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작(間作)

간작

한자명

間作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안승택(安勝澤)

정의

1년에 한 그루 농사를 짓거나 다모작을 하는 특정 경작지에서 하나의 농작물을 심어 기르는 그루의 사이에 그와 재배 시기를 달리하는 다른 농작물을 심어 재배하는 농업의 방식.

내용

근대 농학에서 간작間作, intercropping, 즉 사이짓기의 본래 의미는 1년에 1회(한 그루) 농사를 짓는 경작지에서 주작물이 자라는 그루의 사이에 부작물을 파종하는 작부체계를 일컫는다. 그러나 한국 농업 특히 농업사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농법은 기후가 한랭하여 밭 이모작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보리·밀 등 앞그루 작물(여름곡식)의 수확 직전 조·콩·팥 등 뒷그루 작물(가을곡식)을 파종하고, 앞그루 작물 수확 후에는 오롯이 뒷그루 작물만을 재배하는 밭으로 전환하는 일종의 이모작 방식이다.
전자의 근대 농학에 입각한 개념에서 본질적 요소로 중시되는 것은 주작물과 부작물의 구분으로 주작물인 맥류나 목화에 대해 채소, 들깨 같은 부작물을 간작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때 의미상 대립하는 범주는 주와 부의 구별이 없는 농법인 혼작이다. 후자의 한국 농업사에서의 방식은 근경(그루갈이)으로 불리던 밭 이모작을 그보다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실시한다는 개념이므로, 앞그루와 뒷그루 구별은 있어도 주작물과 부작물이라는 구분을 적용하기는 어색하다. 이 경우 의미상 대립하는 범주는 혼작이 아니라 근경根耕 즉 이모작으로서의 윤작이다. 간작의 이칭 중 하나인 대우代耰가 ‘근경에 쓰는 고무래 대신 호미를 쓰는 갈이 방법[以鋤代耰耕]’이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점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그루갈이에 의한 밭 이모작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이모작을 이루기 위하여 행하는 간작농법을 농업사학자들은 주로 간종법間種法이라고 불러왔으며, 부분적으로 대전법代田法·대우법 등의 용어도 사용하였다. 현장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은 간작이라고도 하지만, 지역에 따라 대우치기 또는 그냥 대우라고만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기도 하였다. 실제 작부체계로는 1년 2작, 2년 4작, 2년 3작 등이 다양하게 조합되고 활용된다. 이웃한 일본에서는 근래 이를 입모간파종기술立毛間播種技術이라 부르며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기계화 영농까지 한다. 그러나 간종법 발전의 역사는 한반도처럼 길지 않고, 많은 경우 근대 이후에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농업사에서 밭 이모작 간작농법의 문헌적 근거는 『농사직설農事直說』(1429)에서도 확인된다. 『농사직설』은 밭 이모작의 기본형식으로 근경을 제시한 후 ‘밭이 적은 자[田少者]’가 구사하는 방식으로 간종법을 들었다. 그 기술체계는 근현대에 행하여지던 밭 이모작 간작농법과 사실상 같은 것이어서 그 역사가 적어도 수백 년 이상 거슬러 오르는 셈이다.
이를 세부적으로 보면 뒷그루 작물 간종 이후의 복토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앞그루 작물 수확 후 그 그루터기가 있는 두둑(애초에 앞그루인 보리와 밀은 고랑에 심지만, 이후 복토와 제초에 의해 거의 평평하거나 살짝 높은 두둑이 된다)을 후치, 극젱이, 훌칭이 등으로 불리는 일종의 쟁기로 끌어서 뒷그루가 파종된 고랑에 흙을 돋우어 두둑 재배로 바꾸어 내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후치가 아닌 호미를 사용해서 앞그루 작물의 그루터기를 흙과 함께 파내고, 이를 뒷그루 작물이 파종된 고랑에 가지런히 쌓아 올려 두둑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후치질을 하든 호미질을 하든 농민들은 이 작업을 가리켜 “북을 준다.” 혹은 “북돋는다.”라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뒷그루는 앞그루의 고랑에 파종되지만, 앞그루 수확 후 새로 조성된 두둑에서 자라게 된다. 학계에서는 후치를 쓰면 후치법, 호미를 쓰면 대우법이라 구분하는데 현장 농민이 대우치기라고 할 때는 이 후치법과 대우법의 총칭으로 쓰는 경향이 있다.

특징 및 의의

세종 대 농서인 『농사직설』에서 밭이 적은 자들이 하는 소수적 방식이라 평한 간종법에 대해 1800년경 저술된 농서인 『천일록千一錄』에서는 “경기 남부만 빼고 각 도에서 다 한다.”라고 적고 있다. 간종법을 하지 않는 것이 경기 남부만이라는 것은 과장이겠으나 18세기에 이미 한반도 도처에서 널리 행해졌던 것은 분명하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농학자가 자신이 쓴 글에서 경기 북부의 밭 2년 3작 간작농법을 두고 “일본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3대 농업술의 하나”라고 평한 적도 있다. 간작농법을 “일본의 것”이라고 적은 점은 식민치하의 일로 통탄할 상황이지만, 일본인이 그렇게 평가할 정도로 조선의 간작농법에는 괄목할 만한 면이 있었다. 서로 시기를 달리하여 서로 깊이가 다른 여러 층의 지력을 얻고, 높이가 다른 작물이 저마다 볕을 받아서 좁은 밭에서 취할 수 있는 양분을 남김없이 끌어내는 농법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하나의 경작지 구획 안에서 서로 생장기와 키를 달리하는 여러 작물을 혼합해서 마치 밀림 속 야생식물이 서로 엉키면서도 공간을 분할하여 자라듯 작물을 재배하는 것은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소농들이 농사를 짓는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근경 후 혼작을 하거나 간작을 하는 조선의 밭 이모작은 그것을 아주 좁은 구획 안에서 그것도 곡식 작물만으로 정밀하게 진행하고, 게다가 기후가 허용하는 최대의 한계지점까지 밀어붙이며 그 집약도를 높였다는 점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농학에서는 토양 건조, 배수 불량, 일조 방해, 뿌리발달 저해, 작업 불편 등을 이유로 간작농법과 혼작농법을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한반도의 자연환경과 소농문화가 산출한 중대한 농업문화유산이었던 것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그 기원이 ‘밭이 적은 자’ 즉 가난한 소농들이 고안해 낸 기술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간작농법이 개발되고 확산됨으로써 1년 1작밖에 짓지 못하던 곳에서 1년 2작, 2년 4작 혹은 2년 3작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한정된 농토에서 더 많은 곡식을 생산해 더 많은 이가 먹고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일본인 식민자가 간작농법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적었지만, 실은 그런 의견은 그들 안에서도 소수파에 불과하였다. 또 간작농법이 활발히 퍼지던 조선 후기 시점에 살았던 소위 실학자들조차도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렇게 수백 년간 이어진 부정적 인식 속에서도 농민 스스로 개발하고 응용해서 현대까지 이어진 점 역시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식민지 조선의 근대농법과 재래농법(안승택, 신구문화사, 2009), 전작-4판(조재영 외, 향문사, 2001), 조선농업사연구(민성기, 일조각, 1988), 조선시대농법발달연구(염정섭, 태학사, 2002), 조선후기농업사연구2(김용섭, 지식산업사, 2006), 最新農業技術事典(農業·生物系特定産業技術硏究機構, 山漁村文化協会, 2006).

간작

간작
한자명

間作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안승택(安勝澤)

정의

1년에 한 그루 농사를 짓거나 다모작을 하는 특정 경작지에서 하나의 농작물을 심어 기르는 그루의 사이에 그와 재배 시기를 달리하는 다른 농작물을 심어 재배하는 농업의 방식.

내용

근대 농학에서 간작間作, intercropping, 즉 사이짓기의 본래 의미는 1년에 1회(한 그루) 농사를 짓는 경작지에서 주작물이 자라는 그루의 사이에 부작물을 파종하는 작부체계를 일컫는다. 그러나 한국 농업 특히 농업사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농법은 기후가 한랭하여 밭 이모작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보리·밀 등 앞그루 작물(여름곡식)의 수확 직전 조·콩·팥 등 뒷그루 작물(가을곡식)을 파종하고, 앞그루 작물 수확 후에는 오롯이 뒷그루 작물만을 재배하는 밭으로 전환하는 일종의 이모작 방식이다.
전자의 근대 농학에 입각한 개념에서 본질적 요소로 중시되는 것은 주작물과 부작물의 구분으로 주작물인 맥류나 목화에 대해 채소, 들깨 같은 부작물을 간작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때 의미상 대립하는 범주는 주와 부의 구별이 없는 농법인 혼작이다. 후자의 한국 농업사에서의 방식은 근경(그루갈이)으로 불리던 밭 이모작을 그보다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실시한다는 개념이므로, 앞그루와 뒷그루 구별은 있어도 주작물과 부작물이라는 구분을 적용하기는 어색하다. 이 경우 의미상 대립하는 범주는 혼작이 아니라 근경根耕 즉 이모작으로서의 윤작이다. 간작의 이칭 중 하나인 대우代耰가 ‘근경에 쓰는 고무래 대신 호미를 쓰는 갈이 방법[以鋤代耰耕]’이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점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그루갈이에 의한 밭 이모작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이모작을 이루기 위하여 행하는 간작농법을 농업사학자들은 주로 간종법間種法이라고 불러왔으며, 부분적으로 대전법代田法·대우법 등의 용어도 사용하였다. 현장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은 간작이라고도 하지만, 지역에 따라 대우치기 또는 그냥 대우라고만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기도 하였다. 실제 작부체계로는 1년 2작, 2년 4작, 2년 3작 등이 다양하게 조합되고 활용된다. 이웃한 일본에서는 근래 이를 입모간파종기술立毛間播種技術이라 부르며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기계화 영농까지 한다. 그러나 간종법 발전의 역사는 한반도처럼 길지 않고, 많은 경우 근대 이후에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농업사에서 밭 이모작 간작농법의 문헌적 근거는 『농사직설農事直說』(1429)에서도 확인된다. 『농사직설』은 밭 이모작의 기본형식으로 근경을 제시한 후 ‘밭이 적은 자[田少者]’가 구사하는 방식으로 간종법을 들었다. 그 기술체계는 근현대에 행하여지던 밭 이모작 간작농법과 사실상 같은 것이어서 그 역사가 적어도 수백 년 이상 거슬러 오르는 셈이다.
이를 세부적으로 보면 뒷그루 작물 간종 이후의 복토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앞그루 작물 수확 후 그 그루터기가 있는 두둑(애초에 앞그루인 보리와 밀은 고랑에 심지만, 이후 복토와 제초에 의해 거의 평평하거나 살짝 높은 두둑이 된다)을 후치, 극젱이, 훌칭이 등으로 불리는 일종의 쟁기로 끌어서 뒷그루가 파종된 고랑에 흙을 돋우어 두둑 재배로 바꾸어 내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후치가 아닌 호미를 사용해서 앞그루 작물의 그루터기를 흙과 함께 파내고, 이를 뒷그루 작물이 파종된 고랑에 가지런히 쌓아 올려 두둑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후치질을 하든 호미질을 하든 농민들은 이 작업을 가리켜 “북을 준다.” 혹은 “북돋는다.”라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뒷그루는 앞그루의 고랑에 파종되지만, 앞그루 수확 후 새로 조성된 두둑에서 자라게 된다. 학계에서는 후치를 쓰면 후치법, 호미를 쓰면 대우법이라 구분하는데 현장 농민이 대우치기라고 할 때는 이 후치법과 대우법의 총칭으로 쓰는 경향이 있다.

특징 및 의의

세종 대 농서인 『농사직설』에서 밭이 적은 자들이 하는 소수적 방식이라 평한 간종법에 대해 1800년경 저술된 농서인 『천일록千一錄』에서는 “경기 남부만 빼고 각 도에서 다 한다.”라고 적고 있다. 간종법을 하지 않는 것이 경기 남부만이라는 것은 과장이겠으나 18세기에 이미 한반도 도처에서 널리 행해졌던 것은 분명하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농학자가 자신이 쓴 글에서 경기 북부의 밭 2년 3작 간작농법을 두고 “일본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3대 농업기술의 하나”라고 평한 적도 있다. 간작농법을 “일본의 것”이라고 적은 점은 식민치하의 일로 통탄할 상황이지만, 일본인이 그렇게 평가할 정도로 조선의 간작농법에는 괄목할 만한 면이 있었다. 서로 시기를 달리하여 서로 깊이가 다른 여러 층의 지력을 얻고, 높이가 다른 작물이 저마다 볕을 받아서 좁은 밭에서 취할 수 있는 양분을 남김없이 끌어내는 농법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하나의 경작지 구획 안에서 서로 생장기와 키를 달리하는 여러 작물을 혼합해서 마치 밀림 속 야생식물이 서로 엉키면서도 공간을 분할하여 자라듯 작물을 재배하는 것은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소농들이 농사를 짓는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근경 후 혼작을 하거나 간작을 하는 조선의 밭 이모작은 그것을 아주 좁은 구획 안에서 그것도 곡식 작물만으로 정밀하게 진행하고, 게다가 기후가 허용하는 최대의 한계지점까지 밀어붙이며 그 집약도를 높였다는 점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농학에서는 토양 건조, 배수 불량, 일조 방해, 뿌리발달 저해, 작업 불편 등을 이유로 간작농법과 혼작농법을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한반도의 자연환경과 소농문화가 산출한 중대한 농업문화유산이었던 것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그 기원이 ‘밭이 적은 자’ 즉 가난한 소농들이 고안해 낸 기술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간작농법이 개발되고 확산됨으로써 1년 1작밖에 짓지 못하던 곳에서 1년 2작, 2년 4작 혹은 2년 3작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한정된 농토에서 더 많은 곡식을 생산해 더 많은 이가 먹고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일본인 식민자가 간작농법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적었지만, 실은 그런 의견은 그들 안에서도 소수파에 불과하였다. 또 간작농법이 활발히 퍼지던 조선 후기 시점에 살았던 소위 실학자들조차도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렇게 수백 년간 이어진 부정적 인식 속에서도 농민 스스로 개발하고 응용해서 현대까지 이어진 점 역시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식민지 조선의 근대농법과 재래농법(안승택, 신구문화사, 2009), 전작-4판(조재영 외, 향문사, 2001), 조선농업사연구(민성기, 일조각, 1988), 조선시대농법발달연구(염정섭, 태학사, 2002), 조선후기농업사연구2(김용섭, 지식산업사, 2006), 最新農業技術事典(農業·生物系特定産業技術硏究機構, 山漁村文化協会,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