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翟衣)

한자명

翟衣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박성실(朴聖實)

정의

왕비, 세자빈, 세손빈 등 왕실의 적통을 잇는 비빈이 착용하는 대례용 법복法服.

내용

적의는 관복冠服, 명복命服, 예복禮服이라고도 하였다. 적의제도는 시대에 따라 크게 4단계의 변화를 거쳤다. 1단계는 고려시대 1370년(공민왕 19) 명나라에서 공민왕비에게 적문翟紋이 있는 심청색 9등 적의 일습을 보내와 처음으로 왕비 관복으로 수용하였다. 2단계는 1403년(태종 3)부터 1625년(인조 3)까지 명에서 조선 전기의 역대 왕비에게 대홍색 대삼大衫 일습을 관복으로 사여받아 이를 적의로 착용하였으며, 3단계는 1627년(인조 5)부터 1882년(고종 19)까지 대삼에 기초한 조선식의 후기 적의제도가 완성되어 시행되었다. 4단계는 1897년(고종 34) 대한제국의 성립으로 황제국 제도에 따른 황후용 심청색 12등 적의제도로 개정된 것이다. 이상의 적의제도는 명 황실의 관복제도에 근거한 것이며 적의를 착용할 때는 옷을 포함하여 관冠에서 대帶, 의례신발과 다양한 부속품까지 일습을 갖추었다. 적의는 왕비나 세자빈으로 책봉 받을 때, 국혼인 가례嘉禮 시 친영의와 동뢰연, 조현례朝見禮 그 밖에도 명절이나 탄신일에 조하朝賀를 받을 때, 궁중 연회, 존호를 올릴 때 등에 착용하였다. 묘현례廟見禮에는 제복祭服으로, 국장國葬 시에는 대렴의로 사용되었다.
공민왕비 적의 일습은 꿩7, 봉황 2마리와 크고 작은 수식이 있는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 청색 바탕에 꿩무늬를 9등으로 수놓은 적의, 적의 속에 입는 소사중단素紗中單, 의식용 폐슬蔽膝과 후수後綬, 패옥佩玉, 대대大帶, 옥혁대玉革帶, 의식용 버선인 청말靑襪과 신발 청석靑舃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민왕비 적의는 송나라 명부命婦 제1품 관복에 해당하였다.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송 인종仁宗(1022~1063) 황후 좌상에서 당시의 제도를 참조할 수 있으며, 대한제국의 황실용 적의제도와 유사하다.
조선 전기 왕비의 적의 일습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과 대홍소저사대삼大紅素紵絲大衫, 청저사채수권금적계배자靑紵絲綵繡圈金翟鷄褙子와 청선라채수권금적계하피靑線羅綵繡圈金翟鷄霞帔, 하피 중앙에 달리는 장식용 삽화금추자鈒花金墜子, 의식용으로 손에 잡는 상아여홀象牙女笏 등이다. 대삼은 명 황후와 황태자비의 상복常服이자 황비皇妃 이하의 예복으로, 예복은 대홍색으로 규정되어 있다. 사여된 대삼은 대홍색의 무늬가 없는 비단[素紵絲]으로 장식이 없고 하피와 배자는 청색 비단에 금적계문金翟鷄紋을 수 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삼은 하피와 일습으로 구성되며 하피의 문양은 신분에 따라 구분되었다. 칠적관을 착용하는 명明의 군왕비群王妃 하피는 심청색의 금수운하적문金繡雲霞翟紋이며 배자[四楑襖子]는 도홍색의 금수적문, 홀은 옥곡규玉穀圭로 되어 있다. 반면 공후公侯 및 명부命婦 1품과 2품 하피와 배자는 심청색 비단에 금수운하적문이 있는 것이며 홀은 상아홀이었다. 조선의 관복은 명 황실의 관복제도에 준하여 규정되었으나 적계문 하피는 『대명회전』, 『명실록』 등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중국 남창南昌에서 발굴된 명 영정왕寧靖王 부인 오씨吳氏(1439~1502)의 대삼, 하피, 금추자 등 유물을 참조할 수 있다. 무문단無紋緞 대삼은 맞깃[對衿]에 소매가 넓고 앞이 짧고 뒤가 긴 전단후장형前短後長形 홑옷이며 진동 아래부터 길게 트여 있고 넓은 동정이 달려 있다. 라羅로 만든 하피는 한 폭을 반으로 나누어 두 장을 길게 이어 너비 13,
총길이 245 긴 띠의 형태로 만들고 이은 부분을 삼각형 형태로 접고 끝에 금추자를 걸게 되어 있다. 마치 조선의 신부용 도투락댕기와 유사한 형태이다. 한쪽에 적문翟紋 7개씩 14개와 구름문을 금사로 수놓았으며 단추와 끈이 달려 있다. 하피는 금추자가 달린 부분을 앞 중심에 오도록 하고 나머지는 양 어깨에 걸쳐 등판에 달린 삼각형 주머니 두자兜子에 넣었다. 대삼과 하피를 착용한 황후상 복원도를 보면 앉아 있을 때 금추자는 앞 도련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전기 적의 착용법에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태종 대에는 명에서 가져온 왕비 관복 착용법을 알지 못하여 귀화인 명승明昇 모친이 궁중에 들어와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적의는 명의 멸망으로 사여가 중단되어 소현세자 가례(1627)부터 직접 제작하였다. 대삼제도에 근거한 조선의 제도가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칠적관은 계해년(1623) 이후부터 체발髢髮로 수식을 대체하였다. 『인조장렬후가례도감의궤』(1638)에는 유일하게 채색된 도설자료가 남아 있다. 적의 일습은 대홍광적廣的 대삼·아청모단冒段 하피·옥대·수綬·패옥·대대·청옥규靑玉圭·적말赤襪·적석赤舃 등이며, 적관을 대신하여 체발髢髮 68단 5개, 크고 작은 비녀가 있다. 대삼은 오씨 부인 유물과 유사하나 운봉雲鳳 흉배가 달리고 어깨와 옆선에는 봉황과 유사하게 수놓은 수원적繡圓翟 36개를 달아 꿩무늬[翟紋]를 표현하였다. 하피는 오씨 유물 제작 과정처럼 모단 6척을 반으로 갈라 길게 이어서 길이가 두배로 길어져 적계문翟鷄紋도 14개씩 28개로 늘어난 상태이다. 이미 완성된 하피를 기준하여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비롯된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대삼의 색상은 세자빈 아청색, 왕대비와 대왕대비 자적색, 혜경궁 홍씨는 천청색天靑色으로 구분하였다. 영조 대에 이르러 완성된 적의 제도는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1751)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왕비 예복제도로 제시된 적의 일습은 규·수식· 적의·하피·상裳·대대·옥대·패옥·후수·폐슬·말·석
등이다.
규는 백옥이며 형태는 전하의 규와 같다. 전하의 규는 길이 9촌, 너비 3촌, 끝을 뾰족하게 깍는 염수는 1촌 5푼이다. 세자빈, 세손빈은 청옥규이다. 수식은 1623년부터 체발로 수식을 대신하였으나 점차 줄어 영조 대부터 10단으로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적의는 대홍단으로 하며 앞은 배자와 같이 맞깃형으로 내려오고 앞길이는 치마 끝에 닿으며 뒤는 1척이 길게 하였다. 오조원용보五爪圓龍補를 달고 수원적 51개를 부착한다. 왕세자빈 적의는 흑단으로 하고 수원적 51개는 왕비와 같으며 사조원용보를 달아 차이를
두었다.
하피는 흑단을 겉으로, 안감은 홍초로 하고 운하雲霞 28개, 적문 26개를 금가루로 그려준다. 왕세자빈은 왕비와 같게 하였다. 현재 심청색 12등 적의와 9등 적의 유물에는 운문과 적문이 각각 26개씩 부금된 하피가 포함되어 있고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하피에는 운문 25개, 용문 24개가 부금되어 있다. 심청색 적의제도에는 하피가 포함되지 않으나 조선의 적의로 착용되었던 대삼용 하피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상은 청단靑緞으로 하고 앞 3폭과 뒤 4폭으로 된 잔주름 치마이다. 왕비는 직금織金한 용무늬 스란[膝蘭]이며 왕세자빈은 봉무늬 스란이다. 현재 심청색 적의용 위치마[上裳] 유물이 남아있다.
대대는 허리에 두르는 띠를 말하며 겉 대홍단, 안을 백릉白綾으로 하고 녹색으로 선[緣]을 두른다. 양옆에 달린 청색의 띠로 매어준다. 왕세자빈도 같다. 옥대는 대대 위에 띠는 대로서 왕비는 조작한 옥을, 왕세자빈은 조각하지 않은 옥을 사용한다. 청단으로 싸고 금으로 봉鳳을 그려 주도록 하였다.
수는 후수를 말하며 전하와 동일하였다. 당시의 후수는 1746년(영조 22)부터 수입품(홍화금) 대신 적· 청·현玄·표縹·녹색의 5색단을 제직하여 만들었다. 대대와 함께 허리 뒤에 착용한다. 패는 패옥을 말하며 크고 작은 옥이 5줄로 연결되어 있으며 받침은 후수와 같이 5색단이다. 허리 양옆에 드리운다. 폐슬은 가슴 부위에 부착하는 의식 용구로서 전하의 면복 폐슬과 동일하나 장문이 없이 다홍색 비단으로 만든 직사각형 형태이다. 왕비의 말은 적말이며, 왕세자빈은 흑단으로 만들었다. 석은 전하의 석과 같이 적석이며 다만 신코에 홍과 녹색 비단실로 만든 사화絲花 3개를 단다. 왕세자빈은 흑단이며 사화는 왕비와 동일하였다. 이 외에도 『국혼정례』(1749)와 『상방정례』(1750), 역대 국혼 기록인 『가례도감의궤』(1627~1906)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은 1897년(고종 34)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국의 위상을 대표하는 황실 관복제도를 새로 규정하였다. 『대명회전』 1405년(영락 3)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대한예전』 제복과 관복 도설에 기록되어 있다. 황후의 관복은 적문이 있는 심청색 적의 제도로 바뀌었으며, 황태자 순종과 계비 윤씨의 병오년(1906) 『가례도감의궤』에는 적의 일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체발 10단·백옥규·심청색 적의·옥색사 중단·폐슬·옥대·대대·수·옥패·청말·청석과 모단 하피와 함께 대홍 대삼도 포함되어 있다.
유물은 국가민속문화재 제67호 12등 적의본과 폐슬본, 국가민속문화재 제54호 황후 적의, 중단, 폐슬, 하피. 국가민속문화재 제55호 황후 청석, 국가민속문화재 제265호 영친왕 일가 복식 가운데 영친왕비 9등 적의와 부속품이 있다. 대한제국의 적의는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明憲太后(효정왕후, 1831~1904)가 황제 등극 이틀 후에 황태자비 민씨로부터 조알朝謁을 받을 때 처음으로 착용하였다.
세종대학교박물관 소장 황후 적의는 다채한 색사로 적문을 제직한 심청색 채적문단彩翟紋緞으로 12등 148쌍의 적문과 조선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李花紋이 제직되어 있다. 가장자리는 대홍색 직금운용문능織金雲龍紋綾으로 둘렀고, 금사 오조룡원보五爪龍圓補가 달려 있다. 중단은 회색 비단에 홍색선을 둘렀으며, 깃 중심 좌우로 11개의 아자亞字형 불문黻紋이 금박되어 있다. 폐슬은 적의와 동일한 바탕에 대홍색 직금운용문단으로 가선되어 있고 이화문 4단, 적문 3단이 쌍으로 제직되어 있으며 위에는 폐슬을 고정하는 걸개[鉤子]가 달려 있다. 하피는 검은색 공단에 분홍색 고운 명주를 받쳤으며 운문과 적문이 각각 26개가 부금되어 있다. 길이 495cm 너비 11cm이며 중앙과 11번째 운문 있는 가장자리에 1개씩 총 3개의 단추가 달려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적문은 위를 향하게 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친왕비 적의는 일습이 남아 있다. 적관은 체발과 다양한 수식품으로 되어 있다. 옥규는 백옥이며 길이 14.5cm, 너비 7cm이며 곡식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상단은 둥근 산山형이며, 다홍색 공단으로 손잡이 부분이 씌워져 있다. 적의는 12등 적의와 동일하나 138쌍의 적문과 168개의 이화문이 직성되어 있고, 오조룡보가 달리고 대홍색 가선은 운봉문으로 되어 있다. 중단은 청회색 견絹이며 가장자리는 다홍색 비단으로 선을 둘렀고, 불문 11개가 금박되었다. 하피는 황후용과 동일하나 단추가 없다. 상은 위치마[上裳] 또는 전행웃치마로서 수복과 화문이 직금된 3가닥의 남색 잔주름 스란치마이다. 대대는 흰 공단에 안은 홍색이며 가장자리는 연녹색의 선을 둘렀고, 후수는 5색단으로 만들고 금환 1쌍이 달려 있다. 옥대는 청단으로 싸고 조각하지 않은 백옥을 사용하였고, 금선장식은 자국만 남아 있다. 폐슬은 황후용과 유사하나 적문 2단, 이화문 3단이 배치되어 있고 홍색 가선에는 봉문과 화염문火焰紋이 금직되어 있다. 패옥은 오색단 받침에 5줄 옥이 있으며 면복 패옥함이라 명문이 있는 상자에 들어 있다. 청말과 청석이 있다.
심청색 적의를 착용할 때 하피를 두르는 방법은 매우 중요하다. 하피의 길이가 길어져 명 황실의 방법과 다른 조선식의 방법이 있었을 것이나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진 기록은 없다. 다만 윤황후로부터 황실 관복 일부를 기증받은 전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설립자는 상궁으로부터 전수받은 방법을 알려주어 현재까지 재현하고 있다. 즉 하피에 달린 단추와 적의 고대 양옆에 있는 고리에 끼우면 앞부분 하피는 무릎 아래 위치하게 된다. 뒤는 하피 중앙 고리를 등부분에 달린 가운데 단추에 끼우면 W 형태로 나타나 뒤가 끌리지 않고 정리된다. 등부분에 달린 3개의 단추를 대대를 걸치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진동이 좁아 불가능하다. 또한 전단후장형이며 양옆이 트인 대삼에는 뒤 도련 단추가 필요하나 트임이 없는 심청색 적의에는 불필요하다. 반면 단추가 없는 하피를 착용한 영친왕비의 1922년 4월 조현례시 사진에는 적문의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앞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특징 및 의의

적의는 왕비를 포함하여 왕실의 적통을 잇는 비빈들이 착용하는 대례용 법복으로, 고려 말 공민왕비 이후 1922년 영친왕 가례까지 7세기 가깝게 착용되었던 예복이다. 조선 전기에는 칠적관에 대홍대을 사여받아 왕비의 적의로 착용하였고 후기에는 수원적과 흉배를 부착한 대삼을 신분별로 규정하여 조선의 적의제도를 정비하였다. 대한제국 때는 황후용 12등 심청색 적의제도를 새롭게 시행함으로써 법복을 통하여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은 개국초부터 명 황실의 관복제도를 수용하여 왕과 왕비의 관복으로 착용함으로써 외교적인 정책의 일환이 되었다. 이는 명의 패망 이후에도 지속되어 조선의 위상은 물론 소멸된 동아시아의 전통복식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大明會典, 大韓禮典, 明實錄, 昭顯世子 嘉禮都監儀軌, 純宗純宗妃 嘉禮都監儀軌, 承政院日記, 仁祖莊列后嘉禮都監儀軌, 朝鮮王朝實錄, 尙方定例, 고종대례의궤(서울대학교규장각, 2001), 고궁문화4(국립고궁박물관, 2011), 국역 중국정사여복지(소종 외 역, 민속원, 2014), 문물 권제561기(국가문물국 문물출판사, 2003), 문화재대관-중요민속자료(문화재청, 2006), 영친왕 일가 복식(국립고궁박물관, 2010), 용제총화(성현, 김남이 외 옮김, 2015), 조선왕조궁중의궤복식(유송옥, 수학사, 1991).

적의

적의
한자명

翟衣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박성실(朴聖實)

정의

왕비, 세자빈, 세손빈 등 왕실의 적통을 잇는 비빈이 착용하는 대례용 법복法服.

내용

적의는 관복冠服, 명복命服, 예복禮服이라고도 하였다. 적의제도는 시대에 따라 크게 4단계의 변화를 거쳤다. 1단계는 고려시대 1370년(공민왕 19) 명나라에서 공민왕비에게 적문翟紋이 있는 심청색 9등 적의 일습을 보내와 처음으로 왕비 관복으로 수용하였다. 2단계는 1403년(태종 3)부터 1625년(인조 3)까지 명에서 조선 전기의 역대 왕비에게 대홍색 대삼大衫 일습을 관복으로 사여받아 이를 적의로 착용하였으며, 3단계는 1627년(인조 5)부터 1882년(고종 19)까지 대삼에 기초한 조선식의 후기 적의제도가 완성되어 시행되었다. 4단계는 1897년(고종 34) 대한제국의 성립으로 황제국 제도에 따른 황후용 심청색 12등 적의제도로 개정된 것이다. 이상의 적의제도는 명 황실의 관복제도에 근거한 것이며 적의를 착용할 때는 옷을 포함하여 관冠에서 대帶, 의례용 신발과 다양한 부속품까지 일습을 갖추었다. 적의는 왕비나 세자빈으로 책봉 받을 때, 국혼인 가례嘉禮 시 친영의와 동뢰연, 조현례朝見禮 그 밖에도 명절이나 탄신일에 조하朝賀를 받을 때, 궁중 연회, 존호를 올릴 때 등에 착용하였다. 묘현례廟見禮에는 제복祭服으로, 국장國葬 시에는 대렴의로 사용되었다.
공민왕비 적의 일습은 꿩7, 봉황 2마리와 크고 작은 수식이 있는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 청색 바탕에 꿩무늬를 9등으로 수놓은 적의, 적의 속에 입는 소사중단素紗中單, 의식용 폐슬蔽膝과 후수後綬, 패옥佩玉, 대대大帶, 옥혁대玉革帶, 의식용 버선인 청말靑襪과 신발 청석靑舃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민왕비 적의는 송나라 명부命婦 제1품 관복에 해당하였다.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송 인종仁宗(1022~1063) 황후 좌상에서 당시의 제도를 참조할 수 있으며, 대한제국의 황실용 적의제도와 유사하다.
조선 전기 왕비의 적의 일습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과 대홍소저사대삼大紅素紵絲大衫, 청저사채수권금적계배자靑紵絲綵繡圈金翟鷄褙子와 청선라채수권금적계하피靑線羅綵繡圈金翟鷄霞帔, 하피 중앙에 달리는 장식용 삽화금추자鈒花金墜子, 의식용으로 손에 잡는 상아여홀象牙女笏 등이다. 대삼은 명 황후와 황태자비의 상복常服이자 황비皇妃 이하의 예복으로, 예복은 대홍색으로 규정되어 있다. 사여된 대삼은 대홍색의 무늬가 없는 비단[素紵絲]으로 장식이 없고 하피와 배자는 청색 비단에 금적계문金翟鷄紋을 수 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삼은 하피와 일습으로 구성되며 하피의 문양은 신분에 따라 구분되었다. 칠적관을 착용하는 명明의 군왕비群王妃 하피는 심청색의 금수운하적문金繡雲霞翟紋이며 배자[四楑襖子]는 도홍색의 금수적문, 홀은 옥곡규玉穀圭로 되어 있다. 반면 공후公侯 및 명부命婦 1품과 2품 하피와 배자는 심청색 비단에 금수운하적문이 있는 것이며 홀은 상아홀이었다. 조선의 관복은 명 황실의 관복제도에 준하여 규정되었으나 적계문 하피는 『대명회전』, 『명실록』 등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중국 남창南昌에서 발굴된 명 영정왕寧靖王 부인 오씨吳氏(1439~1502)의 대삼, 하피, 금추자 등 유물을 참조할 수 있다. 무문단無紋緞 대삼은 맞깃[對衿]에 소매가 넓고 앞이 짧고 뒤가 긴 전단후장형前短後長形 홑옷이며 진동 아래부터 길게 트여 있고 넓은 동정이 달려 있다. 라羅로 만든 하피는 한 폭을 반으로 나누어 두 장을 길게 이어 너비 13,
총길이 245 긴 띠의 형태로 만들고 이은 부분을 삼각형 형태로 접고 끝에 금추자를 걸게 되어 있다. 마치 조선의 신부용 도투락댕기와 유사한 형태이다. 한쪽에 적문翟紋 7개씩 14개와 구름문을 금사로 수놓았으며 단추와 끈이 달려 있다. 하피는 금추자가 달린 부분을 앞 중심에 오도록 하고 나머지는 양 어깨에 걸쳐 등판에 달린 삼각형 주머니 두자兜子에 넣었다. 대삼과 하피를 착용한 황후상 복원도를 보면 앉아 있을 때 금추자는 앞 도련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전기 적의 착용법에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태종 대에는 명에서 가져온 왕비 관복 착용법을 알지 못하여 귀화인 명승明昇 모친이 궁중에 들어와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적의는 명의 멸망으로 사여가 중단되어 소현세자 가례(1627)부터 직접 제작하였다. 대삼제도에 근거한 조선의 제도가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칠적관은 계해년(1623) 이후부터 체발髢髮로 수식을 대체하였다. 『인조장렬후가례도감의궤』(1638)에는 유일하게 채색된 도설자료가 남아 있다. 적의 일습은 대홍광적廣的 대삼·아청모단冒段 하피·옥대·수綬·패옥·대대·청옥규靑玉圭·적말赤襪·적석赤舃 등이며, 적관을 대신하여 체발髢髮 68단 5개, 크고 작은 비녀가 있다. 대삼은 오씨 부인 유물과 유사하나 운봉雲鳳 흉배가 달리고 어깨와 옆선에는 봉황과 유사하게 수놓은 수원적繡圓翟 36개를 달아 꿩무늬[翟紋]를 표현하였다. 하피는 오씨 유물 제작 과정처럼 모단 6척을 반으로 갈라 길게 이어서 길이가 두배로 길어져 적계문翟鷄紋도 14개씩 28개로 늘어난 상태이다. 이미 완성된 하피를 기준하여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비롯된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대삼의 색상은 세자빈 아청색, 왕대비와 대왕대비 자적색, 혜경궁 홍씨는 천청색天靑色으로 구분하였다. 영조 대에 이르러 완성된 적의 제도는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1751)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왕비 예복제도로 제시된 적의 일습은 규·수식· 적의·하피·상裳·대대·옥대·패옥·후수·폐슬·말·석
등이다.
규는 백옥이며 형태는 전하의 규와 같다. 전하의 규는 길이 9촌, 너비 3촌, 끝을 뾰족하게 깍는 염수는 1촌 5푼이다. 세자빈, 세손빈은 청옥규이다. 수식은 1623년부터 체발로 수식을 대신하였으나 점차 줄어 영조 대부터 10단으로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적의는 대홍단으로 하며 앞은 배자와 같이 맞깃형으로 내려오고 앞길이는 치마 끝에 닿으며 뒤는 1척이 길게 하였다. 오조원용보五爪圓龍補를 달고 수원적 51개를 부착한다. 왕세자빈 적의는 흑단으로 하고 수원적 51개는 왕비와 같으며 사조원용보를 달아 차이를
두었다.
하피는 흑단을 겉으로, 안감은 홍초로 하고 운하雲霞 28개, 적문 26개를 금가루로 그려준다. 왕세자빈은 왕비와 같게 하였다. 현재 심청색 12등 적의와 9등 적의 유물에는 운문과 적문이 각각 26개씩 부금된 하피가 포함되어 있고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하피에는 운문 25개, 용문 24개가 부금되어 있다. 심청색 적의제도에는 하피가 포함되지 않으나 조선의 적의로 착용되었던 대삼용 하피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상은 청단靑緞으로 하고 앞 3폭과 뒤 4폭으로 된 잔주름 치마이다. 왕비는 직금織金한 용무늬 스란[膝蘭]이며 왕세자빈은 봉무늬 스란이다. 현재 심청색 적의용 위치마[上裳] 유물이 남아있다.
대대는 허리에 두르는 띠를 말하며 겉 대홍단, 안을 백릉白綾으로 하고 녹색으로 선[緣]을 두른다. 양옆에 달린 청색의 띠로 매어준다. 왕세자빈도 같다. 옥대는 대대 위에 띠는 대로서 왕비는 조작한 옥을, 왕세자빈은 조각하지 않은 옥을 사용한다. 청단으로 싸고 금으로 봉鳳을 그려 주도록 하였다.
수는 후수를 말하며 전하와 동일하였다. 당시의 후수는 1746년(영조 22)부터 수입품(홍화금) 대신 적· 청·현玄·표縹·녹색의 5색단을 제직하여 만들었다. 대대와 함께 허리 뒤에 착용한다. 패는 패옥을 말하며 크고 작은 옥이 5줄로 연결되어 있으며 받침은 후수와 같이 5색단이다. 허리 양옆에 드리운다. 폐슬은 가슴 부위에 부착하는 의식 용구로서 전하의 면복 폐슬과 동일하나 장문이 없이 다홍색 비단으로 만든 직사각형 형태이다. 왕비의 말은 적말이며, 왕세자빈은 흑단으로 만들었다. 석은 전하의 석과 같이 적석이며 다만 신코에 홍과 녹색 비단실로 만든 사화絲花 3개를 단다. 왕세자빈은 흑단이며 사화는 왕비와 동일하였다. 이 외에도 『국혼정례』(1749)와 『상방정례』(1750), 역대 국혼 기록인 『가례도감의궤』(1627~1906)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은 1897년(고종 34)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국의 위상을 대표하는 황실 관복제도를 새로 규정하였다. 『대명회전』 1405년(영락 3)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대한예전』 제복과 관복 도설에 기록되어 있다. 황후의 관복은 적문이 있는 심청색 적의 제도로 바뀌었으며, 황태자 순종과 계비 윤씨의 병오년(1906) 『가례도감의궤』에는 적의 일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체발 10단·백옥규·심청색 적의·옥색사 중단·폐슬·옥대·대대·수·옥패·청말·청석과 모단 하피와 함께 대홍 대삼도 포함되어 있다.
유물은 국가민속문화재 제67호 12등 적의본과 폐슬본, 국가민속문화재 제54호 황후 적의, 중단, 폐슬, 하피. 국가민속문화재 제55호 황후 청석, 국가민속문화재 제265호 영친왕 일가 복식 가운데 영친왕비 9등 적의와 부속품이 있다. 대한제국의 적의는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明憲太后(효정왕후, 1831~1904)가 황제 등극 이틀 후에 황태자비 민씨로부터 조알朝謁을 받을 때 처음으로 착용하였다.
세종대학교박물관 소장 황후 적의는 다채한 색사로 적문을 제직한 심청색 채적문단彩翟紋緞으로 12등 148쌍의 적문과 조선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李花紋이 제직되어 있다. 가장자리는 대홍색 직금운용문능織金雲龍紋綾으로 둘렀고, 금사 오조룡원보五爪龍圓補가 달려 있다. 중단은 회색 비단에 홍색선을 둘렀으며, 깃 중심 좌우로 11개의 아자亞字형 불문黻紋이 금박되어 있다. 폐슬은 적의와 동일한 바탕에 대홍색 직금운용문단으로 가선되어 있고 이화문 4단, 적문 3단이 쌍으로 제직되어 있으며 위에는 폐슬을 고정하는 걸개[鉤子]가 달려 있다. 하피는 검은색 공단에 분홍색 고운 명주를 받쳤으며 운문과 적문이 각각 26개가 부금되어 있다. 길이 495cm 너비 11cm이며 중앙과 11번째 운문 있는 가장자리에 1개씩 총 3개의 단추가 달려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적문은 위를 향하게 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친왕비 적의는 일습이 남아 있다. 적관은 체발과 다양한 수식품으로 되어 있다. 옥규는 백옥이며 길이 14.5cm, 너비 7cm이며 곡식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상단은 둥근 산山형이며, 다홍색 공단으로 손잡이 부분이 씌워져 있다. 적의는 12등 적의와 동일하나 138쌍의 적문과 168개의 이화문이 직성되어 있고, 오조룡보가 달리고 대홍색 가선은 운봉문으로 되어 있다. 중단은 청회색 견絹이며 가장자리는 다홍색 비단으로 선을 둘렀고, 불문 11개가 금박되었다. 하피는 황후용과 동일하나 단추가 없다. 상은 위치마[上裳] 또는 전행웃치마로서 수복과 화문이 직금된 3가닥의 남색 잔주름 스란치마이다. 대대는 흰 공단에 안은 홍색이며 가장자리는 연녹색의 선을 둘렀고, 후수는 5색단으로 만들고 금환 1쌍이 달려 있다. 옥대는 청단으로 싸고 조각하지 않은 백옥을 사용하였고, 금선장식은 자국만 남아 있다. 폐슬은 황후용과 유사하나 적문 2단, 이화문 3단이 배치되어 있고 홍색 가선에는 봉문과 화염문火焰紋이 금직되어 있다. 패옥은 오색단 받침에 5줄 옥이 있으며 면복 패옥함이라 명문이 있는 상자에 들어 있다. 청말과 청석이 있다.
심청색 적의를 착용할 때 하피를 두르는 방법은 매우 중요하다. 하피의 길이가 길어져 명 황실의 방법과 다른 조선식의 방법이 있었을 것이나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진 기록은 없다. 다만 윤황후로부터 황실 관복 일부를 기증받은 전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설립자는 상궁으로부터 전수받은 방법을 알려주어 현재까지 재현하고 있다. 즉 하피에 달린 단추와 적의 고대 양옆에 있는 고리에 끼우면 앞부분 하피는 무릎 아래 위치하게 된다. 뒤는 하피 중앙 고리를 등부분에 달린 가운데 단추에 끼우면 W 형태로 나타나 뒤가 끌리지 않고 정리된다. 등부분에 달린 3개의 단추를 대대를 걸치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진동이 좁아 불가능하다. 또한 전단후장형이며 양옆이 트인 대삼에는 뒤 도련 단추가 필요하나 트임이 없는 심청색 적의에는 불필요하다. 반면 단추가 없는 하피를 착용한 영친왕비의 1922년 4월 조현례시 사진에는 적문의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앞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특징 및 의의

적의는 왕비를 포함하여 왕실의 적통을 잇는 비빈들이 착용하는 대례용 법복으로, 고려 말 공민왕비 이후 1922년 영친왕 가례까지 7세기 가깝게 착용되었던 예복이다. 조선 전기에는 칠적관에 대홍대을 사여받아 왕비의 적의로 착용하였고 후기에는 수원적과 흉배를 부착한 대삼을 신분별로 규정하여 조선의 적의제도를 정비하였다. 대한제국 때는 황후용 12등 심청색 적의제도를 새롭게 시행함으로써 법복을 통하여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은 개국초부터 명 황실의 관복제도를 수용하여 왕과 왕비의 관복으로 착용함으로써 외교적인 정책의 일환이 되었다. 이는 명의 패망 이후에도 지속되어 조선의 위상은 물론 소멸된 동아시아의 전통복식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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