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김광언(金光彦)

정의

솥을 걸 수 있도록 아궁이 위에 흙과 돌을 쌓아 만든 턱.

내용

부뚜막은 불의 옛말인 ‘’와 ‘으막’으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막’은 ‘움막’의 ‘막’과 같은 의미로 ‘집’을 말하며, ‘으’는 결합모음으로 ‘’의 ‘ㅿ’가 ㅿ-ㅅ-ㄷ-ㄸ으로 바뀌어 ‘뚜’가 되었다. 1775년의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 조대竈臺를 ‘붓두막’, 『한청문감漢淸文鑑』에서는 과대鍋臺를 ‘붓두막’으로 새겼다. 제주도 가옥에서 마루에 불을 피우고 온기를 쬐는 자리나 부엌 바닥에 둘러놓은 돌에 불을 지펴서 음식을 익히는 곳을 부섭이라 부르는 것도 연관이 있다.

부뚜막은 원시시대 움집의 화덕에서 비롯되었다. 빗살무늬토기시대에는 움집 한가운데 돌을 원형 내지 타원형으로 두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어 무문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연기가 쉽게 빠지도록 움 한쪽에 설치하는 것 외에 한쪽을 터놓거나 바닥에 돌을 깔기도 하였다. 화덕이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것은 고구려시대부터이다. 서기 1세기 무렵의 유적에서 나온 도제 및 철제 부뚜막이 좋은 사례이다.

황해도 안악 3호 무덤의 벽화는 4세기 무렵의 부뚜막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형태는 긴네모꼴이며, 연기는 한 끝에 붙인 오리 입을 닮은 굴뚝을 통하여 집 밖으로 나간다. 이 부뚜막이 음식 조리 외에 난방 기능을 겸한 것은 4~5세기이지만 초기에는 구들이 외구들인 까닭에 방의 일부에만 불길이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앞의 두 가지 기능을 완벽하게 하는 부뚜막이 전국에 퍼진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부뚜막의 기능도 두 가지로 나뉘어 난방은 아궁이, 조리는 부뚜막에 걸어 놓은 솥이 각각 담당하게 되었다. 솥의 수는 집 형편에 따라 달랐다. 상류가옥에서는 흔히 부엌 안쪽에서부터 용가마·가마솥·중솥·옹솥 따위를 걸며, 물을 담아 두고 쓰는 두멍솥은 부뚜막 바깥쪽에 놓는다. 용가마나 가마솥은 입이 워낙 커서 널을 반달꼴로 짠 두 쪽으로 여닫는다. 흔히 용가마나 가마솥에는 물을 끓이고, 중솥에는 밥을 지으며, 옹솥에는 국을 끓였다. 한편 서민들은 중솥과 옹솥 둘을 걸었으며, 옹솥은 일제강점기에 양은솥이 들어오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기온이 따듯한 제주도에는 구들에 불을 넣을 필요성이 적어서 부뚜막을 따로 걸지 않았다. 이에 따라 아기 머리 크기만한 돌을 놓고 솥을 올렸으며, 굴뚝이 없어서 연기는 벽에 뚫은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이곳에서 난방을 시작한 것은 100여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솥 가운데 가장 큰 가마솥은 국가 자체를 상징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박세무朴世茂(1487~1564)가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조선왕조의 건국을 “조선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한양에 솥을 놓았다(國號曰朝鮮 定鼎于漢陽).”라고 적은 것이 좋은 보기이다.

부뚜막은 흙과 돌로 쌓고 황토를 두 번 바른 뒤 가늘고 고운 매흙을 여러 번 덧칠하였기 때문에 흙이 마르면 기름을 바른 듯 번들거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물에 젖거나 하면 흙이 부서져 내려서 한쪽이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부뚜막을 가운家運의 상징으로 여긴 나머지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복토福土 훔치기’라고 하여 부잣집의 흙을 몰래 가져다가 부뚜막에 덧발랐다. 이로써 그 집의 복이 옮겨 온다고 믿은 것이다.

또한 부뚜막을 부엌의 성소聖所로 여긴 까닭에 주부들은 이곳을 깨끗이 하려고 애썼고, 걸터앉거나 하는 행위를 삼갔다. 이곳에 놓은 종지에 담은 물을 신체로 삼아서 조왕신으로 받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인 아낙은 아침마다 물을 새로 갈아 부으며 그날 하루 온 식구의 평안을 빌었다. 중국에서 물이 아닌 신상神像을 받들고 조군竈君 또는 사명조군司命竈君이라 하여 주로 남성으로 다루는 데 반해 우리는 조왕각씨, 조왕할망이라 하여 여성으로 섬기는 점은 대조가 된다.

방을 외줄로 배치하는 대부분의 홑집에서는 부뚜막과 방 사이에 벽을 쳐서 막았지만 방을 두 줄로 배치하는 함경도 겹집에서는 부뚜막과 집의 중심 공간인 정주간을 터놓았다. 이처럼 부뚜막과 정주간이 한 평면에 배치된 덕분에 주부는 부뚜막에서 익힌 음식을 바로 상위에 차리게 되어 아주 편리하다. 그리고 아궁이가 딸린 공간을 부엌이라고 부르는 점도 특이하다.

특징 및 의의

조리와 난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우리의 부뚜막은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독특한 시설이며, 이것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에쿠안 겐지榮久庵憲司는 “부뚜막이 (조선)반도에서 들어오기까지 땅을 파고 만든 화덕[爐]을 썼다.”고 적었고, 가노 도시쓰구狩野敏次도 “부뚜막은 5세기쯤 조선반도에서 들어왔으며, 조선에서 솥[釜]을 가마かま라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가마’도 본디 조선어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동아시아의 부엌(김광언, 눌와, 2015), 어원사전(안옥규, 동북민족교육출판사, 1996), 한국식생활풍속(강인회·이경복, 삼영사, 1984), かまど(狩野敏次, 法政大學出版局, 2004), 台所の歷史(榮久庵憲司, 柴田書店, 1976).

부뚜막

부뚜막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김광언(金光彦)

정의

솥을 걸 수 있도록 아궁이 위에 흙과 돌을 쌓아 만든 턱.

내용

부뚜막은 불의 옛말인 ‘’와 ‘으막’으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막’은 ‘움막’의 ‘막’과 같은 의미로 ‘집’을 말하며, ‘으’는 결합모음으로 ‘’의 ‘ㅿ’가 ㅿ-ㅅ-ㄷ-ㄸ으로 바뀌어 ‘뚜’가 되었다. 1775년의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 조대竈臺를 ‘붓두막’, 『한청문감漢淸文鑑』에서는 과대鍋臺를 ‘붓두막’으로 새겼다. 제주도 가옥에서 마루에 불을 피우고 온기를 쬐는 자리나 부엌 바닥에 둘러놓은 돌에 불을 지펴서 음식을 익히는 곳을 부섭이라 부르는 것도 연관이 있다.

부뚜막은 원시시대 움집의 화덕에서 비롯되었다. 빗살무늬토기시대에는 움집 한가운데 돌을 원형 내지 타원형으로 두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어 무문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연기가 쉽게 빠지도록 움 한쪽에 설치하는 것 외에 한쪽을 터놓거나 바닥에 돌을 깔기도 하였다. 화덕이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것은 고구려시대부터이다. 서기 1세기 무렵의 유적에서 나온 도제 및 철제 부뚜막이 좋은 사례이다.

황해도 안악 3호 무덤의 벽화는 4세기 무렵의 부뚜막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형태는 긴네모꼴이며, 연기는 한 끝에 붙인 오리 입을 닮은 굴뚝을 통하여 집 밖으로 나간다. 이 부뚜막이 음식 조리 외에 난방 기능을 겸한 것은 4~5세기이지만 초기에는 구들이 외구들인 까닭에 방의 일부에만 불길이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앞의 두 가지 기능을 완벽하게 하는 부뚜막이 전국에 퍼진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부뚜막의 기능도 두 가지로 나뉘어 난방은 아궁이, 조리는 부뚜막에 걸어 놓은 솥이 각각 담당하게 되었다. 솥의 수는 집 형편에 따라 달랐다. 상류가옥에서는 흔히 부엌 안쪽에서부터 용가마·가마솥·중솥·옹솥 따위를 걸며, 물을 담아 두고 쓰는 두멍솥은 부뚜막 바깥쪽에 놓는다. 용가마나 가마솥은 입이 워낙 커서 널을 반달꼴로 짠 두 쪽으로 여닫는다. 흔히 용가마나 가마솥에는 물을 끓이고, 중솥에는 밥을 지으며, 옹솥에는 국을 끓였다. 한편 서민들은 중솥과 옹솥 둘을 걸었으며, 옹솥은 일제강점기에 양은솥이 들어오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기온이 따듯한 제주도에는 구들에 불을 넣을 필요성이 적어서 부뚜막을 따로 걸지 않았다. 이에 따라 아기 머리 크기만한 돌을 놓고 솥을 올렸으며, 굴뚝이 없어서 연기는 벽에 뚫은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이곳에서 난방을 시작한 것은 100여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솥 가운데 가장 큰 가마솥은 국가 자체를 상징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박세무朴世茂(1487~1564)가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조선왕조의 건국을 “조선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한양에 솥을 놓았다(國號曰朝鮮 定鼎于漢陽).”라고 적은 것이 좋은 보기이다.

부뚜막은 흙과 돌로 쌓고 황토를 두 번 바른 뒤 가늘고 고운 매흙을 여러 번 덧칠하였기 때문에 흙이 마르면 기름을 바른 듯 번들거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물에 젖거나 하면 흙이 부서져 내려서 한쪽이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부뚜막을 가운家運의 상징으로 여긴 나머지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복토福土 훔치기’라고 하여 부잣집의 흙을 몰래 가져다가 부뚜막에 덧발랐다. 이로써 그 집의 복이 옮겨 온다고 믿은 것이다.

또한 부뚜막을 부엌의 성소聖所로 여긴 까닭에 주부들은 이곳을 깨끗이 하려고 애썼고, 걸터앉거나 하는 행위를 삼갔다. 이곳에 놓은 종지에 담은 물을 신체로 삼아서 조왕신으로 받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인 아낙은 아침마다 물을 새로 갈아 부으며 그날 하루 온 식구의 평안을 빌었다. 중국에서 물이 아닌 신상神像을 받들고 조군竈君 또는 사명조군司命竈君이라 하여 주로 남성으로 다루는 데 반해 우리는 조왕각씨, 조왕할망이라 하여 여성으로 섬기는 점은 대조가 된다.

방을 외줄로 배치하는 대부분의 홑집에서는 부뚜막과 방 사이에 벽을 쳐서 막았지만 방을 두 줄로 배치하는 함경도 겹집에서는 부뚜막과 집의 중심 공간인 정주간을 터놓았다. 이처럼 부뚜막과 정주간이 한 평면에 배치된 덕분에 주부는 부뚜막에서 익힌 음식을 바로 상위에 차리게 되어 아주 편리하다. 그리고 아궁이가 딸린 공간을 부엌이라고 부르는 점도 특이하다.

특징 및 의의

조리와 난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우리의 부뚜막은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독특한 시설이며, 이것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에쿠안 겐지榮久庵憲司는 “부뚜막이 (조선)반도에서 들어오기까지 땅을 파고 만든 화덕[爐]을 썼다.”고 적었고, 가노 도시쓰구狩野敏次도 “부뚜막은 5세기쯤 조선반도에서 들어왔으며, 조선에서 솥[釜]을 가마かま라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가마’도 본디 조선어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동아시아의 부엌(김광언, 눌와, 2015), 어원사전(안옥규, 동북민족교육출판사, 1996), 한국식생활풍속(강인회·이경복, 삼영사, 1984), かまど(狩野敏次, 法政大學出版局, 2004), 台所の歷史(榮久庵憲司, 柴田書店,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