation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농업은 쟁기와 같은 축력농기구를 이용하여 농작물을 재배하고 자연히 소와 같은 견인 가축을 이용하여 주된 노동력을 충당하여 농작물을 재배하는 형태로 정착 생활과 마을을 형성하고 상호 간에 협동을 통하여 사회생활을 견고하게 하며, 원시농경에 비해 토지생산성을 높인 집약농경intensive cultivation을 가리킨다.
농경의 특징은 씨앗을 토양에 파종해서 장기간에 걸쳐서 가꾼다는 점이다. 사람이 공력과 정성을 기울여서 식용식물을 가꾼 것은 안정적으로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농경은 시대에 따라서 꾸준히 발전하였으니,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는 그 발전 단계가 ①휴경농법休耕農法 단계(통일신라기) ②휴한농법休閑農法 단계(고려기) ③연작농법連作農法 단계(조선기)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원시농경은 신석기시대에 뒤지개[掘棒]와 괭이를 이용한 농경으로 출발되었다. 이후 청동기시대까지는 뒤지개, 괭이, 반달돌칼, 돌낫 같은 단순한 손도구가 중심이 된 농경이었다. 철기시대가 무르익어서야 쟁기를 이용한 농경을 시작하여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철제 보습극젱이, 쇠낫을 비롯하여 많은 농기구가 사용되었다. 이로써 주요 작물의 재배법이 관습화되기 시작하였다.
재배곡물을 살펴보면 신석기시대에는 피·기장·조 등의 작물이 재배되었고,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농경이 발달하면서 수수·콩·팥 등이 추가되었다. 최근 발굴조사에 따르면 벼는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부분적으로 재배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탄소연대 측정 결과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의 가와지 벼는 기원전 2880~2450년,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가현리의 벼는 기원전 2460~2280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이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벼이다. 최근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서 발굴된 기원전 1세기 무렵의 초기 논농사 유적도 주목된다. 괭이·낫·나무스랑(쇠스랑 같은 목제농기구)이 보이며, 특히 최대 80㎝에 달하는 벼껍질층도 발견되어 당시 벼가 주요한 작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북부지방에서는 주로 조·수수·기장·콩 농사를 기본으로 하는 밭농사가 정착되었고, 남부지방에서는 보리·조·콩을 기본으로 하는 밭농사와 논·벼농사[水稻作]가 이루어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5~6세기까지 조와 보리가 주작물이었다. 신라에서는 28년(유리왕 5)에 쟁기보습[犂耜]을 만들었고, 502년(지증왕 3)에 우경牛耕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우경은 시작이 아니라 보편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시대에는 논·벼농사가 대폭 확대되고 모내기법이 일부 지역에서 행해졌다. 고려 말기에는 의술의 발달과 함께 인구압박과 시비기술·제초기술의 발전으로 종래와 다른 새로운 토지 이용법이 마련되었다. 즉 ‘해를 걸러 경작하던 농사법’(휴한농법休閑農法)에서 ‘해마다 경작하는 농법’(연작농법連作農法)으로 발전하였다.
15세기 초 남부지방의 선진농업을 기록한 『농사직설農事直說』에 따르면 밭에서는 ‘2년 3작법’ ‘2년 4작법’ 외에 전후 작물을 연결하여 재배하는 ‘그루갈이법’[根耕法]과 전후 작물을 일정 기간 동시에 재배하는 ‘사이짓기법’[間種法, 間作法]이 행해졌고, 논에서도 ‘1년 2작법’이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농서 『촬요신서撮要新書』(1415~1429)의 전체적인 내용이 좋은 일진이나 방위 등에 맞추어 파종하고 일하여야 흉작을 피하고 풍작을 거둘 수 있다는 내용으로 구성된 것은 주술에도 일정하게 의존하였음을 시사한다. 17세기는 세계적으로 소빙기little ice age라는 이상기후에 봉착하여 영농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쳤고 사회가 불안해졌다. 조선에서도 하절기 기온이 저하하고 한발旱魃과 홍수가 되풀이됨으로써 흉년이 거듭되어 기아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새로이 역서曆書를 편찬하고 천문관측기구를 제작하여 자연현상을 우리 생활과 밀착시켰을 뿐 아니라 농우 육성책과 도살금지령을 시행하여 농가당 농우 보유율을 높였고, 농우의 폭넓은 이용으로 노동생산성을 향상시켰다. 가뭄의 위험 때문에 조선 초기까지 금지되었던 모내기법[移秧法]은 17~18세기에 수리시설의 확충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논·벼농사에 커다란 발전을 꾀하였다. 이는 논매기 횟수의 절감, 노동력의 절감, 종자의 절약, 논의 지력 회복, 논에서 1년 2작의 성립, 연간 총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다.
일제강점기에는 화학비료, 줄모내기와 같은 일본식 농법이 도입되었으나 전통농법의 골간은 유지되었다. 1970년대에 우리의 농업기술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다수확 벼품종의 보급, 농약과 비료의 보급, 제초제의 보급 등을 통하여 토지 생산성이 향상되어 비로소 1975년에 전 국민의 식량 자급자족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때 경운기가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노동생산성을 높여주었다. 1980년대에는 트랙터·콤바인 같은 대형농기계가 점진적으로 농촌에서 인기를 모았고, 대형농기계로 갈이·써레질·운반·수확·탈곡 등 주요한 농경 작업을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1990년대에는 우루과이라운드의 영향으로 국제경쟁력이 없는 농산물 가격은 큰 폭으로 하락하였고, 그리하여 국제경쟁력이 있는 상품작물의 재배를 선호하고 있다.

내용

농경은 자연단계에서 문화 또는 문명의 단계로 진입하는 역사적 혁명이었다. 농경생활을 하기 전에는 자연계에 자라는 식물을 채집하거나 동물을 사냥하여 먹고 살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에 대한 약탈이었다. 사람이 동식물을 채집하거나 포획할 때까지 성장하도록 정성을 기울이거나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는 사람들이 살면서 이런저런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제도나 생활양식이다. 문화는 인공이 개입되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채집과 수렵 활동 그 자체는 인위적이라고 하더라도, 채집과 수렵의 대상물인 동식물을 성장·존속하도록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반면, 농경은 씨를 뿌리고 가꾸어서 수확하는 일련의 인간 행위이다. 따라서 채집이나 수렵에서 농경으로 전환한 것은 곧 자연에서 문화의 성립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이 영어에서는 농경을 뜻하는 agriculture라는 단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단어는 라틴어의 ager(토양)와 culture(문화)가 합성된 것이다. 즉 농경은 토양 위에 가꾸어진 문화, 말을 바꾸면 땅에 꽃핀 문화라는 의미이다. 더욱이 문화를 뜻하는 culture는 ‘경작하다’ ‘재배하다’라는 뜻의 cultivate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영어권에서 문화는 시원적으로 농경과 직결되는 개념이었고, 이것으로 보아 고대에는 농경이 곧 문화였다.
우리 민족은 신석기시대부터 농작물을 재배하여 식품의 대부분을 마련하였고 이로써 생계를 유지하였다. 농경은 곧 생명이었고, 사회를 유지하는 중추 산업이었다. 조선시대 세종의 명에 따라 편찬된 농서 『농사직설』의 서문에서 “농자천하국가지대본農者天下國家之大本”이라고 한 것은 농경이 기본적 생계 수단이고 나아가 국가와 만백성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농경생활은 여러 가지 농경의례와 영농주기를 형성하였다. 정월 대보름, 이월 머슴날, 단오, 하지, 백중, 한가위, 중구일, 상달 고사, 동지 등은 농경생활과 긴밀하게 연결된 날이었다. 정월 대보름은 농사의 풍년을 비는 날이었고, 이월 머슴날부터 농사를 시작하여 단오에는 노동을 위한 힘을 기르고, 하지 전에는 모내기를 마쳐야 하고, 이어서 김매기를 부지런히 하다가 백중 무렵에 와서야 호미씻이를 먹었다. 여기까지가 파종과 재배를 위한 영농시간이었다. 한가위나 중구일에 이르러서는 햇곡식으로 조상에게 천신薦新을 하고, 상달에는 가신에게 감사의 고사를 올렸으며, 동지에 이르러서는 농경생활을 위한 태양력인 24절기에 근거하여 새로운 해로 넘어간다고 여겼다. 한가위부터가 농작물 수확과 감사를 표현하는 시간이었다. 지역별로 시기의 차이가 있지만, 농부들은 작물별로 언제 갈이·파종·김매기·거름주기·물대기·수확 등의 일을 해야 하는지 24절기에 따라서 인식하고 실천하였다. 성인이 되고 성숙한 농군이 되어 농사의 계절(철) 감각이 몸에 배면 ‘철이 들었다.’라고 하거나 ‘철을 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힘든 농경 노동을 여러 사람이 손쉽게 하기 위해 문화적인 장치를 마련하여 관습화하였다. 벼농사에서 모내기·논매기 때에는 단시간에 집약적인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이때 농민들은 두레·품앗이와 같은 집중적으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방식을 채택하여 일하였다. 두레는 농민들의 공동노동조직이자 공동노동의 방식으로서 조선 후기에 모내기법의 보급과 더불어 더욱 조직화·대형화되었다. 공동노동·공동식사·공동유희를 겸하는 특성이 있는 두레는 힘든 노동을 즐겁게 하여 노동능률을 제고하며, 공동부조와 공동오락으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여 마을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두레는 보통 20~30명부터 50여 명까지로 조직되었다. ‘두레꾼’ ‘두레패’라고 불린 두레의 성원은 한 마을의 농가당 한 명씩 참여하여 구성되었다. 이들의 자격은 노동력이 왕성한 성인 남자였으며, 여성과 미성년자 그리고 노인은 제외되었다. 두레 노동을 할 때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쓰인 농기를 앞세우고 들판으로 나가서 풍물과 농요를 동반하여 일하였다. 그해 두레 노동의 마지막인 ‘세벌(3차)논매기’가 완료되는 때(음력 7월)에 ‘호미씻이’라는 두레꾼의 축제를 열었다.
한편 품앗이는 노동력 교환 형식을 띤다. 두레가 공동적·공동체적인 것이라면 품앗이는 개인적인 것으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사회적 지체가 비슷한 사람끼리 혹은 친지간에 이루어지는 노동력 교환이었다. 두레가 농번기 중에서도 바쁜 모내기와 논매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품앗이는 시기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조직되었다. 작업의 종류도 농가의 거의 모든 일에 다 적용되었다.
고지雇只’는 임금노동자층의 형성으로 인해 출현한 제도이다. 궁핍한 농민 수명이 연대책임 아래 농업경영자와 노동계약을 체결하고 춘궁기에 노임의 일부를 미리 차용하여, 그것으로 생활의 궁핍을 해결하고 농번기에 노동으로 갚는 제도이다. 고지 제도는 단체계약의 공동노동이란 특징을 보인다.
농촌에 자본주의적 색채가 짙어지고 일제에 의한 촌락 자치제 파괴, 공동집회의 방지, 농주 제조금지와 같은 억압으로 두레는 일제강점기부터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다만 품앗이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임금노동인 ‘놉’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졌다.

특징 및 의의

농경문화는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 정착한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오랜 시기 동안 선택한 삶의 방식이자 문화였다. 넓고 오랜 역사적 흐름 속에서 농업은 시기마다 지역마다 독특한 풍속을 이루면서 한국문화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어왔다. 심지어는 농업 이외의 문제도 농업 현상에 비유되어 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거나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은 농경에서 소재를 채택하고 있지만, 세상의 이치나 사람의 됨됨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필시 우리가 농경민족이었기 때문에 애초의 의미가 확장된 언술이다.
농경은 무척 다양한 면모를 띠었다. 노동이면서 기술이며, 예술이면서 주술이고 또한 사회제도이자 경제였다. 한국의 농경은 기술적 활동으로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주술과 예술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삶의 과정이었다. 농경주술로는 춘경제·수신제·봇제·기우제·지우제·쥐불놀이·일진에 따른 파종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으며, 농경예술로는 풍물·농요·호미씻이 등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농사의 결과는 불안하고 예측하기 어려우며, 그래서 때로는 주술로서 안정을 유지하고, 축제와 예술을 통하여 노동의 고통을 해소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기술 수준이 미미하던 고대 농경에는 주술적 요소가 중시되었으나, 기술 수준이 진보된 현대의 과학적 영농에서는 주술적 요소가 크게 약화·감소되었다. 그러나 농경주술은 그 시대의 사회환경체계 속에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구성하는 요소로 이해된다. 농경예술은 영농활동을 하는 가운데 형성된 예술이지만, 농경을 위한 예술로서도 그 의미와 역할이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농경을 위한 기술, 그에 결합된 주술과 예술은 상호작용하면서 거대한 체계의 농경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식용식물을 생산하려는 실제적 측면인 농경기술을 중심에 놓고 보면 주술과 예술은 농경기술이 갖는 한계를 신앙적·심리적·정서적 차원에서 보완해주었다. 따라서 우리 농경문화는 기술·주술·예술의 복합체로 이해될 수 있다.

참고문헌

농업(배영동, 한국민속학의 이해, 문학아카데미, 1994), 농경생활의 문화읽기(배영동, 민속원, 2000), 농업기술의 역사(배영동, 한국민속사 입문, 지식산업사, 1996),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高橋昇, 구자옥 외 역, 농촌진흥청, 2008), 한국 선사시대 벼농사에 관한 연구-고양 가와지 2지구를 중심으로(이융조·박태식·하문식, 성곡논총25-1, 성곡언론문화재단, 1994),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구자옥 외 역, 농촌진흥청, 2009).

농경문화

농경문화
한자명

農耕文化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배영동(裵永東)

정의

땅을 일구어 농작물을 재배하는 노동·기술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농기구 제작과 이용, 가축 사육 그리고 이런 활동과 관련된 의례·세시·신앙 등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

역사

농경이란 용어는 논이나 밭을 갈아 농사를 짓는 것을 한정하는 좁은 의미를 지닌다. 농업은 직업으로서 농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농경에 비해 사회제도적, 산업적 의미가 강한 용어이다. 따라서 농업은 반드시 농경을 기본요소로 하며, 농경이 서구에서 들어온 산업이라는 개념과 결합된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농경과 농업이란 용어는 혼용되지만, 농경은 다분히 고대적인 용어로, 농업은 현대적인 용어로 쓰인다.
원시농경은 굴봉掘捧·괭이·삽 등 단순한 손도구hand tool의 인력농기구를 이용하여 농작물을 재배하며, 대체로 화경농법火耕農法처럼 윤작을 통하여 곡물을 생산하는 이동 농경shifting cultivation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농업은 쟁기와 같은 축력농기구를 이용하여 농작물을 재배하고 자연히 소와 같은 견인 가축을 이용하여 주된 노동력을 충당하여 농작물을 재배하는 형태로 정착 생활과 마을을 형성하고 상호 간에 협동을 통하여 사회생활을 견고하게 하며, 원시농경에 비해 토지생산성을 높인 집약농경intensive cultivation을 가리킨다.
농경의 특징은 씨앗을 토양에 파종해서 장기간에 걸쳐서 가꾼다는 점이다. 사람이 공력과 정성을 기울여서 식용식물을 가꾼 것은 안정적으로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농경은 시대에 따라서 꾸준히 발전하였으니,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는 그 발전 단계가 ①휴경농법休耕農法 단계(통일신라기) ②휴한농법休閑農法 단계(고려기) ③연작농법連作農法 단계(조선기)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원시농경은 신석기시대에 뒤지개[掘棒]와 괭이를 이용한 농경으로 출발되었다. 이후 청동기시대까지는 뒤지개, 괭이, 반달돌칼, 돌낫 같은 단순한 손도구가 중심이 된 농경이었다. 철기시대가 무르익어서야 쟁기를 이용한 농경을 시작하여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철제 보습과 극젱이, 쇠낫을 비롯하여 많은 농기구가 사용되었다. 이로써 주요 작물의 재배법이 관습화되기 시작하였다.
재배곡물을 살펴보면 신석기시대에는 피·기장·조 등의 작물이 재배되었고,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농경이 발달하면서 수수·콩·팥 등이 추가되었다. 최근 발굴조사에 따르면 벼는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부분적으로 재배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탄소연대 측정 결과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의 가와지 벼는 기원전 2880~2450년,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가현리의 벼는 기원전 2460~2280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이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벼이다. 최근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서 발굴된 기원전 1세기 무렵의 초기 논농사 유적도 주목된다. 괭이·낫·나무스랑(쇠스랑 같은 목제농기구)이 보이며, 특히 최대 80㎝에 달하는 벼껍질층도 발견되어 당시 벼가 주요한 작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북부지방에서는 주로 조·수수·기장·콩 농사를 기본으로 하는 밭농사가 정착되었고, 남부지방에서는 보리·조·콩을 기본으로 하는 밭농사와 논·벼농사[水稻作]가 이루어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5~6세기까지 조와 보리가 주작물이었다. 신라에서는 28년(유리왕 5)에 쟁기보습[犂耜]을 만들었고, 502년(지증왕 3)에 우경牛耕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우경은 시작이 아니라 보편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시대에는 논·벼농사가 대폭 확대되고 모내기법이 일부 지역에서 행해졌다. 고려 말기에는 의술의 발달과 함께 인구압박과 시비기술·제초기술의 발전으로 종래와 다른 새로운 토지 이용법이 마련되었다. 즉 ‘해를 걸러 경작하던 농사법’(휴한농법休閑農法)에서 ‘해마다 경작하는 농법’(연작농법連作農法)으로 발전하였다.
15세기 초 남부지방의 선진농업을 기록한 『농사직설農事直說』에 따르면 밭에서는 ‘2년 3작법’ ‘2년 4작법’ 외에 전후 작물을 연결하여 재배하는 ‘그루갈이법’[根耕法]과 전후 작물을 일정 기간 동시에 재배하는 ‘사이짓기법’[間種法, 間作法]이 행해졌고, 논에서도 ‘1년 2작법’이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농서 『촬요신서撮要新書』(1415~1429)의 전체적인 내용이 좋은 일진이나 방위 등에 맞추어 파종하고 일하여야 흉작을 피하고 풍작을 거둘 수 있다는 내용으로 구성된 것은 주술에도 일정하게 의존하였음을 시사한다. 17세기는 세계적으로 소빙기little ice age라는 이상기후에 봉착하여 영농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쳤고 사회가 불안해졌다. 조선에서도 하절기 기온이 저하하고 한발旱魃과 홍수가 되풀이됨으로써 흉년이 거듭되어 기아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새로이 역서曆書를 편찬하고 천문관측기구를 제작하여 자연현상을 우리 생활과 밀착시켰을 뿐 아니라 농우 육성책과 도살금지령을 시행하여 농가당 농우 보유율을 높였고, 농우의 폭넓은 이용으로 노동생산성을 향상시켰다. 가뭄의 위험 때문에 조선 초기까지 금지되었던 모내기법[移秧法]은 17~18세기에 수리시설의 확충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논·벼농사에 커다란 발전을 꾀하였다. 이는 논매기 횟수의 절감, 노동력의 절감, 종자의 절약, 논의 지력 회복, 논에서 1년 2작의 성립, 연간 총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다.
일제강점기에는 화학비료, 줄모내기와 같은 일본식 농법이 도입되었으나 전통농법의 골간은 유지되었다. 1970년대에 우리의 농업기술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다수확 벼품종의 보급, 농약과 비료의 보급, 제초제의 보급 등을 통하여 토지 생산성이 향상되어 비로소 1975년에 전 국민의 식량 자급자족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때 경운기가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노동생산성을 높여주었다. 1980년대에는 트랙터·콤바인 같은 대형농기계가 점진적으로 농촌에서 인기를 모았고, 대형농기계로 갈이·써레질·운반·수확·탈곡 등 주요한 농경 작업을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1990년대에는 우루과이라운드의 영향으로 국제경쟁력이 없는 농산물 가격은 큰 폭으로 하락하였고, 그리하여 국제경쟁력이 있는 상품작물의 재배를 선호하고 있다.

내용

농경은 자연단계에서 문화 또는 문명의 단계로 진입하는 역사적 혁명이었다. 농경생활을 하기 전에는 자연계에 자라는 식물을 채집하거나 동물을 사냥하여 먹고 살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에 대한 약탈이었다. 사람이 동식물을 채집하거나 포획할 때까지 성장하도록 정성을 기울이거나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는 사람들이 살면서 이런저런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제도나 생활양식이다. 문화는 인공이 개입되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채집과 수렵 활동 그 자체는 인위적이라고 하더라도, 채집과 수렵의 대상물인 동식물을 성장·존속하도록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반면, 농경은 씨를 뿌리고 가꾸어서 수확하는 일련의 인간 행위이다. 따라서 채집이나 수렵에서 농경으로 전환한 것은 곧 자연에서 문화의 성립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이 영어에서는 농경을 뜻하는 agriculture라는 단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단어는 라틴어의 ager(토양)와 culture(문화)가 합성된 것이다. 즉 농경은 토양 위에 가꾸어진 문화, 말을 바꾸면 땅에 꽃핀 문화라는 의미이다. 더욱이 문화를 뜻하는 culture는 ‘경작하다’ ‘재배하다’라는 뜻의 cultivate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영어권에서 문화는 시원적으로 농경과 직결되는 개념이었고, 이것으로 보아 고대에는 농경이 곧 문화였다.
우리 민족은 신석기시대부터 농작물을 재배하여 식품의 대부분을 마련하였고 이로써 생계를 유지하였다. 농경은 곧 생명이었고, 사회를 유지하는 중추 산업이었다. 조선시대 세종의 명에 따라 편찬된 농서 『농사직설』의 서문에서 “농자천하국가지대본農者天下國家之大本”이라고 한 것은 농경이 기본적 생계 수단이고 나아가 국가와 만백성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농경생활은 여러 가지 농경의례와 영농주기를 형성하였다. 정월 대보름, 이월 머슴날, 단오, 하지, 백중, 한가위, 중구일, 상달 고사, 동지 등은 농경생활과 긴밀하게 연결된 날이었다. 정월 대보름은 농사의 풍년을 비는 날이었고, 이월 머슴날부터 농사를 시작하여 단오에는 노동을 위한 힘을 기르고, 하지 전에는 모내기를 마쳐야 하고, 이어서 김매기를 부지런히 하다가 백중 무렵에 와서야 호미씻이를 먹었다. 여기까지가 파종과 재배를 위한 영농시간이었다. 한가위나 중구일에 이르러서는 햇곡식으로 조상에게 천신薦新을 하고, 상달에는 가신에게 감사의 고사를 올렸으며, 동지에 이르러서는 농경생활을 위한 태양력인 24절기에 근거하여 새로운 해로 넘어간다고 여겼다. 한가위부터가 농작물 수확과 감사를 표현하는 시간이었다. 지역별로 시기의 차이가 있지만, 농부들은 작물별로 언제 갈이·파종·김매기·거름주기·물대기·수확 등의 일을 해야 하는지 24절기에 따라서 인식하고 실천하였다. 성인이 되고 성숙한 농군이 되어 농사의 계절(철) 감각이 몸에 배면 ‘철이 들었다.’라고 하거나 ‘철을 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힘든 농경 노동을 여러 사람이 손쉽게 하기 위해 문화적인 장치를 마련하여 관습화하였다. 벼농사에서 모내기·논매기 때에는 단시간에 집약적인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이때 농민들은 두레·품앗이와 같은 집중적으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방식을 채택하여 일하였다. 두레는 농민들의 공동노동조직이자 공동노동의 방식으로서 조선 후기에 모내기법의 보급과 더불어 더욱 조직화·대형화되었다. 공동노동·공동식사·공동유희를 겸하는 특성이 있는 두레는 힘든 노동을 즐겁게 하여 노동능률을 제고하며, 공동부조와 공동오락으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여 마을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두레는 보통 20~30명부터 50여 명까지로 조직되었다. ‘두레꾼’ ‘두레패’라고 불린 두레의 성원은 한 마을의 농가당 한 명씩 참여하여 구성되었다. 이들의 자격은 노동력이 왕성한 성인 남자였으며, 여성과 미성년자 그리고 노인은 제외되었다. 두레 노동을 할 때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쓰인 농기를 앞세우고 들판으로 나가서 풍물과 농요를 동반하여 일하였다. 그해 두레 노동의 마지막인 ‘세벌(3차)논매기’가 완료되는 때(음력 7월)에 ‘호미씻이’라는 두레꾼의 축제를 열었다.
한편 품앗이는 노동력 교환 형식을 띤다. 두레가 공동적·공동체적인 것이라면 품앗이는 개인적인 것으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사회적 지체가 비슷한 사람끼리 혹은 친지간에 이루어지는 노동력 교환이었다. 두레가 농번기 중에서도 바쁜 모내기와 논매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품앗이는 시기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조직되었다. 작업의 종류도 농가의 거의 모든 일에 다 적용되었다.
‘고지雇只’는 임금노동자층의 형성으로 인해 출현한 제도이다. 궁핍한 농민 수명이 연대책임 아래 농업경영자와 노동계약을 체결하고 춘궁기에 노임의 일부를 미리 차용하여, 그것으로 생활의 궁핍을 해결하고 농번기에 노동으로 갚는 제도이다. 고지 제도는 단체계약의 공동노동이란 특징을 보인다.
농촌에 자본주의적 색채가 짙어지고 일제에 의한 촌락 자치제 파괴, 공동집회의 방지, 농주 제조금지와 같은 억압으로 두레는 일제강점기부터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다만 품앗이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임금노동인 ‘놉’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졌다.

특징 및 의의

농경문화는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 정착한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오랜 시기 동안 선택한 삶의 방식이자 문화였다. 넓고 오랜 역사적 흐름 속에서 농업은 시기마다 지역마다 독특한 풍속을 이루면서 한국문화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어왔다. 심지어는 농업 이외의 문제도 농업 현상에 비유되어 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거나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은 농경에서 소재를 채택하고 있지만, 세상의 이치나 사람의 됨됨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필시 우리가 농경민족이었기 때문에 애초의 의미가 확장된 언술이다.
농경은 무척 다양한 면모를 띠었다. 노동이면서 기술이며, 예술이면서 주술이고 또한 사회제도이자 경제였다. 한국의 농경은 기술적 활동으로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주술과 예술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삶의 과정이었다. 농경주술로는 춘경제·수신제·봇제·기우제·지우제·쥐불놀이·일진에 따른 파종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으며, 농경예술로는 풍물·농요·호미씻이 등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농사의 결과는 불안하고 예측하기 어려우며, 그래서 때로는 주술로서 안정을 유지하고, 축제와 예술을 통하여 노동의 고통을 해소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기술 수준이 미미하던 고대 농경에는 주술적 요소가 중시되었으나, 기술 수준이 진보된 현대의 과학적 영농에서는 주술적 요소가 크게 약화·감소되었다. 그러나 농경주술은 그 시대의 사회환경체계 속에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구성하는 요소로 이해된다. 농경예술은 영농활동을 하는 가운데 형성된 예술이지만, 농경을 위한 예술로서도 그 의미와 역할이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농경을 위한 기술, 그에 결합된 주술과 예술은 상호작용하면서 거대한 체계의 농경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식용식물을 생산하려는 실제적 측면인 농경기술을 중심에 놓고 보면 주술과 예술은 농경기술이 갖는 한계를 신앙적·심리적·정서적 차원에서 보완해주었다. 따라서 우리 농경문화는 기술·주술·예술의 복합체로 이해될 수 있다.

참고문헌

농업(배영동, 한국민속학의 이해, 문학아카데미, 1994), 농경생활의 문화읽기(배영동, 민속원, 2000), 농업기술의 역사(배영동, 한국민속사 입문, 지식산업사, 1996),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高橋昇, 구자옥 외 역, 농촌진흥청, 2008), 한국 선사시대 벼농사에 관한 연구-고양 가와지 2지구를 중심으로(이융조·박태식·하문식, 성곡논총25-1, 성곡언론문화재단, 1994),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구자옥 외 역, 농촌진흥청,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