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화(御賜花)

한자명

御賜花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노수정(盧洙正)

정의

조선시대 임금이 과거에 급제한 신하에게 내리는 종이꽃.

내용

조선시대에는 문과·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홍패紅牌와 어사화御賜花를 하사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사흘간 광대를 데리고 풍악을 울리면서 거리를 돌며 삼관三館, 여러 관사의 선배, 친척 등을 찾아보았는데, 이를 <삼일유가三日遊街>라 한다. 『평생도平生圖』의 내용 가운데 <삼일유가>는 과거급제하고 금의환향하는 주인공이 어사화를 꽂은 복두를 머리에 쓰고 난삼襴衫을 착용한 차림새로 말에 올라탄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난삼의 색은 연둣빛을 사용하였는데, 꾀꼬리의 색과 유사하여 앵삼鶯衫이라고도 하였다.
머리에 쓰는 관모冠帽에 장식물을 꽂는 풍습(삽식揷飾)은 상고시대부터 전해진다. 삼국시대 새의 깃털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에서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궁중 잔치 등에서 관모에 꽃을 꽂는 삽화揷花 풍습이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어사화에 대한 내용은 다수의 고서에서도 조금씩 보인다. 정약용丁若鏞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는 “어사화 두 가닥을 머리에 꽂고頭揷雙條御賜花”,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서는 “임금이 하사한 꽃도 머리에 꽂지 않는다네君賜花枝亦不簪.”의 구절에서 어사화의 형태와 임금이 하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문과 전시殿試에 3등으로 뽑힌 사람을 담화랑擔花郞이라고 하였는데, 방방례放榜禮를 할 때 담화랑은 임금 앞에서 모화帽花를 받아 새로 급제한 모든 사람에게 꽂아 주었다.”라고 하였다.
1602년(선조 35) 호조에서는 “국고가 고갈된 때에 수많은 사람의 관복을 관에서 지급하기는 형편상 어려워 급제자에게 지급되던 홍패와 어사화를 각자가 구하여 착용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정원政院에서 흉년에 어사화와 홍패지를 마련하는 것이 힘들다 하여 합격자들에게 마련하도록 하자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어사화는 임금이 하사하였으나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급제자가 직접 구하게 하였다. 한편, 1650년(효종 1) 기진흥奇震興(1606~1651)이 과거에 급제한 날 어사화를 개조하여 수놓은 비단으로 장식하였다는 사실로 역모의 마음을 가질 것이라 하여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할 것을 논하기도 하였다.
현재 전하는 유물로는 이세후李世垕 어사화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이만기李晩耆 어사화가 있다. 이세후의 어사화는 1726년(영조 2) 대과 급제 시 받은 것으로 길이는 약 90이며, 이만기의 어사화는 1852년(철종 3)에 하사 받은 것으로 197에 이른다. 1765년(영조 41) 실록의 기록을 보면 “신은新恩에게 주는 어사화御賜花가 전보다 좀 길어졌으니 지금부터는 지난 을유년에 내려 주던 어사화의 몸체와 양식을 따르도록” 하였으나, 두 점의 유물 크기 차이로 보아 그 제도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877년(고종 14)에는 “계방桂坊의 관원 가운데 과거에 오른 사람이 있으면 방방放榜할 때 어사화는 비단으로 만들고 홍패는 종이로 하되 길이와 너비는 특별히 일반적인 홍패와 다르게 하는 것으로 규식을 정하라.”라고 하여, 조선 후기에는 재료를 종이뿐만 아니라 비단으로도 만들었음이 확인된다.

특징 및 의의

어사화는 가늘게 쪼갠 댓개비 두 개를 밑부분은 함께 싸서 묶고 위쪽으로는 각각 벌어지도록 하여 청·홍·황·백색의 종이를 꽃모양으로 오려 붙였다. 한쪽 끝을 복두 뒤에 꽂고, 다른 한끝은 명주실로 잡아매어 머리 위로 휘어 넘겨서 입에 물거나 손에 든 홀에 묶어서 어사화를 고정해서 다녔다. 어사화는 홍패와 함께 문과·무과의 급제자에게만 지급되던 것으로 입신양명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를 담았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日省錄, 국역 다산시문집7(정약용, 민족문화추진회 역, 솔, 1994), 국역 명재유고(윤증, 민족문화추진회, 2006), 국역 목은집3(이색, 임정기 역, 민족문화추진회, 2001), 용재총화(성현, 김남이 외 역, 휴머니스트, 2015),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2(박성실, 민속원, 2002),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어사화

어사화
한자명

御賜花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노수정(盧洙正)

정의

조선시대 임금이 과거에 급제한 신하에게 내리는 종이꽃.

내용

조선시대에는 문과·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홍패紅牌와 어사화御賜花를 하사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사흘간 광대를 데리고 풍악을 울리면서 거리를 돌며 삼관三館, 여러 관사의 선배, 친척 등을 찾아보았는데, 이를 <삼일유가三日遊街>라 한다. 『평생도平生圖』의 내용 가운데 <삼일유가>는 과거급제하고 금의환향하는 주인공이 어사화를 꽂은 복두를 머리에 쓰고 난삼襴衫을 착용한 차림새로 말에 올라탄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난삼의 색은 연둣빛을 사용하였는데, 꾀꼬리의 색과 유사하여 앵삼鶯衫이라고도 하였다.
머리에 쓰는 관모冠帽에 장식물을 꽂는 풍습(삽식揷飾)은 상고시대부터 전해진다. 삼국시대 새의 깃털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에서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궁중 잔치 등에서 관모에 꽃을 꽂는 삽화揷花 풍습이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어사화에 대한 내용은 다수의 고서에서도 조금씩 보인다. 정약용丁若鏞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는 “어사화 두 가닥을 머리에 꽂고頭揷雙條御賜花”,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서는 “임금이 하사한 꽃도 머리에 꽂지 않는다네君賜花枝亦不簪.”의 구절에서 어사화의 형태와 임금이 하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문과 전시殿試에 3등으로 뽑힌 사람을 담화랑擔花郞이라고 하였는데, 방방례放榜禮를 할 때 담화랑은 임금 앞에서 모화帽花를 받아 새로 급제한 모든 사람에게 꽂아 주었다.”라고 하였다.
1602년(선조 35) 호조에서는 “국고가 고갈된 때에 수많은 사람의 관복을 관에서 지급하기는 형편상 어려워 급제자에게 지급되던 홍패와 어사화를 각자가 구하여 착용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정원政院에서 흉년에 어사화와 홍패지를 마련하는 것이 힘들다 하여 합격자들에게 마련하도록 하자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어사화는 임금이 하사하였으나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급제자가 직접 구하게 하였다. 한편, 1650년(효종 1) 기진흥奇震興(1606~1651)이 과거에 급제한 날 어사화를 개조하여 수놓은 비단으로 장식하였다는 사실로 역모의 마음을 가질 것이라 하여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할 것을 논하기도 하였다.
현재 전하는 유물로는 이세후李世垕 어사화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이만기李晩耆 어사화가 있다. 이세후의 어사화는 1726년(영조 2) 대과 급제 시 받은 것으로 길이는 약 90이며, 이만기의 어사화는 1852년(철종 3)에 하사 받은 것으로 197에 이른다. 1765년(영조 41) 실록의 기록을 보면 “신은新恩에게 주는 어사화御賜花가 전보다 좀 길어졌으니 지금부터는 지난 을유년에 내려 주던 어사화의 몸체와 양식을 따르도록” 하였으나, 두 점의 유물 크기 차이로 보아 그 제도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877년(고종 14)에는 “계방桂坊의 관원 가운데 과거에 오른 사람이 있으면 방방放榜할 때 어사화는 비단으로 만들고 홍패는 종이로 하되 길이와 너비는 특별히 일반적인 홍패와 다르게 하는 것으로 규식을 정하라.”라고 하여, 조선 후기에는 재료를 종이뿐만 아니라 비단으로도 만들었음이 확인된다.

특징 및 의의

어사화는 가늘게 쪼갠 댓개비 두 개를 밑부분은 함께 싸서 묶고 위쪽으로는 각각 벌어지도록 하여 청·홍·황·백색의 종이를 꽃모양으로 오려 붙였다. 한쪽 끝을 복두 뒤에 꽂고, 다른 한끝은 명주실로 잡아매어 머리 위로 휘어 넘겨서 입에 물거나 손에 든 홀에 묶어서 어사화를 고정해서 다녔다. 어사화는 홍패와 함께 문과·무과의 급제자에게만 지급되던 것으로 입신양명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를 담았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日省錄, 국역 다산시문집7(정약용, 민족문화추진회 역, 솔, 1994), 국역 명재유고(윤증, 민족문화추진회, 2006), 국역 목은집3(이색, 임정기 역, 민족문화추진회, 2001), 용재총화(성현, 김남이 외 역, 휴머니스트, 2015),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2(박성실, 민속원, 2002),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