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령(直領)

한자명

直領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이주영(李珠英)

정의

옷깃이 곧고 양 옆에 사각형의 무가 달린 직령교임直領交衽의 남성용 포袍.

내용

직령直領은 문자 그대로 ‘곧은 깃’이라는 의미로서 깃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고, 포枹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깃 양식으로서의 직령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에서 동시에 확인되지만, 포제로서의 직령은 우리나라 문헌에서만 확인되는 우리나라 고유의복명이다. 직령과 동일한 형태의 포가 중국에도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직신直身이라고 하였다. 직신은 『노걸대老乞大』에 ‘압록사직신鴨綠紗直身’이라고 처음으로 기록되었고,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에 ‘딕령’으로 언해되었다. 직령과 관련된 용어로 직령의直領衣, 직령포直領袍, 직령교임식포直領交衽式袍가 있다. 직령의는 직령이 상례복과 제례복으로 착용될 경우 사용되기도 했던 직령의 이명異名이다. 직령포와 직령교임식포는 깃이 직령교임으로 된 모든 포를 통칭하는 용어로서, 직령도 직령포 또는 직령교임식포의 한 종류에
속한다.
직령은 고려 말 1387년(우왕 13) 6월에 명나라 제도에 의해 호복胡服을 개혁할 때, ‘각 영領의 위尉와 정正, 그리고 직職이 있는 백성百姓의 관복官服’으로 규정되면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이조년李兆年(1269~1343)과 이조년의 아들 이포李褒(?~1373)의 초상화에서 이미 직령을 입고 있어 1387년 이전에도 착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1446년(세종 28) 5월에 복색상정조건服色詳定條件을 의논하면서 “서인庶人 각사제원各司諸員, 대장隊長, 대부隊副, 외방外方의 일수양반日守兩班, 공상工商, 천예賤隷는 단령을 없애고 통通하여 철릭[帖裏], 액추의腋皺衣, 직령의直領衣를 입을 것”이라 정하였다.
직령은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도로 착용되었다. 즉, 왕·왕세자·왕세손·문무백관·하급관리의 상례복喪禮服, 왕세자·문무백관·사대부의 제례복祭禮服, 왕·왕세자·왕실종친·사대부의 편복便服으로 착용되었고, 하급 관리와 서인·공상천예 출신으로서 관직이 있거나 역役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평상시 업무를 볼 때 상복常服으로 착용되었다. 이렇듯 직령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편복포로서 조선 전기에는 주로 문관이 착용하였으나 17세기 후반부터는 무관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영정조 대에 무관이 직령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였음에도 순조 대에 이르러서는 직령이 무관의 편복용 포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문관들은 직령 대신 도포를 널리 착용하게 되었다. 직령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착용되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착용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사회적 역할 또한 작아졌다. 크게 세 차례의 계기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임란왜란 이후 도포와 심의가 편복포로 널리 착용되면서였다. 두 번째는 영·정조 대에 도포·중치막·창의·주의·장의 등이 편복 포로 보편화되면서였다. 마지막으로 1884년(고종 21), 1894년(고종 31)에 도포·직령·창의·중의 등 소매가 넓은 포(광수의廣袖衣)를 폐지하고 모두 소매가 좁은 포(착수의窄袖衣)를 입도록 하는 사복 개혁 조치가 내려지면서 직령의 역할이 작아졌다. 직령은 19세기 중반 이후에 소매가 넓은 두리소매이면두루마기와 같은 형태로도 만들어졌으며, 20세기 초까지 착용되다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직령은 하나의 독립된 겉옷으로 착용되기도 하고 관복 단령團領의 받침옷으로 착용되기도 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겉옷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단령의 받침옷으로 더 많이 착용되었다. 직령이 단령의 받침옷으로 착용된 경우, 조선 전기에는 직령과 단령을 각각 따로 만들어 두 벌의 옷을 함께 입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 직령이 단령의 안감으로 변화되어 겉감은 단령이고 안감은 직령인 한 벌의 겹옷으로 만들어 입었다.

특징 및 의의

직령은 양옆에 한 폭 내지 한 폭 반으로 만든 사각형의 자락, 즉 무가 달렸다는 점에서 다른 포들과 구별되었다. 무는 직령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착용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무는 옆선에 달리는 위치에 따라 안주름형, 안팎주름형, 밭주름형, 뒤젖힘형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안주름형은 무 전체가 옆선 안으로 들어가 주름으로 처리된 유형이고, 안팎주름형은 무의 일부가 옆선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옆선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겨드랑이 위치까지 접혀 들어간 유형이다. 밭주름형은 무 전체가 옆선 밖으로 나와 한 개의 큰 주름으로 처리된 유형이고, 뒤젖힘형은 무 위쪽을 뾰족하게 접어서 뒷길 쪽으로 넘겨 고정한 유형이다. 무를 길에 고정하는 방법도 달랐는데, 안주름형·안팎주름형 무는 온당침으로 고정하였고, 밭주름형 무는 겉에서 징그듯이 고정하거나 겨드랑이 안쪽과 무 위쪽에 각각 끈(너비 약 0.3~0.5, 길이 약 8~16)을 달아 끈을 서로 묶어서 고정하였으며, 뒤젖힘형 무는 뒷길로 넘긴 무의 위쪽 뾰족한 부분에 매듭단추를 달아 고정하거나 무를 뒷길 위에 놓고 윗부분을 꿰매어 고정하였다. 직령에 달린 무는 단령답호에서도 볼 수 있고, 시기 변화에 따른 무의 변화 양상도 동일하였다. 다만, 답호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전복戰服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단령·직령의 무와는 달리 삼각형 모양의 무가 달리게 되었다.
직령의 형태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서서히 변화되었는데, 형태 변화가 두드러지는 부위는 앞·뒤 옷길이, 깃, 섶, 소매, 무, 고름 등이다. 직령의 시기별 형태 변화를 보면, 조선 초기에서 16세기 전반까지는 앞길이가 뒷길이보다 짧은 전단후장형前短後長形, 이중선이 있는 깎은 목판깃과 칼깃, 두 개의 섶을 이어서 겉섶으로 만든 이중섶, 소매통이 좁으면서 배래선이 직선에 가까운 착수형 소매가 주로 나타난다. 무는 안주름형과 안팎주름형이 공존하는 가운데 안팎주름형이 주류를 이룬다.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전반까지는 앞과 뒤의 길이가 동일한 전후동장형前後同長形, 이중선이 없는 칼깃이 주로 나타난다. 겉섶은 한 개의 섶으로 겉섶을 만든 단섶도 나타나지만 여전히 이중섶이 주로 나타나고, 소매는 소매통이 점점 넓어지면서 배래선이 완만한 곡선으로 변화되었다. 무는 안주름형·안팎주름형· 밭주름형·뒤젖힘형 등 모든 유형이 공존하는 가운데 안팎주름형이 밭주름형으로 변화되고 밭주름형이 다시 뒤젖힘형으로 변화되었다. 17세기 중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는 전후동장형, 깃 궁둥이가 완만한 둥그레깃, 단섶, 소매통이 전체 옷 길이의 반 정도까지 넓은 두리소매가 주로 나타나고, 무는 뒤젖힘형으로 정착되었다. 고름은 17세기 후반 경 좁고 짧은 끈 고름 한 쌍(너비 약 2~3.5cm, 길이 약 25~30cm 정도)에서 넓고 긴 고름 한 쌍(너비 약 5.5~7cm, 길이 약 67~95cm 정도)으로 변화되었다.
직령은 홑·겹·솜 등으로 만들어 사계절 두루 착용되었는데 색상과 재질은 용도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다. 상례복으로서의 직령에는 소색素色 생포生布가 사용되었고, 제례복으로서의 직령에는 흰색 포布와 마포麻布가 사용되었다. 편복으로서의 직령에는 백색·홍색· 토홍색·황단색·초록색·아청색 등의 면포綿布·면주綿紬, 모단毛緞 등 고급 직물이 사용되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는 홍색 직령이, 이후에는 초록색 직령이 선호되었다. 관복으로 사용된 직령에는 백색·홍색·녹색 등의 면포·마포·저포 등 실용적인 재질이 사용되었는데, 홍색과 녹색은 행차할 때 시각적 착장미가 중요시되었던 궐내 하급 관리들에게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여산 송씨일가 묘 출토 남자 포의 조형 및 구성 특성(이주영, 옷섶사이로 비치는 조선, 대전선사박물관, 2009), 조선시대 직령 연구(이주영,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직령에 관한 연구(김미자, 복식5, 한국복식학회, 1981), 직령의 부위별 형태 특성과 상호간의 관련성 연구(이주영, 복식54-5, 한국복식학회, 2004), 한국복식사전(강순제 외, 민속원, 2015).

직령

직령
한자명

直領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이주영(李珠英)

정의

옷깃이 곧고 양 옆에 사각형의 무가 달린 직령교임直領交衽의 남성용 포袍.

내용

직령直領은 문자 그대로 ‘곧은 깃’이라는 의미로서 깃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고, 포枹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깃 양식으로서의 직령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에서 동시에 확인되지만, 포제로서의 직령은 우리나라 문헌에서만 확인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의복명이다. 직령과 동일한 형태의 포가 중국에도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직신直身이라고 하였다. 직신은 『노걸대老乞大』에 ‘압록사직신鴨綠紗直身’이라고 처음으로 기록되었고,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에 ‘딕령’으로 언해되었다. 직령과 관련된 용어로 직령의直領衣, 직령포直領袍, 직령교임식포直領交衽式袍가 있다. 직령의는 직령이 상례복과 제례복으로 착용될 경우 사용되기도 했던 직령의 이명異名이다. 직령포와 직령교임식포는 깃이 직령교임으로 된 모든 포를 통칭하는 용어로서, 직령도 직령포 또는 직령교임식포의 한 종류에
속한다.
직령은 고려 말 1387년(우왕 13) 6월에 명나라 제도에 의해 호복胡服을 개혁할 때, ‘각 영領의 위尉와 정正, 그리고 직職이 있는 백성百姓의 관복官服’으로 규정되면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이조년李兆年(1269~1343)과 이조년의 아들 이포李褒(?~1373)의 초상화에서 이미 직령을 입고 있어 1387년 이전에도 착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1446년(세종 28) 5월에 복색상정조건服色詳定條件을 의논하면서 “서인庶人 각사제원各司諸員, 대장隊長, 대부隊副, 외방外方의 일수양반日守兩班, 공상工商, 천예賤隷는 단령을 없애고 통通하여 철릭[帖裏], 액추의腋皺衣, 직령의直領衣를 입을 것”이라 정하였다.
직령은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도로 착용되었다. 즉, 왕·왕세자·왕세손·문무백관·하급관리의 상례복喪禮服, 왕세자·문무백관·사대부의 제례복祭禮服, 왕·왕세자·왕실종친·사대부의 편복便服으로 착용되었고, 하급 관리와 서인·공상천예 출신으로서 관직이 있거나 역役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평상시 업무를 볼 때 상복常服으로 착용되었다. 이렇듯 직령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편복포로서 조선 전기에는 주로 문관이 착용하였으나 17세기 후반부터는 무관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영정조 대에 무관이 직령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였음에도 순조 대에 이르러서는 직령이 무관의 편복용 포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문관들은 직령 대신 도포를 널리 착용하게 되었다. 직령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착용되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착용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사회적 역할 또한 작아졌다. 크게 세 차례의 계기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임란왜란 이후 도포와 심의가 편복포로 널리 착용되면서였다. 두 번째는 영·정조 대에 도포·중치막·창의·주의·장의 등이 편복 포로 보편화되면서였다. 마지막으로 1884년(고종 21), 1894년(고종 31)에 도포·직령·창의·중의 등 소매가 넓은 포(광수의廣袖衣)를 폐지하고 모두 소매가 좁은 포(착수의窄袖衣)를 입도록 하는 사복 개혁 조치가 내려지면서 직령의 역할이 작아졌다. 직령은 19세기 중반 이후에 소매가 넓은 두리소매이면서 두루마기와 같은 형태로도 만들어졌으며, 20세기 초까지 착용되다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직령은 하나의 독립된 겉옷으로 착용되기도 하고 관복 단령團領의 받침옷으로 착용되기도 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겉옷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단령의 받침옷으로 더 많이 착용되었다. 직령이 단령의 받침옷으로 착용된 경우, 조선 전기에는 직령과 단령을 각각 따로 만들어 두 벌의 옷을 함께 입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 직령이 단령의 안감으로 변화되어 겉감은 단령이고 안감은 직령인 한 벌의 겹옷으로 만들어 입었다.

특징 및 의의

직령은 양옆에 한 폭 내지 한 폭 반으로 만든 사각형의 자락, 즉 무가 달렸다는 점에서 다른 포들과 구별되었다. 무는 직령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착용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무는 옆선에 달리는 위치에 따라 안주름형, 안팎주름형, 밭주름형, 뒤젖힘형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안주름형은 무 전체가 옆선 안으로 들어가 주름으로 처리된 유형이고, 안팎주름형은 무의 일부가 옆선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옆선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겨드랑이 위치까지 접혀 들어간 유형이다. 밭주름형은 무 전체가 옆선 밖으로 나와 한 개의 큰 주름으로 처리된 유형이고, 뒤젖힘형은 무 위쪽을 뾰족하게 접어서 뒷길 쪽으로 넘겨 고정한 유형이다. 무를 길에 고정하는 방법도 달랐는데, 안주름형·안팎주름형 무는 온당침으로 고정하였고, 밭주름형 무는 겉에서 징그듯이 고정하거나 겨드랑이 안쪽과 무 위쪽에 각각 끈(너비 약 0.3~0.5, 길이 약 8~16)을 달아 끈을 서로 묶어서 고정하였으며, 뒤젖힘형 무는 뒷길로 넘긴 무의 위쪽 뾰족한 부분에 매듭단추를 달아 고정하거나 무를 뒷길 위에 놓고 윗부분을 꿰매어 고정하였다. 직령에 달린 무는 단령과 답호에서도 볼 수 있고, 시기 변화에 따른 무의 변화 양상도 동일하였다. 다만, 답호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전복戰服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단령·직령의 무와는 달리 삼각형 모양의 무가 달리게 되었다.
직령의 형태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서서히 변화되었는데, 형태 변화가 두드러지는 부위는 앞·뒤 옷길이, 깃, 섶, 소매, 무, 고름 등이다. 직령의 시기별 형태 변화를 보면, 조선 초기에서 16세기 전반까지는 앞길이가 뒷길이보다 짧은 전단후장형前短後長形, 이중선이 있는 깎은 목판깃과 칼깃, 두 개의 섶을 이어서 겉섶으로 만든 이중섶, 소매통이 좁으면서 배래선이 직선에 가까운 착수형 소매가 주로 나타난다. 무는 안주름형과 안팎주름형이 공존하는 가운데 안팎주름형이 주류를 이룬다.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전반까지는 앞과 뒤의 길이가 동일한 전후동장형前後同長形, 이중선이 없는 칼깃이 주로 나타난다. 겉섶은 한 개의 섶으로 겉섶을 만든 단섶도 나타나지만 여전히 이중섶이 주로 나타나고, 소매는 소매통이 점점 넓어지면서 배래선이 완만한 곡선으로 변화되었다. 무는 안주름형·안팎주름형· 밭주름형·뒤젖힘형 등 모든 유형이 공존하는 가운데 안팎주름형이 밭주름형으로 변화되고 밭주름형이 다시 뒤젖힘형으로 변화되었다. 17세기 중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는 전후동장형, 깃 궁둥이가 완만한 둥그레깃, 단섶, 소매통이 전체 옷 길이의 반 정도까지 넓은 두리소매가 주로 나타나고, 무는 뒤젖힘형으로 정착되었다. 고름은 17세기 후반 경 좁고 짧은 끈 고름 한 쌍(너비 약 2~3.5cm, 길이 약 25~30cm 정도)에서 넓고 긴 고름 한 쌍(너비 약 5.5~7cm, 길이 약 67~95cm 정도)으로 변화되었다.
직령은 홑·겹·솜 등으로 만들어 사계절 두루 착용되었는데 색상과 재질은 용도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다. 상례복으로서의 직령에는 소색素色 생포生布가 사용되었고, 제례복으로서의 직령에는 흰색 포布와 마포麻布가 사용되었다. 편복으로서의 직령에는 백색·홍색· 토홍색·황단색·초록색·아청색 등의 면포綿布·면주綿紬, 모단毛緞 등 고급 직물이 사용되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는 홍색 직령이, 이후에는 초록색 직령이 선호되었다. 관복으로 사용된 직령에는 백색·홍색·녹색 등의 면포·마포·저포 등 실용적인 재질이 사용되었는데, 홍색과 녹색은 행차할 때 시각적 착장미가 중요시되었던 궐내 하급 관리들에게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여산 송씨일가 묘 출토 남자 포의 조형 및 구성 특성(이주영, 옷섶사이로 비치는 조선, 대전선사박물관, 2009), 조선시대 직령 연구(이주영,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직령에 관한 연구(김미자, 복식5, 한국복식학회, 1981), 직령의 부위별 형태 특성과 상호간의 관련성 연구(이주영, 복식54-5, 한국복식학회, 2004), 한국복식사전(강순제 외, 민속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