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척(干拓)

간척

한자명

干拓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양선아(梁善雅)

정의

해안, 하천변, 호수 등에 둑을 쌓고 물을 빼내어 그 내부를 육지로 만드는 일.

내용

조수潮水의 영향 여부에 따라 감조지간척感潮地干拓과 무감조지간척無感潮地干拓으로 구분된다. 감조지간척은 해안이나 감조하천感潮河川 연안을, 무감조지간척은 호수나 늪 또는 조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강가를 대상으로 한다. 한국에서는 갯벌이 발달한 서해안과 전라남도 남해안을 중심으로 감조지간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간척은 일본에서 도입된 용어로 19세기 말 일본과 수교 이후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만조수위선滿潮水位線과 간조수위선干潮水位線 사이를 뜻하는 간석지干潟地 역시 간척과 함께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한국의 간척』에서는 ‘매립’을 간척의 한 유형으로 파악하면서 “해면, 하구, 호소, 저습지 등의 낮은 지반을 메워 돋는 방식”으로 정의하고 있다. 매립이란 용어 역시 19세기 말 개항장 인근 간척공사와 관련된 문서들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사료에서는 간척 대신 ‘축언築堰’ 또는 ‘축동築垌’이란 표현이 주로 쓰였다. ‘언堰’과 ‘동垌’은 방조防潮나 방수防水의 기능을 하는 둑을 가리킨다. 간척을 통해 조성된 경지는 ‘언전堰田’이나 ‘언답堰畓’ ‘동답垌畓’이라 하였다. 육지에 있는 기성 답을 뜻하는 ‘육답陸畓’과 구분되어 쓰이던 ‘해답海畓’이란 표현 역시 간척으로 조성된 논을 의미한다. 크고 작은 간척지가 산재해 있는 서해안에는 간척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는데 ‘언내堰內’ ‘언안[堰-]’ ‘언장堰場’ ‘원안[堰-]’ ‘원장[堰場]’ 등 ‘언’에서 유래하는 것들이 많다. 이 밖에 ‘갯논’ ‘갯들’ ‘방죽논’ 등도 간척을 통해 조성된 논을 뜻하는 민속용어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조성된 대규모 간척지 중에는 ‘간사지干瀉地’로 불리는 사례도 있다. 간사지는 간석지의 오기誤記나 간척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많이 쓰였다. 간척으로 조성된 땅은 개간하여 주로 논으로 이용되었는데 조선시대 사료에는 ‘축언작답築堰作畓’으로 표현되어 있다.
간척의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서해안을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의 간척 역사도 오래되었고 간척 면적도 넓으나 기록이 남아 있는 간척지는 극히 일부이다. 기록상에 등장하는 최초의 간척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기에 있었다. 천도遷都 이후 식량 확보를 위해 강화도에서 간척이 이루어졌으며 평안도 위도에서도 서북면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 주도한 간척공사가 있었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에서 충청남도 당진과 아산 사이를 흐르는 삽교천 주변의 땅은 백제시대 때부터 군량 확보를 위해 끊임없이 간척이 진행되어 왔던 곳이라고 기술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간척 관련 기록이 증가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선 초기부터 간척 관련 기사가 실려 있으며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왕족을 비롯한 중앙 척신戚臣들의 간척이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정도로 권세가들의 간척이 두드러졌다. 서해안 일대의 간척지 개발이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되는 시점은 17세기 이후이다. 양 난(왜란·호란) 이후 군영軍營을 중심으로 한 국방체제의 전반적인 정비 과정에서 대두되었던 둔전 확대책은 개인의 수준을 넘어서서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로서 간척지 개발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과 왕실 가족의 가계를 담당하던 궁방宮房 역시 재원 확보를 위해 간척지 개발에 적극 가담하였다. 조선 후기에 오면 간척 관련 기록물의 종류도 다양해진다. 관찬 편년사 자료뿐만 아니라 둔전 및 궁방전 운영을 위해 작성되었던 양안量案이나 추수기秋收記, 개인들의 토지매매 문기나 소송자료 등 다양한 수준의 자료에서 당시 전개된 간척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국가가 주도한 대표적 간척으로는 강화도 선두포언船頭浦堰과 안산~인천 사이(현재 경기 시흥)에 축조된 진휼청신언賑恤廳新堰 등을 들 수 있으며 궁방의 간척으로는 전라도 부안 용동궁龍洞宮 장토庄土 등이 있다. 선두포언은 1706년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완공되었는데 그 과정은 「선두포축언시말비船頭浦築堰始末碑」와 공사를 감독했던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왕에게 올린 보고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선두포언 둑의 길이는 305파(약 476m), 선두포언을 쌓아 얻게 된 땅은 1,000여 섬지기, 평수로 약 300만 평에 달하였다. 선두포언 공사에는 총 11만 명의 인원이 1일 작업에 동원되었다. 1720~1721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휼청신언은 진휼청의 진자賑資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으며 간척지 규모는 1,000섬지기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안 용동궁 장토는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궁안리와 행안면 삼간리 그리고 하서면 언독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데, 19세기 전반 용동궁에서 선희궁宣禧宮 장토를 이속받은 후 간척을 통해 확장한 곳이다. 궁안리와 삼간리는 원래 갯벌이었던 곳으로 간척 이후 조성된 간척촌이다. 윤선도尹善道로 유명한 해남윤씨海南尹氏는 16~18세기 간척을 통해 소유지를 확대해 간 집안으로 유명하며 이와 관련된 자료가 이 집안 소장 문서로 남아 있다. 일반 백성들도 쉽게 간척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 규모는 대체로 영세하였다. 일반 백성이 조성한 소규모 간척지는 그 밖으로 대규모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여기에 편입되는 일이 많았으며 이 경우 종종 소유권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다양한 규모의 간척이 지속되었다. 이 시기 간척은 「국유미간지이용법」(1907년)과 「조선공유수면매립령」(1923년)의 규정을 받았는데 3정보 이상의 간척은 조선총독부의 처분을 받도록 하였다. 대규모 간척은 일본인들이 경지를 확보하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1910년대 전북군산과 압록강 하구 일대에 대농장을 조성한 불이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의 간척사업이 대표적 사례이다. 1920~1930년대 추진된 토지개량사업은 대규모 간척사업의 활성화에 일조하였다. 1950~1960년대에도 간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시기 간척은 미국의 원조식량을 자원으로 한 피난민정착사업이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공유수면매립법〉(현재 〈공유수면 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대규모 간척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동진강 수리 간척사업(계화도 간척지, 3,368㏊)과 서산 B지구 간척사업(5,817㏊)은 이 시기에 착공된 대표적 사업이다. 1970년대는 국제기구의 차관을 이용한 대단위농업종합개발의 일환으로 간척이 추진되던 시기로, 평택지구의 남양 간척지(2,682㏊)가 대표적 사례이다. 국가 주도 대규모 간척사업이 전면화되면서 1960년대까지도 행해지던 소규모 간척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1970년대 수립된 정부의 간척사업 기조가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1990년대 들어와 농지 확장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감소한 가운데 환경문제와 어업권 침해 등으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면서 농지 개발을 목적으로 한 국가 주도 대규모 간척사업의 정당성에 의문부호가 붙게 되었다. 2010년 새만금방조제 준공과 함께 간척사업의 역사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특징 및 의의

간척지의 조성은 저지대로의 경지 확대, 인구 이동, 촌락 형성이라는 사회사의 큰 흐름에 근간이 되는 생산기반의 구축과 직결된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한국의 간척은 200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갯벌과 도서의 발달, 복잡한 해안선, 조수간만의 큰 차와 같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무대로 서해안과 전라남도 남해안에서는 다양한 규모의 간척이 이루어져 왔다. 1970년대 국가 주도 대규모 간척사업이 전면화되면서 소규모 간척은 사라지게 되었다. 수백 년에 걸쳐 국토 확장에 일조해 온 간척의 역사는 농지 확장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감소하고 환경문제와 어업권 침해 등의 사회문제가 제기되면서 새만금방조제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간척은 사람이 자연과 힘을 겨루는 일임과 동시에 사람들 사이의 알력도 생기는 일이다. 새로운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사회적 갈등이 함께 야기되는 일은 현대사회뿐만 아니라 20세기 이전에도 존재하였다. 간척지의 규모가 커질수록 사회적 갈등의 폭도 증가하였다. 서해안에 산재한 간척지는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어 온 조상들의 지혜와 노고, 갈등의 역사까지도 함께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19세기 궁방의 간척-부안 삼간평 용동궁 장토를 중심으로(양선아, 한국문화57,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2), 국토와 민족생활사(최영준, 한길사, 1997), 조선후기 간척과 수리(양선아 외, 민속원, 2010), 한국의 간척(농어촌진흥공사, 1995).

간척

간척
한자명

干拓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양선아(梁善雅)

정의

해안, 하천변, 호수 등에 둑을 쌓고 물을 빼내어 그 내부를 육지로 만드는 일.

내용

조수潮水의 영향 여부에 따라 감조지간척感潮地干拓과 무감조지간척無感潮地干拓으로 구분된다. 감조지간척은 해안이나 감조하천感潮河川 연안을, 무감조지간척은 호수나 늪 또는 조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강가를 대상으로 한다. 한국에서는 갯벌이 발달한 서해안과 전라남도 남해안을 중심으로 감조지간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간척은 일본에서 도입된 용어로 19세기 말 일본과 수교 이후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만조수위선滿潮水位線과 간조수위선干潮水位線 사이를 뜻하는 간석지干潟地 역시 간척과 함께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한국의 간척』에서는 ‘매립’을 간척의 한 유형으로 파악하면서 “해면, 하구, 호소, 저습지 등의 낮은 지반을 메워 돋는 방식”으로 정의하고 있다. 매립이란 용어 역시 19세기 말 개항장 인근 간척공사와 관련된 문서들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사료에서는 간척 대신 ‘축언築堰’ 또는 ‘축동築垌’이란 표현이 주로 쓰였다. ‘언堰’과 ‘동垌’은 방조防潮나 방수防水의 기능을 하는 둑을 가리킨다. 간척을 통해 조성된 경지는 ‘언전堰田’이나 ‘언답堰畓’ ‘동답垌畓’이라 하였다. 육지에 있는 기성 답을 뜻하는 ‘육답陸畓’과 구분되어 쓰이던 ‘해답海畓’이란 표현 역시 간척으로 조성된 논을 의미한다. 크고 작은 간척지가 산재해 있는 서해안에는 간척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는데 ‘언내堰內’ ‘언안[堰-]’ ‘언장堰場’ ‘원안[堰-]’ ‘원장[堰場]’ 등 ‘언’에서 유래하는 것들이 많다. 이 밖에 ‘갯논’ ‘갯들’ ‘방죽논’ 등도 간척을 통해 조성된 논을 뜻하는 민속용어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조성된 대규모 간척지 중에는 ‘간사지干瀉地’로 불리는 사례도 있다. 간사지는 간석지의 오기誤記나 간척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많이 쓰였다. 간척으로 조성된 땅은 개간하여 주로 논으로 이용되었는데 조선시대 사료에는 ‘축언작답築堰作畓’으로 표현되어 있다.
간척의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서해안을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의 간척 역사도 오래되었고 간척 면적도 넓으나 기록이 남아 있는 간척지는 극히 일부이다. 기록상에 등장하는 최초의 간척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기에 있었다. 천도遷都 이후 식량 확보를 위해 강화도에서 간척이 이루어졌으며 평안도 위도에서도 서북면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 주도한 간척공사가 있었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에서 충청남도 당진과 아산 사이를 흐르는 삽교천 주변의 땅은 백제시대 때부터 군량 확보를 위해 끊임없이 간척이 진행되어 왔던 곳이라고 기술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간척 관련 기록이 증가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선 초기부터 간척 관련 기사가 실려 있으며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왕족을 비롯한 중앙 척신戚臣들의 간척이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정도로 권세가들의 간척이 두드러졌다. 서해안 일대의 간척지 개발이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되는 시점은 17세기 이후이다. 양 난(왜란·호란) 이후 군영軍營을 중심으로 한 국방체제의 전반적인 정비 과정에서 대두되었던 둔전 확대책은 개인의 수준을 넘어서서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로서 간척지 개발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과 왕실 가족의 가계를 담당하던 궁방宮房 역시 재원 확보를 위해 간척지 개발에 적극 가담하였다. 조선 후기에 오면 간척 관련 기록물의 종류도 다양해진다. 관찬 편년사 자료뿐만 아니라 둔전 및 궁방전 운영을 위해 작성되었던 양안量案이나 추수기秋收記, 개인들의 토지매매 문기나 소송자료 등 다양한 수준의 자료에서 당시 전개된 간척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국가가 주도한 대표적 간척으로는 강화도 선두포언船頭浦堰과 안산~인천 사이(현재 경기 시흥)에 축조된 진휼청신언賑恤廳新堰 등을 들 수 있으며 궁방의 간척으로는 전라도 부안 용동궁龍洞宮 장토庄土 등이 있다. 선두포언은 1706년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완공되었는데 그 과정은 「선두포축언시말비船頭浦築堰始末碑」와 공사를 감독했던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왕에게 올린 보고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선두포언 둑의 길이는 305파(약 476m), 선두포언을 쌓아 얻게 된 땅은 1,000여 섬지기, 평수로 약 300만 평에 달하였다. 선두포언 공사에는 총 11만 명의 인원이 1일 작업에 동원되었다. 1720~1721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휼청신언은 진휼청의 진자賑資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으며 간척지 규모는 1,000섬지기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안 용동궁 장토는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궁안리와 행안면 삼간리 그리고 하서면 언독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데, 19세기 전반 용동궁에서 선희궁宣禧宮 장토를 이속받은 후 간척을 통해 확장한 곳이다. 궁안리와 삼간리는 원래 갯벌이었던 곳으로 간척 이후 조성된 간척촌이다. 윤선도尹善道로 유명한 해남윤씨海南尹氏는 16~18세기 간척을 통해 소유지를 확대해 간 집안으로 유명하며 이와 관련된 자료가 이 집안 소장 문서로 남아 있다. 일반 백성들도 쉽게 간척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 규모는 대체로 영세하였다. 일반 백성이 조성한 소규모 간척지는 그 밖으로 대규모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여기에 편입되는 일이 많았으며 이 경우 종종 소유권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다양한 규모의 간척이 지속되었다. 이 시기 간척은 「국유미간지이용법」(1907년)과 「조선공유수면매립령」(1923년)의 규정을 받았는데 3정보 이상의 간척은 조선총독부의 처분을 받도록 하였다. 대규모 간척은 일본인들이 경지를 확보하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1910년대 전북군산과 압록강 하구 일대에 대농장을 조성한 불이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의 간척사업이 대표적 사례이다. 1920~1930년대 추진된 토지개량사업은 대규모 간척사업의 활성화에 일조하였다. 1950~1960년대에도 간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시기 간척은 미국의 원조식량을 자원으로 한 피난민정착사업이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공유수면매립법〉(현재 〈공유수면 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대규모 간척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동진강 수리 간척사업(계화도 간척지, 3,368㏊)과 서산 B지구 간척사업(5,817㏊)은 이 시기에 착공된 대표적 사업이다. 1970년대는 국제기구의 차관을 이용한 대단위농업종합개발의 일환으로 간척이 추진되던 시기로, 평택지구의 남양 간척지(2,682㏊)가 대표적 사례이다. 국가 주도 대규모 간척사업이 전면화되면서 1960년대까지도 행해지던 소규모 간척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1970년대 수립된 정부의 간척사업 기조가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1990년대 들어와 농지 확장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감소한 가운데 환경문제와 어업권 침해 등으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면서 농지 개발을 목적으로 한 국가 주도 대규모 간척사업의 정당성에 의문부호가 붙게 되었다. 2010년 새만금방조제 준공과 함께 간척사업의 역사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특징 및 의의

간척지의 조성은 저지대로의 경지 확대, 인구 이동, 촌락 형성이라는 사회사의 큰 흐름에 근간이 되는 생산기반의 구축과 직결된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한국의 간척은 200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갯벌과 도서의 발달, 복잡한 해안선, 조수간만의 큰 차와 같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무대로 서해안과 전라남도 남해안에서는 다양한 규모의 간척이 이루어져 왔다. 1970년대 국가 주도 대규모 간척사업이 전면화되면서 소규모 간척은 사라지게 되었다. 수백 년에 걸쳐 국토 확장에 일조해 온 간척의 역사는 농지 확장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감소하고 환경문제와 어업권 침해 등의 사회문제가 제기되면서 새만금방조제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간척은 사람이 자연과 힘을 겨루는 일임과 동시에 사람들 사이의 알력도 생기는 일이다. 새로운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사회적 갈등이 함께 야기되는 일은 현대사회뿐만 아니라 20세기 이전에도 존재하였다. 간척지의 규모가 커질수록 사회적 갈등의 폭도 증가하였다. 서해안에 산재한 간척지는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어 온 조상들의 지혜와 노고, 갈등의 역사까지도 함께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19세기 궁방의 간척-부안 삼간평 용동궁 장토를 중심으로(양선아, 한국문화57,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2), 국토와 민족생활사(최영준, 한길사, 1997), 조선후기 간척과 수리(양선아 외, 민속원, 2010), 한국의 간척(농어촌진흥공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