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식생활

집필자 김광언(金光彦)

정의

부뚜막 등의 시설을 갖추고 음식을 마련하며, 아궁이에 불을 넣어 난방을 하는 공간.

내용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등 지역에서는 부엌이라 부르지만, 함경도·강원도·경상도 등지에서는 정지라고 부른다.

이 낱말은 1481년에 나온 『두시언해杜詩諺解』에 처음 보이며, 이보다 60년쯤 뒤에 선보인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 ‘부억’으로 바뀌었다가 오늘날의 ‘부엌’으로 굳어졌다. 부엌의 ‘부’는 ‘불’에서 왔고 ‘엌’은 장소를 일컫는 접미사이다.

정주는 16세기 중반의 『신증류합新增類合』에 ‘졍듀’로 올랐다. 이는 함경도 겹집의 중심공간인 정주 또는 정주방에서 왔다. 식구들이 음식을 먹고 잠을 잘 뿐 아니라 제사를 지내고 혼인식도 치르며 손님도 맞는다. ‘정지’는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의 오로촌족이 아낙의 자리를 ‘정지뒤’라고 부르는 점과 연관이 있을 터이다. 우리말 ‘마루’도 주인 자리를 가리키는 말루에서 왔다고 한다.

부엌에 대한 첫 기록은 3세기 중국사서 『삼국지三國志』 ‘변진’의 “부엌이 모두 집 서쪽에 있다.竈皆在西戶”는 기사이다. ‘서쪽’은 남향집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도 “부엌은 서남쪽에 있어야 좋다.”고 하였고, 거의 모든 살림집 부엌도 이곳에 있었다. 근래까지도 밥을 풀 때 ‘들이 푼다’고 하여 주걱 끝이 북쪽으로 가야 복을 받는다고 여겼고, 반대면 ‘내 푼다’고 하여 몹시 꺼렸다.

황해도에 있는 안악 3호 무덤의 벽화는 4세기 무렵 부엌의 모습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부뚜시루 앞의 아낙은 오른손에 떡칼을 쥔 채 왼손의 긴 젓가락으로 떡을 찔러서 잘 익었는지 살피고, 다른 이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땀을 고르며, 또 한 사람은 갈큇발이 달린 상에 그릇을 차곡차곡 쌓는다. 부엌이 세 칸 독채에 푸줏간이 딸린 점도 눈을 끈다. 부뚜막은 긴네모꼴이며 한 끝에 오리 입을 닮은 굴뚝을 붙였다. 또 지붕마루 오른쪽에 앉은 불의 신이자 솥의 신이기도 한 까마귀는 이곳이 신령스러운 공간임을 나타낸다.

예부터 궁궐이나 부잣집에서는 조리를 위한 반빗간을 따로 세웠다. 음식 먹을 인원이 많은 데다 화재 염려가 높고 냄새가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현종실록顯宗實錄』에서도 부엌 여종을 ‘반비飯婢’라 불렀으며, 1828년(순조 28)에 지은 창덕궁 연경당延慶堂에도 한 채가 남아 있다. 한편 경복궁에서는 소주방燒廚房이라고 부르면서 임금의 수라를 마련하는 내소주방內燒廚房, 잔치음식이나 제물을 준비하는 외소주방, 후식과 별식을 다루는 생물방을 두었다.

이와 달리 일반 살림집에서는 부엌 가까운 곳에 작은 부뚜막을 마련하고 이를 한데부엌, 딴솥, 헛부엌 따위로 불렀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아궁이에 불을 넣기 어렵기도 했지만 상례나 혼인 따위에 모이는 많은 손님을 치르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우리 부엌의 가장 큰 특징은 부뚜막 시설이다. 이곳에 걸어 놓은 솥에 음식을 끓이는 일 외에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난방도 한 것이다. 중국은 물론 일본에도 없는 우리네 독특한 방식으로, 『신당서新唐書』에도 “고구려 백성들은 겨울에 구들을 놓고 따듯하게 지낸다.”는 기사가 있다. 솥의 수는 집 형편에 따라 달랐다. 상류 가옥에서는 용가마, 가마솥, 중솥, 옹솥 따위를 걸지만 서민들은 중솥과 옹솥 둘에다 밥 및 국을 끓였다. 중부지역에서는 부엌 서쪽에 반 칸을 이어 붙이고 땔 나무를 무리하는 공간을 나뭇간이라 불렀으며, 상류 가옥에서는 헛간에 두었다.

부뚜막은 흙과 돌로 쌓고 황토를 두 번 바른 뒤 가늘고 고운 매흙을 여러 번 덧칠한다. 이로써 흙이 마르면 기름을 바른 듯 번들거린다. ‘맥질 잘한 부뚜막 얼굴은 열일곱 살 아가씨 살결보다 곱다’는 말은 여기에서 왔다. 한 가지 흠은 지면보다 낮아서 주부가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외에 아궁이에 불을 넣을 때도 쪼그려 앉고, 상도 높이 들고 문턱을 넘어가야 하는 점이다. 아궁이에서 구들을 통해 들어간 연기는 부엌 북쪽에 세운 굴뚝으로 빠져나간다. 한편 겨울에도 기온이 그다지 내려가지 않는 제주도 지역에서는 어린아이 머리만 한 돌 셋을 세모꼴로 놓은 삼덕에 솥을 얹어서 부뚜막으로 삼았으며, 밥도 그 앞에 놓인 짚방석에 앉아서 먹었다. 따라서 방석 수는 곧 식구 수와 같았다. 이곳에서 구들을 놓고 난방을 한 것은 1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는 ‘복토福土 훔치기’라 하여 부잣집 흙을 몰래 가져와서 부뚜막에 덧바르거나 마당에 뿌린다. 이로써 그 집의 복을 옮겨 왔다고 여긴것이다. 『경도잡지京都雜志』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서울 종각 네거리의 흙을 파다가 집 네 귀퉁이에 뿌리거나 부뚜막에 바른다.”는 기사가 보인다. 한편 부잣집에서는 남이 흙을 가져가면 복이 줄어든다고 하여 밤새 지켰다.

이뿐만 아니라 대보름날에 찰밥, 시월상달에 떡을 바쳤다. 동지에는 팥죽을 발랐다. 누에를 먹이는 집은 정월 첫 소날[丑日]에 흰 닭을 올려서 잘 자라기를 바랐고, 대보름날 아침에 소금 한 움큼을 놓고 ‘산 애기 간질한다’고 중얼거리면 여름에 노래기가 꾀지 않는다고 믿었다.

섣달그믐날 부뚜막에다 불을 밝히고 정화수와 쌀이 담긴 함지를 놓고 절을 올리면서 “떠들어온다, 떠들어온다, 무량대복無量大福이 떠들어온다, 천석石, 만석이 떠들어온다.”고 외치며 풍년 들기를 바랐다.

어린 아기를 부뚜막이라 부르면 건강하고, 배냇머리를 아궁이에 넣으면 장수하며, 두드러기 난 어린이를 부뚜막에 세우고 몽당비로 쓸면서 ‘중도 고기 먹나? 중도 고기를 먹나?’ 읊조리면 낫는다는 풍속도 있었다. 『산림경제山林經濟』 권3 「구급」에도 ‘난산 때, 임산부 옷을 부뚜막과 아궁이에 씌우면 아기가 곧 나오지만, 산모가 알면 효험이 없다.’는 내용이 보인다.

부뚜막 앞에서 옷 벗고 노래하며 욕하고, 글씨 쓴 종이와 닭털 및 짐승 뼈를 태우고, 칼과 도끼를 놓고, 생강·파·마늘을 썰면 악운이 닥친다고 하여 삼갔다.

아궁이는 음식을 끓이는 일반형, 구들에 불만 넣는 함실아궁이 두 종류가 있다. 이를 ‘군불아궁이’라고도 불렀다. 불을 땐 뒤에는 불돌로 입구를 막아서 온기가 새지 않도록 하며, 큰 집에서는 쇠문을 따로 달았다. 1960년대에는 정부에서 땔감을 줄이기 위해 ‘산림녹화’라는 글을 돋을새김한 쇠문을 보급하였다.

상류 가옥에서는 부엌 뒷벽에 찬장을 붙이고 식기나 반찬 따위를 갈무리하였으며, 일반가정에서는 살강이라 하여 서너 개의 선반으로 대신하였다. 개수대를 놓고 설거지를 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부엌세간 중에 솥에 버금가는 살림살이는 물을 담아 두고 쓰는 부뚜막 옆의 물두멍이다. 입이 너른 항아리가 대부분이지만 상류 가옥에서는 무쇠 제품을 썼으며, 더러 독을 묻기도 하였다. 또 여기에 용녀가 깃든 까닭에 물이 마르면 재앙이 닥친다며 언제나 가득 채웠다.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는 눈에 다래끼가 났을 때 물두멍을 들여다보고 깜빡이면 다래끼가 그 안으로 빠진다고 일렀다.

부뚜막 벽에 걸어 놓고 쓰는 조리도 복의 상징이었다. ‘조리로 인다.’는 말의 ‘인다’는 일어난다는 뜻으로, 복이 늘어나서 부자가 되는 것을 이른다. 정월 초하루에 한 쌍을 사서 다홍실로 엮은 뒤 대청이나 안방머리에 엇걸어 두는 것을 복조리, 그 안에 넣는 엽전을 복돈이라고 부른 까닭이 이것이다. 값을 깎으면 복이 그만큼 줄어든다며 부르는 대로 내는 것이 관례였다. 못 쓰는 조리를 버리지 않고 한쪽에 오랫동안 걸어 두는 풍습도 마찬가지이다.

부엌의 조왕신은 부뚜막 뒤에 모시고 종지에 담은 물을 신체로 삼았다. 이는 중국에서 신상神像을 받드는 것과 대조를 보인다. 그리고 중국에서 조군竈君 또는 사명조군司命竈君이라 하여 주로 남성으로 다루었지만 우리는 조왕각씨·조왕할망이라 하여 여성으로 섬겼다. 주인 아낙은 아침마다 물을 새로 갈아 부으며 그 날 하루 온 식구의 평안을 빌었다. 또 군대에 간 아들이나 집 떠난 식구를 위해 끼니마다 겨울에는 놋주발, 여름에는 흰 사기주발에 밥을 퍼서 조왕에게 올렸다. 밥그릇이 예 있으니 굶지 말고 잘 있다가 돌아오라는 뜻이다.

신체는 곳에 따라 다르다. 경기도에서는 바가지에 담은 삼베조각, 강원도에서는 네모로 접은 종이에 덧 걸어 놓은 명태를 섬겼다. 신체가 따로 없는 경북 지역에서는 뒤집어 놓는 소댕에다 제물을 차린다. 한편 절집에서는 중국처럼 조왕신상[幀畵]으로 대신하였다.

조왕신이 해마다 12월 25일 하늘에 올라가 그 집에서 한 해 동안 일어난 일을 알리면 옥황상제가 내용에 따라 알맞은 복을 내린다고 하여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집에서는 전날 아궁이에 엿을 발라 두어서 조왕의 입을 봉하였다.

특징 및 의의

우리네 부엌은 온 식구의 건강을 지켜 주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반드시 갖춘 까닭이 이것이다. 또 여성의 성역이기도 하여 남성은 가까이 가지 못하였으며, 모든 집안 살림살이는 주관자인 주부가 맡아서 처리하였다.

물러나는 시어머니가 새 며느리에게 주걱을 넘겨준 것도 부엌이 주부권의 상징임을 나타낸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날 일가와 마을의 노부인이 모인 자리에서 건네며, 작은 잔치도 베풀었다. 이와 달리 일본에서는 곳간열쇠를 맡긴다. 열쇠가 주걱보다 커 보이지만 배를 불리려면 주부가 밥을 많이 담아야 하는 점에서 주걱이 더 현실성이 있다.

우리나라 부뚜막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에쿠안 겐지榮久庵憲司는 “부뚜막이 (조선)반도에서 들어오기까지 땅을 파고 만든 화덕爐을 썼다”라고 적었고, 가노도시쓰구狩野敏次도 “부뚜막은 5세기쯤 조선반도에서 들어왔으며, 조선에서 솥[釜]을 가마kama라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가마’도 본디 조선어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나미 고어사전岩波古語辭典』에도 가마竈釜의 뿌리는 조선어 ‘kama’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한데 부엌을 가라카마도[韓竈]라고 부르며, 굴뚝을 가리키는 ‘구도久度’도 우리말 굴뚝에서 왔다. 우리가 17세기까지 이를 굴·ㅅ·독으로 적은 것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일본 곳곳에 있는 한조신사韓竈神社도 빼놓을 수 없다.

참고문헌

동아시아의 부엌(김광언, 눌와, 2015), 한국식생활풍속(강인회·이경복, 삼영사, 1984), かまど(狩野敏次, 法政大學出版局, 2004), 台所の歷史(榮久庵憲司, 柴田書店, 1976).

부엌

부엌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식생활

집필자 김광언(金光彦)

정의

부뚜막 등의 시설을 갖추고 음식을 마련하며, 아궁이에 불을 넣어 난방을 하는 공간.

내용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등 지역에서는 부엌이라 부르지만, 함경도·강원도·경상도 등지에서는 정지라고 부른다.

이 낱말은 1481년에 나온 『두시언해杜詩諺解』에 처음 보이며, 이보다 60년쯤 뒤에 선보인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 ‘부억’으로 바뀌었다가 오늘날의 ‘부엌’으로 굳어졌다. 부엌의 ‘부’는 ‘불’에서 왔고 ‘엌’은 장소를 일컫는 접미사이다.

정주는 16세기 중반의 『신증류합新增類合』에 ‘졍듀’로 올랐다. 이는 함경도 겹집의 중심공간인 정주 또는 정주방에서 왔다. 식구들이 음식을 먹고 잠을 잘 뿐 아니라 제사를 지내고 혼인식도 치르며 손님도 맞는다. ‘정지’는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의 오로촌족이 아낙의 자리를 ‘정지뒤’라고 부르는 점과 연관이 있을 터이다. 우리말 ‘마루’도 주인 자리를 가리키는 말루에서 왔다고 한다.

부엌에 대한 첫 기록은 3세기 중국사서 『삼국지三國志』 ‘변진’의 “부엌이 모두 집 서쪽에 있다.竈皆在西戶”는 기사이다. ‘서쪽’은 남향집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도 “부엌은 서남쪽에 있어야 좋다.”고 하였고, 거의 모든 살림집 부엌도 이곳에 있었다. 근래까지도 밥을 풀 때 ‘들이 푼다’고 하여 주걱 끝이 북쪽으로 가야 복을 받는다고 여겼고, 반대면 ‘내 푼다’고 하여 몹시 꺼렸다.

황해도에 있는 안악 3호 무덤의 벽화는 4세기 무렵 부엌의 모습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부뚜막 시루 앞의 아낙은 오른손에 떡칼을 쥔 채 왼손의 긴 젓가락으로 떡을 찔러서 잘 익었는지 살피고, 다른 이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땀을 고르며, 또 한 사람은 갈큇발이 달린 상에 그릇을 차곡차곡 쌓는다. 부엌이 세 칸 독채에 푸줏간이 딸린 점도 눈을 끈다. 부뚜막은 긴네모꼴이며 한 끝에 오리 입을 닮은 굴뚝을 붙였다. 또 지붕마루 오른쪽에 앉은 불의 신이자 솥의 신이기도 한 까마귀는 이곳이 신령스러운 공간임을 나타낸다.

예부터 궁궐이나 부잣집에서는 조리를 위한 반빗간을 따로 세웠다. 음식 먹을 인원이 많은 데다 화재 염려가 높고 냄새가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현종실록顯宗實錄』에서도 부엌 여종을 ‘반비飯婢’라 불렀으며, 1828년(순조 28)에 지은 창덕궁 연경당延慶堂에도 한 채가 남아 있다. 한편 경복궁에서는 소주방燒廚房이라고 부르면서 임금의 수라를 마련하는 내소주방內燒廚房, 잔치음식이나 제물을 준비하는 외소주방, 후식과 별식을 다루는 생물방을 두었다.

이와 달리 일반 살림집에서는 부엌 가까운 곳에 작은 부뚜막을 마련하고 이를 한데부엌, 딴솥, 헛부엌 따위로 불렀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아궁이에 불을 넣기 어렵기도 했지만 상례나 혼인 따위에 모이는 많은 손님을 치르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우리 부엌의 가장 큰 특징은 부뚜막 시설이다. 이곳에 걸어 놓은 솥에 음식을 끓이는 일 외에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난방도 한 것이다. 중국은 물론 일본에도 없는 우리네 독특한 방식으로, 『신당서新唐書』에도 “고구려 백성들은 겨울에 구들을 놓고 따듯하게 지낸다.”는 기사가 있다. 솥의 수는 집 형편에 따라 달랐다. 상류 가옥에서는 용가마, 가마솥, 중솥, 옹솥 따위를 걸지만 서민들은 중솥과 옹솥 둘에다 밥 및 국을 끓였다. 중부지역에서는 부엌 서쪽에 반 칸을 이어 붙이고 땔 나무를 갈무리하는 공간을 나뭇간이라 불렀으며, 상류 가옥에서는 헛간에 두었다.

부뚜막은 흙과 돌로 쌓고 황토를 두 번 바른 뒤 가늘고 고운 매흙을 여러 번 덧칠한다. 이로써 흙이 마르면 기름을 바른 듯 번들거린다. ‘맥질 잘한 부뚜막 얼굴은 열일곱 살 아가씨 살결보다 곱다’는 말은 여기에서 왔다. 한 가지 흠은 지면보다 낮아서 주부가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외에 아궁이에 불을 넣을 때도 쪼그려 앉고, 상도 높이 들고 문턱을 넘어가야 하는 점이다. 아궁이에서 구들을 통해 들어간 연기는 부엌 북쪽에 세운 굴뚝으로 빠져나간다. 한편 겨울에도 기온이 그다지 내려가지 않는 제주도 지역에서는 어린아이 머리만 한 돌 셋을 세모꼴로 놓은 삼덕에 솥을 얹어서 부뚜막으로 삼았으며, 밥도 그 앞에 놓인 짚방석에 앉아서 먹었다. 따라서 방석 수는 곧 식구 수와 같았다. 이곳에서 구들을 놓고 난방을 한 것은 1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는 ‘복토福土 훔치기’라 하여 부잣집 흙을 몰래 가져와서 부뚜막에 덧바르거나 마당에 뿌린다. 이로써 그 집의 복을 옮겨 왔다고 여긴것이다. 『경도잡지京都雜志』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서울 종각 네거리의 흙을 파다가 집 네 귀퉁이에 뿌리거나 부뚜막에 바른다.”는 기사가 보인다. 한편 부잣집에서는 남이 흙을 가져가면 복이 줄어든다고 하여 밤새 지켰다.

이뿐만 아니라 대보름날에 찰밥, 시월상달에 떡을 바쳤다. 동지에는 팥죽을 발랐다. 누에를 먹이는 집은 정월 첫 소날[丑日]에 흰 닭을 올려서 잘 자라기를 바랐고, 대보름날 아침에 소금 한 움큼을 놓고 ‘산 애기 간질한다’고 중얼거리면 여름에 노래기가 꾀지 않는다고 믿었다.

또 섣달그믐날 부뚜막에다 불을 밝히고 정화수와 쌀이 담긴 함지를 놓고 절을 올리면서 “떠들어온다, 떠들어온다, 무량대복無量大福이 떠들어온다, 천석石, 만석이 떠들어온다.”고 외치며 풍년 들기를 바랐다.

어린 아기를 부뚜막이라 부르면 건강하고, 배냇머리를 아궁이에 넣으면 장수하며, 두드러기 난 어린이를 부뚜막에 세우고 몽당비로 쓸면서 ‘중도 고기 먹나? 중도 고기를 먹나?’ 읊조리면 낫는다는 풍속도 있었다. 『산림경제山林經濟』 권3 「구급」에도 ‘난산 때, 임산부 옷을 부뚜막과 아궁이에 씌우면 아기가 곧 나오지만, 산모가 알면 효험이 없다.’는 내용이 보인다.

부뚜막 앞에서 옷 벗고 노래하며 욕하고, 글씨 쓴 종이와 닭털 및 짐승 뼈를 태우고, 칼과 도끼를 놓고, 생강·파·마늘을 썰면 악운이 닥친다고 하여 삼갔다.

아궁이는 음식을 끓이는 일반형, 구들에 불만 넣는 함실아궁이 두 종류가 있다. 이를 ‘군불아궁이’라고도 불렀다. 불을 땐 뒤에는 불돌로 입구를 막아서 온기가 새지 않도록 하며, 큰 집에서는 쇠문을 따로 달았다. 1960년대에는 정부에서 땔감을 줄이기 위해 ‘산림녹화’라는 글을 돋을새김한 쇠문을 보급하였다.

상류 가옥에서는 부엌 뒷벽에 찬장을 붙이고 식기나 반찬 따위를 갈무리하였으며, 일반가정에서는 살강이라 하여 서너 개의 선반으로 대신하였다. 개수대를 놓고 설거지를 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부엌세간 중에 솥에 버금가는 살림살이는 물을 담아 두고 쓰는 부뚜막 옆의 물두멍이다. 입이 너른 항아리가 대부분이지만 상류 가옥에서는 무쇠 제품을 썼으며, 더러 독을 묻기도 하였다. 또 여기에 용녀가 깃든 까닭에 물이 마르면 재앙이 닥친다며 언제나 가득 채웠다.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는 눈에 다래끼가 났을 때 물두멍을 들여다보고 깜빡이면 다래끼가 그 안으로 빠진다고 일렀다.

부뚜막 벽에 걸어 놓고 쓰는 조리도 복의 상징이었다. ‘조리로 인다.’는 말의 ‘인다’는 일어난다는 뜻으로, 복이 늘어나서 부자가 되는 것을 이른다. 정월 초하루에 한 쌍을 사서 다홍실로 엮은 뒤 대청이나 안방머리에 엇걸어 두는 것을 복조리, 그 안에 넣는 엽전을 복돈이라고 부른 까닭이 이것이다. 값을 깎으면 복이 그만큼 줄어든다며 부르는 대로 내는 것이 관례였다. 못 쓰는 조리를 버리지 않고 한쪽에 오랫동안 걸어 두는 풍습도 마찬가지이다.

부엌의 조왕신은 부뚜막 뒤에 모시고 종지에 담은 물을 신체로 삼았다. 이는 중국에서 신상神像을 받드는 것과 대조를 보인다. 그리고 중국에서 조군竈君 또는 사명조군司命竈君이라 하여 주로 남성으로 다루었지만 우리는 조왕각씨·조왕할망이라 하여 여성으로 섬겼다. 주인 아낙은 아침마다 물을 새로 갈아 부으며 그 날 하루 온 식구의 평안을 빌었다. 또 군대에 간 아들이나 집 떠난 식구를 위해 끼니마다 겨울에는 놋주발, 여름에는 흰 사기주발에 밥을 퍼서 조왕에게 올렸다. 밥그릇이 예 있으니 굶지 말고 잘 있다가 돌아오라는 뜻이다.

신체는 곳에 따라 다르다. 경기도에서는 바가지에 담은 삼베조각, 강원도에서는 네모로 접은 종이에 덧 걸어 놓은 명태를 섬겼다. 신체가 따로 없는 경북 지역에서는 뒤집어 놓는 소댕에다 제물을 차린다. 한편 절집에서는 중국처럼 조왕신상[幀畵]으로 대신하였다.

조왕신이 해마다 12월 25일 하늘에 올라가 그 집에서 한 해 동안 일어난 일을 알리면 옥황상제가 내용에 따라 알맞은 복을 내린다고 하여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집에서는 전날 아궁이에 엿을 발라 두어서 조왕의 입을 봉하였다.

특징 및 의의

우리네 부엌은 온 식구의 건강을 지켜 주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반드시 갖춘 까닭이 이것이다. 또 여성의 성역이기도 하여 남성은 가까이 가지 못하였으며, 모든 집안 살림살이는 주관자인 주부가 맡아서 처리하였다.

물러나는 시어머니가 새 며느리에게 주걱을 넘겨준 것도 부엌이 주부권의 상징임을 나타낸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날 일가와 마을의 노부인이 모인 자리에서 건네며, 작은 잔치도 베풀었다. 이와 달리 일본에서는 곳간열쇠를 맡긴다. 열쇠가 주걱보다 커 보이지만 배를 불리려면 주부가 밥을 많이 담아야 하는 점에서 주걱이 더 현실성이 있다.

우리나라 부뚜막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에쿠안 겐지榮久庵憲司는 “부뚜막이 (조선)반도에서 들어오기까지 땅을 파고 만든 화덕爐을 썼다”라고 적었고, 가노도시쓰구狩野敏次도 “부뚜막은 5세기쯤 조선반도에서 들어왔으며, 조선에서 솥[釜]을 가마kama라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가마’도 본디 조선어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나미 고어사전岩波古語辭典』에도 가마竈釜의 뿌리는 조선어 ‘kama’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한데 부엌을 가라카마도[韓竈]라고 부르며, 굴뚝을 가리키는 ‘구도久度’도 우리말 굴뚝에서 왔다. 우리가 17세기까지 이를 굴·ㅅ·독으로 적은 것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일본 곳곳에 있는 한조신사韓竈神社도 빼놓을 수 없다.

참고문헌

동아시아의 부엌(김광언, 눌와, 2015), 한국식생활풍속(강인회·이경복, 삼영사, 1984), かまど(狩野敏次, 法政大學出版局, 2004), 台所の歷史(榮久庵憲司, 柴田書店,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