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박철수(朴哲守)

정의

건축물의 벽·복도·계단이나 그 외 설비 등의 전부 또는 일부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각 가구가 하나의 건축물 안에서 각각 독립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된 공동주택의 하나로, 주택으로 쓰이는 층수가 5개 층 이상인 주택.

역사

일반적으로 제국주의는 식민지로부터 강제 잉여를 유출하기 위한 통로로, 식민지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한 장치로 회사·공장·은행 등 기구는 물론 경찰·학교·감옥·병원 등의 근대 제도를 식민지에 이식하였다. ‘아파트’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은행이나 회사의 급여생활자는 물론 전문학교 학생, 기자, 작가, 카페 여급 및 각종 사회단체 활동가 등 근대적 직종에 가담하게 된 독신생활자들을 위하여 일본인 사업가들이 단기 거처용 임대주택으로 조선에 처음 소개한 새로운 주택 유형이 ‘아파트’이다.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문화정치로 겉모양을 바꾸며 창간이 허용된 각종 신문이며 잡지·단행본과 전문잡지 등을 통하여 당시 아파트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아파-트멘츠·하우스’, ‘아파-트멘트’, ‘아파-트’ 등으로 부르거나 표기하였다. 때론 ‘아파-ㅌ멘트’, ‘아파-아트’, ‘아파아트’, ‘아트’, ‘아파트’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아주 예외이긴 하지만 아파트먼트apartment의 미국식 발음인 [ǝpάːrtmǝnt]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판멘’이라 소개한 경우도 있다. 1930년 2월부터 4월까지 『동아일보』에 주요섭이 연재한 조선 고학생의 미국체류기인 「유미외기留米外記」에 실린 내용에서이다.

새로운 것이자 늘 보아 온 경우와는 다른 도시주택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에 등장한 ‘아파트’는 당시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명확한 개념이나 용례를 정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까닭에 ‘아파트’라는 호칭이나 명칭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은 민간에서 주도한 도심형 임대주택에 국한하지 않고 공장기숙사나 근로자 숙사宿舍, 목조나 벽돌구조 혹은 콘크리트구조 등을 따로 구별하지 않은 채 기존의 단독주택과는 다르면서 주로 공동생활을 보장하는 규모가 큰 주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치 18세기 후반부터 한반도 주변 바다에 빈번하게 출현한 서양 배를 가리켜 ‘이양선異樣船’이나 ‘황당선荒唐船’이라 부르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식민지 조선에 ‘아파트’를 전파한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아파트를 변형시킨 미국식 아파트를 일본인 중류가정의 주택 모델로 채택하였고, 1925년에 ‘문화아파트’라는 이름의 주택을 도쿄 오차노미즈お茶の水에 건설하였다. 또한 간토대지진으로 파괴된 주택의 복구와 이재민 구휼을 목적으로 조직한 사단법인 동윤회同潤會가 도쿄와 요코하마 중심으로 주택을 건설하는 과정에 내진내화耐震耐火 성능을 띤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다층주택多層住宅을 ‘아파트’라고 불렀다. 이들 아파트는 대개 도심 간선도로변에 지어졌다. 1층에는 상점, 식당, 카페, 오락실, 사무실 등이 들어섰다. 2층부터 3~4층까지는 크기가 서로 다른 독신자용 방이 늘어선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또한 층마다 공동화장실이나 공동취사장 혹은 응접실 등을 따로 두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아파트란 가족용 살림집이라기보다 화장실이나 세탁장 등은 공동으로 사용하고 각 방은 침실로만 사용하는 독신자용 단기 거처용 주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아파트’라는 용어가 처음 알려진 것도 1925년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발행된 유일한 건축전문지 『朝鮮と建築(조선과건축)』에 「동윤회의 아파트먼트」라는 제목으로 내용이 소개된 것이다. 경성공업고등학교[京城高工]의 1927년 학생 졸업 작품으로 ‘아파트먼트 하우스’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대중잡지인 『별건곤』, 『삼천리』, 『동광』, 『신동아』 등과 『동아일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에서도 ‘아파트’가 간헐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대체로 1925년부터 1930년 사이에 도회지의 많은 사람이 ‘아파트’에 대해 일정한 지식이 있은 것으로 보인다. 1930년에 들어서는 실제로 지어진 아파트가 『朝鮮と建築』에 소개되었다. 서울 회현동의 ‘경성 미쿠니三國상회 아파트’가 대표 사례이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동원된 관공리들의 거처인 관사官舍나 사택社宅에도 ‘아파트’라는 호칭을 붙였지만 근대 도시의 전문 직업군에 속하는 독신자나 학생 등을 위한 단기 거처용 임대주택으로서의 아파트가 조선에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중반이다. 1930년 11월 『京城日報(경성일보)』에는 ‘광희문 밖에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하게 하는 거대한 아파트가 출현’하였다고 하였는가 하면 『每日申報(매일신보)』 1937년 1월 21일자 기사에서는 ‘훈련원 터에 3층으로 모던 독신 「아파트」를 건설’한다는 내용이 게재되었다. 이들 아파트는 대체로 난방장치와 함께 취사용 연료로 가스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방마다 옷을 따로 보관할 수 있는 수납장을 두기도 하였다.

또한 독신자용 임대아파트라는 뜻에서 거주자의 벌이에 맞춤하도록 임대료가 책정되었다. 다다미 4장인 경우와 6장인 경우가 비교적 넓은 방에 속하였고, 층마다 대부분 라디에이터 난방설비를 갖췄다. 다시 말해 한국 최초의 ‘아파트’에 해당하는 사례들은 도시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빚어진 독신자 근로계층을 위한 임대주택이라는 뜻이니 오늘날의 아파트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34년과 1935년에 각각 평양, 경성에 준공한 아즈마東아파트와 내자동 미쿠니三國아파트는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였다. 69개의 임대용 방을 갖춘 미쿠니아파트는 옥상전망대에서 준공식을 치렀다. 준공식에는 유력자 300여 명이 참석하여 오후 6시까지 여흥을 즐겼다고하였다. 매점이며 이발소, 당구장과 상점까지 구비한 아즈마아파트는 근대건축의 정수라는 찬사가 붙여지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어로 발행된 『조선신문朝鮮新聞』이 전한 내용이다.

내용

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이 벌일 만한 유망한 사업 가운데 하나로 주택임대업을 꼽았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만주농업이민이 활발해졌고 경성, 부산, 대구, 인천, 청진, 평양 등 대도시는 일본과 대륙의 중간 지역으로서 인구 유입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미 조선에 진출한 크고 작은 일본기업들은 부동산임대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였고, 이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의 대도시에는 아파트 붐이 일어나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도시 풍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은 이러한 분위기를 바꾸었다. 한반도가 병참기지 구실을 수행하게 되면서 조선총독부는 1939년 9월 <지대가임통제령地代家賃統制令>을 발동해 주택가격 안정화를 꾀하였다. 지대地代와 집세를 한 해 전인 1938년 12월 말일 기준으로 되돌리고 부府와 읍邑 단위의 행정기관에서는 공영公營주택 건설대책을 강구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미 1937년 11월 1일부터는 총독부령인 <철강공작물축조제한령鐵鋼工作物築造制限令>에 따라 백화점, 극장, 영화관, 상점, 은행, 사무소, 여관, 숙박소 등의 신축이 원칙적으로 불허되었다. 여기에 이미 ‘아파트’가 포함된 터였다.

이에 따라 적정 임대료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아파트 임대사업자들은 기존의 아파트를 속속 호텔로 전업하였고, 조선의 서민주택 수급 곤란을 우려한 조선총독부는 민간아파트의 호텔로의 전업을 강력 통제하는 동시에 오늘날의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 합병되기 이전의 대한주택공사 전신인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을 1941년 7월 서둘러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는 경성, 평양,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는 공채를 발행해 ‘공영아파트’를 건설할 것을 강력 권고하였다. 1930년대 말부터 광복 이전까지 대도시에서 아파트를 포함한 부영주택府營住宅 건설을 위한 지방자치단체 공채 발행이 급증한 이유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 기획되었거나 지어진 공영아파트 역시 민간 임대주택인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1층에는 상점·사무실·식당·오락실·응접실 등을 두었고, 2층 이상은 대부분 독신자를 위한 침실만으로 공간을 구성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가기록원의 당시 기록과 도면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총독부가 강력 권고한 대도시 아파트 건설은 중일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과 함께 공채 발행이 여의치 않아 대부분 취소되었고, 일부만이 지어졌다.

광복과 함께 38선으로 나뉜 한반도의 남측은 미군이 점령하였고,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파트는 다시 한 번 변신하게 된다. 즉 미군과 그 가족, 군사·경제고문단이 한반도에 장기간 머물게 되면서 그들의 거처가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번듯한 주택을 접수하였고, 여기에는 이미 호텔로 전용한 아파트와 패전으로 인하여 일본인이 남기고 간 많은 임대용 아파트가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일제가 조선의 강제병합 25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에 등장하는 취산翠山아파트는 1930년대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광복 후 군정 당국에 접수되어 기혼자 가족 42명의 미군 요원 숙소로 활용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물론 준공식을 옥상 전망대에서 치른 내자동의 미쿠니아파트 역시 미군정에 접수된 뒤 내자호텔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당 기간 미국 경제고문관과 군사고문단 숙소로 사용되었다.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6·25전쟁 발발 등으로 아파트 공급은 지지부진하였고, 1953년 휴전 이후에는 전쟁 이전 상태로의 재건과 복구가 우선 과제로 책정되어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다. 1958년부터 시작된 도심 주요 간선도로변의 상가주택 건설 및 원조 자재·대금을 활용한 운크라UNKRA주택과 재건주택, ICA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 등 소규모 주상복합 건축물과 단독 및 연립형 구호주택이 그 뒤를 이었을 뿐이었다. 대표적인 아파트로는 1950년대 후반에 지어진 종암아파트와 개명아파트 정도를 꼽을 수 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아파트 건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의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도심지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단일동單一棟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포아파트단지로 대표되는 가족용 단지형團地型 아파트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흔히 광복 이후 중요한 아파트 선례로 꼽는 종암아파트와 개명아파트는 이승만 정권 이후 승승장구하던 민간건설회사인 중앙산업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다. 이는 단일동 형식과 단지형 아파트의 중간 성격으로, 독신자용 아파트가 가족형 아파트로 전환되는 시기의 대표 사례에 해당한다.

1962년 대한주택공사 설립 이후 아파트는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에 따라 대부분 가족형 아파트로 조성되었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주민공동시설이나 편의시설을 모두 담장 안에 구비한 단지형 아파트로 바뀌면서 임대와 분양이 선택 활용되는 주택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1970년의 한강맨션아파트를 통하여 모델하우스에 의한 선분양先分讓 방식이 도입되었고, 단지 안에는 쇼핑센터와 각종 주민 편의시설이 모두 들어가는 방식이 고착되며 오늘날의 아파트단지로 변모하였다. 이후 특별한 공간 구성의 변화 없이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특징 및 의의

오늘날의 아파트는 미국식 아파트를 중류주택 규범으로 삼은 일본이 간토대지진 이후 문화 및 모던한 가족 본위의 생활공간으로 아파트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대도시에 들여온 유형으로, 2016년 6월 이후 전체 재고 주택의 60%를 넘기며 우리나라 주택의 절대적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민간이 주도하는 단기 거처용 임대주택으로서 대도시 지역 중심으로 공급된 독신자 주거 공간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일전쟁 격화로 상당수의 아파트가 호텔로 전용되었고, 광복 이후 미군정에 접수되어 미군 가족이나 고문단 등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이후 도시 확장과 변화 과정에서 가족용 단지형 아파트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50년대 후반 이후에는 기존의 임대 위주 방식과 달리 임대와 분양 방식이 함께 적용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담장을 두르고 내부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춘 단지식 아파트로 고착되고, 선분양 방식이 채택되었다. 1970년대 초반에는 이를 더욱 강화하는 <주택건설기준등에관한규정>과 관계 법령이 속속 마련되면서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단지 내 부대복리시설과 주민공동시설 설치가 법률로 강제되고 오늘날과 같은 아파트단지로 보편화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독신자용 거처이자 도심형 주택 유형으로서의 아파트는 인구 증가에 따른 도시의 행정구역 확대와 함께 외곽의 신시가지 조성이 잇따르면서 처음 모습과는 다른 유형으로 탈바꿈해 가족용 주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욕망하는 보편적 주택유형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박진희·장림종, 효형출판, 2009), 아파트(박철수, 마티, 2013), 아파트 한국사회(박인석, 현암사, 2013), 일제강점기 근대시설의 모더니즘 수용(강상훈,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한국공동주택계획의 역사(공동주택연구회, 세진사, 1999).

아파트

아파트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박철수(朴哲守)

정의

건축물의 벽·복도·계단이나 그 외 설비 등의 전부 또는 일부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각 가구가 하나의 건축물 안에서 각각 독립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된 공동주택의 하나로, 주택으로 쓰이는 층수가 5개 층 이상인 주택.

역사

일반적으로 제국주의는 식민지로부터 강제 잉여를 유출하기 위한 통로로, 식민지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한 장치로 회사·공장·은행 등 기구는 물론 경찰·학교·감옥·병원 등의 근대 제도를 식민지에 이식하였다. ‘아파트’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은행이나 회사의 급여생활자는 물론 전문학교 학생, 기자, 작가, 카페 여급 및 각종 사회단체 활동가 등 근대적 직종에 가담하게 된 독신생활자들을 위하여 일본인 사업가들이 단기 거처용 임대주택으로 조선에 처음 소개한 새로운 주택 유형이 ‘아파트’이다.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문화정치로 겉모양을 바꾸며 창간이 허용된 각종 신문이며 잡지·단행본과 전문잡지 등을 통하여 당시 아파트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아파-트멘츠·하우스’, ‘아파-트멘트’, ‘아파-트’ 등으로 부르거나 표기하였다. 때론 ‘아파-ㅌ멘트’, ‘아파-아트’, ‘아파아트’, ‘아트’, ‘아파트’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아주 예외이긴 하지만 아파트먼트apartment의 미국식 발음인 [ǝpάːrtmǝnt]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판멘’이라 소개한 경우도 있다. 1930년 2월부터 4월까지 『동아일보』에 주요섭이 연재한 조선 고학생의 미국체류기인 「유미외기留米外記」에 실린 내용에서이다.

새로운 것이자 늘 보아 온 경우와는 다른 도시주택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에 등장한 ‘아파트’는 당시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명확한 개념이나 용례를 정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까닭에 ‘아파트’라는 호칭이나 명칭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은 민간에서 주도한 도심형 임대주택에 국한하지 않고 공장기숙사나 근로자 숙사宿舍, 목조나 벽돌구조 혹은 콘크리트구조 등을 따로 구별하지 않은 채 기존의 단독주택과는 다르면서 주로 공동생활을 보장하는 규모가 큰 주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치 18세기 후반부터 한반도 주변 바다에 빈번하게 출현한 서양 배를 가리켜 ‘이양선異樣船’이나 ‘황당선荒唐船’이라 부르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식민지 조선에 ‘아파트’를 전파한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아파트를 변형시킨 미국식 아파트를 일본인 중류가정의 주택 모델로 채택하였고, 1925년에 ‘문화아파트’라는 이름의 주택을 도쿄 오차노미즈お茶の水에 건설하였다. 또한 간토대지진으로 파괴된 주택의 복구와 이재민 구휼을 목적으로 조직한 사단법인 동윤회同潤會가 도쿄와 요코하마 중심으로 주택을 건설하는 과정에 내진내화耐震耐火 성능을 띤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다층주택多層住宅을 ‘아파트’라고 불렀다. 이들 아파트는 대개 도심 간선도로변에 지어졌다. 1층에는 상점, 식당, 카페, 오락실, 사무실 등이 들어섰다. 2층부터 3~4층까지는 크기가 서로 다른 독신자용 방이 늘어선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또한 층마다 공동화장실이나 공동취사장 혹은 응접실 등을 따로 두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아파트란 가족용 살림집이라기보다 화장실이나 세탁장 등은 공동으로 사용하고 각 방은 침실로만 사용하는 독신자용 단기 거처용 주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아파트’라는 용어가 처음 알려진 것도 1925년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발행된 유일한 건축전문지 『朝鮮と建築(조선과건축)』에 「동윤회의 아파트먼트」라는 제목으로 내용이 소개된 것이다. 경성공업고등학교[京城高工]의 1927년 학생 졸업 작품으로 ‘아파트먼트 하우스’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대중잡지인 『별건곤』, 『삼천리』, 『동광』, 『신동아』 등과 『동아일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에서도 ‘아파트’가 간헐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대체로 1925년부터 1930년 사이에 도회지의 많은 사람이 ‘아파트’에 대해 일정한 지식이 있은 것으로 보인다. 1930년에 들어서는 실제로 지어진 아파트가 『朝鮮と建築』에 소개되었다. 서울 회현동의 ‘경성 미쿠니三國상회 아파트’가 대표 사례이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동원된 관공리들의 거처인 관사官舍나 사택社宅에도 ‘아파트’라는 호칭을 붙였지만 근대 도시의 전문 직업군에 속하는 독신자나 학생 등을 위한 단기 거처용 임대주택으로서의 아파트가 조선에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중반이다. 1930년 11월 『京城日報(경성일보)』에는 ‘광희문 밖에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하게 하는 거대한 아파트가 출현’하였다고 하였는가 하면 『每日申報(매일신보)』 1937년 1월 21일자 기사에서는 ‘훈련원 터에 3층으로 모던 독신 「아파트」를 건설’한다는 내용이 게재되었다. 이들 아파트는 대체로 난방장치와 함께 취사용 연료로 가스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방마다 옷을 따로 보관할 수 있는 수납장을 두기도 하였다.

또한 독신자용 임대아파트라는 뜻에서 거주자의 벌이에 맞춤하도록 임대료가 책정되었다. 다다미 4장인 경우와 6장인 경우가 비교적 넓은 방에 속하였고, 층마다 대부분 라디에이터 난방설비를 갖췄다. 다시 말해 한국 최초의 ‘아파트’에 해당하는 사례들은 도시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빚어진 독신자 근로계층을 위한 임대주택이라는 뜻이니 오늘날의 아파트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34년과 1935년에 각각 평양, 경성에 준공한 아즈마東아파트와 내자동 미쿠니三國아파트는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였다. 69개의 임대용 방을 갖춘 미쿠니아파트는 옥상전망대에서 준공식을 치렀다. 준공식에는 유력자 300여 명이 참석하여 오후 6시까지 여흥을 즐겼다고하였다. 매점이며 이발소, 당구장과 상점까지 구비한 아즈마아파트는 근대건축의 정수라는 찬사가 붙여지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어로 발행된 『조선신문朝鮮新聞』이 전한 내용이다.

내용

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이 벌일 만한 유망한 사업 가운데 하나로 주택임대업을 꼽았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만주농업이민이 활발해졌고 경성, 부산, 대구, 인천, 청진, 평양 등 대도시는 일본과 대륙의 중간 지역으로서 인구 유입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미 조선에 진출한 크고 작은 일본기업들은 부동산임대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였고, 이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의 대도시에는 아파트 붐이 일어나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도시 풍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은 이러한 분위기를 바꾸었다. 한반도가 병참기지 구실을 수행하게 되면서 조선총독부는 1939년 9월 <지대가임통제령地代家賃統制令>을 발동해 주택가격 안정화를 꾀하였다. 지대地代와 집세를 한 해 전인 1938년 12월 말일 기준으로 되돌리고 부府와 읍邑 단위의 행정기관에서는 공영公營주택 건설대책을 강구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미 1937년 11월 1일부터는 총독부령인 <철강공작물축조제한령鐵鋼工作物築造制限令>에 따라 백화점, 극장, 영화관, 상점, 은행, 사무소, 여관, 숙박소 등의 신축이 원칙적으로 불허되었다. 여기에 이미 ‘아파트’가 포함된 터였다.

이에 따라 적정 임대료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아파트 임대사업자들은 기존의 아파트를 속속 호텔로 전업하였고, 조선의 서민주택 수급 곤란을 우려한 조선총독부는 민간아파트의 호텔로의 전업을 강력 통제하는 동시에 오늘날의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 합병되기 이전의 대한주택공사 전신인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을 1941년 7월 서둘러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는 경성, 평양,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는 공채를 발행해 ‘공영아파트’를 건설할 것을 강력 권고하였다. 1930년대 말부터 광복 이전까지 대도시에서 아파트를 포함한 부영주택府營住宅 건설을 위한 지방자치단체 공채 발행이 급증한 이유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 기획되었거나 지어진 공영아파트 역시 민간 임대주택인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1층에는 상점·사무실·식당·오락실·응접실 등을 두었고, 2층 이상은 대부분 독신자를 위한 침실만으로 공간을 구성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가기록원의 당시 기록과 도면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총독부가 강력 권고한 대도시 아파트 건설은 중일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과 함께 공채 발행이 여의치 않아 대부분 취소되었고, 일부만이 지어졌다.

광복과 함께 38선으로 나뉜 한반도의 남측은 미군이 점령하였고,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파트는 다시 한 번 변신하게 된다. 즉 미군과 그 가족, 군사·경제고문단이 한반도에 장기간 머물게 되면서 그들의 거처가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번듯한 주택을 접수하였고, 여기에는 이미 호텔로 전용한 아파트와 패전으로 인하여 일본인이 남기고 간 많은 임대용 아파트가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일제가 조선의 강제병합 25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에 등장하는 취산翠山아파트는 1930년대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광복 후 군정 당국에 접수되어 기혼자 가족 42명의 미군 요원 숙소로 활용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물론 준공식을 옥상 전망대에서 치른 내자동의 미쿠니아파트 역시 미군정에 접수된 뒤 내자호텔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당 기간 미국 경제고문관과 군사고문단 숙소로 사용되었다.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6·25전쟁 발발 등으로 아파트 공급은 지지부진하였고, 1953년 휴전 이후에는 전쟁 이전 상태로의 재건과 복구가 우선 과제로 책정되어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다. 1958년부터 시작된 도심 주요 간선도로변의 상가주택 건설 및 원조 자재·대금을 활용한 운크라UNKRA주택과 재건주택, ICA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 등 소규모 주상복합 건축물과 단독 및 연립형 구호주택이 그 뒤를 이었을 뿐이었다. 대표적인 아파트로는 1950년대 후반에 지어진 종암아파트와 개명아파트 정도를 꼽을 수 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아파트 건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의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도심지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단일동單一棟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포아파트단지로 대표되는 가족용 단지형團地型 아파트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흔히 광복 이후 중요한 아파트 선례로 꼽는 종암아파트와 개명아파트는 이승만 정권 이후 승승장구하던 민간건설회사인 중앙산업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다. 이는 단일동 형식과 단지형 아파트의 중간 성격으로, 독신자용 아파트가 가족형 아파트로 전환되는 시기의 대표 사례에 해당한다.

1962년 대한주택공사 설립 이후 아파트는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에 따라 대부분 가족형 아파트로 조성되었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주민공동시설이나 편의시설을 모두 담장 안에 구비한 단지형 아파트로 바뀌면서 임대와 분양이 선택 활용되는 주택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1970년의 한강맨션아파트를 통하여 모델하우스에 의한 선분양先分讓 방식이 도입되었고, 단지 안에는 쇼핑센터와 각종 주민 편의시설이 모두 들어가는 방식이 고착되며 오늘날의 아파트단지로 변모하였다. 이후 특별한 공간 구성의 변화 없이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특징 및 의의

오늘날의 아파트는 미국식 아파트를 중류주택 규범으로 삼은 일본이 간토대지진 이후 문화 및 모던한 가족 본위의 생활공간으로 아파트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대도시에 들여온 유형으로, 2016년 6월 이후 전체 재고 주택의 60%를 넘기며 우리나라 주택의 절대적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민간이 주도하는 단기 거처용 임대주택으로서 대도시 지역 중심으로 공급된 독신자 주거 공간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일전쟁 격화로 상당수의 아파트가 호텔로 전용되었고, 광복 이후 미군정에 접수되어 미군 가족이나 고문단 등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이후 도시 확장과 변화 과정에서 가족용 단지형 아파트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50년대 후반 이후에는 기존의 임대 위주 방식과 달리 임대와 분양 방식이 함께 적용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담장을 두르고 내부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춘 단지식 아파트로 고착되고, 선분양 방식이 채택되었다. 1970년대 초반에는 이를 더욱 강화하는 <주택건설기준등에관한규정>과 관계 법령이 속속 마련되면서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단지 내 부대복리시설과 주민공동시설 설치가 법률로 강제되고 오늘날과 같은 아파트단지로 보편화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독신자용 거처이자 도심형 주택 유형으로서의 아파트는 인구 증가에 따른 도시의 행정구역 확대와 함께 외곽의 신시가지 조성이 잇따르면서 처음 모습과는 다른 유형으로 탈바꿈해 가족용 주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욕망하는 보편적 주택유형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박진희·장림종, 효형출판, 2009), 아파트(박철수, 마티, 2013), 아파트 한국사회(박인석, 현암사, 2013), 일제강점기 근대시설의 모더니즘 수용(강상훈,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한국공동주택계획의 역사(공동주택연구회, 세진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