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

가래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김광언(金光彦)

정의

땅을 고르고 도랑을 치며 둑을 깎거나 쌓고 흙을 떠서 옮기는 기구.

내용

‘가래’라는 이름은 “논밭을 갈다”라는 표현처럼 덩어리를 부수어서 가루로 만든다는 뜻에서 왔다. 생나무를 손잡이와 몸이 하나가 되도록 깎고 넓죽한 몸 끝에 말굽꼴 쇠날을 박았다. 손잡이를 잡은 장부잡이가 날을 땅에 박으면 양쪽에 낸 구멍에 꿴 줄을 줄꾼 두 사람이 좌우에서 당겨서 흙을 옮긴다.
후기 신석기시대에서 초기 청동기시대 유적에 해당하는 함경북도 서포항 유적과 신석기시대 황해도 지탑리 유적에서 가래의 전신으로 보이는 쇠붙이가 나왔으며, 몸 끝에 쇠날을 박은 것은 중세기에 퍼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평안남도 대동의 고려시대 유적에서 날만 쇠이고 가운데는 나무로 깎은 볏을 끼운 길이 18㎝쯤 되는 종가래를 닮은 것이 나오기도 하였다.
가래가 처음 언급된 문헌은 『훈몽자회訓蒙字會』로, “杴은 가래 험으로 흔히 넉가래라고 부르며 쇠날을 박은 것은 쇠가래[鐵杴]라고 한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과농소초課農小抄』에는 “삼과 달리 끝이 모나고 너르며 자루에 손잡이가 없으며 끝에 가래날을 박았다.”라고 적혀 있다. 이처럼 몸에 날을 박은 것을 ‘날가래’라 하고 날을 달지 않은 채 주로 눈을 치우는 데 쓰는 것을 ‘넉가래’, 서해안 갯가에서 낙지 따위를 거두는 데 쓰는 작은 가래는 종가래라고 부른다.
가래는 함께 일하는 사람의 수효에 따라 달리 부른다. 첫째는 앞에서처럼 세 사람이 쓰는 것은 ‘세손목한카래’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의 삼인초三人鍫와 『천일록千一錄』의 독초獨鍬가 이것이다. 둘째는 장부잡이 하나와 줄꾼 여섯이 붙는 것은 일곱목한카래 또는 칠목카래라고 하고, 가래 둘을 하나로 묶어서 장부꾼 둘에 줄꾼 여덟이 쓰는 것은 쌍가래 또는 열목카래라고 한다. 『농가월령農家月令』의 병대삽幷大揷은 쌍가래를 가리킨다. 논밭에서는 주로 세손목한카래를 쓰며 나머지 둘은 공사장에서 사용한다. 가래로 떠낸 흙덩이는 ‘가랫밥’, 가래를 세워서 흙을 깎아내는 일은 ‘칼가래질’이라 부르며 논둑이나 밭둑 깎는 일은 ‘후릿가래질’이라고 한다.
가래질은 매우 고되어서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에서도 “농부의 힘 드는 일 중 가래질이 첫째”라고 하였다. 이때는 노래를 불러서 동작을 맞추고 고달픔도 덜어낸다.
제주도에서는 거친 땅을 일구거나 쟁기와 따비 따위로 갈아엎은 흙을 떠올려 두둑과 고랑을 짓는 것을 ‘낭갈래죽’, 집터를 다지려고 흙을 떠 옮기는 세손목한카래를 ‘줄갈래죽’이라고 부른다. 이는 ‘줄을 맨 가래’라는 뜻이다.
가래질은 손발이 맞아야 한다. 자루를 앞으로 내밀거나 끌어당길 때 줄이 느슨해지면 힘을 쓰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를 위해 가래질에 앞서 빈 가래로 손을 맞추어 보는데 이를 ‘헹가래질’이라고 한다. 여럿이 한 사람의 네 활개를 갈라 쥐고 좌우로 흔드는 행위도 이같이 부른다. 동작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남자 세 사람이 하루 600여 평의 진흙밭을 고를 수 있다. 수명은 4~5년에 무게는 2.5㎏쯤 나간다.

특징 및 의의

가래는 우리 발명품이다. 모습이나 짜임새로 미루어 우리 가래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보기 어렵듯이 일본 가래도 우리 것과는 거리가 있다. 중국 가래는 오히려 삽에 가까워서 논밭을 갈기 어렵고, 일본의 것은 줄을 굽은 나무로 대신한 까닭에 쓰기 불편할 뿐만 아니라 운반이나 보관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세 나라 가래 가운데 우리 것이 가장 뛰어나다. 『과농소초』에도 “쇠가래는 중국의 『농기보農器譜』에도 없는 것으로, 다른 농기구보다 편리한 필수적인 기구이다.”라는 기사가 있다. 『농기보』는 중국의 서광계徐光啟(1562~1633)가 낸 『농정전서農政全書』를 가리킨다. 우리 가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가사키현長崎県에서 쓰는 고려가래[高麗鍬]가 그것이다. 다만 자루를 날에 직각으로 박고, 한 사람이 쓰는 점 따위로 보면 가래의 변종인 셈이다. 한편 충청도와 호남 일부 지역에서 이와 똑같은 것을 ‘화가래’라고 부르지만, 본디 우리 것이었는지 일제강점기에 저쪽에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가래는 신령스러운 기물이다. 하늘에서 이승으로 쫓겨 온 성주가 가래로 집터 닦는 대목을 담은 무당노래인 〈황제풀이〉에 “은가래에는 은줄 매고 / 금가래에는 금줄 매고 / 쇠가래에는 삼[熟麻]줄 매고 / 슬금슬금 당길 적에 동편 지경을 닦으면 / 청사자가 놀랄세라.”라는 구절이 있다. ‘은가래’나 ‘금가래’는 신령스럽다는 뜻이며, 우리나라에 없는 ‘사자’를 들먹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동편지경’이나 ‘청사자’는 집터의 동쪽, 곧 양기陽氣가 솟는 방향이고 ‘서편지경이’나 ‘백사자’는 서쪽, 곧 음기가 서린 방향이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조상신위를 모신 사당과 남자들의 사랑채를 동쪽에, 여성 거주공간인 안채를 서쪽에 세웠다. 또 경기도 이천에서는 봉분封墳을 지을 때 쓴 가래는 조상의 얼이 따라온다고 꺼린 나머지 되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쇠붙이가 귀하였던 옛적에는 줄만 불에 태우고 날은 가져왔다.
가래로 풍년의 즐거움도 나타낸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마을마다 가래와 호미질 마치자(千邨錢鎛告成功) / 온 세상 가득 누른 구름이누나(漠漠黃雲四望同) / 아낙과 어린이도 임금의 덕 알고(婦孺亦知王化盛) / 풍년가 부르며 서로 즐거워하네(巷謠爭看樂年豐).”라는 시가 있다(〈시골 별장의 풍경을 읊음[贈人郊墅四景]〉). ‘누른 구름’은 가을을 맞아 누렇게 여문 곡식을 가리킨다.

참고문헌

일본에 건너간 우리 농기구(김광언, 한국민족학연구2, 단국대학교 민족학연구소, 1994),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9), 明治三十年調べ長崎縣佐遐縣における農具圖錄(月川雅夫·立平進, 長崎出版文化協會, 1984), 朝鮮巫歌の硏究(赤松智城·秋葉隆, 大阪屋號書店, 1937).

가래

가래
사전위치

한국생업기술사전 > 농업

집필자 김광언(金光彦)

정의

땅을 고르고 도랑을 치며 둑을 깎거나 쌓고 흙을 떠서 옮기는 기구.

내용

‘가래’라는 이름은 “논밭을 갈다”라는 표현처럼 덩어리를 부수어서 가루로 만든다는 뜻에서 왔다. 생나무를 손잡이와 몸이 하나가 되도록 깎고 넓죽한 몸 끝에 말굽꼴 쇠날을 박았다. 손잡이를 잡은 장부잡이가 날을 땅에 박으면 양쪽에 낸 구멍에 꿴 줄을 줄꾼 두 사람이 좌우에서 당겨서 흙을 옮긴다.
후기 신석기시대에서 초기 청동기시대 유적에 해당하는 함경북도 서포항 유적과 신석기시대 황해도 지탑리 유적에서 가래의 전신으로 보이는 쇠붙이가 나왔으며, 몸 끝에 쇠날을 박은 것은 중세기에 퍼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평안남도 대동의 고려시대 유적에서 날만 쇠이고 가운데는 나무로 깎은 볏을 끼운 길이 18㎝쯤 되는 종가래를 닮은 것이 나오기도 하였다.
가래가 처음 언급된 문헌은 『훈몽자회訓蒙字會』로, “杴은 가래 험으로 흔히 넉가래라고 부르며 쇠날을 박은 것은 쇠가래[鐵杴]라고 한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과농소초課農小抄』에는 “삼과 달리 끝이 모나고 너르며 자루에 손잡이가 없으며 끝에 가래날을 박았다.”라고 적혀 있다. 이처럼 몸에 날을 박은 것을 ‘날가래’라 하고 날을 달지 않은 채 주로 눈을 치우는 데 쓰는 것을 ‘넉가래’, 서해안 갯가에서 낙지 따위를 거두는 데 쓰는 작은 가래는 종가래라고 부른다.
가래는 함께 일하는 사람의 수효에 따라 달리 부른다. 첫째는 앞에서처럼 세 사람이 쓰는 것은 ‘세손목한카래’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의 삼인초三人鍫와 『천일록千一錄』의 독초獨鍬가 이것이다. 둘째는 장부잡이 하나와 줄꾼 여섯이 붙는 것은 일곱목한카래 또는 칠목카래라고 하고, 가래 둘을 하나로 묶어서 장부꾼 둘에 줄꾼 여덟이 쓰는 것은 쌍가래 또는 열목카래라고 한다. 『농가월령農家月令』의 병대삽幷大揷은 쌍가래를 가리킨다. 논밭에서는 주로 세손목한카래를 쓰며 나머지 둘은 공사장에서 사용한다. 가래로 떠낸 흙덩이는 ‘가랫밥’, 가래를 세워서 흙을 깎아내는 일은 ‘칼가래질’이라 부르며 논둑이나 밭둑 깎는 일은 ‘후릿가래질’이라고 한다.
가래질은 매우 고되어서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에서도 “농부의 힘 드는 일 중 가래질이 첫째”라고 하였다. 이때는 노래를 불러서 동작을 맞추고 고달픔도 덜어낸다.
제주도에서는 거친 땅을 일구거나 쟁기와 따비 따위로 갈아엎은 흙을 떠올려 두둑과 고랑을 짓는 것을 ‘낭갈래죽’, 집터를 다지려고 흙을 떠 옮기는 세손목한카래를 ‘줄갈래죽’이라고 부른다. 이는 ‘줄을 맨 가래’라는 뜻이다.
가래질은 손발이 맞아야 한다. 자루를 앞으로 내밀거나 끌어당길 때 줄이 느슨해지면 힘을 쓰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를 위해 가래질에 앞서 빈 가래로 손을 맞추어 보는데 이를 ‘헹가래질’이라고 한다. 여럿이 한 사람의 네 활개를 갈라 쥐고 좌우로 흔드는 행위도 이같이 부른다. 동작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남자 세 사람이 하루 600여 평의 진흙밭을 고를 수 있다. 수명은 4~5년에 무게는 2.5㎏쯤 나간다.

특징 및 의의

가래는 우리 발명품이다. 모습이나 짜임새로 미루어 우리 가래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보기 어렵듯이 일본 가래도 우리 것과는 거리가 있다. 중국 가래는 오히려 삽에 가까워서 논밭을 갈기 어렵고, 일본의 것은 줄을 굽은 나무로 대신한 까닭에 쓰기 불편할 뿐만 아니라 운반이나 보관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세 나라 가래 가운데 우리 것이 가장 뛰어나다. 『과농소초』에도 “쇠가래는 중국의 『농기보農器譜』에도 없는 것으로, 다른 농기구보다 편리한 필수적인 기구이다.”라는 기사가 있다. 『농기보』는 중국의 서광계徐光啟(1562~1633)가 낸 『농정전서農政全書』를 가리킨다. 우리 가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가사키현長崎県에서 쓰는 고려가래[高麗鍬]가 그것이다. 다만 자루를 날에 직각으로 박고, 한 사람이 쓰는 점 따위로 보면 가래의 변종인 셈이다. 한편 충청도와 호남 일부 지역에서 이와 똑같은 것을 ‘화가래’라고 부르지만, 본디 우리 것이었는지 일제강점기에 저쪽에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가래는 신령스러운 기물이다. 하늘에서 이승으로 쫓겨 온 성주가 가래로 집터 닦는 대목을 담은 무당노래인 〈황제풀이〉에 “은가래에는 은줄 매고 / 금가래에는 금줄 매고 / 쇠가래에는 삼[熟麻]줄 매고 / 슬금슬금 당길 적에 동편 지경을 닦으면 / 청사자가 놀랄세라.”라는 구절이 있다. ‘은가래’나 ‘금가래’는 신령스럽다는 뜻이며, 우리나라에 없는 ‘사자’를 들먹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동편지경’이나 ‘청사자’는 집터의 동쪽, 곧 양기陽氣가 솟는 방향이고 ‘서편지경이’나 ‘백사자’는 서쪽, 곧 음기가 서린 방향이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조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과 남자들의 사랑채를 동쪽에, 여성 거주공간인 안채를 서쪽에 세웠다. 또 경기도 이천에서는 봉분封墳을 지을 때 쓴 가래는 조상의 얼이 따라온다고 꺼린 나머지 되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쇠붙이가 귀하였던 옛적에는 줄만 불에 태우고 날은 가져왔다.
가래로 풍년의 즐거움도 나타낸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마을마다 가래와 호미질 마치자(千邨錢鎛告成功) / 온 세상 가득 누른 구름이누나(漠漠黃雲四望同) / 아낙과 어린이도 임금의 덕 알고(婦孺亦知王化盛) / 풍년가 부르며 서로 즐거워하네(巷謠爭看樂年豐).”라는 시가 있다(〈시골 별장의 풍경을 읊음[贈人郊墅四景]〉). ‘누른 구름’은 가을을 맞아 누렇게 여문 곡식을 가리킨다.

참고문헌

일본에 건너간 우리 농기구(김광언, 한국민족학연구2, 단국대학교 민족학연구소, 1994),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9), 明治三十年調べ長崎縣佐遐縣における農具圖錄(月川雅夫·立平進, 長崎出版文化協會, 1984), 朝鮮巫歌の硏究(赤松智城·秋葉隆, 大阪屋號書店,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