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주름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김은정(金垠呈)

정의

조선시대 남자가 착용했던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이 잡힌 곧은 깃으로 구성된 편복便服의 포.

내용

액주름포는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이 있는 포라는 의미이며, 문헌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처음 살펴볼 수 있다. 세종 28년 5월조(『세종실록世宗實錄』 권 112)에 의정부의 「복색상정조건服色詳定條件」에서 “서인庶人·제원諸員·대장隊長·대부隊副의 일수양반日守兩班 및 공상천례工商賤隸는 단령을 없애고 철릭과 액추의腋皺衣·직령의를 입도록 하라”라는 기록이 있다. 세조 13년 10월조(『세조실록世祖實錄』 권 44)에 왕이 귀성군龜城君 이준李俊의 아내에게 초록면주유방첩아草綠綿紬襦榜褶兒, 면주겹방첩아綿布裌榜褶兒에 양옆에 주름이 있는 옷을 하사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액주름포를 ‘액추의’ 라고도 하는데, 겨드랑이 밑에 쭈그려서 주름잡은 옷이라는 뜻이다.
액주름포는 형태적으로 볼 때 길과 섶이 의衣와 상裳으로 분리되지 않고 옆에 달린 무만 따로 주름잡아 겨드랑이 밑에서 연결한 부분적인 의상연의衣裳聯衣 형태이다. 형태는 소매 형태나 트임, 길이와 고름 등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계절에 따라 착용되었던 평상복임을 알 수 있다. 실물자료는 조선시대 초중기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현재 박물관에 소장된 액주름포는 명주· 무명·목면·저포·공단 등 다양한 재료로 제작되었다.
구성 방법도 소매 형태나 트임 유무와 길이, 고름의 색상과 크기가 다채롭게 나타나고 있어 기능적으로 착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적인 면에서도 조선시대 남자가 착용했던 포 중에서도 독특한 형태이다. 특히 액주름은 옆길 무의 상부에 잔주름을 일정하게 잡아 작은 사다리꼴 무에 바느질하고, 이것을 다시 배래와 연결한 형태이다. 이러한 사다리꼴의 무는 주름 부분이 옷의 형태나 기능 면에서 편하게 착용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 액주름포에는 당襠이라고 불리는 정사각형의 무를 삼각형으로 접어 함께 연결하였다. 액주름포는 깃·소매·상하의 비율·주름의 너비·고름의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액주름포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비교해 보면, 깃의 형태는 칼깃이 주류를 이루나 목판깃이 나타나기도 한다. 액주름포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주로 명주·목면·저포·공단 등이다. 바느질 구성방법은 홑·겹·솜·누비 등으로 제작되었다. 소매 형태는 통수형이 대부분이나 임진왜란 후에는 통수형· 두리형·배래형이 나타난다. 주름 형태는 맞주름과 외주름이 공존하며 임진왜란 후에는 주름의 너비와 안주름 분량이 늘어난다. 또한 화장과 전체 길이가 다른 포제보다 짧은 편이다.

특징 및 의의

액주음의 액腋은 겨드랑이 액자이고, 주음注音은 주름이라는 우리말의 한자 표기이다. 이는 양 겨드랑이 밑에 주름이 잡혀 있는 옷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액주름포는 조선시대에 왕부터 평민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입었던 포이다. 액주름포는 조선시대 초중기에 잠시 입다가 없어진 포로 양쪽 겨드랑이 밑에 주름이 잡혀 있는 곧은 깃의 포이다. 액주름포는 조선 전기에 출토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는 전쟁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융복철릭의 착용이 늘어나고, 실학사상이 대두하면서 도포창의, 심의가 널리 착용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사극 드라마 추노에 나타난 액주름연구(김초영 외, 남도민속연구23, 남도민속학회, 2011), 조선시대 액주름포에 관한 연구(이경희,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조선시대 출토복식을 통해 본 남자포 연구(유송옥,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 1984), 조선전기 출토복식연구(박성실, 세종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한국복식사(유송옥, 수학사, 1998).

액주름포

액주름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김은정(金垠呈)

정의

조선시대 남자가 착용했던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이 잡힌 곧은 깃으로 구성된 편복便服의 포.

내용

액주름포는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이 있는 포라는 의미이며, 문헌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처음 살펴볼 수 있다. 세종 28년 5월조(『세종실록世宗實錄』 권 112)에 의정부의 「복색상정조건服色詳定條件」에서 “서인庶人·제원諸員·대장隊長·대부隊副의 일수양반日守兩班 및 공상천례工商賤隸는 단령을 없애고 철릭과 액추의腋皺衣·직령의를 입도록 하라”라는 기록이 있다. 세조 13년 10월조(『세조실록世祖實錄』 권 44)에 왕이 귀성군龜城君 이준李俊의 아내에게 초록면주유방첩아草綠綿紬襦榜褶兒, 면주겹방첩아綿布裌榜褶兒에 양옆에 주름이 있는 옷을 하사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액주름포를 ‘액추의’ 라고도 하는데, 겨드랑이 밑에 쭈그려서 주름잡은 옷이라는 뜻이다.
액주름포는 형태적으로 볼 때 길과 섶이 의衣와 상裳으로 분리되지 않고 옆에 달린 무만 따로 주름잡아 겨드랑이 밑에서 연결한 부분적인 의상연의衣裳聯衣 형태이다. 형태는 소매 형태나 트임, 길이와 고름 등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계절에 따라 착용되었던 평상복임을 알 수 있다. 실물자료는 조선시대 초중기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현재 박물관에 소장된 액주름포는 명주· 무명·목면·저포·공단 등 다양한 재료로 제작되었다.
구성 방법도 소매 형태나 트임 유무와 길이, 고름의 색상과 크기가 다채롭게 나타나고 있어 기능적으로 착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적인 면에서도 조선시대 남자가 착용했던 포 중에서도 독특한 형태이다. 특히 액주름은 옆길 무의 상부에 잔주름을 일정하게 잡아 작은 사다리꼴 무에 바느질하고, 이것을 다시 배래와 연결한 형태이다. 이러한 사다리꼴의 무는 주름 부분이 옷의 형태나 기능 면에서 편하게 착용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 액주름포에는 당襠이라고 불리는 정사각형의 무를 삼각형으로 접어 함께 연결하였다. 액주름포는 깃·소매·상하의 비율·주름의 너비·고름의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액주름포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비교해 보면, 깃의 형태는 칼깃이 주류를 이루나 목판깃이 나타나기도 한다. 액주름포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주로 명주·목면·저포·공단 등이다. 바느질 구성방법은 홑·겹·솜·누비 등으로 제작되었다. 소매 형태는 통수형이 대부분이나 임진왜란 후에는 통수형· 두리형·배래형이 나타난다. 주름 형태는 맞주름과 외주름이 공존하며 임진왜란 후에는 주름의 너비와 안주름 분량이 늘어난다. 또한 화장과 전체 길이가 다른 포제보다 짧은 편이다.

특징 및 의의

액주음의 액腋은 겨드랑이 액자이고, 주음注音은 주름이라는 우리말의 한자 표기이다. 이는 양 겨드랑이 밑에 주름이 잡혀 있는 옷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액주름포는 조선시대에 왕부터 평민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입었던 포이다. 액주름포는 조선시대 초중기에 잠시 입다가 없어진 포로 양쪽 겨드랑이 밑에 주름이 잡혀 있는 곧은 깃의 포이다. 액주름포는 조선 전기에 출토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는 전쟁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융복인 철릭의 착용이 늘어나고, 실학사상이 대두하면서 도포와 창의, 심의가 널리 착용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사극 드라마 추노에 나타난 액주름연구(김초영 외, 남도민속연구23, 남도민속학회, 2011), 조선시대 액주름포에 관한 연구(이경희,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조선시대 출토복식을 통해 본 남자포 연구(유송옥,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 1984), 조선전기 출토복식연구(박성실, 세종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한국복식사(유송옥, 수학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