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眼鏡)

한자명

眼鏡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윤을요(尹乙堯)

정의

눈의 굴절 이상을 보정·보호하거나 장식하기 위한 도구.

역사

현재까지 안경 기원에 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더불어 우리나라에 안경이 유입된 시기 또한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호민李好閔(1553~1634)이 쓴 『오봉집五峯集』의 안경명眼鏡銘과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을 통해 안경의 유입 시기가 추정될 뿐이다. 또한 이규경李圭景(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실린 애체변증설과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안경眼鏡은 과거 안경 착용에 관한 실제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 자료로 쓰이고 있다.
현존하는 안경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임진왜란 직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안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휴대가 용이한 접이식 실다리 대모안경(거북이 등껍질)으로 안경집은 옻칠한 피나무로 제작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조선 후기 영조는 안경이 시력과 맞지 않아 탈착을 반복하였으며, 불경스러움을 이유로 사도세자의 안경 착용을 반대하였다. 또한 정조는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착용하였으나 1800년(정조 24)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안경을 쓰고 조정에 나가면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할 것 같아 쓰고 나갈 수 없었다는 기록을 통해 공식석상에서는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일반적으로 왕 앞에서의 안경 착용은 금지되었으나 어의만은 안경을 착용하고 시침할 수 있었으며, 왕이나 연장자 앞에서 안경 착용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로 인식되었다. 결과적으로 안경은 시력을 보완하는 편리한 물품이나 왕에게는 위엄과 품위를 손상시킬 수 있는 도구로 이해되었으며, 나이가 어리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는 상대를 무시하는 결례의 도구로 인식되었다.
17세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체적으로 제작된 안경이 존재하였으며, 경상북도 경주의 남석(수정) 안경은 우수한 품질의 수정안경으로 유명하였다. 남석 안경의 초기 제작 시기는 적어도 17세기 초반 경으로 추정되며, 이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민기閔機(1568~ 1641)가 자신의 안경을 부윤 시절(1636~1637)에 구입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다. 결국 임진왜란(1592~1598)을 전후로 조선에 유입된 초기 안경은 세도가와 부유층에 의해 주로 착용되었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대중에게 보급되었고, 17세기 무렵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체적으로 제작된 안경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내용

안경은 안경테와 안경알, 안경다리로 구성된다. 초기 안경은 코에 걸쳐 착용하거나 실고리 또는 끈을 달아 착용하였다. 안경테는 안경의코걸이가 접히는 접이식 형태에서 점차 코걸이 고정식 형태로 변화하였다. 초창기 안경을 고정하기 위하여 사용하던 실고리나 끈은 활동성과 안정성, 편리성의 요구로 인하여 안경다리로 변화하였으며 그로 인해 착용이 용이해졌다.
조선시대 안경은 안경테를 접을 수 있는 접이식과 고정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형태적 특징을 기준으로 대못안경·실다리안경·꺾기다리안경·무테안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못안경은 외알 안경 두 개의 테 사이를 대못으로 고정하고 이를 코걸이로 사용하여 옆으로 비껴 접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실다리안경은 안경테를 고정하는 도구로 끈이나 실을 고리형으로 만들어 착용하였다. 코받침이 있는 안경은 연결 부분에 받침대를 세워 안경의 안정성을 높였으며, 휴대가 용이한 접이식으로 제작되었다. 장시간 착용을 위해 머리 뒤나 망건 등에 묶어 착용하기도 하였다. 꺾기다리안경은 다리의 꺾임과 다리 끝부분에 부착된 원형판이 안정감을 도모하였으며, 반지형·만卍자문형·칠보문 등의 문양을 새겨 사용하였다. 대모 꺾기다리안경은 1800년대 중반에 제작되었으며, 무테안경은 1800년대 후반부터 사용되었는데, 지위와 부의 상징물처럼 인식되었지만 잘 깨지는 결점 때문에 오래 유행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안경테의 소재는 대모·우각牛角·나무·금속 등이 있었으며, 점차 무거운 것에서 가벼운 것으로 바뀌었다. 대모는 거북이 등껍질로 색상이 아름답고 견고하면서도 가벼워 안경테를 만드는 데 좋은 재료로 쓰였다. 우각테로는 속이 차지 않고 색깔이 연갈색이며 고르게 퍼진 암소 뿔을 사용하였으며, 나무테로는 재질이 단단하고 습기에 강한 대추나무를 사용하였다. 금속테안경은 금·은·동·기타 금속재료를 가공하여 사용했으며, 순금은 다른 금속(은·구리·니켈·아연 등)과 합금하여 경도·강도를 높여 사용되거나 도금 또는 피복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특징 및 의의

안경의 발전과 보급은 안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초창기에는 안경에 대한 거부감이 컸지만 동경과 필요성에 의하여 점차 긍정적으로 인식이 전환되었다. 유리 세공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초기에는 무거운 수정 안경이 제작되었으나 광학 기술의 발달로 기능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안경이 대중화되면서 노출 빈도가 잦아지자 기능성 외에 활동성과 안정성, 편리성, 경량성, 심미성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었으며, 이는 안경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안경은 시력을 보정하는 기능적인 도구에서 현대인의 개성을 연출하는 기능성이 내재된 심미적인 도구로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참고문헌

안경의 문화사(리차드 코손, 김하정 역, 에디터, 2003), 옛 안경과 안경집(금복현, 대원사, 1995),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규방문화(허동화, 현암사, 2006), 전통 안경집의 구성적 특징(홍명화, 한복문화16-3, 한복문화학회, 2013), 조선시대 안경과 안경집 디자인연구(윤을요, 한국패션디자인학회지14-4, 한국패션디자인학회, 2014),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강명관, 휴머니스트, 2015), 조선 중·후기 안경집의 소재에 따른 색채 특성(이영경·김영인, 복식58-4, 한국복식학회, 2008), 한국복식사전(강순제 외, 민속원, 2015), 표준국어대사전(korean.go.kr), 초당대학교안경박물관(cdu.ac.kr), 한빛고안경박물관(hanvitland.nemocom.kr).

안경

안경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윤을요(尹乙堯)

정의

눈의 굴절 이상을 보정·보호하거나 장식하기 위한 도구.

역사

현재까지 안경 기원에 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더불어 우리나라에 안경이 유입된 시기 또한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호민李好閔(1553~1634)이 쓴 『오봉집五峯集』의 안경명眼鏡銘과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을 통해 안경의 유입 시기가 추정될 뿐이다. 또한 이규경李圭景(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실린 애체변증설과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안경眼鏡은 과거 안경 착용에 관한 실제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 자료로 쓰이고 있다.
현존하는 안경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임진왜란 직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안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휴대가 용이한 접이식 실다리 대모안경(거북이 등껍질)으로 안경집은 옻칠한 피나무로 제작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조선 후기 영조는 안경이 시력과 맞지 않아 탈착을 반복하였으며, 불경스러움을 이유로 사도세자의 안경 착용을 반대하였다. 또한 정조는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착용하였으나 1800년(정조 24)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안경을 쓰고 조정에 나가면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할 것 같아 쓰고 나갈 수 없었다는 기록을 통해 공식석상에서는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일반적으로 왕 앞에서의 안경 착용은 금지되었으나 어의만은 안경을 착용하고 시침할 수 있었으며, 왕이나 연장자 앞에서 안경 착용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로 인식되었다. 결과적으로 안경은 시력을 보완하는 편리한 물품이나 왕에게는 위엄과 품위를 손상시킬 수 있는 도구로 이해되었으며, 나이가 어리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는 상대를 무시하는 결례의 도구로 인식되었다.
17세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체적으로 제작된 안경이 존재하였으며, 경상북도 경주의 남석(수정) 안경은 우수한 품질의 수정안경으로 유명하였다. 남석 안경의 초기 제작 시기는 적어도 17세기 초반 경으로 추정되며, 이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민기閔機(1568~ 1641)가 자신의 안경을 부윤 시절(1636~1637)에 구입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다. 결국 임진왜란(1592~1598)을 전후로 조선에 유입된 초기 안경은 세도가와 부유층에 의해 주로 착용되었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대중에게 보급되었고, 17세기 무렵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체적으로 제작된 안경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내용

안경은 안경테와 안경알, 안경다리로 구성된다. 초기 안경은 코에 걸쳐 착용하거나 실고리 또는 끈을 달아 착용하였다. 안경테는 안경의코걸이가 접히는 접이식 형태에서 점차 코걸이 고정식 형태로 변화하였다. 초창기 안경을 고정하기 위하여 사용하던 실고리나 끈은 활동성과 안정성, 편리성의 요구로 인하여 안경다리로 변화하였으며 그로 인해 착용이 용이해졌다.
조선시대 안경은 안경테를 접을 수 있는 접이식과 고정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형태적 특징을 기준으로 대못안경·실다리안경·꺾기다리안경·무테안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못안경은 외알 안경 두 개의 테 사이를 대못으로 고정하고 이를 코걸이로 사용하여 옆으로 비껴 접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실다리안경은 안경테를 고정하는 도구로 끈이나 실을 고리형으로 만들어 착용하였다. 코받침이 있는 안경은 연결 부분에 받침대를 세워 안경의 안정성을 높였으며, 휴대가 용이한 접이식으로 제작되었다. 장시간 착용을 위해 머리 뒤나 망건 등에 묶어 착용하기도 하였다. 꺾기다리안경은 다리의 꺾임과 다리 끝부분에 부착된 원형판이 안정감을 도모하였으며, 반지형·만卍자문형·칠보문 등의 문양을 새겨 사용하였다. 대모 꺾기다리안경은 1800년대 중반에 제작되었으며, 무테안경은 1800년대 후반부터 사용되었는데, 지위와 부의 상징물처럼 인식되었지만 잘 깨지는 결점 때문에 오래 유행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안경테의 소재는 대모·우각牛角·나무·금속 등이 있었으며, 점차 무거운 것에서 가벼운 것으로 바뀌었다. 대모는 거북이 등껍질로 색상이 아름답고 견고하면서도 가벼워 안경테를 만드는 데 좋은 재료로 쓰였다. 우각테로는 속이 차지 않고 색깔이 연갈색이며 고르게 퍼진 암소 뿔을 사용하였으며, 나무테로는 재질이 단단하고 습기에 강한 대추나무를 사용하였다. 금속테안경은 금·은·동·기타 금속재료를 가공하여 사용했으며, 순금은 다른 금속(은·구리·니켈·아연 등)과 합금하여 경도·강도를 높여 사용되거나 도금 또는 피복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특징 및 의의

안경의 발전과 보급은 안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초창기에는 안경에 대한 거부감이 컸지만 동경과 필요성에 의하여 점차 긍정적으로 인식이 전환되었다. 유리 세공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초기에는 무거운 수정 안경이 제작되었으나 광학 기술의 발달로 기능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안경이 대중화되면서 노출 빈도가 잦아지자 기능성 외에 활동성과 안정성, 편리성, 경량성, 심미성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었으며, 이는 안경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안경은 시력을 보정하는 기능적인 도구에서 현대인의 개성을 연출하는 기능성이 내재된 심미적인 도구로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참고문헌

안경의 문화사(리차드 코손, 김하정 역, 에디터, 2003), 옛 안경과 안경집(금복현, 대원사, 1995),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규방문화(허동화, 현암사, 2006), 전통 안경집의 구성적 특징(홍명화, 한복문화16-3, 한복문화학회, 2013), 조선시대 안경과 안경집 디자인연구(윤을요, 한국패션디자인학회지14-4, 한국패션디자인학회, 2014),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강명관, 휴머니스트, 2015), 조선 중·후기 안경집의 소재에 따른 색채 특성(이영경·김영인, 복식58-4, 한국복식학회, 2008), 한국복식사전(강순제 외, 민속원, 2015), 표준국어대사전(korean.go.kr), 초당대학교안경박물관(cdu.ac.kr), 한빛고안경박물관(hanvitland.nemoco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