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랍집

가랍집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강영환(姜榮煥)

정의

조선시대 외거노비가 거처하던 살림집.

개관

신분제 사회가 형성된 이래 최하위 계층인 천민으로 대표되는 존재는 노비였다. 고대국가시대부터 개인에게 예속된 노비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들이 어떤 집에서 생활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신당서新唐書』 「신라新羅」에 “재상의 집에 노동奴童이 3,000이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재상의 집이라 하여도 그만한 인원을 모두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터이니 재상의 집 밖에(또는 같은 마을에) 노비들이 생활하는 독립된 살림집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노비는 상전의 토지·가옥과 더불어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상속·매매·증여의 대상이었다. 사노비私奴婢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된다. 솔거노비率居奴婢는 상전 가호家戶의 일원으로 생활하면서 농경과 가내잡사에 사역되는 노비를 말한다. 이에 반해 외거노비外居奴婢는 독립된 가호와 가계를 유지하면서 신공身貢만을 바치는 노비였다. 이들은 대부분 상전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경노비였으나 타인의 토지를 전작하여 재화를 축적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경제력에 따라 주거 수준도 차이가 있었다.

내용

조선사회에서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주거형식은 완전히 달랐다. 솔거노비는 상전인 양반 가호의 일원으로서 그 집 안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된 주택을 갖지 못하였다. 그들의 생활 영역은 대부분 양반주택의 전면 외곽에 위치하는 행랑채대문채에 부속되어 있었다. 또한 사랑채나 수장 공간을 경계로 하여 주인의 거처인 안채 영역과 철저하게 격리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유사시에 주거 외부로부터 주인을 방호하고 노비들에 대한 주인의 권위를 지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솔거노비가 혼인으로 가정을 꾸리면 상전의 주택에서 나와 독립된 집을 마련하여 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외거노비라 부른다. 이들은 자신의 집에서 잠만 잘 뿐 날이 새면 주인집에 들어가 일을 하고 세 끼를 주인집에서 먹었다. 이들의 집을 경상도에서는 ‘가랍집’, 전라도에서는 ‘호지집’, 평안도에서는 ‘마가리집’, 황해도에서는 ‘윳집’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집은 대체로 주인집에서 가까운 외곽에 자리하였다. 주인이 쉽게 호출할 수 있고, 주인집을 방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외거노비는 좋은 집을 가질 경제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경제력이 있다 하여도 가사규제에 따라 주택 규모를 크게 하거나 고급주택을 지을 수가 없었다. 영역화된 외부공간이 필요하지 않으니 넓은 마당도 없고, 울도 담도 대문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제생활을 주인집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산이나 수장을 위한 공간도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대부분 살림채 한 동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는 가족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 즉 하나의 부엌침실로 구성되는 예가 많았다. 대부분 자력으로 건설하기 때문에 쉽게 지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고, 자연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가 사용되었다. 벽체는 담처럼 쌓아 만든 토담집이 많았고, 지붕볏짚을 사용한 초가집이었다.

특징 및 의의

가랍집은 조선시대 양반촌락에서 양반과 노비들의 주거생활과 상호관계를 반영하는 주거 유형이다. 이는 양반들의 주거생활이 양반주택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외곽의 가랍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반영한다. 또한 사노비들의 주거생활을 반영하는 생활무대이기도 하다.

건축 관점으로 보면 가랍집은 최저 수준의 살림집이다. 학계에서는 ‘막살이집’, ‘오막살이집’이라 하여 빈한한 소농계층의 집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가랍집은 사회적 지위나 생활양식상 상전 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소농계층의 집과는 차이가 있다. 가랍집은 가족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모와 공간이 있는 집이다. 또한 가장 적은 노동력과 비용으로 지을 수 있는 구조와 형태를 보여 준다.

참고문헌

한국 주거문화의 역사(강영환, 기문당, 2013), 한국의 주거민속지(김광언, 민음사, 198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가랍집

가랍집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집필자 강영환(姜榮煥)

정의

조선시대 외거노비가 거처하던 살림집.

개관

신분제 사회가 형성된 이래 최하위 계층인 천민으로 대표되는 존재는 노비였다. 고대국가시대부터 개인에게 예속된 노비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들이 어떤 집에서 생활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신당서新唐書』 「신라新羅」에 “재상의 집에 노동奴童이 3,000이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재상의 집이라 하여도 그만한 인원을 모두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터이니 재상의 집 밖에(또는 같은 마을에) 노비들이 생활하는 독립된 살림집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노비는 상전의 토지·가옥과 더불어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상속·매매·증여의 대상이었다. 사노비私奴婢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된다. 솔거노비率居奴婢는 상전 가호家戶의 일원으로 생활하면서 농경과 가내잡사에 사역되는 노비를 말한다. 이에 반해 외거노비外居奴婢는 독립된 가호와 가계를 유지하면서 신공身貢만을 바치는 노비였다. 이들은 대부분 상전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경노비였으나 타인의 토지를 전작하여 재화를 축적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경제력에 따라 주거 수준도 차이가 있었다.

내용

조선사회에서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주거형식은 완전히 달랐다. 솔거노비는 상전인 양반 가호의 일원으로서 그 집 안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된 주택을 갖지 못하였다. 그들의 생활 영역은 대부분 양반주택의 전면 외곽에 위치하는 행랑채나 대문채에 부속되어 있었다. 또한 사랑채나 수장 공간을 경계로 하여 주인의 거처인 안채 영역과 철저하게 격리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유사시에 주거 외부로부터 주인을 방호하고 노비들에 대한 주인의 권위를 지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솔거노비가 혼인으로 가정을 꾸리면 상전의 주택에서 나와 독립된 집을 마련하여 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외거노비라 부른다. 이들은 자신의 집에서 잠만 잘 뿐 날이 새면 주인집에 들어가 일을 하고 세 끼를 주인집에서 먹었다. 이들의 집을 경상도에서는 ‘가랍집’, 전라도에서는 ‘호지집’, 평안도에서는 ‘마가리집’, 황해도에서는 ‘윳집’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집은 대체로 주인집에서 가까운 외곽에 자리하였다. 주인이 쉽게 호출할 수 있고, 주인집을 방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외거노비는 좋은 집을 가질 경제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경제력이 있다 하여도 가사규제에 따라 주택 규모를 크게 하거나 고급주택을 지을 수가 없었다. 영역화된 외부공간이 필요하지 않으니 넓은 마당도 없고, 울도 담도 대문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제생활을 주인집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산이나 수장을 위한 공간도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대부분 살림채 한 동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는 가족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 즉 하나의 부엌과 침실로 구성되는 예가 많았다. 대부분 자력으로 건설하기 때문에 쉽게 지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고, 자연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가 사용되었다. 벽체는 담처럼 쌓아 만든 토담집이 많았고, 지붕은 볏짚을 사용한 초가집이었다.

특징 및 의의

가랍집은 조선시대 양반촌락에서 양반과 노비들의 주거생활과 상호관계를 반영하는 주거 유형이다. 이는 양반들의 주거생활이 양반주택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외곽의 가랍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반영한다. 또한 사노비들의 주거생활을 반영하는 생활무대이기도 하다.

건축 관점으로 보면 가랍집은 최저 수준의 살림집이다. 학계에서는 ‘막살이집’, ‘오막살이집’이라 하여 빈한한 소농계층의 집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가랍집은 사회적 지위나 생활양식상 상전 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소농계층의 집과는 차이가 있다. 가랍집은 가족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모와 공간이 있는 집이다. 또한 가장 적은 노동력과 비용으로 지을 수 있는 구조와 형태를 보여 준다.

참고문헌

한국 주거문화의 역사(강영환, 기문당, 2013), 한국의 주거민속지(김광언, 민음사, 198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