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박선희(朴善姬)

정의

전통적으로는 취사와 난방을 겸하는 공간이었지만 현대에는 취사 준비를 위하여 주로 사용되는 공간.

내용

부엌이라는 용어는 지역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었다. 서울 및 경기 지역에서는 ‘부엌’, 충청 지역에서는 세부 지역에 따라 ‘부엌’ 혹은 ‘정지’, 그 외의 지역에서는 발음상으로나 표기상으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대개 ‘정지’로 더 많이 불렸다. 정지는 경상·전라·강원 지역의 부엌에 대한 방언이고 정제는 전라·제주 지역 방언이다. 서울이나 경기 지역은 부엌이 취사와 난방 기능만 하는 평면구조가 많았다. 강원 지역에서는 취사·난방 외에 우천과 적설 시 작업장, 연료 및 농작물 작업장이었다. 그 외 농어촌 지역도 이러한 복합 기능이 있었다.

부엌과 인접한 가장 큰 방인 안방에는 겨울철에 난방을 하기 위하여 온돌아궁이가 설치되었고, 그 상층부는 취사를 위해 부뚜막이라 하여 무쇠솥을 걸고 물과 밥과 국을 끓이는 설비가 필수적이었다. 어원을 보면 ‘정지’는 부엌과 어원을 같이하는 부석(아궁이)이 자신의 의미를 정지에 물려준 것이다. 부석은 아궁이의 의미로 제한되었다. 부엌은 조선시대에는 ‘부업’이나 ‘부억’, ‘부섭’으로도 표기되었다. 즉 부뚜막을 지칭하였다. 그만큼 부뚜막은 부엌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구조물이었다. 전통가옥에서 부엌은 가족 식사를 위한 취사와 난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부뚜막에 설치되는 솥은 보통 대·중·소의 세 개이지만 가옥과 부엌의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바닥에 까는 온돌의 구조상 부엌은 실내보다 훨씬 낮게 층 차를 두었으며, 불을 다루는 곳인 만큼 화재에 대비하여 흙바닥과 아궁이를 둘러싼 부뚜막 설비를 만들었다. 상류층 가옥에는 공간의 분절화가 이루어져 농작물이나 작업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어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부엌은 대체로 취사 중심의 공간이다.

부엌은 난방과 취사를 위한 ‘불’을 다루는 공간이었고, 전통가옥은 대부분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부엌은 화재 예방에 특히 민감한 공간이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부엌은 특히 불을 경계해야 하므로 사방에 벽돌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든다. 무릇 기둥과 인방 등 일체의 목재는 모두 벽돌의 내부에 파묻는다. 만일 바람을 통하게 하고 햇빛을 받아들이려면 벽의 상반부에 모두 영롱장玲瓏牆을 만든다. 부뚜막에서 한두 길[一二丈] 떨어진 곳에 남북으로 문을 뚫고 왕정王楨의 장생옥법長生屋法에 따라서 법제회니法製灰泥를 사용하여 문짝 안팎을 바른다.”라고 하여 부엌공간을 설계하고 구들을 만들 때는 무엇보다도 화재에 대비한 구조적 설비에 주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취사와 난방으로 인한 연기와 냄새를 배출하기 위하여 부엌에는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대개는 살창으로 하여 자연적 환기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부엌 내에는 급배수 시설이 따로 없었다. 따라서 쇠나 옹기로 된 물두멍을 놓고 여기에 물을 받아 사용하였다. 쇠로 된 물두멍은 솥과 달리 바닥이 움푹하게 깊고 몸통과 주둥이는 지름이 촉박하며 밑바닥은 삼바리 받침으로 고여서 부엌 한 귀퉁이에 놓고 물(식수)을 담아 놓고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큰 항아리를 두고 사용하는 집도 많아졌다. 물을 사용한 뒤에는 부엌 바깥의 배수로에 내다 버렸다. 식품을 씻거나 설거지할 때는 우물이 집 안에 있는 상류층 가옥은 대개 우물가에서 하였지만 우물이 별도로 없는 서민층 가옥은 개수통을 마련해서 사용하였다.

부엌공간 사용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여름철에 난방이 따로 필요 없고 또 집안에 큰 행사가 있어서 아궁이가 더 필요할 때는 부엌공간이 아닌 곳에 별도의 화덕을 마당에 설치하여 활용하였다. 이것을 ‘한뎃부엌’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용한 시설이다.

보통 부엌 양측에 모두 문이 있었다. 이는 안마당에서의 출입과 뒷마당의 서비스 공간의 편이한 왕래를 위함이었다. 즉 한식의 필수적인 기본 재료인 간장, 된장, 고추장이 비치된 뒷마당의 장독대와 부엌 사이를 왕래해야 하였다. 장독대는 햇볕이 잘 들고 통풍이 잘 되는 장소에 놓여야 하기 때문에 보통 안채의 뒤뜰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부엌에는 안마당과 뒤 안으로 쉽게 왕래할 수 있는 양방향 개폐의 문 설비가 구성되었다.

상류주택, 특히 지방의 상류주택에서는 크고 작은 규모의 부엌이 두 곳 이상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는 안방과 접한 조리를 하는 주된 부엌이고, 다른 하나는 방에 불을 때기 위한 아궁이 성격을 부엌으로 전환하여 솥을 걸고 평상시 더운 물을 끓이며 때로는 조리도 하였던 것이다. 상류주택 가운데서도 특히 대가大家라 일컫는 큰 주택에서는 부엌 위 지붕 밑에는 누다락을 설치하고 바닥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만들어 부엌은 순수 취사를 위한 공간인 반빗간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의 부엌에서는 하인들이 모여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목적과 기능 때문에 다른 일반 가옥에 비하여 상류층 가옥의 부엌이 큰 경우를 볼 수 있다.

식사생활의 일상적 과정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취사공간, 마련된 음식을 차리는 설비 및 배선공간, 식사를 하는 공간, 남은 음식을 저장·관리하는 설비 및 공간이 필요하다. 조선 후기에는 한식문화가 가장 풍부하게 발전하였고, 지역에 따른 고유한 음식문화도 크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음식 발달은 점점 취사를 보조하는 부엌 옆의 다양한 공간들의 구성과 맥을 함께하였다. 일반 가옥에서는 광이나 곡간이 많았다. 전라남도 지역의 경우 젓갈 보관을 위한 젓곳간이 발달하였다. 그 외 지역도 고방, 도장, 곡간, 광, 찬방, 찬광, 마루광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 식품 저장 공간들이 마련되었다. 또한 발효를 위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김치를 저장하기 위한 김치광이 있었다. 이것은 부엌 옆 뒷마당이나 아래채에 설치되었다. 김치광 안에는 여러 개의 김칫독이 땅에 묻힌 채로 상비常備되어 겨울철 식사 반찬으로 가장 중시되었던 것이다.

상류층 가옥이나 서민층 가옥 모두 부엌의 안방 쪽이나 툇마루 쪽으로 배선이나 유사시 동선 단축을 목적으로 사잇문을 낸 경우도 많았다. 부엌 천장은 대부분 서까래가 노출되는 연등천장이나 집의 규모가 일정 이상 큰 가옥은 대부분 상부에 다락을 조성하므로 이 다락의 바닥이 부엌 천장이 되었다. 특별한 사례이지만 전라남도 해남의 윤선도 고택처럼 지붕의 일부를 덧지붕으로 돌출시켜 부엌의 연기와 냄새를 지붕 위로 빼내는 과학적 구조를 지닌 경우도 있다.

이러한 부엌공간은 1960년대 이후 크게 변화하였다. 구한말부터 도입된 서구식 교육에 힘입어 공간의 기능적인 사용과 설비 개선 의식이 확산되었다. 광복 이후 특히 1972년에 전국적으로 시작한 새마을운동이 농촌은 물론 도시까지 크게 파급되었으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부엌공간이었다.

경제개발정책의 확산과 위생적 기능 의식은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혁을 몰고 왔다. 부엌바닥과 부뚜막의 재료는 전통적인 흙에서 시멘트로, 시멘트는 다시 깨끗한 타일마감으로 바뀌었다. 대도시 신축 주택이나 일부 주택들은 이미 1960년대부터 부엌이 취사 중심 공간으로 바뀌면서 실내 연계가 이루어져 서서히 공간 입식화로 개선되었다. 이런 배경에는 취사와 난방 연료의 대체에너지 변화가 있었다. 1960년대 도입된 석유연료는 취사와 난방을 비로소 분리·가능하게 해 주었다. 난방은 보일러가 설치되어 가능하였고, 취사는 석유곤로가 개발되어 편리한 식생활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등장한 가스레인지는 한 차원 위의 취사혁명은 물론 부엌의 실내 입식화를 가능하게 만든 주인공이었다.

1970년대 서울 등지에서는 부엌의 입식화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전주처럼 전통적인 지역에서는 여전히 도시한옥이 많았다. 이러한 차이는 부엌공간의 평면이나 입면상으로도 지역 간에 시기적 차이가 있음을 말해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 보급된 아파트가 가옥의 대표 자리를 굳히면서 부엌의 빠른 변화가 이루어졌다. 실제 우리나라 도시 부엌의 입식률은 1970년 18%에서 1985년경에 50%를 넘었다.

특징 및 의의

주로 가사를 담당하는 여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간은 예나 지금이나 부엌이다. 주거 유형으로 아파트가 확산되면서 공간 평면이 변화하였고, 이에 따라 부엌의 위치나 크기도 달라졌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아파트의 30평형대 이하는 一자형 부엌 작업대가 ㄱ자형으로, 40평형대 이상은 ㄷ자형 혹은 조반용breakfast 식탁이 달린 반도형peninsula으로 그 크기가 확대되었다. 또한 일부의 부엌 작업대 제조회사가 고급 재료와 다양한 상판 컬러가 들어간 작업대를 제품화하여 판매함으로써 단순히 기능 중심이었던 이 부엌에 장식적 인테리어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이후 부엌에 도입된 변화는 상부 수납장에 휴대용 라디오나 텔레비전 연계 비디오를 설치하고, 시각을 알려주는 등의 서비스 설비가 통합되기 시작하였다. 부엌이 가사노동이라는 한정된 공간의 성격에서 다기능적 활동이 가능한 곳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특히 아파트 설계의 질적 변화는 부엌이 거실 및 식사공간과의 연계와 조화를 이루도록 개방적인 인테리어 디자인을 시도하였고, 여성들의 정서적 감각을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작업대가 도입되거나 부엌 주변에 별도의 독립된 식품고가 설치되는 추세이며, 냉장고를 비롯한 다양한 가전제품이 붙박이 수납공간 안에 일체화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현대 부엌은 취사의 속성은 유지하지만 식사공간이 인접한 다기능 복합 공간이 되어가고 있으며, 주거공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가족 모두의 공간이 되었다. 부엌은 현대인에게 거실과 식탁의 연계가 이루어지는 집의 중심이자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참고문헌

조선시대 반가의 주생활과 공간사용에 대한 연구(박선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한국의 민가 연구(장보웅, 보진재출판사, 1981), 한국의 전통적 주방공간에 관한 연구(윤정옥,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한국의 주거 민속지(김광언, 민음사, 1988).

부엌

부엌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박선희(朴善姬)

정의

전통적으로는 취사와 난방을 겸하는 공간이었지만 현대에는 취사 준비를 위하여 주로 사용되는 공간.

내용

부엌이라는 용어는 지역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었다. 서울 및 경기 지역에서는 ‘부엌’, 충청 지역에서는 세부 지역에 따라 ‘부엌’ 혹은 ‘정지’, 그 외의 지역에서는 발음상으로나 표기상으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대개 ‘정지’로 더 많이 불렸다. 정지는 경상·전라·강원 지역의 부엌에 대한 방언이고 정제는 전라·제주 지역 방언이다. 서울이나 경기 지역은 부엌이 취사와 난방 기능만 하는 평면구조가 많았다. 강원 지역에서는 취사·난방 외에 우천과 적설 시 작업장, 연료 및 농작물 작업장이었다. 그 외 농어촌 지역도 이러한 복합 기능이 있었다.

부엌과 인접한 가장 큰 방인 안방에는 겨울철에 난방을 하기 위하여 온돌과 아궁이가 설치되었고, 그 상층부는 취사를 위해 부뚜막이라 하여 무쇠솥을 걸고 물과 밥과 국을 끓이는 설비가 필수적이었다. 어원을 보면 ‘정지’는 부엌과 어원을 같이하는 부석(아궁이)이 자신의 의미를 정지에 물려준 것이다. 부석은 아궁이의 의미로 제한되었다. 부엌은 조선시대에는 ‘부업’이나 ‘부억’, ‘부섭’으로도 표기되었다. 즉 부뚜막을 지칭하였다. 그만큼 부뚜막은 부엌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구조물이었다. 전통가옥에서 부엌은 가족 식사를 위한 취사와 난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부뚜막에 설치되는 솥은 보통 대·중·소의 세 개이지만 가옥과 부엌의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바닥에 까는 온돌의 구조상 부엌은 실내보다 훨씬 낮게 층 차를 두었으며, 불을 다루는 곳인 만큼 화재에 대비하여 흙바닥과 아궁이를 둘러싼 부뚜막 설비를 만들었다. 상류층 가옥에는 공간의 분절화가 이루어져 농작물이나 작업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어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부엌은 대체로 취사 중심의 공간이다.

부엌은 난방과 취사를 위한 ‘불’을 다루는 공간이었고, 전통가옥은 대부분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부엌은 화재 예방에 특히 민감한 공간이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부엌은 특히 불을 경계해야 하므로 사방에 벽돌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든다. 무릇 기둥과 인방 등 일체의 목재는 모두 벽돌의 내부에 파묻는다. 만일 바람을 통하게 하고 햇빛을 받아들이려면 벽의 상반부에 모두 영롱장玲瓏牆을 만든다. 부뚜막에서 한두 길[一二丈] 떨어진 곳에 남북으로 문을 뚫고 왕정王楨의 장생옥법長生屋法에 따라서 법제회니法製灰泥를 사용하여 문짝 안팎을 바른다.”라고 하여 부엌공간을 설계하고 구들을 만들 때는 무엇보다도 화재에 대비한 구조적 설비에 주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취사와 난방으로 인한 연기와 냄새를 배출하기 위하여 부엌에는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대개는 살창으로 하여 자연적 환기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부엌 내에는 급배수 시설이 따로 없었다. 따라서 쇠나 옹기로 된 물두멍을 놓고 여기에 물을 받아 사용하였다. 쇠로 된 물두멍은 솥과 달리 바닥이 움푹하게 깊고 몸통과 주둥이는 지름이 촉박하며 밑바닥은 삼바리 받침으로 고여서 부엌 한 귀퉁이에 놓고 물(식수)을 담아 놓고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큰 항아리를 두고 사용하는 집도 많아졌다. 물을 사용한 뒤에는 부엌 바깥의 배수로에 내다 버렸다. 식품을 씻거나 설거지할 때는 우물이 집 안에 있는 상류층 가옥은 대개 우물가에서 하였지만 우물이 별도로 없는 서민층 가옥은 개수통을 마련해서 사용하였다.

부엌공간 사용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여름철에 난방이 따로 필요 없고 또 집안에 큰 행사가 있어서 아궁이가 더 필요할 때는 부엌공간이 아닌 곳에 별도의 화덕을 마당에 설치하여 활용하였다. 이것을 ‘한뎃부엌’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용한 시설이다.

보통 부엌 양측에 모두 문이 있었다. 이는 안마당에서의 출입과 뒷마당의 서비스 공간의 편이한 왕래를 위함이었다. 즉 한식의 필수적인 기본 재료인 간장, 된장, 고추장이 비치된 뒷마당의 장독대와 부엌 사이를 왕래해야 하였다. 장독대는 햇볕이 잘 들고 통풍이 잘 되는 장소에 놓여야 하기 때문에 보통 안채의 뒤뜰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부엌에는 안마당과 뒤 안으로 쉽게 왕래할 수 있는 양방향 개폐의 문 설비가 구성되었다.

상류주택, 특히 지방의 상류주택에서는 크고 작은 규모의 부엌이 두 곳 이상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는 안방과 접한 조리를 하는 주된 부엌이고, 다른 하나는 방에 불을 때기 위한 아궁이 성격을 부엌으로 전환하여 솥을 걸고 평상시 더운 물을 끓이며 때로는 조리도 하였던 것이다. 상류주택 가운데서도 특히 대가大家라 일컫는 큰 주택에서는 부엌 위 지붕 밑에는 누다락을 설치하고 바닥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만들어 부엌은 순수 취사를 위한 공간인 반빗간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의 부엌에서는 하인들이 모여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목적과 기능 때문에 다른 일반 가옥에 비하여 상류층 가옥의 부엌이 큰 경우를 볼 수 있다.

식사생활의 일상적 과정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취사공간, 마련된 음식을 차리는 설비 및 배선공간, 식사를 하는 공간, 남은 음식을 저장·관리하는 설비 및 공간이 필요하다. 조선 후기에는 한식문화가 가장 풍부하게 발전하였고, 지역에 따른 고유한 음식문화도 크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음식 발달은 점점 취사를 보조하는 부엌 옆의 다양한 공간들의 구성과 맥을 함께하였다. 일반 가옥에서는 광이나 곡간이 많았다. 전라남도 지역의 경우 젓갈 보관을 위한 젓곳간이 발달하였다. 그 외 지역도 고방, 도장, 곡간, 광, 찬방, 찬광, 마루광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 식품 저장 공간들이 마련되었다. 또한 발효를 위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김치를 저장하기 위한 김치광이 있었다. 이것은 부엌 옆 뒷마당이나 아래채에 설치되었다. 김치광 안에는 여러 개의 김칫독이 땅에 묻힌 채로 상비常備되어 겨울철 식사 반찬으로 가장 중시되었던 것이다.

상류층 가옥이나 서민층 가옥 모두 부엌의 안방 쪽이나 툇마루 쪽으로 배선이나 유사시 동선 단축을 목적으로 사잇문을 낸 경우도 많았다. 부엌 천장은 대부분 서까래가 노출되는 연등천장이나 집의 규모가 일정 이상 큰 가옥은 대부분 상부에 다락을 조성하므로 이 다락의 바닥이 부엌 천장이 되었다. 특별한 사례이지만 전라남도 해남의 윤선도 고택처럼 지붕의 일부를 덧지붕으로 돌출시켜 부엌의 연기와 냄새를 지붕 위로 빼내는 과학적 구조를 지닌 경우도 있다.

이러한 부엌공간은 1960년대 이후 크게 변화하였다. 구한말부터 도입된 서구식 교육에 힘입어 공간의 기능적인 사용과 설비 개선 의식이 확산되었다. 광복 이후 특히 1972년에 전국적으로 시작한 새마을운동이 농촌은 물론 도시까지 크게 파급되었으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부엌공간이었다.

경제개발정책의 확산과 위생적 기능 의식은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혁을 몰고 왔다. 부엌바닥과 부뚜막의 재료는 전통적인 흙에서 시멘트로, 시멘트는 다시 깨끗한 타일마감으로 바뀌었다. 대도시 신축 주택이나 일부 주택들은 이미 1960년대부터 부엌이 취사 중심 공간으로 바뀌면서 실내 연계가 이루어져 서서히 공간 입식화로 개선되었다. 이런 배경에는 취사와 난방 연료의 대체에너지 변화가 있었다. 1960년대 도입된 석유연료는 취사와 난방을 비로소 분리·가능하게 해 주었다. 난방은 보일러가 설치되어 가능하였고, 취사는 석유곤로가 개발되어 편리한 식생활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등장한 가스레인지는 한 차원 위의 취사혁명은 물론 부엌의 실내 입식화를 가능하게 만든 주인공이었다.

1970년대 서울 등지에서는 부엌의 입식화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전주처럼 전통적인 지역에서는 여전히 도시한옥이 많았다. 이러한 차이는 부엌공간의 평면이나 입면상으로도 지역 간에 시기적 차이가 있음을 말해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 보급된 아파트가 가옥의 대표 자리를 굳히면서 부엌의 빠른 변화가 이루어졌다. 실제 우리나라 도시 부엌의 입식률은 1970년 18%에서 1985년경에 50%를 넘었다.

특징 및 의의

주로 가사를 담당하는 여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간은 예나 지금이나 부엌이다. 주거 유형으로 아파트가 확산되면서 공간 평면이 변화하였고, 이에 따라 부엌의 위치나 크기도 달라졌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아파트의 30평형대 이하는 一자형 부엌 작업대가 ㄱ자형으로, 40평형대 이상은 ㄷ자형 혹은 조반용breakfast 식탁이 달린 반도형peninsula으로 그 크기가 확대되었다. 또한 일부의 부엌 작업대 제조회사가 고급 재료와 다양한 상판 컬러가 들어간 작업대를 제품화하여 판매함으로써 단순히 기능 중심이었던 이 부엌에 장식적 인테리어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이후 부엌에 도입된 변화는 상부 수납장에 휴대용 라디오나 텔레비전 연계 비디오를 설치하고, 시각을 알려주는 등의 서비스 설비가 통합되기 시작하였다. 부엌이 가사노동이라는 한정된 공간의 성격에서 다기능적 활동이 가능한 곳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특히 아파트 설계의 질적 변화는 부엌이 거실 및 식사공간과의 연계와 조화를 이루도록 개방적인 인테리어 디자인을 시도하였고, 여성들의 정서적 감각을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작업대가 도입되거나 부엌 주변에 별도의 독립된 식품고가 설치되는 추세이며, 냉장고를 비롯한 다양한 가전제품이 붙박이 수납공간 안에 일체화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현대 부엌은 취사의 속성은 유지하지만 식사공간이 인접한 다기능 복합 공간이 되어가고 있으며, 주거공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가족 모두의 공간이 되었다. 부엌은 현대인에게 거실과 식탁의 연계가 이루어지는 집의 중심이자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참고문헌

조선시대 반가의 주생활과 공간사용에 대한 연구(박선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한국의 민가 연구(장보웅, 보진재출판사, 1981), 한국의 전통적 주방공간에 관한 연구(윤정옥,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한국의 주거 민속지(김광언, 민음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