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니틀

가마니틀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엄정웅(嚴正雄)

정의

가마니를 짜는 틀.

내용

가마니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조선의 대일본 미곡 수출 때 쌀을 포장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제작을 위해 가마니틀이 도입된 것은 1910년 무렵으로 짐작된다.
1909년 조선통감부의 제3차 『한국시정연보韓國施政年報』에는 “1908년에 일본의 개량농기구인 그네·풍구·낫·새끼틀과 함께 보통 가마니틀[普通製筵器] 495대, 마키노식 가마니틀[眞野式製筵器] 50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1910년대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1914)은 일본의 경제호황을 가져왔고 공업화와 도시화를 급속히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 내 쌀 수요와 가격이 폭등하였고 조선의 대일본 쌀 수출은 증가하였다. 일본 내 쌀 부족 현상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산미 증식계획’을 추진하여 조선의 쌀 생산량을 늘리고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이출하여 공급을 안정화하려 하였다. 이때 일본의 가마니를 가져와서 조선의 쌀을 포장하는 것보다는 조선에서 가마니를 만들어 이출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였기에 총독부는 가마니 생산증대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일환으로 전국 곳곳에서 전습회를 열어 기술을 가르치고 보조금을 주어 가마니 기계를 보급하였다. 또 전국 각지에 승입조합繩叺組合을 결성하여 농민들에게 가마니 기계를 보급하고 가마니 짜기를 부업으로 권장하였다. 이 밖에 경진대회를 열기도 하였으며, 가마니 생산성이 좋은 마을을 모범마을로 선정하고 신문에 게재하여 선전하기도 하였다.
1930~1940년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등 전시체제에서 가마니틀은 군량미를 나르고 참호를 만드는 등의 군수용품으로 활용되는 가마니 제작을 위해 많이 사용되었다. 총독부는 보다 많은 양의 가마니를 징수하고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농가의 각호 당 가마니 생산의 할당량을 부과하고 가격을 통제하였다.
이 밖에 가마니틀은 사회복지 정책 차원에서 보급되기도 하였다. 일부 지방 당국은 지방비로 가마니틀을 학교에 보급하고 수업료 체납으로 인한 퇴학을 방지하기 위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가마니를 짜게 해 수업료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풍수해를 입은 농촌 지역에 구제책으로 가마니틀을 보급하고 기술원으로 보내 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가마니 짜기를 부업으로 권장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가마니는 농산물을 포장하는 용도로 유용하게 쓰였다. 농가에서도 여전히 가마니틀을 이용하여 자가소비용 그리고 정부 수매용 등으로 가마니를 제작하였다. 그러다가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1970년대 이후부터는 신소재 제품인 마대가 농가에 점차 보급되고 일반벼보다 키가 작은 통일벼의 등장으로 가마니 짜기가 어려워지자 가마니 생산은 점차 감소하였다. 하지만 마대가 초기에 등장하였을 때는 질이 좋지 않아 잘 찢어졌고 구입하는 데 비용이 들어 일부 농가에서는 가마니틀로 가마니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마대 가격이 저렴해지고 품질이 향상되면서 가마니틀을 활용한 가마니의 생산과 소비는 점차 쇠퇴되어 갔다.

특징 및 의의

가마니틀은 나무 받침 위에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가로질러 둔 다음 그 아래에 바디를 둔다. 그리고 볏짚으로 새끼줄을 만들어 도리와 바닥의 받침대에 돌려 감아 날줄을 만든다. 날줄을 엇갈리게 둔 후 가마니 바늘로 볏짚을 가로질러 씨줄로 넣고 바디를 내리면서 짜 나간다. 다 짠 후에는 반으로 접고 바늘로 꿰매어 자루 형태로 만든다.
가마니가 보급된 1910년 무렵부터 마대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전까지 가마니는 쌀을 비롯한 곡물, 소금, 광물, 비료 등을 담는 데 필요하였다. 따라서 가마니틀 또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농한기에 농가의 부수입원을 창출하는 기계로 자리 잡아 1970년대에는 상당수의 농가가 보유하였다. 하지만 산업화의 진행과 신소재 제품인 마대의 등장, 농한기와 농번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등의 사회 변화에 따라 가마니틀의 사용이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수탈사(인병선·김도형, 창비, 2016), 경기도 김포지역 농촌 부업의 변화와 특성(송지영,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한국의 농기구(박호석·안승모, 어문각, 2001), 농민의욕 상실시키는 수직 가마니만 수매 방침(경향신문, 1978.2.3.), 모범농촌(동아일보, 1925.2.22.), 풍수해 구제책 입직기 배부(동아일보, 1934.2.14.), 두피디아(doopedia.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e뮤지엄(emuseum.go.kr).

가마니틀

가마니틀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엄정웅(嚴正雄)

정의

가마니를 짜는 틀.

내용

가마니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조선의 대일본 미곡 수출 때 쌀을 포장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제작을 위해 가마니틀이 도입된 것은 1910년 무렵으로 짐작된다.
1909년 조선통감부의 제3차 『한국시정연보韓國施政年報』에는 “1908년에 일본의 개량농기구인 그네·풍구·낫·새끼틀과 함께 보통 가마니틀[普通製筵器] 495대, 마키노식 가마니틀[眞野式製筵器] 50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1910년대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1914)은 일본의 경제호황을 가져왔고 공업화와 도시화를 급속히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 내 쌀 수요와 가격이 폭등하였고 조선의 대일본 쌀 수출은 증가하였다. 일본 내 쌀 부족 현상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산미 증식계획’을 추진하여 조선의 쌀 생산량을 늘리고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이출하여 공급을 안정화하려 하였다. 이때 일본의 가마니를 가져와서 조선의 쌀을 포장하는 것보다는 조선에서 가마니를 만들어 이출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였기에 총독부는 가마니 생산증대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일환으로 전국 곳곳에서 전습회를 열어 기술을 가르치고 보조금을 주어 가마니 기계를 보급하였다. 또 전국 각지에 승입조합繩叺組合을 결성하여 농민들에게 가마니 기계를 보급하고 가마니 짜기를 부업으로 권장하였다. 이 밖에 경진대회를 열기도 하였으며, 가마니 생산성이 좋은 마을을 모범마을로 선정하고 신문에 게재하여 선전하기도 하였다.
1930~1940년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등 전시체제에서 가마니틀은 군량미를 나르고 참호를 만드는 등의 군수용품으로 활용되는 가마니 제작을 위해 많이 사용되었다. 총독부는 보다 많은 양의 가마니를 징수하고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농가의 각호 당 가마니 생산의 할당량을 부과하고 가격을 통제하였다.
이 밖에 가마니틀은 사회복지 정책 차원에서 보급되기도 하였다. 일부 지방 당국은 지방비로 가마니틀을 학교에 보급하고 수업료 체납으로 인한 퇴학을 방지하기 위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가마니를 짜게 해 수업료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풍수해를 입은 농촌 지역에 구제책으로 가마니틀을 보급하고 기술원으로 보내 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가마니 짜기를 부업으로 권장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가마니는 농산물을 포장하는 용도로 유용하게 쓰였다. 농가에서도 여전히 가마니틀을 이용하여 자가소비용 그리고 정부 수매용 등으로 가마니를 제작하였다. 그러다가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1970년대 이후부터는 신소재 제품인 마대가 농가에 점차 보급되고 일반벼보다 키가 작은 통일벼의 등장으로 가마니 짜기가 어려워지자 가마니 생산은 점차 감소하였다. 하지만 마대가 초기에 등장하였을 때는 질이 좋지 않아 잘 찢어졌고 구입하는 데 비용이 들어 일부 농가에서는 가마니틀로 가마니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마대 가격이 저렴해지고 품질이 향상되면서 가마니틀을 활용한 가마니의 생산과 소비는 점차 쇠퇴되어 갔다.

특징 및 의의

가마니틀은 나무 받침 위에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가로질러 둔 다음 그 아래에 바디를 둔다. 그리고 볏짚으로 새끼줄을 만들어 도리와 바닥의 받침대에 돌려 감아 날줄을 만든다. 날줄을 엇갈리게 둔 후 가마니 바늘로 볏짚을 가로질러 씨줄로 넣고 바디를 내리면서 짜 나간다. 다 짠 후에는 반으로 접고 바늘로 꿰매어 자루 형태로 만든다.
가마니가 보급된 1910년 무렵부터 마대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전까지 가마니는 쌀을 비롯한 곡물, 소금, 광물, 비료 등을 담는 데 필요하였다. 따라서 가마니틀 또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농한기에 농가의 부수입원을 창출하는 기계로 자리 잡아 1970년대에는 상당수의 농가가 보유하였다. 하지만 산업화의 진행과 신소재 제품인 마대의 등장, 농한기와 농번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등의 사회 변화에 따라 가마니틀의 사용이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수탈사(인병선·김도형, 창비, 2016), 경기도 김포지역 농촌 부업의 변화와 특성(송지영,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한국의 농기구(박호석·안승모, 어문각, 2001), 농민의욕 상실시키는 수직 가마니만 수매 방침(경향신문, 1978.2.3.), 모범농촌(동아일보, 1925.2.22.), 풍수해 구제책 입직기 배부(동아일보, 1934.2.14.), 두피디아(doopedia.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e뮤지엄(emuseum.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