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옥문기(家屋文記)

가옥문기

한자명

家屋文記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김성갑(金性甲)

정의

전통시대에 주택을 거래하면서 일방이 상대방에게 작성해 준 계약문서.

개관

가옥문기家屋文記란 ‘주택거래 계약문서’를 말한다. 전통시대의 주택거래에는 집을 사고파는 ‘매매賣買’, 주택과 주택, 주택과 토지 등을 서로 교환하는 ‘상환相換’, 주택을 일정 기간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리는 ‘환퇴還退’ 등이 있었다. 이러한 주택거래 행위가 있으면 관행으로 가옥문기를 작성하여 거래 당사자 간에 주고 받았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는 선진先秦시기 및 한대漢代 때부터 주택거래 기록이 『사기史記』, 『후한서後漢書』 등에 전해진다. 주택거래 문서에 관해서는 돈황문서敦煌文書나 금석문金石文에서부터 당송唐宋시기 전후 및 원元·명明·청대淸代에도 주택거래 문서가 작성되어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교부하였으며, 해당 거래에 대해 관청의 공증절차를 거치는 문서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택거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5 열전5에 나오는 고구려 평원왕(559~590) 때의 평강공주 및 온달장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쫓겨난 평강공주가 궁궐을 나오면서 가지고 온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아 집과 땅을 사들이고 노비와 소·말, 집기 등을 구비하여 온달과 그의 노모를 모시며 살게 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주택거래 기록이 전존하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다량의 가옥문기가 남아 있어 당시의 주택거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주택거래 후 공증서인 ‘입안立案’을 발급하도록 규정하였고, 대한제국 이후로는 가옥문기나 주택거래계약서가 작성되는 동시에 ‘가사관계家舍官契’라는 양식화된 공증서가 발급되기도 하였다.

내용

가옥문기는 전통시대에 집의 소유자가 집을 매매, 상환, 환퇴하면서 거래의 일방이 상대방에게 작성해 주던 주택거래 관련 계약문서이다. 주로 매매계약 행위에서 상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주택은 주로 ‘가사家舍’, 계약문서를 ‘문기文記’ 혹은 ‘명문明文’이라고 각각 일컬었기 때문에 가옥문기를 ‘가사명문家舍明文’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주택거래 등 다양한 거래생활은 단순히 구두로만 계약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명문, 문기 등의 계약문서를 작성하고 관련 기록들에 근거하여 이뤄졌다. 조선시대 매매에서는 지금과 달리 상호 간에 계약문서를 한 장만 작성하였고, 작성한 문서와 기존 거래 목적물과 관련된 권리문서를 거래 상대방인 매수인에게 모두 넘겨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가옥문기에는 대체로 거래 연월일, 집을 사는 매수인의 정보, 매도인이 집을 소유하게 된 연유와 이용 형태, 집을 파는 이유, 거래 대상인 집의 정보(소재지, 형태, 크기 및 면적 등), 지불수단 및 매도가격, 문기를 쓰는 이유, 거래 분쟁에 대비한 문구, 매도인 및 증인, 대서인(필집) 등의 정보, 특기사항 등을 순서대로 기재하였다. 주요한 기재사항에 대해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주택 소유 및 거래의 사유: 매도자가 거래 대상인 자신의 집을 소유하게 된 연유와 그 집의 이용 형태에 대한 기재 유형으로는 ‘여러 해 살고 있는(累年居生)’, ‘직접 매입하여 살고 있는(自己買得居生)’,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살고 있는(傳來居生)’, ‘(부모 등으로부터) 자식의 몫으로 받아 살고 있는(衿得生居)’, ‘직접 지어 살고 있는(自己構居)’ 등의 표현이 있고, 간단히 ‘살고 있는’이란 표현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집과 텃밭, 땔나무터 등을 일괄로 매도하는 경우에는 그 이용 형태를 ‘몫으로 받아 살면서, (밭을) 갈아먹고 (나무를) 잘라다 쓰면서(衿得生居 耕食刈取)’ 등으로 상세히 표현하는 사례도 간혹 발견되고 있다. 집을 파는 이유를 기재한 경우는 매우 다양하지만 주로 ‘이사하기 위하여(移居次·移徙次·移去次·移居他鄕次)’ 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간혹 ‘빚을 갚기 위하여(報債)’나 ‘생계生計’ 또는 ‘긴히 쓸 곳이 있어서(要用所致)’ 등의 이유라고 간단히 기재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2. 거래 대상 주택의 정보: 조선시대의 집은 기와집인 ‘와가瓦家’와 초가집인 ‘초가草家’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등에 따르면 실제 대다수의 하층민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한 주거 형태로는 흙으로 지은 토실土室, 토방土房, 토막土幕 등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막 등에 대한 거래나 매매의 고문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현전하는 가옥문기에서는 와가와 초가가 주된 거래 대상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와 함께 가옥문기에는 와가와 초가의 내부를 거래 목적물로 삼아 기재할 때 구조나 기능으로 세분하기도 하였다. 정침正寢, 행랑行廊, 익랑翼廊, 용실舂室, 내사內舍 등이 그것이다. 한편 주거래 대상인 주택에 포함시켜서 집 주변에서 기르고 있는 감나무인 시목柿木이나 뽕나무인 상목桑木 등의 수목樹木, 집을 지을 수 있는 집터인 공대空垈, 집 안팎의 텃밭 또는 남새밭이라 할 수 있는 대전垈田을 함께 기재하여 거래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집에서 사용하는 주거용품 절구인 침용砧舂 혹은 석용石舂 등 집기까지 주택과 함께 거래하기도 하였다.
    거래 대상인 주택에 대한 정보를 기재할 때 우선 주택 소재지를 표시하였다. 즉 군현郡縣 단위의 지역명과 면面 혹은 동리洞里 명칭을 기재하였다. 그다음 집의 종류가 초가인지 와가인지와 그 세부 기능이 정침인지 행랑인지 등을 구분하고 면적인 칸수를 기재하였다.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인 공대인 경우도 대개 칸수를 따로 적었다. 주택의 면적 혹은 범위를 표시하는 단위인 ‘칸[間]’은 조선시대 거의 전 시기에 사용되었고, 대한제국기 이후가 되면 일본의 영향으로 ‘평坪’이 주택 면적 단위로 등장한다.
    한편 공대와 달리 ‘대전’은 주로 집에 부속되어 있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지를 통칭하여 가옥문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가대전家垈田’ 혹은 ‘기지基地’ 등의 용어로도 사용되고, 그 면적은 전답과 같은 방식인 마지기[斗落只]나 결부수結負數로 표현되고 있다.
    간혹 거래하는 집의 정보에 대해 주소 없이 ‘초가 몇 칸’, ‘와가 몇 칸’으로만 간략하게 기재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호 간에 합의가 되어 있거나 주변 사람들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주소나 부속건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적지 않은 연유로 보인다.

  3. 지불 수단: 집에 대한 매도가격은 당사자 간에 임의로 정하는 것이 관례였고, 대금을 지불하는 수단은 시대별로 변화가 있었다. 저화楮貨, 은자銀子, 면포綿布, 우마牛馬 등의 여러가지 화폐가 있었으나 포화布貨와 전문錢文 등이 주로 혼용되다가 나중에는 흔히 ‘엽전’이라고 알려진 금속화폐인 전문으로 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1746년에 시행된 『속대전續大典』에서는 국폐로 동전을 사용한다고 법제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전인 18세기 초부터 사회에서 상평통보 등 동전이 지불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현전하는 가옥문기에는 지불 수단이 거의 대부분 ‘전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4. 추탈담보문언(거래 분쟁 및 해결 과정에 대한 언급): 가옥문기 본문의 말미에는 “차후에 본 계약과 관련하여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신고하여 처리할 일(後次雜談 則持此文記 告官卞正事)”이라는 취지가 상투성 문구로 기재되었다. 해당 가옥문기의 증빙 문서로서의 지위를 표현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 문서로 증빙할 일(此文記 憑考事)” 등으로 간략화되었다.

  5. 매도인, 필집, 증인 등 정보: 마지막으로 매도인과 증인, 대서인 등의 정보가 기재된다. 초가 혹은 기와집 등을 매도할 경우 매도인에 대한 지칭은 ‘가주家主’, ‘초가주草家主’, ‘가사주家舍主’ 등으로 한정해서 썼다. 주택 이외에도 텃밭, 과수 등의 다양한 부속 재산을 함께 매도할 경우 ‘재주財主’라는 통칭으로 매도인을 지칭하여 기재하기도 하였다.

  6. 서명 관련: 가옥문기의 마지막에 매도인, 증인, 대서인 등이 자신의 이름 아래에 적는 서명 방식으로 수촌手寸과 착명着名 등이 있었다. 오늘날의 서명signature과 같은 의미와 효력이 있다. 신분과 지위 고하에 따라 또는 문맹文盲 여부에 따라 착명을 하거나 가운데 손가락 마디의 본을 뜬 수촌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별에 따라 남자는 좌촌左寸, 여자는 우촌右寸을 하기도 하였다. 수촌 이외에도 손바닥의 본을 떠서 그 안에 ‘우장右掌’이나 ‘좌장左掌’이라고 써 넣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른손, 왼손 구분이 반드시 남녀 구별을 따른 것은 아니었고 약간의 혼용이 있기도 하였다. 또 부모나 조부모의 상중喪中인 사람은 ‘상불착喪不着’이라고 표기하고 서명을 하지 않았다.

특징 및 의의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매매한조買賣限條에 따르면 토지·가사·노비의 경우 매매 계약을 한지 15일이 지나면 해제·취소·변경할 수 없으며, 매매 계약이 성립된 지 100일 내에 관청에 신고하여 지금의 공증서인 입안立案을 발급받도록 규정하였다. 매수인이 입안을 신청하는 청원서인 소지所志를 적어 주택을 거래한 계약서인 가옥문기를 첨부하여 관청에 제출하면 관청에서는 이를 검토한 후 입안 발급 결정에 대한 처분 내용인 제사題辭를 소지의 좌측 하단 부분에 써서 돌려주게 된다. 이에 근거하여 관청으로 소환된 매도인, 증인, 대서인 등으로부터 매매 사실의 여부 및 합법 정당함을 확인하는 진술서인 초사招辭를 징구 받은 후에 입안을 최종 발급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행정력의 형해화, 공증수수료의 부담 등으로 인해 주택거래 시 당사자 간 계약문서인 가옥문기만으로 거래가 완결되어 그다음 입안 발급 절차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가옥문기에 집을 소유하게 된 연유와 집에 대한 매도인 자신만의 이용 형태를 굳이 가옥문기에 기록한 이유는 거래 대상인 집의 소유 배경 및 점유 상태는 물론 매도라는 처분행위 등의 토대가 합법정당함을 공지함으로써 이중매매二重賣買 및 도매盜賣 등 불법 행위를 방지하여 주택 거래의 안전을 도모한 국가·사회 요구와 관행에 근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가옥문기의 말미에 “잡담이나 분쟁이 발생할 시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신고하여 바로잡을 일”이라는 상투성 문구가 기재되었다는 사실은 가옥문기가 단순히 주택거래 기록을 남기는 용도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차후 분쟁 시 재판에서 거증 책임의 주요 수단으로 자격을 갖춘 증거 능력 있는 증빙문서 역할도 동시에 담당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현대사회에서 매매계약 체결 후에 발생할 수 있는 매도물賣渡物의 하자담보책임瑕疵擔保責任 등은 물론 여타 분쟁의 경우에 그 해결을 관官의 사법처분에 따라 진행하도록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高麗史, 史記,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華城城役儀軌, 後漢書, 우리나라 토지제도 변천사(한국토지주택공사 토지주택연구원, 2011), 조선시대 명문에 관한 문서학적 연구(김성갑,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한국법제사고(박병호, 법문사, 1974), 唐宋法律文書の硏究(仁井田陞, 東京大學出版會, 193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가옥문기

가옥문기
한자명

家屋文記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김성갑(金性甲)

정의

전통시대에 주택을 거래하면서 일방이 상대방에게 작성해 준 계약문서.

개관

가옥문기家屋文記란 ‘주택거래 계약문서’를 말한다. 전통시대의 주택거래에는 집을 사고파는 ‘매매賣買’, 주택과 주택, 주택과 토지 등을 서로 교환하는 ‘상환相換’, 주택을 일정 기간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리는 ‘환퇴還退’ 등이 있었다. 이러한 주택거래 행위가 있으면 관행으로 가옥문기를 작성하여 거래 당사자 간에 주고 받았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는 선진先秦시기 및 한대漢代 때부터 주택거래 기록이 『사기史記』, 『후한서後漢書』 등에 전해진다. 주택거래 문서에 관해서는 돈황문서敦煌文書나 금석문金石文에서부터 당송唐宋시기 전후 및 원元·명明·청대淸代에도 주택거래 문서가 작성되어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교부하였으며, 해당 거래에 대해 관청의 공증절차를 거치는 문서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택거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5 열전5에 나오는 고구려 평원왕(559~590) 때의 평강공주 및 온달장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쫓겨난 평강공주가 궁궐을 나오면서 가지고 온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아 집과 땅을 사들이고 노비와 소·말, 집기 등을 구비하여 온달과 그의 노모를 모시며 살게 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주택거래 기록이 전존하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다량의 가옥문기가 남아 있어 당시의 주택거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주택거래 후 공증서인 ‘입안立案’을 발급하도록 규정하였고, 대한제국 이후로는 가옥문기나 주택거래계약서가 작성되는 동시에 ‘가사관계家舍官契’라는 양식화된 공증서가 발급되기도 하였다.

내용

가옥문기는 전통시대에 집의 소유자가 집을 매매, 상환, 환퇴하면서 거래의 일방이 상대방에게 작성해 주던 주택거래 관련 계약문서이다. 주로 매매계약 행위에서 상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주택은 주로 ‘가사家舍’, 계약문서를 ‘문기文記’ 혹은 ‘명문明文’이라고 각각 일컬었기 때문에 가옥문기를 ‘가사명문家舍明文’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주택거래 등 다양한 거래생활은 단순히 구두로만 계약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명문, 문기 등의 계약문서를 작성하고 관련 기록들에 근거하여 이뤄졌다. 조선시대 매매에서는 지금과 달리 상호 간에 계약문서를 한 장만 작성하였고, 작성한 문서와 기존 거래 목적물과 관련된 권리문서를 거래 상대방인 매수인에게 모두 넘겨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가옥문기에는 대체로 거래 연월일, 집을 사는 매수인의 정보, 매도인이 집을 소유하게 된 연유와 이용 형태, 집을 파는 이유, 거래 대상인 집의 정보(소재지, 형태, 크기 및 면적 등), 지불수단 및 매도가격, 문기를 쓰는 이유, 거래 분쟁에 대비한 문구, 매도인 및 증인, 대서인(필집) 등의 정보, 특기사항 등을 순서대로 기재하였다. 주요한 기재사항에 대해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주택 소유 및 거래의 사유: 매도자가 거래 대상인 자신의 집을 소유하게 된 연유와 그 집의 이용 형태에 대한 기재 유형으로는 ‘여러 해 살고 있는(累年居生)’, ‘직접 매입하여 살고 있는(自己買得居生)’,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살고 있는(傳來居生)’, ‘(부모 등으로부터) 자식의 몫으로 받아 살고 있는(衿得生居)’, ‘직접 지어 살고 있는(自己構居)’ 등의 표현이 있고, 간단히 ‘살고 있는’이란 표현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집과 텃밭, 땔나무터 등을 일괄로 매도하는 경우에는 그 이용 형태를 ‘몫으로 받아 살면서, (밭을) 갈아먹고 (나무를) 잘라다 쓰면서(衿得生居 耕食刈取)’ 등으로 상세히 표현하는 사례도 간혹 발견되고 있다. 집을 파는 이유를 기재한 경우는 매우 다양하지만 주로 ‘이사하기 위하여(移居次·移徙次·移去次·移居他鄕次)’ 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간혹 ‘빚을 갚기 위하여(報債)’나 ‘생계生計’ 또는 ‘긴히 쓸 곳이 있어서(要用所致)’ 등의 이유라고 간단히 기재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거래 대상 주택의 정보: 조선시대의 집은 기와집인 ‘와가瓦家’와 초가집인 ‘초가草家’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등에 따르면 실제 대다수의 하층민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한 주거 형태로는 흙으로 지은 토실土室, 토방土房, 토막土幕 등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막 등에 대한 거래나 매매의 고문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현전하는 가옥문기에서는 와가와 초가가 주된 거래 대상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와 함께 가옥문기에는 와가와 초가의 내부를 거래 목적물로 삼아 기재할 때 구조나 기능으로 세분하기도 하였다. 정침正寢, 행랑行廊, 익랑翼廊, 용실舂室, 내사內舍 등이 그것이다. 한편 주거래 대상인 주택에 포함시켜서 집 주변에서 기르고 있는 감나무인 시목柿木이나 뽕나무인 상목桑木 등의 수목樹木, 집을 지을 수 있는 집터인 공대空垈, 집 안팎의 텃밭 또는 남새밭이라 할 수 있는 대전垈田을 함께 기재하여 거래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집에서 사용하는 주거용품 절구인 침용砧舂 혹은 석용石舂 등 집기까지 주택과 함께 거래하기도 하였다.
거래 대상인 주택에 대한 정보를 기재할 때 우선 주택 소재지를 표시하였다. 즉 군현郡縣 단위의 지역명과 면面 혹은 동리洞里 명칭을 기재하였다. 그다음 집의 종류가 초가인지 와가인지와 그 세부 기능이 정침인지 행랑인지 등을 구분하고 면적인 칸수를 기재하였다.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인 공대인 경우도 대개 칸수를 따로 적었다. 주택의 면적 혹은 범위를 표시하는 단위인 ‘칸[間]’은 조선시대 거의 전 시기에 사용되었고, 대한제국기 이후가 되면 일본의 영향으로 ‘평坪’이 주택 면적 단위로 등장한다.
한편 공대와 달리 ‘대전’은 주로 집에 부속되어 있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지를 통칭하여 가옥문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가대전家垈田’ 혹은 ‘기지基地’ 등의 용어로도 사용되고, 그 면적은 전답과 같은 방식인 마지기[斗落只]나 결부수結負數로 표현되고 있다.
간혹 거래하는 집의 정보에 대해 주소 없이 ‘초가 몇 칸’, ‘와가 몇 칸’으로만 간략하게 기재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호 간에 합의가 되어 있거나 주변 사람들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주소나 부속건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적지 않은 연유로 보인다.

지불 수단: 집에 대한 매도가격은 당사자 간에 임의로 정하는 것이 관례였고, 대금을 지불하는 수단은 시대별로 변화가 있었다. 저화楮貨, 은자銀子, 면포綿布, 우마牛馬 등의 여러가지 화폐가 있었으나 포화布貨와 전문錢文 등이 주로 혼용되다가 나중에는 흔히 ‘엽전’이라고 알려진 금속화폐인 전문으로 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1746년에 시행된 『속대전續大典』에서는 국폐로 동전을 사용한다고 법제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전인 18세기 초부터 사회에서 상평통보 등 동전이 지불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현전하는 가옥문기에는 지불 수단이 거의 대부분 ‘전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추탈담보문언(거래 분쟁 및 해결 과정에 대한 언급): 가옥문기 본문의 말미에는 “차후에 본 계약과 관련하여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신고하여 처리할 일(後次雜談 則持此文記 告官卞正事)”이라는 취지가 상투성 문구로 기재되었다. 해당 가옥문기의 증빙 문서로서의 지위를 표현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 문서로 증빙할 일(此文記 憑考事)” 등으로 간략화되었다.

매도인, 필집, 증인 등 정보: 마지막으로 매도인과 증인, 대서인 등의 정보가 기재된다. 초가 혹은 기와집 등을 매도할 경우 매도인에 대한 지칭은 ‘가주家主’, ‘초가주草家主’, ‘가사주家舍主’ 등으로 한정해서 썼다. 주택 이외에도 텃밭, 과수 등의 다양한 부속 재산을 함께 매도할 경우 ‘재주財主’라는 통칭으로 매도인을 지칭하여 기재하기도 하였다.

서명 관련: 가옥문기의 마지막에 매도인, 증인, 대서인 등이 자신의 이름 아래에 적는 서명 방식으로 수촌手寸과 착명着名 등이 있었다. 오늘날의 서명signature과 같은 의미와 효력이 있다. 신분과 지위 고하에 따라 또는 문맹文盲 여부에 따라 착명을 하거나 가운데 손가락 마디의 본을 뜬 수촌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별에 따라 남자는 좌촌左寸, 여자는 우촌右寸을 하기도 하였다. 수촌 이외에도 손바닥의 본을 떠서 그 안에 ‘우장右掌’이나 ‘좌장左掌’이라고 써 넣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른손, 왼손 구분이 반드시 남녀 구별을 따른 것은 아니었고 약간의 혼용이 있기도 하였다. 또 부모나 조부모의 상중喪中인 사람은 ‘상불착喪不着’이라고 표기하고 서명을 하지 않았다.

특징 및 의의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매매한조買賣限條에 따르면 토지·가사·노비의 경우 매매 계약을 한지 15일이 지나면 해제·취소·변경할 수 없으며, 매매 계약이 성립된 지 100일 내에 관청에 신고하여 지금의 공증서인 입안立案을 발급받도록 규정하였다. 매수인이 입안을 신청하는 청원서인 소지所志를 적어 주택을 거래한 계약서인 가옥문기를 첨부하여 관청에 제출하면 관청에서는 이를 검토한 후 입안 발급 결정에 대한 처분 내용인 제사題辭를 소지의 좌측 하단 부분에 써서 돌려주게 된다. 이에 근거하여 관청으로 소환된 매도인, 증인, 대서인 등으로부터 매매 사실의 여부 및 합법 정당함을 확인하는 진술서인 초사招辭를 징구 받은 후에 입안을 최종 발급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행정력의 형해화, 공증수수료의 부담 등으로 인해 주택거래 시 당사자 간 계약문서인 가옥문기만으로 거래가 완결되어 그다음 입안 발급 절차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가옥문기에 집을 소유하게 된 연유와 집에 대한 매도인 자신만의 이용 형태를 굳이 가옥문기에 기록한 이유는 거래 대상인 집의 소유 배경 및 점유 상태는 물론 매도라는 처분행위 등의 토대가 합법정당함을 공지함으로써 이중매매二重賣買 및 도매盜賣 등 불법 행위를 방지하여 주택 거래의 안전을 도모한 국가·사회 요구와 관행에 근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가옥문기의 말미에 “잡담이나 분쟁이 발생할 시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신고하여 바로잡을 일”이라는 상투성 문구가 기재되었다는 사실은 가옥문기가 단순히 주택거래 기록을 남기는 용도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차후 분쟁 시 재판에서 거증 책임의 주요 수단으로 자격을 갖춘 증거 능력 있는 증빙문서 역할도 동시에 담당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현대사회에서 매매계약 체결 후에 발생할 수 있는 매도물賣渡物의 하자담보책임瑕疵擔保責任 등은 물론 여타 분쟁의 경우에 그 해결을 관官의 사법처분에 따라 진행하도록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高麗史, 史記,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華城城役儀軌, 後漢書, 우리나라 토지제도 변천사(한국토지주택공사 토지주택연구원, 2011), 조선시대 명문에 관한 문서학적 연구(김성갑,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한국법제사고(박병호, 법문사, 1974), 唐宋法律文書の硏究(仁井田陞, 東京大學出版會, 193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