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長靴)

한자명

長靴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조선희(趙鮮姬)

정의

신 목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길이가 긴 가죽신이나 고무신.

내용

화는 신목이 있는 신을 말하는데, 특히 장화는 신목이 높이 달린 신을 말한다. 장화는 일반적으로 긴 길이의 화이거나 화와 혼용된 용어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백관 및 일반용의 화의 가죽 재료는 담비 가죽[斜皮], 사슴 가죽[鹿皮], 삵 가죽[狸皮], 무두질한 가죽[猠皮], 말가죽[馬皮], 족제비 가죽[貂皮], 여우 가죽 등의 기록이 있다. 현재 유물로 남아 있는 화의 높이는 22~27 내외인데, 실록에서 세종의 석의 길이가 발목까지 오는 반장화와 비슷하다고 한 것과 투혜의 설명에 비 올 때 신는 반장화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장화는 화와 같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실록에 1635년(인조 13)에 중전의 승하 후 왕세자와 대군 이하는 흰 옷, 흰 장화, 거친 베로 만든 버선을 신었다고 나와 있으나 특별히 더 긴 길이인지 알 수 없다.
1894년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된 근대적 행정기관인 중추원中樞院의 관혼상제 실례에 보면 “결혼식 당일 신랑은 사모대례복을 입고 각대를 두르고 목화(흑장화)를 신는다.”라고 하여 장화는 목화로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장화는 개화기 이후 서양복의 도입과 함께 그 형태와 기능이 바뀌게 되었다. 1899년(고종 36) 임금의 복장 목록에 장화 4족의 기록이 있고, 1900년 대한제국 경부警部의 복제 개정에 나와 있는 장화는 이미 서양화된 양복에 맞춘 장화로 기마용으로 착용되기도 하였다.
유물 중 장화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 신목의 길이가 긴 것을 살펴보면 길이가 34로 장화 형태인 유물 백목화가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2호로 윤증尹拯(1629~1714) 가의 유품으로 국상 때 문무백관들이 백색 단령에 착용하였던 무명 백목화이다. 또 다른 장화의 형태로 출토된 조선시대 밀창군 이직李職(1677~1746)의 유물 중 누비화가 있다. 높이가 39로, 수의로 입혀진 운문단 단령 상복과 함께 출토되어 생전에 착용하였던 신으로 추정한다. 외피는 공단이며 내피는 명주로 하였는데, 마치 스모킹smocking(천에 잔주름을 잡고 장식 스티치를 하여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의 유럽풍 자수)을 한 것처럼 누벼서 잔주름을 잡아 주었다. 이와 같은 누비화를 제작하는 데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므로 사치품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실록에는 누비로 화를 만들었다가 파면된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 조선시대 습신 중 높이가 46가 되는 화가 있다. 선조의 증손자인 탐릉군 이변(1636~1731)의 출토유물이다. 생전에 착용되었던 것과 동일한 형태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외피는 공단이고 내피는 명주로 된 겹신이며 습신으로 착용하였다. 두 점 모두 생전에 착용된 것과 동일하다면 당시 장화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장화의 기능에 중점을 두고 보면, 조선시대 무관들이 철릭에 갖추어 신던 화 중 수화자가 있다. 수화자는 신의 입구가 좁아서 벗고 신는 데 매우 어렵지만 걸어 다니기에 편하다. 바닥은 베를 접어서 만들었는데 매우 두껍고 단단하여 진흙 길을 걸어도 스며들어 젖지 않을 정도였으며, 오랜 시간 야외에서 행군을 했던 무관들에게는 매우 유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수화자는 왕실의 연회인 궁중정재宮中呈才에서 무희들이 신기도 했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단화는 비 오는 날에 아동이나 부녀자가 착용하고 신울이 일반화에 비해 짧았으며 겨울철용으로 추정된다.

특징 및 의의

근세에 이르러 장화의 기록을 보면, 1917년 『매일신보』에 「소가죽으로 만든 장화」, 1938년 『동아일보』에 나온 고무 사용 제한 법령에 「고무로 만든 장화, 단화, 슬리퍼의 제작 금지」의 기사 등이 나와 있다. 장화는 산업의 근대화에 따라 고무로도 제작되었다. 1927년 이수광의 잡지 기고에 보면 “비 오는 날이면 장화를 신고 흙 안 튀게 가만가만 마른 땅을 곪아 집고 …… ”라고 나와 있어 근세 이후 장화는 비 오는 날과 진땅에 신는 우중화로서 착용 목적이 강조된 신으로 되었다. 이후 장화는 고무장화로 불리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중요민속자료(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6), 우리 옷과 장신구(이경자 외, 열화당, 2003), 한국복식문화사(유희경·김문자, 교문사, 1981), 한국복식문화사전(김영숙, 미술문화, 1998), 한국의 복식(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화·혜·리(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4), 화혜장(조선희, 민속원, 2007).

장화

장화
한자명

長靴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조선희(趙鮮姬)

정의

신 목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길이가 긴 가죽신이나 고무신.

내용

화는 신목이 있는 신을 말하는데, 특히 장화는 신목이 높이 달린 신을 말한다. 장화는 일반적으로 긴 길이의 화이거나 화와 혼용된 용어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백관 및 일반용의 화의 가죽 재료는 담비 가죽[斜皮], 사슴 가죽[鹿皮], 삵 가죽[狸皮], 무두질한 가죽[猠皮], 말가죽[馬皮], 족제비 가죽[貂皮], 여우 가죽 등의 기록이 있다. 현재 유물로 남아 있는 화의 높이는 22~27 내외인데, 실록에서 세종의 석의 길이가 발목까지 오는 반장화와 비슷하다고 한 것과 투혜의 설명에 비 올 때 신는 반장화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장화는 화와 같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실록에 1635년(인조 13)에 중전의 승하 후 왕세자와 대군 이하는 흰 옷, 흰 장화, 거친 베로 만든 버선을 신었다고 나와 있으나 특별히 더 긴 길이인지 알 수 없다.
1894년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된 근대적 행정기관인 중추원中樞院의 관혼상제 실례에 보면 “결혼식 당일 신랑은 사모에 대례복을 입고 각대를 두르고 목화(흑장화)를 신는다.”라고 하여 장화는 목화로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장화는 개화기 이후 서양복의 도입과 함께 그 형태와 기능이 바뀌게 되었다. 1899년(고종 36) 임금의 복장 목록에 장화 4족의 기록이 있고, 1900년 대한제국 경부警部의 복제 개정에 나와 있는 장화는 이미 서양화된 양복에 맞춘 장화로 기마용으로 착용되기도 하였다.
유물 중 장화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 신목의 길이가 긴 것을 살펴보면 길이가 34로 장화 형태인 유물 백목화가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2호로 윤증尹拯(1629~1714) 가의 유품으로 국상 때 문무백관들이 백색 단령에 착용하였던 무명 백목화이다. 또 다른 장화의 형태로 출토된 조선시대 밀창군 이직李職(1677~1746)의 유물 중 누비화가 있다. 높이가 39로, 수의로 입혀진 운문단 단령 상복과 함께 출토되어 생전에 착용하였던 신으로 추정한다. 외피는 공단이며 내피는 명주로 하였는데, 마치 스모킹smocking(천에 잔주름을 잡고 장식 스티치를 하여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의 유럽풍 자수)을 한 것처럼 누벼서 잔주름을 잡아 주었다. 이와 같은 누비화를 제작하는 데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므로 사치품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실록에는 누비로 화를 만들었다가 파면된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 조선시대 습신 중 높이가 46가 되는 화가 있다. 선조의 증손자인 탐릉군 이변(1636~1731)의 출토유물이다. 생전에 착용되었던 것과 동일한 형태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외피는 공단이고 내피는 명주로 된 겹신이며 습신으로 착용하였다. 두 점 모두 생전에 착용된 것과 동일하다면 당시 장화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장화의 기능에 중점을 두고 보면, 조선시대 무관들이 철릭에 갖추어 신던 화 중 수화자가 있다. 수화자는 신의 입구가 좁아서 벗고 신는 데 매우 어렵지만 걸어 다니기에 편하다. 바닥은 베를 접어서 만들었는데 매우 두껍고 단단하여 진흙 길을 걸어도 스며들어 젖지 않을 정도였으며, 오랜 시간 야외에서 행군을 했던 무관들에게는 매우 유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수화자는 왕실의 연회인 궁중정재宮中呈才에서 무희들이 신기도 했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단화는 비 오는 날에 아동이나 부녀자가 착용하고 신울이 일반화에 비해 짧았으며 겨울철용으로 추정된다.

특징 및 의의

근세에 이르러 장화의 기록을 보면, 1917년 『매일신보』에 「소가죽으로 만든 장화」, 1938년 『동아일보』에 나온 고무 사용 제한 법령에 「고무로 만든 장화, 단화, 슬리퍼의 제작 금지」의 기사 등이 나와 있다. 장화는 산업의 근대화에 따라 고무로도 제작되었다. 1927년 이수광의 잡지 기고에 보면 “비 오는 날이면 장화를 신고 흙 안 튀게 가만가만 마른 땅을 곪아 집고 …… ”라고 나와 있어 근세 이후 장화는 비 오는 날과 진땅에 신는 우중화로서 착용 목적이 강조된 신으로 되었다. 이후 장화는 고무장화로 불리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중요민속자료(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6), 우리 옷과 장신구(이경자 외, 열화당, 2003), 한국복식문화사(유희경·김문자, 교문사, 1981), 한국복식문화사전(김영숙, 미술문화, 1998), 한국의 복식(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화·혜·리(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4), 화혜장(조선희, 민속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