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제한(家舍制限)

가사제한

한자명

家舍制限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이호열(李鎬洌)

정의

고대 신라와 조선시대에 신분별로 대지와 가옥의 규모 및 사용 재료·크기·치장 등을 제한한 명문 규정.

내용

가사제한家舍制限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집터의 면적과 가옥의 전체 규모 및 치장 등을 제한하는 제도를 이른다. 조선왕조에서는 초기부터 신분에 따라 집터의 면적을 규제한 가대(집터)제한家垈制限과 주택 규모·장식 등을 엄격히 제한하는 가사제한이 시행되었다. 신라의 옥사조가 골품제에 의하여 차등을 두었다면 조선시대에는 관직의 품계에 따라 집터의 면적, 주택의 규모와 장식 등을 제한하였다. 관직 품계 기준으로 주택 규모를 제한한 가사규제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문무 양반 사회의 상하 신분 질서와 유가儒家 사상의 명분론名分論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태조 대에 신분별로 집터 면적을 제한하는 가대제한을 먼저 제정하여 시행하다가 세종 대에 이르러 가옥의 총 규모와 장식을 제한하는 가사제한을 처음 제정하였다.

1395년(태조 4)에 제정된 가대제한은 국가가 나누어 주는 집터 면적을 신분별로 정한 것으로, 봉건 신분 질서를 준수함과 동시에 도성 내 무분별한 가옥 건축을 규제하여 한정된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성을 옮기기 전부터 개경의 토지를 신분과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차등을 두고 나누어 줄 목적으로 가대제한이 처음 시행되었다. 가대제한은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인 1395년 1월 장지화張至和 등의 상소로 비롯되었다. 장지화 등은 개경에서 시행하고 있던 가대제한을 새 도성(한양)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집터 부족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며 가대 면적을 대폭 축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태조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1품의 집터 면적을 60부負에서 35부로 줄이는 등 관리들에게 나누어 줄 가대의 면적을 대폭 축소하였다. 즉 정1품에게 35부에 해당하는 집터를 나누어 주고, 이하 한 품에 5부씩 줄여 정6품에게 10부를 나누어 주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정6품 이하는 한 품에 2부씩 줄여 정7품 8부, 정8품 6부, 정9품 4부로 축소 조정하였다. 서인庶人의 집터 면적은 이전과 같은 2부(80여 평)로 정하였다.

1395년에 태조가 장지화 등의 주장을 수용하여 품계별 집터 면적을 대폭 축소 조정하였으나 그 후 한양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택지가 부족해졌다. 이에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면서 한양의 택지 부족 현상을 감안하여 품계별 가대 면적을 다시 대폭 축소하고, 이를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의 「호전戶典」 급조가지조給造家地條에 규정하였다. 『경국대전』에 보이는 품계별 가대 제한은 대군·공주 30부, 왕자군·옹주 25부, 1·2품 15부, 3·4품 10부, 5·6품 8부, 7품 이하 4부, 서인 2부이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대군·공주의 집터는 1,179평이나 되어 대단히 큰 주택을 지을 수 있었고, 최하층인 서인도 오늘날의 도시 주택 대지보다 넓은 약 78평의 대지를 얻어 집을 지을 수 있었다. 도성 안의 집 지을 터는 한성부漢城府가 신청을 받아 공지이거나 만 2년이 넘도록 집을 짓지 아니한 토지를 회수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만 주인이 사신으로 나가거나 지방관이 되거나 상喪을 당하여 집을 짓지 못한 경우는 예외로 하였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가대제한은 조선 후기에 편찬된 법전 『대전통편大典通編』(1785)과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가대제한에 이어 1431년(세종 13)에 품계별로 가옥의 총 규모와 장식 등을 규제하는 가사제한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이후 1440년(세종 22), 1449년(세종 31), 1478년(성종 9) 등 여러 차례 가사제한의 세부 내용을 고치고 보완하였다. 1431년에 제정된 제1차 가사제한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를 시켜 옛 제도를 상고하여 만든 것이다. 품계별로 지을 수 있는 가옥의 총 규모를 정하고, 이를 예조禮曹로 보내 시행하도록 하였다. 제1차 가사제한에서는 임금의 친아들·친형제·공주의 가옥은 50칸, 대군은 여기에 10칸을 더하여 60칸, 2품 관리는 40칸, 3품 이하는 30칸, 서인은 10칸을 넘을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가옥 총 규모의 제한과 함께 주춧돌 외에는 다듬은 돌[熟石]을 사용하여서는 아니 되며, 공포의 일종인 화공花栱을 사용하지 말고, 진채眞彩로 단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사치스럽게 다듬은 돌 및 화공, 진채단청의 사용을 불허하여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는 분위기를 진작시키려고 하였다.

제1차 가사제한을 시행하면서도 아래의 경우에 해당되면 예외 규정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가사제한 시행 전에 지은 가옥, 사당 및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옥, 사들인 가옥, 한성이 아닌 지방에 지은 가옥은 가사제한의 적용을 받지 않도록 했다. 이것으로 보아 제1차 가사제한은 주로 궁궐이 있는 한성 도성을 중심으로 시행되었으며, 도성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던 한성부가 가대제한과 가사제한 관련 업무를 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방 거주 관인과 양반사대부의 가옥은 직접 적용 대상은 아니지만 가사제한 제도를 준용한 것으로 보인다.

1431년에 제1차 가사제한을 제정하고 불과 10년이 경과하지 않은 1440년에 제2차 가사제한이 제정되었다. 제2차 가사제한은 제1차 가사제한을 시행하면서 드러난 여러 문제점을 개선한 것이다. 제1차 가사 제한은 품계별로 지을 수 있는 가옥의 총 규모를 칸수로만 정하여 놓아 칸수 제한을 지키면서 기둥 간격을 넓게 잡거나 기둥, 들보, 도리에 큰 재목을 사용활 경우 제한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가옥의 전체 칸수와 장식 등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봉건 신분 질서를 유지하려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440년 7월 예조는 제1차 가사제한의 칸수 규제는 유지하면서 누각과 주요 건물의 기둥 간격 및 들보 길이[栿長], 도리 길이[行長], 기둥 높이[柱高] 등을 척수尺數로 구체화시켜서 제한한 제2차 가사제한을 제정·반포하였다. 제2차 가사제한의 특징은 품계별로 지을 수 있는 주요 건물의 들보 길이, 도리 길이, 기둥 높이 등을 차등적으로 정해 가사제한의 실효성을 크게 높인 바 있다. 그럼에도 당시 고위 관리들이 제2차 가사제한을 위반한 사례는 더 많이 늘었다.

이처럼 제2차 가사제한도 시행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많이 발생하였다. 1449년 1월에 드디어 제2차 가사제한의 불합리한 내용을 대폭 수정한 제3차 가사제한을 제정·반포하였다. 제3차 가사제한을 제안하면서 의정부議政府는 개정하여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대군과 공주의 가사에서 정침·익랑의 들보 길이는 10자[尺], 기둥높이는 13자라 하였으나 들보(대들보)는 10자가 너무 짧고 종보[小梁]는 10자가 너무 길며, 또 기둥 높이 13자는 너무 길고, 각 품계 가옥의 정침과 행랑의 치수에 차등이 없어서 실로 적당하지 못합니다.” 이에 세종은 의정부에서 그동안의 문제점을 수정한 제3차 가사제한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제3차 가사제한의 특징은 제1·2차 가사제한을 시행하면서 나타난 여러 문제를 고치기 위하여 가옥 내 각 건물에 사용하는 재목의 크기 등을 매우 구체화해서 정하였다는 데 있다. 여러 건물을 용도와 중요도에 따라 누樓·정침正寢·익랑翼廊 외에 서청西廳·내루內樓·사랑斜廊·행랑行廊 등으로 구분하고, 이에 맞게 각 건물의 기둥 간격과 사용 재목의 크기를 결정하였다. 이처럼 제1차 가사제한에 비하여 제3차 가사제한은 내용에서 매우 정교해졌으며, 따라서 시행상의 문제도 크게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후 『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품계별로 지을 수 있는 가옥 규모를 칸수로만 제한한 제1차 가사제한 내용이 그대로 실리면서 가사제한의 제정 목적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편찬된 『경국대전』 「공전工典」 잡령조雜令條의 가사제한은 세종 대의 제1차 가사제한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다만 진채 단청을 사용하여 가옥을 치장하는 것을 금지한 조항만 삭제하였다. 이처럼 『경국대전』의 가사제한은 신분별로 지을 수 있는 가옥의 총 규모를 칸수로만 간략히 제한한 것이었다. 제2·3차 가사제한에 들어 있던 들보와 도리 등 주요 재목의 크기와 기둥 간격 등을 제한하는 내용이 빠져 있어 실효성이 매우 낮았다.

1431년에 제1차 가사제한을 제정하고 두 차례의 개정과 보완을 통하여 실효성을 크게 높였음에도 이를 지키지 않는 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초에 한치형 등은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사하는 무리와 노예의 미천한 신분으로도 돈과 재물이 있으면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집을 경쟁적으로 지어 번화한 것만 숭상하니 칸수[間數]의 많음과 화려하게 꾸민 것이 경대부卿大夫보다도 뛰어나다. 또 서인의 집이 조정 신하의 집을 능가하고, 조신朝臣의 집이 궁궐과 같이 사치하고 크기에 절조가 없다. 따라서 세종 때 정한 가사제한을 거듭 밝히고 지키지 않는 자는 법에 의해 논단하고 지은 집을 철거함으로써 사치하고 참람된 풍습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이는 1431년에 제1차 가사제한을 제정하고 그 후 수차례 개정·보완하였음에도 가사제한을 잘 준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드디어 1471년(성종 2)에 성종은 “이제부터 이미 지은 집 이외에는 세종 때 정한 가사제도를 넘는 집은 금단禁斷하라.”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는 세종 대에 반포한 가사제한이 성종 대에 이르러 유명무실하여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성종은 문란해진 가사제한 제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사헌부로 하여금 새로운 가사제한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1478년에 나온 제4차 가사제한이다. 제4차 가사제한에서는 가옥의 총 규모는 이전의 가사제한을 그대로 계승하되 정침, 익랑 등의 규모를 칸수로 제한함과 동시에 재목 크기도 함께 제한하였다. 다만 가옥 규모가 열 칸에 불과한 서인에게는 재목의 크기 제한(척수 제한)을 적용하지 않았다. 제4차 가사제한에서는 고주高柱의 높이를 제한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지붕이 높은 집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제3차 가사제한의 문제점을 개선한 것으로, 고주의 높이를 정하여 정침·익랑 등 주요 건물의 최고 높이를 규제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주 높이를 제한하는 방식이 봉건 신분을 반영하는 가옥의 수직성 통제에 더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제4차 가사제한에서는 각 건물의 규모를 실제로 규제하기 위하여 과량장過樑長, 척량장脊樑長 등 새 용어를 사용하였다. 먼저 과량장은 건물의 앞뒤 기둥 위에 놓이는 대들보와 툇보의 길이를 모두 합한 것으로, 이는 건물의 측면 총 길이를 일정하게 제한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건물의 측면 전체 길이를 제한하는 방식을 통하여 건물의 지붕 높이를 일정하게 제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리고 척량장은 건물의 앞면 한 칸의 도리 길이로, 이를 제한하여 기둥 간격이 넓은 큰 규모의 건물을 함부로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가사제한은 집터 면적을 제한하는 가대제한을 비롯하여 가옥의 총 규모와 재목 크기 및 장식을 제한하던 가사 및 장식 제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395년에 제정된 품계별 가대제한은 한성부의 택지 부족 문제 등 여러 현실 문제를 고려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국가에서 나누어 주는 가대의 면적을 대폭 축소 조정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반면에 가사제한은 1431년에 제정된 제1차 가사제한 이후 세 차례에 걸친 개정과 보완 작업을 거쳤으나 여전히 잘 준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469년에 편찬된 『경국대전』의 가사제한에서는 제1차 가사제한에서 정한, 품계별로 지을 수 있는 가옥의 총 칸수만 규제하여 가사제한의 제정 의도와 효력을 크게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가사제한의 변화를 살펴보면 신분별 가옥의 총 규모(칸수)는 제1차 가사제한 때 처음 정하여 고종 때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으로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제2차 가사제한에서 가옥 내 각 건물의 규모를 규제하기 위하여 들보와 도리 길이는 물론 기둥 높이 등을 제한하는 재목의 척수제한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가사제한을 시행하면서 나타난 불합리한 점을 수정·보완한 제3차 가사제한에서는 주요 건물의 기둥 간격, 건물의 측면 전체 길이 등을 조정하였다. 성종 대에 마련한 제4차 가사제한에서는 주요 건물의 규모를 칸수로 제한함과 동시에 규제의 실효성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고주 높이를 제한하는 방식을 채용, 각 건물의 높이를 일정하게 제한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건물의 측면 총 길이와 정면의 기둥 간격도 제한하였다.

특징 및 의의

조선시대 가사규제는 1431년(세종 13)에 품계에 따라 주택 칸수를 제한하는 것을 시작하여 그 후 세 차례 개정되었다. 품계별로 주택의 전체 칸수를 제한하는 규제는 『경국대전』 및 『대전회통』 등의 법전에 등재되어 제도상으로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엄수되던 가사규제는 15세기 말에 이르러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중종반정 이후 가사규제를 위반한 주택 수는 급증하였으며, 이것으로 보아 왕권이 약화된 중기 이후에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칸수제한과 가대제한은 사치 금지 및 절검節儉과도 관련이 있다. 칸수제한과 가대제한을 위반한 왕자녀의 제택 건축 등은 늘 과도한 재목 벌목과 운반으로 민폐를 발생시켰다. 민폐를 줄이기 위하여 가사제도 준수를 강조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 왕의 자녀와 권신들의 위반으로 가사규제가 점차 유명무실해지면서 법전에도 없는 ‘집을 99칸까지 지을 수 있다.’라는 민간 전승어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가사제한은 중국 명明의 가사제한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조선의 가사제한은 신분별 집터 면적과 가옥의 총 규모뿐만 아니라 각 건물을 구성하는 들보·도리·기둥의 높이 등을 세세하게 제한하였으나 명의 가사제한은 가옥 규모와 구조를 함께 제한한 형식으로, 무엇보다 장식제한에 중점이 있었다. 조선시대 가사제한이 주요 건물의 칸수와 거기에 사용되는 기둥 등 재목 크기를 따로 제한한 데 반하여 명은 건물의 규모와 구조를 통합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참고문헌

조선전기 주택사 연구(이호열,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한국주택건축(주남철, 일지사, 1980).

가사제한

가사제한
한자명

家舍制限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이호열(李鎬洌)

정의

고대 신라와 조선시대에 신분별로 대지와 가옥의 규모 및 사용 재료·크기·치장 등을 제한한 명문 규정.

내용

가사제한家舍制限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집터의 면적과 가옥의 전체 규모 및 치장 등을 제한하는 제도를 이른다. 조선왕조에서는 초기부터 신분에 따라 집터의 면적을 규제한 가대(집터)제한家垈制限과 주택 규모·장식 등을 엄격히 제한하는 가사제한이 시행되었다. 신라의 옥사조가 골품제에 의하여 차등을 두었다면 조선시대에는 관직의 품계에 따라 집터의 면적, 주택의 규모와 장식 등을 제한하였다. 관직 품계 기준으로 주택 규모를 제한한 가사규제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문무 양반 사회의 상하 신분 질서와 유가儒家 사상의 명분론名分論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태조 대에 신분별로 집터 면적을 제한하는 가대제한을 먼저 제정하여 시행하다가 세종 대에 이르러 가옥의 총 규모와 장식을 제한하는 가사제한을 처음 제정하였다.

1395년(태조 4)에 제정된 가대제한은 국가가 나누어 주는 집터 면적을 신분별로 정한 것으로, 봉건 신분 질서를 준수함과 동시에 도성 내 무분별한 가옥 건축을 규제하여 한정된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성을 옮기기 전부터 개경의 토지를 신분과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차등을 두고 나누어 줄 목적으로 가대제한이 처음 시행되었다. 가대제한은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인 1395년 1월 장지화張至和 등의 상소로 비롯되었다. 장지화 등은 개경에서 시행하고 있던 가대제한을 새 도성(한양)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집터 부족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며 가대 면적을 대폭 축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태조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1품의 집터 면적을 60부負에서 35부로 줄이는 등 관리들에게 나누어 줄 가대의 면적을 대폭 축소하였다. 즉 정1품에게 35부에 해당하는 집터를 나누어 주고, 이하 한 품에 5부씩 줄여 정6품에게 10부를 나누어 주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정6품 이하는 한 품에 2부씩 줄여 정7품 8부, 정8품 6부, 정9품 4부로 축소 조정하였다. 서인庶人의 집터 면적은 이전과 같은 2부(80여 평)로 정하였다.

1395년에 태조가 장지화 등의 주장을 수용하여 품계별 집터 면적을 대폭 축소 조정하였으나 그 후 한양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택지가 부족해졌다. 이에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면서 한양의 택지 부족 현상을 감안하여 품계별 가대 면적을 다시 대폭 축소하고, 이를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의 「호전戶典」 급조가지조給造家地條에 규정하였다. 『경국대전』에 보이는 품계별 가대 제한은 대군·공주 30부, 왕자군·옹주 25부, 1·2품 15부, 3·4품 10부, 5·6품 8부, 7품 이하 4부, 서인 2부이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대군·공주의 집터는 1,179평이나 되어 대단히 큰 주택을 지을 수 있었고, 최하층인 서인도 오늘날의 도시 주택 대지보다 넓은 약 78평의 대지를 얻어 집을 지을 수 있었다. 도성 안의 집 지을 터는 한성부漢城府가 신청을 받아 공지이거나 만 2년이 넘도록 집을 짓지 아니한 토지를 회수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만 주인이 사신으로 나가거나 지방관이 되거나 상喪을 당하여 집을 짓지 못한 경우는 예외로 하였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가대제한은 조선 후기에 편찬된 법전 『대전통편大典通編』(1785)과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가대제한에 이어 1431년(세종 13)에 품계별로 가옥의 총 규모와 장식 등을 규제하는 가사제한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이후 1440년(세종 22), 1449년(세종 31), 1478년(성종 9) 등 여러 차례 가사제한의 세부 내용을 고치고 보완하였다. 1431년에 제정된 제1차 가사제한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를 시켜 옛 제도를 상고하여 만든 것이다. 품계별로 지을 수 있는 가옥의 총 규모를 정하고, 이를 예조禮曹로 보내 시행하도록 하였다. 제1차 가사제한에서는 임금의 친아들·친형제·공주의 가옥은 50칸, 대군은 여기에 10칸을 더하여 60칸, 2품 관리는 40칸, 3품 이하는 30칸, 서인은 10칸을 넘을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가옥 총 규모의 제한과 함께 주춧돌 외에는 다듬은 돌[熟石]을 사용하여서는 아니 되며, 공포의 일종인 화공花栱을 사용하지 말고, 진채眞彩로 단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사치스럽게 다듬은 돌 및 화공, 진채단청의 사용을 불허하여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는 분위기를 진작시키려고 하였다.

제1차 가사제한을 시행하면서도 아래의 경우에 해당되면 예외 규정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가사제한 시행 전에 지은 가옥, 사당 및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옥, 사들인 가옥, 한성이 아닌 지방에 지은 가옥은 가사제한의 적용을 받지 않도록 했다. 이것으로 보아 제1차 가사제한은 주로 궁궐이 있는 한성 도성을 중심으로 시행되었으며, 도성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던 한성부가 가대제한과 가사제한 관련 업무를 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방 거주 관인과 양반사대부의 가옥은 직접 적용 대상은 아니지만 가사제한 제도를 준용한 것으로 보인다.

1431년에 제1차 가사제한을 제정하고 불과 10년이 경과하지 않은 1440년에 제2차 가사제한이 제정되었다. 제2차 가사제한은 제1차 가사제한을 시행하면서 드러난 여러 문제점을 개선한 것이다. 제1차 가사 제한은 품계별로 지을 수 있는 가옥의 총 규모를 칸수로만 정하여 놓아 칸수 제한을 지키면서 기둥 간격을 넓게 잡거나 기둥, 들보, 도리에 큰 재목을 사용활 경우 제한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가옥의 전체 칸수와 장식 등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봉건 신분 질서를 유지하려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440년 7월 예조는 제1차 가사제한의 칸수 규제는 유지하면서 누각과 주요 건물의 기둥 간격 및 들보 길이[栿長], 도리 길이[行長], 기둥 높이[柱高] 등을 척수尺數로 구체화시켜서 제한한 제2차 가사제한을 제정·반포하였다. 제2차 가사제한의 특징은 품계별로 지을 수 있는 주요 건물의 들보 길이, 도리 길이, 기둥 높이 등을 차등적으로 정해 가사제한의 실효성을 크게 높인 바 있다. 그럼에도 당시 고위 관리들이 제2차 가사제한을 위반한 사례는 더 많이 늘었다.

이처럼 제2차 가사제한도 시행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많이 발생하였다. 1449년 1월에 드디어 제2차 가사제한의 불합리한 내용을 대폭 수정한 제3차 가사제한을 제정·반포하였다. 제3차 가사제한을 제안하면서 의정부議政府는 개정하여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대군과 공주의 가사에서 정침·익랑의 들보 길이는 10자[尺], 기둥높이는 13자라 하였으나 들보(대들보)는 10자가 너무 짧고 종보[小梁]는 10자가 너무 길며, 또 기둥 높이 13자는 너무 길고, 각 품계 가옥의 정침과 행랑의 치수에 차등이 없어서 실로 적당하지 못합니다.” 이에 세종은 의정부에서 그동안의 문제점을 수정한 제3차 가사제한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제3차 가사제한의 특징은 제1·2차 가사제한을 시행하면서 나타난 여러 문제를 고치기 위하여 가옥 내 각 건물에 사용하는 재목의 크기 등을 매우 구체화해서 정하였다는 데 있다. 여러 건물을 용도와 중요도에 따라 누樓·정침正寢·익랑翼廊 외에 서청西廳·내루內樓·사랑斜廊·행랑行廊 등으로 구분하고, 이에 맞게 각 건물의 기둥 간격과 사용 재목의 크기를 결정하였다. 이처럼 제1차 가사제한에 비하여 제3차 가사제한은 내용에서 매우 정교해졌으며, 따라서 시행상의 문제도 크게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후 『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품계별로 지을 수 있는 가옥 규모를 칸수로만 제한한 제1차 가사제한 내용이 그대로 실리면서 가사제한의 제정 목적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편찬된 『경국대전』 「공전工典」 잡령조雜令條의 가사제한은 세종 대의 제1차 가사제한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다만 진채 단청을 사용하여 가옥을 치장하는 것을 금지한 조항만 삭제하였다. 이처럼 『경국대전』의 가사제한은 신분별로 지을 수 있는 가옥의 총 규모를 칸수로만 간략히 제한한 것이었다. 제2·3차 가사제한에 들어 있던 들보와 도리 등 주요 재목의 크기와 기둥 간격 등을 제한하는 내용이 빠져 있어 실효성이 매우 낮았다.

1431년에 제1차 가사제한을 제정하고 두 차례의 개정과 보완을 통하여 실효성을 크게 높였음에도 이를 지키지 않는 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초에 한치형 등은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사하는 무리와 노예의 미천한 신분으로도 돈과 재물이 있으면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집을 경쟁적으로 지어 번화한 것만 숭상하니 칸수[間數]의 많음과 화려하게 꾸민 것이 경대부卿大夫보다도 뛰어나다. 또 서인의 집이 조정 신하의 집을 능가하고, 조신朝臣의 집이 궁궐과 같이 사치하고 크기에 절조가 없다. 따라서 세종 때 정한 가사제한을 거듭 밝히고 지키지 않는 자는 법에 의해 논단하고 지은 집을 철거함으로써 사치하고 참람된 풍습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이는 1431년에 제1차 가사제한을 제정하고 그 후 수차례 개정·보완하였음에도 가사제한을 잘 준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드디어 1471년(성종 2)에 성종은 “이제부터 이미 지은 집 이외에는 세종 때 정한 가사제도를 넘는 집은 금단禁斷하라.”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는 세종 대에 반포한 가사제한이 성종 대에 이르러 유명무실하여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성종은 문란해진 가사제한 제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사헌부로 하여금 새로운 가사제한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1478년에 나온 제4차 가사제한이다. 제4차 가사제한에서는 가옥의 총 규모는 이전의 가사제한을 그대로 계승하되 정침, 익랑 등의 규모를 칸수로 제한함과 동시에 재목 크기도 함께 제한하였다. 다만 가옥 규모가 열 칸에 불과한 서인에게는 재목의 크기 제한(척수 제한)을 적용하지 않았다. 제4차 가사제한에서는 고주高柱의 높이를 제한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지붕이 높은 집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제3차 가사제한의 문제점을 개선한 것으로, 고주의 높이를 정하여 정침·익랑 등 주요 건물의 최고 높이를 규제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주 높이를 제한하는 방식이 봉건 신분을 반영하는 가옥의 수직성 통제에 더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제4차 가사제한에서는 각 건물의 규모를 실제로 규제하기 위하여 과량장過樑長, 척량장脊樑長 등 새 용어를 사용하였다. 먼저 과량장은 건물의 앞뒤 기둥 위에 놓이는 대들보와 툇보의 길이를 모두 합한 것으로, 이는 건물의 측면 총 길이를 일정하게 제한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건물의 측면 전체 길이를 제한하는 방식을 통하여 건물의 지붕 높이를 일정하게 제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리고 척량장은 건물의 앞면 한 칸의 도리 길이로, 이를 제한하여 기둥 간격이 넓은 큰 규모의 건물을 함부로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가사제한은 집터 면적을 제한하는 가대제한을 비롯하여 가옥의 총 규모와 재목 크기 및 장식을 제한하던 가사 및 장식 제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395년에 제정된 품계별 가대제한은 한성부의 택지 부족 문제 등 여러 현실 문제를 고려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국가에서 나누어 주는 가대의 면적을 대폭 축소 조정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반면에 가사제한은 1431년에 제정된 제1차 가사제한 이후 세 차례에 걸친 개정과 보완 작업을 거쳤으나 여전히 잘 준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469년에 편찬된 『경국대전』의 가사제한에서는 제1차 가사제한에서 정한, 품계별로 지을 수 있는 가옥의 총 칸수만 규제하여 가사제한의 제정 의도와 효력을 크게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가사제한의 변화를 살펴보면 신분별 가옥의 총 규모(칸수)는 제1차 가사제한 때 처음 정하여 고종 때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으로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제2차 가사제한에서 가옥 내 각 건물의 규모를 규제하기 위하여 들보와 도리 길이는 물론 기둥 높이 등을 제한하는 재목의 척수제한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가사제한을 시행하면서 나타난 불합리한 점을 수정·보완한 제3차 가사제한에서는 주요 건물의 기둥 간격, 건물의 측면 전체 길이 등을 조정하였다. 성종 대에 마련한 제4차 가사제한에서는 주요 건물의 규모를 칸수로 제한함과 동시에 규제의 실효성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고주 높이를 제한하는 방식을 채용, 각 건물의 높이를 일정하게 제한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건물의 측면 총 길이와 정면의 기둥 간격도 제한하였다.

특징 및 의의

조선시대 가사규제는 1431년(세종 13)에 품계에 따라 주택 칸수를 제한하는 것을 시작하여 그 후 세 차례 개정되었다. 품계별로 주택의 전체 칸수를 제한하는 규제는 『경국대전』 및 『대전회통』 등의 법전에 등재되어 제도상으로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엄수되던 가사규제는 15세기 말에 이르러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중종반정 이후 가사규제를 위반한 주택 수는 급증하였으며, 이것으로 보아 왕권이 약화된 중기 이후에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칸수제한과 가대제한은 사치 금지 및 절검節儉과도 관련이 있다. 칸수제한과 가대제한을 위반한 왕자녀의 제택 건축 등은 늘 과도한 재목 벌목과 운반으로 민폐를 발생시켰다. 민폐를 줄이기 위하여 가사제도 준수를 강조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 왕의 자녀와 권신들의 위반으로 가사규제가 점차 유명무실해지면서 법전에도 없는 ‘집을 99칸까지 지을 수 있다.’라는 민간 전승어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가사제한은 중국 명明의 가사제한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조선의 가사제한은 신분별 집터 면적과 가옥의 총 규모뿐만 아니라 각 건물을 구성하는 들보·도리·기둥의 높이 등을 세세하게 제한하였으나 명의 가사제한은 가옥 규모와 구조를 함께 제한한 형식으로, 무엇보다 장식제한에 중점이 있었다. 조선시대 가사제한이 주요 건물의 칸수와 거기에 사용되는 기둥 등 재목 크기를 따로 제한한 데 반하여 명은 건물의 규모와 구조를 통합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참고문헌

조선전기 주택사 연구(이호열,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한국주택건축(주남철, 일지사,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