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니

가마니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박종민(朴鍾珉)

정의

새끼와 짚으로 쳐서 울을 깊게 만들어 곡식 등을 운반하거나 저장하용기.

내용

가마니는 새끼를 날줄로 하고 그 사이를 짚으로 촘촘하게 엮어서 짠다. 짜임이 매우 조밀하여 곡식이 샐 틈이 거의 없다. 날과 날 사이가 잘 다져져서 어떤 곡물도 담을 수 있었다. 특히 농가에서 벼와 쌀 등을 담을 때에는 가마니가 꼭 필요하였다. 가마니가 일본에서 들어오기 전에는 보관 용구로 섬을 주로 사용하였다.
가마니는 일본어 가마스かます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1909년에 당시 조선통감부가 발행한 제3차 『한국시정연보韓國施政年報』에는 “1908년 일본의 개량농기구인 그네·풍구·낫·괭이 따위와 더불어 새끼틀 19대, 보통 가마니틀[普通製筵器] 495대, 마키노식 가마니틀[眞野式製筵器] 50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가마니 제작의 시초로 생각할 수 있다. 이후에 가마니틀 도입량이 부쩍 늘어나서 1916년에 7만 916대, 1917년에 10만 2,244대를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의 가마니 제작과 생산은 이 무렵부터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마니가 일본에서 도입되면서 섬을 대신해서 대중적으로 사용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조직과 중량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섬은 날 사이가 성기어서 낱알이 작거나 도정搗精한 곡물을 담기 어려워 오직 벼·보리·콩 등만 담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섬은 가마니보다 담는 양이 많아서 중량이 당연히 무거워지기에 한 사람이 들어서 옮기기 어려웠다. 그에 비하여 가마니는 한 사람이 나르기에 적당하였고 높이 쌓기에도 편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빈 가마니는 차곡차곡 쌓아 놓을 수 있었으며 반으로 접을 수 있어 사용 후 보관 역시 편리하였다.
가마니는 두 명이 가마니틀을 활용해서 짠다. 가마니틀은 틀과 바디 그리고 대침 등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새끼줄을 틀에 걸고 대침으로 들어간 볏짚을 바디로 눌러 친다. 한 사람은 바디질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대침으로 볏짚을 밀어 넣는다. 능숙한 사람은 하루에 서너 장의 가마니를 짤 수 있다. 보통 사람은 잡담과 노래 등을 즐기면서도 하루 두 장 정도의 가마니를 짤 수 있다.
가마니는 용도에 따라 비료가마니·볏가마니·쌀가마니 등으로 나뉘며, 날 수와 크기도 각각 달랐다. 비료가마니는 17날, 볏가마니는 20날, 쌀가마니는 22날로 짠다. 가마니는 날 수가 많을수록 든든하다. 크기는 비료가마니 너비가 75㎝이고 나머지 두 종류는 85㎝ 정도이다. 한 가마니는 10말로, 쌀로 치면 80㎏이다. 두 가마니가 한 섬이다. 1960년대 말에 가마니 중량은 2.75㎏, 수명은 1~2년, 거래 가격은 30원이었다.
정부는 1970년대 말까지 농가에서 가마니틀을 이용해서 짠 손가마니를 전량 매입하였다. 이는 대부분 농가가 농한기 소득 증대 부업으로 가마니 짜기에 자연스럽게 참여케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가마니 짜기는 농민들의 소득원으로 한몫을 하여서 가족 모두와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동사업으로 확대되었다.
가마니를 많이 짜는 집은 한겨울에 100여 장을 짰고 한 해 필요한 가마니는 대개 직접 짜서 사용하였다. 심지어 어떤 부부는 가마니 200장을 짜서 쌀 세 가마의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농민들은 가을걷이를 마치고 난 후에 사랑방에 모여 앉아서 공동으로 가마니를 짜는 일로 겨울을 보내곤 하였다. 다수의 마을은 가마니 짜기를 농한기 새마을 공동사업으로 확대해서 진행하였다. 당시 정부는 부녀 새마을 쌀가마니 짜기 경진대회를 열고 우수사례를 발굴해 발표도 하게 하였다.
이후에는 동력을 활용한 가마니 짜기 기계가 출현하였다. 이 기계는 하루에 20장에서 200장까지 가마니를 생산하였다. 기계가마니는 손가마니보다 질적으로 우수하였고 더 많은 양을 생산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마을은 기계를 도입해서 가마니를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계가마니보다 손가마니를 우선하여 고가에 매입하였다. 손가마니의 우선 고가 매입은 정부 차원에서 농민들의 소득을 보전해 주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마대·비닐포대·종이포대 등이 대량생산되고 농가에 보급된 후에는 더 이상 가마니를 매입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다수확이 가능한 벼품종은 가마니 제작용으로 부적합하다. 볏짚이 길어야만 가마니를 짤 수 있기 때문이다. 통일벼 등 다수확 품종은 키가 작아서 가마니를 짤 수 있는 길이로 부족하다. 이제는 주위에서 가마니를 생산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가마니의 용량을 말하는 ‘가마’란 말만 남았다.

특징 및 의의

가마니는 가을걷이 이후에 농작물의 보관과 운반을 위한 우리의 대표적 전통 농구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에서 들어왔지만, 우리 농가에 뿌리 깊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가마니는 농한기에 농가의 부업 대상으로 농민들로부터 관심을 많이 끌었던 이색적인 농구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권장과 벼농사 중심의 농업 등이 농민들로 하여금 가마니 짜기에 적극 참여하게 하였다. 가마니는 농민들의 총체적인 삶과 함께한 농구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9), 한국의 농기구(박호석·안승모, 어문각, 2001), 두피디아(doopedia.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가마니

가마니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박종민(朴鍾珉)

정의

새끼와 짚으로 쳐서 울을 깊게 만들어 곡식 등을 운반하거나 저장하는 용기.

내용

가마니는 새끼를 날줄로 하고 그 사이를 짚으로 촘촘하게 엮어서 짠다. 짜임이 매우 조밀하여 곡식이 샐 틈이 거의 없다. 날과 날 사이가 잘 다져져서 어떤 곡물도 담을 수 있었다. 특히 농가에서 벼와 쌀 등을 담을 때에는 가마니가 꼭 필요하였다. 가마니가 일본에서 들어오기 전에는 보관 용구로 섬을 주로 사용하였다.
가마니는 일본어 가마스かます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1909년에 당시 조선통감부가 발행한 제3차 『한국시정연보韓國施政年報』에는 “1908년 일본의 개량농기구인 그네·풍구·낫·괭이 따위와 더불어 새끼틀 19대, 보통 가마니틀[普通製筵器] 495대, 마키노식 가마니틀[眞野式製筵器] 50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가마니 제작의 시초로 생각할 수 있다. 이후에 가마니틀 도입량이 부쩍 늘어나서 1916년에 7만 916대, 1917년에 10만 2,244대를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의 가마니 제작과 생산은 이 무렵부터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마니가 일본에서 도입되면서 섬을 대신해서 대중적으로 사용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조직과 중량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섬은 날 사이가 성기어서 낱알이 작거나 도정搗精한 곡물을 담기 어려워 오직 벼·보리·콩 등만 담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섬은 가마니보다 담는 양이 많아서 중량이 당연히 무거워지기에 한 사람이 들어서 옮기기 어려웠다. 그에 비하여 가마니는 한 사람이 나르기에 적당하였고 높이 쌓기에도 편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빈 가마니는 차곡차곡 쌓아 놓을 수 있었으며 반으로 접을 수 있어 사용 후 보관 역시 편리하였다.
가마니는 두 명이 가마니틀을 활용해서 짠다. 가마니틀은 틀과 바디 그리고 대침 등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새끼줄을 틀에 걸고 대침으로 들어간 볏짚을 바디로 눌러 친다. 한 사람은 바디질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대침으로 볏짚을 밀어 넣는다. 능숙한 사람은 하루에 서너 장의 가마니를 짤 수 있다. 보통 사람은 잡담과 노래 등을 즐기면서도 하루 두 장 정도의 가마니를 짤 수 있다.
가마니는 용도에 따라 비료가마니·볏가마니·쌀가마니 등으로 나뉘며, 날 수와 크기도 각각 달랐다. 비료가마니는 17날, 볏가마니는 20날, 쌀가마니는 22날로 짠다. 가마니는 날 수가 많을수록 든든하다. 크기는 비료가마니 너비가 75㎝이고 나머지 두 종류는 85㎝ 정도이다. 한 가마니는 10말로, 쌀로 치면 80㎏이다. 두 가마니가 한 섬이다. 1960년대 말에 가마니 중량은 2.75㎏, 수명은 1~2년, 거래 가격은 30원이었다.
정부는 1970년대 말까지 농가에서 가마니틀을 이용해서 짠 손가마니를 전량 매입하였다. 이는 대부분 농가가 농한기 소득 증대 부업으로 가마니 짜기에 자연스럽게 참여케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가마니 짜기는 농민들의 소득원으로 한몫을 하여서 가족 모두와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동사업으로 확대되었다.
가마니를 많이 짜는 집은 한겨울에 100여 장을 짰고 한 해 필요한 가마니는 대개 직접 짜서 사용하였다. 심지어 어떤 부부는 가마니 200장을 짜서 쌀 세 가마의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농민들은 가을걷이를 마치고 난 후에 사랑방에 모여 앉아서 공동으로 가마니를 짜는 일로 겨울을 보내곤 하였다. 다수의 마을은 가마니 짜기를 농한기 새마을 공동사업으로 확대해서 진행하였다. 당시 정부는 부녀 새마을 쌀가마니 짜기 경진대회를 열고 우수사례를 발굴해 발표도 하게 하였다.
이후에는 동력을 활용한 가마니 짜기 기계가 출현하였다. 이 기계는 하루에 20장에서 200장까지 가마니를 생산하였다. 기계가마니는 손가마니보다 질적으로 우수하였고 더 많은 양을 생산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마을은 기계를 도입해서 가마니를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계가마니보다 손가마니를 우선하여 고가에 매입하였다. 손가마니의 우선 고가 매입은 정부 차원에서 농민들의 소득을 보전해 주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마대·비닐포대·종이포대 등이 대량생산되고 농가에 보급된 후에는 더 이상 가마니를 매입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다수확이 가능한 벼품종은 가마니 제작용으로 부적합하다. 볏짚이 길어야만 가마니를 짤 수 있기 때문이다. 통일벼 등 다수확 품종은 키가 작아서 가마니를 짤 수 있는 길이로 부족하다. 이제는 주위에서 가마니를 생산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가마니의 용량을 말하는 ‘가마’란 말만 남았다.

특징 및 의의

가마니는 가을걷이 이후에 농작물의 보관과 운반을 위한 우리의 대표적 전통 농구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에서 들어왔지만, 우리 농가에 뿌리 깊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가마니는 농한기에 농가의 부업 대상으로 농민들로부터 관심을 많이 끌었던 이색적인 농구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권장과 벼농사 중심의 농업 등이 농민들로 하여금 가마니 짜기에 적극 참여하게 하였다. 가마니는 농민들의 총체적인 삶과 함께한 농구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9), 한국의 농기구(박호석·안승모, 어문각, 2001), 두피디아(doopedia.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