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무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정미숙(鄭美淑)

정의

전설상의 동물인 용을 소재로 도안한 무늬.

내용

용은 벽사와 수호의 능력을 갖춘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겨, 왕실에서는 위엄과 권위의 상징으로, 일반 사람들에게는 영험한 동물로 인식되었다. 용의 모습에 대해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발바닥은 호랑이를 닮았다.”라고 하여 용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으나 인간이 보아 왔던 다양한 동물의 모습을 조합하여 형상화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속에서는 형태와 능력에 따라 아홉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비늘이 있는 교룡蛟龍, 날개가 있는 응룡應龍, 뿔이 있는 규룡虯龍, 뿔이 없는 이룡螭龍, 승천하지 못한 반룡蟠龍, 물을 좋아하는 청룡靑龍, 불을 좋아하는 화룡火龍, 울기 좋아하는 명룡鳴龍, 싸우기 좋아하는 용을 석룡蜥龍이라고 하였다. 이들 중 규룡을 여러 용들의 우두머리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 용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고구려 고분의 널방에 그려진 청룡과 황룡이다. 청룡은 동쪽의 수호신으로서 천장 동쪽에, 황룡은 중앙의 수호신으로서 천장 중앙에 배치되었다. 청룡은 큰 입과 긴 혀, 둥근 눈을 하고, 그 머리 위에는 두 개의 긴 뿔, 뭉뚝한 발끝에는 세 개의 발톱이 돋아 있다. 마름모 형태의 비늘이 가득한 용의 몸통은 얇은 목선을 따라 굵은 몸이 이어지고, 꼬리 부분은 점차 얇아져 앞을 향해 걷는 듯 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반면, 황룡은 중앙에 똬리를 틀고 도사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용무늬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와·청동거울·청자·석관石棺 등에 장식무늬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는데, 장식할 대상의 형태에 따라 길게 또는 둥글게 말린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걷거나 뛰는 것 같은 옆모습으로도 묘사되었다. 고대 직물 중에는 용무늬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고려 말에 만들어진 불상 내부에서 불복장 직물이 발견되어 당시의 용무늬를 확인할 수 있다. 불복장 직물에서 용무늬는 도안의 규모가 작고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모두 측면의 자세로 작고 간략하게 표현되어 전체적인 형태가 불분명하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대의 용무늬와 관련하여 서울과 지방의 민서民庶들은 의복과 기물에 용봉무늬를 넣지 못하게 금지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용봉무늬가 특별한 신분에게만 허용되었다는 것과 더불어,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용봉이 있는 의복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풀이되어 고려 말에 발견된 용무늬 직물과의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인천 석남동 출토 장옷에 용무늬가 있으나, 그 형태는 고려 말 직물 조각에 나타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로 발견된 용무늬 복식 자료로는 17세기 전반 유물부터 확인되며, 상류층의 의복에서 볼 수 있는 용무늬와 왕실의 상징성으로 표현된 화려한 장식의 용무늬로 구분된다. 상류층의 의복에 나타난 용무늬로는 윤선언尹善言(1580~1628) 묘에서 출토된 철릭의 고름바대에 원형의 용무늬가 있다. 안동 권씨(1664~1722) 묘에서 출토된 지요 역시 지름 4.8의 원형으로 묘사된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안동 권씨 묘에서 출토된 용무늬는 튀어나온 입과 둥근 눈, 두 개의 뿔, 몸의 비늘과 발끝에 표현된 다섯 개의 발톱 등 17세기의 유물에 비하여 비교적 세밀하다. 큰 원형으로 도안한 용무늬는 18세기 중반 유물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연응李 沇應(1818~1879) 묘에서 출토된 마고자에서 용 두 마리가 지름 20 가량의 큰 원형으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용무늬는 소재와 직물 조직에 따라 용문갑사·용단·별문영초라 부르며 개화기까지도 왕실과 상류층 복식에서 자주 확인된다.
왕실의 위엄과 존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대표적인 용무늬로 곤룡포에 장식된 용보龍補가 있다. 용보는 가슴(흉胸)·등(배背)·어깨(견화肩花)에 장식하는 둥근 형태의 용무늬 장식을 말한다. 왕의 복식에 용보를 달기 시작한 것은 1444년(세종 26) 명나라에서 상복常服으로 곤룡포 세 건을 사여 받으면서였으며, 이는 왕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은 어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조 어진의 용보는 금실을 넣어 직조하였으며, 용에는 두 개의 뿔, 꽉 다문 길쭉한 입, 턱 밑의 수염 머리 뒤에 있는 다섯 가닥의 갈기가 있었다. 몸은 조개 모양의 비늘로 덮인 채 S자에서 C자로 굽었으며, 네 개의 발끝에는 각을 세운 다섯 개의 발톱이 있다. 영조 어진에서 보이는 조선 후기의 용보는 금실로 수를 놓은 자수 용보였으며, 용이 태조 어진의 용과는 자세와 모습이 다르다. 태조 어진의 용이 측면형으로 머리보다 몸에 비중을 두었다면, 영조 어진은 정면형으로 머리에 비중을 두었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 정면을 향해 돌진하려는 자세를 취해 보다 위협적으로 표현되었다. 세부적으로 보면 두 개의 뿔, 좌우로 휘날리는 갈기와 수염, 입·코· 눈과 눈썹·이마의 주름까지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태조 어진에 비하여 용의 몸이 커지고 긴 몸을 말아 머리 뒤쪽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몸에는 조개 모양의 비늘이 가득 덮혀 있고, 발끝에 각을 세운 다섯 개의 발톱이 있다. 철종 어진의 용보는 군복에 부착한 모습이다. 화재로 인하여 반 정도가 불에 타 정확한 형태 파악이 어려우나,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는 군복용 흉배 도안을 통하여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철종이 입은 조끼형 옷인 전복은 구성상 앞 중심이 좌우로 나뉘기 때문에 용보 또한 반으로 나뉘어 여의주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놓여 있으며, 곤룡포의 용보와 달리 측면형에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다. 실물로 남아 있는 고종의 곤룡포는 조선 말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오른 황제의 지위에 걸맞게 황룡포이며 그 위에 황색 용보를 부착하였다. 영조 어진의 용과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으나 여의주와 해에는 색사를 넣어 자수하였고, 가장자리는 꽃처럼 곡선이며 규모는 한결 작아졌다.
1751년(영조 27)에 편찬한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에서는 왕은 오조원룡보, 왕세자는 사조원룡보, 왕세손은 삼조방룡보를 사용하게 하여, 왕과 왕세자는 원형, 왕세손은 사각형의 보를 사용하고 지위에 따라 용의 발톱 수에 오조, 사조, 삼조로 차등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왕비·왕세자빈·왕세손빈의 용보도 같은 규정이 적용되었다. 그 전까지 왕실 여성 복식에 주로 봉황무늬가 사용되었다면, 이때 이후로는 적통 왕실 여성의 예복에는 원형의 용보를, 그 외 왕실 여성의 예복에는 사각형의 봉흉배가 사용되었다. 실물로 남아 있는 왕실 여성의 용보는 순정효황후와 영친왕비 적의· 원삼·당의에 부착한 것이다. 왕의 보와는 형태상 큰 차이가 없으나 왕실 여성의 용보에는 금사만 사용하지 않고 색사를 함께 사용하여 수를 놓았다.

특징 및 의의

용무늬는 왕이 입는 옷인 곤룡포, 왕의 행차를 알리는 깃발인 교룡기에 사용됨으로써 왕이 곧 용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전달하였다. 또한 우리의 민속문화 속에서도 용은 최고의 자리에 비유되어 입신출세의 관문을 등용문이라고 하였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을 두고 “개천에서 용이 났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용을 건축·공예·회화·복식 등에 다양한 모습으로 장식하여 그 신령스러운 능력을 늘 가까이에 두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國朝續五禮儀補序, 本草綱目, 朝鮮王朝實錄, 우리나라전통무늬1-직물(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의문의 조선-무늬(민속원·경기도박물관, 2016), 인천 석남동 회곽묘 출토복식(인천시립박물관, 2005), 중국미술상징사전(노자키 세이킨, 변영섭·안영섭 역, 고려대학교출판부, 2011), 한국직물문양 이천년(심연옥, 고대직물연구소출판부, 2006).

용무늬

용무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정미숙(鄭美淑)

정의

전설상의 동물인 용을 소재로 도안한 무늬.

내용

용은 벽사와 수호의 능력을 갖춘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겨, 왕실에서는 위엄과 권위의 상징으로, 일반 사람들에게는 영험한 동물로 인식되었다. 용의 모습에 대해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발바닥은 호랑이를 닮았다.”라고 하여 용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으나 인간이 보아 왔던 다양한 동물의 모습을 조합하여 형상화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속에서는 형태와 능력에 따라 아홉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비늘이 있는 교룡蛟龍, 날개가 있는 응룡應龍, 뿔이 있는 규룡虯龍, 뿔이 없는 이룡螭龍, 승천하지 못한 반룡蟠龍, 물을 좋아하는 청룡靑龍, 불을 좋아하는 화룡火龍, 울기 좋아하는 명룡鳴龍, 싸우기 좋아하는 용을 석룡蜥龍이라고 하였다. 이들 중 규룡을 여러 용들의 우두머리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 용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고구려 고분의 널방에 그려진 청룡과 황룡이다. 청룡은 동쪽의 수호신으로서 천장 동쪽에, 황룡은 중앙의 수호신으로서 천장 중앙에 배치되었다. 청룡은 큰 입과 긴 혀, 둥근 눈을 하고, 그 머리 위에는 두 개의 긴 뿔, 뭉뚝한 발끝에는 세 개의 발톱이 돋아 있다. 마름모 형태의 비늘이 가득한 용의 몸통은 얇은 목선을 따라 굵은 몸이 이어지고, 꼬리 부분은 점차 얇아져 앞을 향해 걷는 듯 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반면, 황룡은 중앙에 똬리를 틀고 도사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용무늬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와·청동거울·청자·석관石棺 등에 장식무늬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는데, 장식할 대상의 형태에 따라 길게 또는 둥글게 말린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걷거나 뛰는 것 같은 옆모습으로도 묘사되었다. 고대 직물 중에는 용무늬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고려 말에 만들어진 불상 내부에서 불복장 직물이 발견되어 당시의 용무늬를 확인할 수 있다. 불복장 직물에서 용무늬는 도안의 규모가 작고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모두 측면의 자세로 작고 간략하게 표현되어 전체적인 형태가 불분명하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대의 용무늬와 관련하여 서울과 지방의 민서民庶들은 의복과 기물에 용봉무늬를 넣지 못하게 금지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용봉무늬가 특별한 신분에게만 허용되었다는 것과 더불어,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용봉이 있는 의복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풀이되어 고려 말에 발견된 용무늬 직물과의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인천 석남동 출토 장옷에 용무늬가 있으나, 그 형태는 고려 말 직물 조각에 나타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로 발견된 용무늬 복식 자료로는 17세기 전반 유물부터 확인되며, 상류층의 의복에서 볼 수 있는 용무늬와 왕실의 상징성으로 표현된 화려한 장식의 용무늬로 구분된다. 상류층의 의복에 나타난 용무늬로는 윤선언尹善言(1580~1628) 묘에서 출토된 철릭의 고름바대에 원형의 용무늬가 있다. 안동 권씨(1664~1722) 묘에서 출토된 지요 역시 지름 4.8의 원형으로 묘사된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안동 권씨 묘에서 출토된 용무늬는 튀어나온 입과 둥근 눈, 두 개의 뿔, 몸의 비늘과 발끝에 표현된 다섯 개의 발톱 등 17세기의 유물에 비하여 비교적 세밀하다. 큰 원형으로 도안한 용무늬는 18세기 중반 유물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연응李 沇應(1818~1879) 묘에서 출토된 마고자에서 용 두 마리가 지름 20 가량의 큰 원형으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용무늬는 소재와 직물 조직에 따라 용문갑사·용단·별문영초라 부르며 개화기까지도 왕실과 상류층 복식에서 자주 확인된다.
왕실의 위엄과 존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대표적인 용무늬로 곤룡포에 장식된 용보龍補가 있다. 용보는 가슴(흉胸)·등(배背)·어깨(견화肩花)에 장식하는 둥근 형태의 용무늬 장식을 말한다. 왕의 복식에 용보를 달기 시작한 것은 1444년(세종 26) 명나라에서 상복常服으로 곤룡포 세 건을 사여 받으면서였으며, 이는 왕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은 어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조 어진의 용보는 금실을 넣어 직조하였으며, 용에는 두 개의 뿔, 꽉 다문 길쭉한 입, 턱 밑의 수염 머리 뒤에 있는 다섯 가닥의 갈기가 있었다. 몸은 조개 모양의 비늘로 덮인 채 S자에서 C자로 굽었으며, 네 개의 발끝에는 각을 세운 다섯 개의 발톱이 있다. 영조 어진에서 보이는 조선 후기의 용보는 금실로 수를 놓은 자수 용보였으며, 용이 태조 어진의 용과는 자세와 모습이 다르다. 태조 어진의 용이 측면형으로 머리보다 몸에 비중을 두었다면, 영조 어진은 정면형으로 머리에 비중을 두었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 정면을 향해 돌진하려는 자세를 취해 보다 위협적으로 표현되었다. 세부적으로 보면 두 개의 뿔, 좌우로 휘날리는 갈기와 수염, 입·코· 눈과 눈썹·이마의 주름까지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태조 어진에 비하여 용의 몸이 커지고 긴 몸을 말아 머리 뒤쪽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몸에는 조개 모양의 비늘이 가득 덮혀 있고, 발끝에 각을 세운 다섯 개의 발톱이 있다. 철종 어진의 용보는 군복에 부착한 모습이다. 화재로 인하여 반 정도가 불에 타 정확한 형태 파악이 어려우나,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는 군복용 흉배 도안을 통하여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철종이 입은 조끼형 옷인 전복은 구성상 앞 중심이 좌우로 나뉘기 때문에 용보 또한 반으로 나뉘어 여의주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놓여 있으며, 곤룡포의 용보와 달리 측면형에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다. 실물로 남아 있는 고종의 곤룡포는 조선 말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오른 황제의 지위에 걸맞게 황룡포이며 그 위에 황색 용보를 부착하였다. 영조 어진의 용과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으나 여의주와 해에는 색사를 넣어 자수하였고, 가장자리는 꽃처럼 곡선이며 규모는 한결 작아졌다.
1751년(영조 27)에 편찬한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에서는 왕은 오조원룡보, 왕세자는 사조원룡보, 왕세손은 삼조방룡보를 사용하게 하여, 왕과 왕세자는 원형, 왕세손은 사각형의 보를 사용하고 지위에 따라 용의 발톱 수에 오조, 사조, 삼조로 차등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왕비·왕세자빈·왕세손빈의 용보도 같은 규정이 적용되었다. 그 전까지 왕실 여성 복식에 주로 봉황무늬가 사용되었다면, 이때 이후로는 적통 왕실 여성의 예복에는 원형의 용보를, 그 외 왕실 여성의 예복에는 사각형의 봉흉배가 사용되었다. 실물로 남아 있는 왕실 여성의 용보는 순정효황후와 영친왕비 적의· 원삼·당의에 부착한 것이다. 왕의 보와는 형태상 큰 차이가 없으나 왕실 여성의 용보에는 금사만 사용하지 않고 색사를 함께 사용하여 수를 놓았다.

특징 및 의의

용무늬는 왕이 입는 옷인 곤룡포, 왕의 행차를 알리는 깃발인 교룡기에 사용됨으로써 왕이 곧 용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전달하였다. 또한 우리의 민속문화 속에서도 용은 최고의 자리에 비유되어 입신출세의 관문을 등용문이라고 하였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을 두고 “개천에서 용이 났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용을 건축·공예·회화·복식 등에 다양한 모습으로 장식하여 그 신령스러운 능력을 늘 가까이에 두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國朝續五禮儀補序, 本草綱目, 朝鮮王朝實錄, 우리나라전통무늬1-직물(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의문의 조선-무늬(민속원·경기도박물관, 2016), 인천 석남동 회곽묘 출토복식(인천시립박물관, 2005), 중국미술상징사전(노자키 세이킨, 변영섭·안영섭 역, 고려대학교출판부, 2011), 한국직물문양 이천년(심연옥, 고대직물연구소출판부,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