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洗濯)

한자명

洗濯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윤지원(尹智嫄)

정의

의복의 착용 또는 보관 중에 발생한 더러움을 없애 깨끗하게 만드는 일.

역사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연하천에서 세탁을 하였다.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는 풍부하고 질 좋은 수자원으로 인해 세탁 용수의 보급에 문제가 없어 의복을 청결히 하는 습속이 있었다. 특히 하얀 옷을 즐겨 입었던 우리나라는 유색옷에 비해 관리가 어렵다는 특성과 조선조에 특히 강조된 청결을 중시하는 관습이 결합하여 다양하고 효과적인 의복 관리법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초반까지도 겨우내 빨랫감을 모았다가 날이 풀리면 강가나 냇가에 나가서 빨래를 했다. 물이 좋고 빨래하기 좋은 강가나 냇가에는 어느 곳이나 ‘마전터’가 있었다. 서울 성북동 골짜기는 마전(표백)이 성행했으며, 지금도 이 일대를 마전터라고 부른다. 이곳이 마전터가 된 것은 1765년(영조 41) 영의정 홍봉환이 서울 각 시전市廛에서 파는 포목을 표백하는 권리를 이곳 주민에게 주도록 왕에게 건의하면서부터였다.
1920년대부터는 30~40전의 삯을 받고 남의 빨래를 해주는 ‘빨래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내용

세탁은 위생을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옷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행해졌다. 전통적인 세탁 방식은 의복의 색채, 의복의 종류, 오염의 종류 및 소재,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다. 세제의 종류와 오염 제거 방식 등 다양한 세탁 방식이 있다. 때에 찌든 빨랫감은 잿물에 삶아 빤 후에 여러 번 물에 적시면서 햇볕에 널어 바랜다. 빨 때에는 돌 위에 빨래를 놓고 빨래방망이로 두드리고 발로 밟아 빠는데, 방망이를 너무 힘껏 두들기면 빨랫감이 상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깨끗하게 헹군 빨랫감을 양손으로 비틀어 힘껏 짜서 탈수가 되면 널어 말린다. 명주모시는 비틀어 짜지 않고 손으로 눌러 짠다.
빨래한 뒤 건조하는 장소는 근처의 바위나 땅, 산자락에 널기도 하고, 마당에 매어 놓은 빨랫줄에 널기도 했다. 대부분 빨래는 햇볕에 말리기 때문에 빨래는 날이 맑을 때 널며, 빨랫줄의 중간에는 바지랑대를 세워 빨래가 늘어지는 것을 막고 공기가 잘 통하게 해야 한다. 빨래는 낮에만 널어놓고 말리며 낮 동안에 채 마르지 않은 빨래는 걷어서 방이마루의 한쪽 구석에 두었다가 다음 날 다시 말린다.
큰 빨래를 할 때, 특히 무명이나 광목을 희게 바래거나 삶을 때는 솥을 걸어 놓고 장작불을 지피면서 하였다. 삶아서 빨 경우는 처음에 대강의 때를 먼저 없앤 후 소죽을 쑤는 큰 가마솥에다 삶은 후 개울에서 방망이질하여 때를 없앤다. 의복의 종류별로 각각 다양한 방법과 세제를 사용하였는데, 소재가 모두 다르고 걸쳐지는 신체 부위에 따라 생기는 때와 얼룩의 성분이 차이가 있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1. 세제: 세제는 자연에서 얻었는데 잿물·오줌·쌀뜨물·풀잎 등이 사용되었다. 초가집 추녀에서 받은 빗물은 걸레나 덜 더러운 옷을 빠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잿물은 식물(볏짚, 콩짚, 메밀대 등)을 태워 만든 것으로 염기성을 띠기 때문에 때의 성분인 동물성 단백질을 분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잿물은 재료도 귀하고 만들기도 번거롭기 때문에 빨래거리를 많이 모았다가 날을 잡아서 한꺼번에 만들어 사용하였다. 잿물 내리는 방법은 먼저 큰 자배기 위에 막대기를 두어 개 얹고, 그 위에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 속에 짚을 깐다. 그 위에 태운 재를 넣고 재 위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잿물이 자배기에 고인다. 물을 여러 번 부어 잿물을 계속 받는다. 처음 내린 잿물은 ‘애물’ 또는 ‘초물’이라 한다. 애물은 독하므로 따로 받아 두었다가 때가 잘 빠지지 않은 것을 빨거나 삶을 때 사용하였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양잿물은 서양의 의미를 담은 ‘양洋’을 붙인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등장하여 사서 썼다. 수산화나트륨 수용액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통적 잿물과는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알칼리성분이 너무 강해서 옷감과 피부가 상한다고 하여 많이 이용되지는 않았다. 주로 삼베·무명·광목 등에 사용되었다. 또 이 양잿물로 쌀겨와 반죽하여 굳힌 고형비누가 이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색이 꺼멓기 때문에 ‘꺼먹비누’라고 불렀다. 녹두를 물에 불려 맷돌에 갈아 껍질을 벗기고 불린 다음 뭉쳐 두었다가 필요한 때마다 개어서 썼다고 하는데, 세안용 또는 모시 빨래용으로만 사용했으며 매우 아껴 썼다.
백색옷의 경우 백창포·무·토란·붉은 팥 등 식물의 꽃이나 열매, 잎, 줄기를 물에 우려내어 세탁에 이용하였다. 유색옷의 경우 단순히 옷에 묻은 때와 얼룩을 제거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색깔을 좀 더 선명하게 하거나 엷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식물 외에도 소가죽 아교 같은 동물성 재료나 사람의 오줌 내지는 요리에 쓰이는 식초나 술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특히 썩은 오줌은 세척력이 좋아 작업복의 찌든 때나 여성들의 서답(생리대)을 빨 때 사용했는데, 빨래거리를 오줌 속에 담가 두었다가 빨면 때도 잘 빠지고 하얗게 되었다. 견직물 같은 귀한 직물을 세탁할 때는 콩·녹두·팥·쌀뜨물· 두부순물 등을 사용하였다. 조상의 지혜에서 나온 천연 세제들은 근래에 와서 친환경 천연세제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제주도는 잿물 이외에 식물이나 해조류를 세탁 재료로 사용한 것이 특징적이다.
2. 세탁용구: 빨래바구니함지박이나 오지그릇(자배기)을 사용하였고, 나무로 만든 빨랫방망이로 옷감을 두들겨 때를 뺐다. 손목의 힘을 이용해 빨래를 주물러 빨거나 빨랫감을 물이 담긴 통에 넣고 막대로 휘휘 젓는 방법을 사용하는 서양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빨랫돌은 냇가에 고정시켜 놓고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 세탁장소: 주로 마을 근처의 흐르는 냇가나 강가나 도랑, 우물가였다. 서울 사람들의 빨래터로 유명한 곳은 자하문 밖 세검정변이었다. 현재 경복궁 근처의 북촌 사람이 이용하였고, 청계천변은 서울 사람의 가장 큰 빨래터였다. 한편 특수한 경우로 제주에서는 바닷물이 썰물일 때 물이 빠져나간 갯가의 용천수가 흘러나오는 곳이 임시 빨래터가 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 유료로 운영되는 공동세탁장이 생겼으나 이용자가 많지 않았다.

지역사례

빨랫방망이는 다듬잇방망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둥글고 긴 형태인데, 제주도 지역은 그 형태가 다르다. 제주도에서는 빨랫방망이를 ‘서답막개’, ‘물막개’라 불렀다. 서답막개는 나무를 넓적하게 깎아 만드는데, 그 형태는 탁구채와 유사하다.
빨래와 관련된 속설은 크게 장례제례에 관련된 속설, 빨래와 건조하는 시기에 관련된 속설로 나뉜다.

특징 및 의의

순전히 여성들의 노동력으로만 했기에 이를 배려해 명절 또는 산후 등에는 빨래를 금기시했다. 여성들이 시냇가를 빨래터로 선택한 것은 용수시설 부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시냇가의 빨래터는 가정에서 해방되는 장소이자 대화의 공간으로 여성들이 위로받는 곳이었다.

참고문헌

경기민속지-의식주(경기도박물관, 2001), 문헌으로 본 한국 전통의복 관리법 연구(한지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우리 생활 100년·옷(고부자, 현암사, 2001),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의생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2012), 한국복식 2천년(국립민속박물관, 1995).

세탁

세탁
한자명

洗濯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윤지원(尹智嫄)

정의

의복의 착용 또는 보관 중에 발생한 더러움을 없애 깨끗하게 만드는 일.

역사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연하천에서 세탁을 하였다.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는 풍부하고 질 좋은 수자원으로 인해 세탁 용수의 보급에 문제가 없어 의복을 청결히 하는 습속이 있었다. 특히 하얀 옷을 즐겨 입었던 우리나라는 유색옷에 비해 관리가 어렵다는 특성과 조선조에 특히 강조된 청결을 중시하는 관습이 결합하여 다양하고 효과적인 의복 관리법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초반까지도 겨우내 빨랫감을 모았다가 날이 풀리면 강가나 냇가에 나가서 빨래를 했다. 물이 좋고 빨래하기 좋은 강가나 냇가에는 어느 곳이나 ‘마전터’가 있었다. 서울 성북동 골짜기는 마전(표백)이 성행했으며, 지금도 이 일대를 마전터라고 부른다. 이곳이 마전터가 된 것은 1765년(영조 41) 영의정 홍봉환이 서울 각 시전市廛에서 파는 포목을 표백하는 권리를 이곳 주민에게 주도록 왕에게 건의하면서부터였다.
1920년대부터는 30~40전의 삯을 받고 남의 빨래를 해주는 ‘빨래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내용

세탁은 위생을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옷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행해졌다. 전통적인 세탁 방식은 의복의 색채, 의복의 종류, 오염의 종류 및 소재,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다. 세제의 종류와 오염 제거 방식 등 다양한 세탁 방식이 있다. 때에 찌든 빨랫감은 잿물에 삶아 빤 후에 여러 번 물에 적시면서 햇볕에 널어 바랜다. 빨 때에는 돌 위에 빨래를 놓고 빨래방망이로 두드리고 발로 밟아 빠는데, 방망이를 너무 힘껏 두들기면 빨랫감이 상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깨끗하게 헹군 빨랫감을 양손으로 비틀어 힘껏 짜서 탈수가 되면 널어 말린다. 명주나 모시는 비틀어 짜지 않고 손으로 눌러 짠다.
빨래한 뒤 건조하는 장소는 근처의 바위나 땅, 산자락에 널기도 하고, 마당에 매어 놓은 빨랫줄에 널기도 했다. 대부분 빨래는 햇볕에 말리기 때문에 빨래는 날이 맑을 때 널며, 빨랫줄의 중간에는 바지랑대를 세워 빨래가 늘어지는 것을 막고 공기가 잘 통하게 해야 한다. 빨래는 낮에만 널어놓고 말리며 낮 동안에 채 마르지 않은 빨래는 걷어서 방이나 마루의 한쪽 구석에 두었다가 다음 날 다시 말린다.
큰 빨래를 할 때, 특히 무명이나 광목을 희게 바래거나 삶을 때는 솥을 걸어 놓고 장작불을 지피면서 하였다. 삶아서 빨 경우는 처음에 대강의 때를 먼저 없앤 후 소죽을 쑤는 큰 가마솥에다 삶은 후 개울에서 방망이질하여 때를 없앤다. 의복의 종류별로 각각 다양한 방법과 세제를 사용하였는데, 소재가 모두 다르고 걸쳐지는 신체 부위에 따라 생기는 때와 얼룩의 성분이 차이가 있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1. 세제: 세제는 자연에서 얻었는데 잿물·오줌·쌀뜨물·풀잎 등이 사용되었다. 초가집 추녀에서 받은 빗물은 걸레나 덜 더러운 옷을 빠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잿물은 식물(볏짚, 콩짚, 메밀대 등)을 태워 만든 것으로 염기성을 띠기 때문에 때의 성분인 동물성 단백질을 분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잿물은 재료도 귀하고 만들기도 번거롭기 때문에 빨래거리를 많이 모았다가 날을 잡아서 한꺼번에 만들어 사용하였다. 잿물 내리는 방법은 먼저 큰 자배기 위에 막대기를 두어 개 얹고, 그 위에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 속에 짚을 깐다. 그 위에 태운 재를 넣고 재 위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잿물이 자배기에 고인다. 물을 여러 번 부어 잿물을 계속 받는다. 처음 내린 잿물은 ‘애물’ 또는 ‘초물’이라 한다. 애물은 독하므로 따로 받아 두었다가 때가 잘 빠지지 않은 것을 빨거나 삶을 때 사용하였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양잿물은 서양의 의미를 담은 ‘양洋’을 붙인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등장하여 사서 썼다. 수산화나트륨 수용액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통적 잿물과는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알칼리성분이 너무 강해서 옷감과 피부가 상한다고 하여 많이 이용되지는 않았다. 주로 삼베·무명·광목 등에 사용되었다. 또 이 양잿물로 쌀겨와 반죽하여 굳힌 고형비누가 이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색이 꺼멓기 때문에 ‘꺼먹비누’라고 불렀다. 녹두를 물에 불려 맷돌에 갈아 껍질을 벗기고 불린 다음 뭉쳐 두었다가 필요한 때마다 개어서 썼다고 하는데, 세안용 또는 모시 빨래용으로만 사용했으며 매우 아껴 썼다.
백색옷의 경우 백창포·무·토란·붉은 팥 등 식물의 꽃이나 열매, 잎, 줄기를 물에 우려내어 세탁에 이용하였다. 유색옷의 경우 단순히 옷에 묻은 때와 얼룩을 제거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색깔을 좀 더 선명하게 하거나 엷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식물 외에도 소가죽 아교 같은 동물성 재료나 사람의 오줌 내지는 요리에 쓰이는 식초나 술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특히 썩은 오줌은 세척력이 좋아 작업복의 찌든 때나 여성들의 서답(생리대)을 빨 때 사용했는데, 빨래거리를 오줌 속에 담가 두었다가 빨면 때도 잘 빠지고 하얗게 되었다. 견직물 같은 귀한 직물을 세탁할 때는 콩·녹두·팥·쌀뜨물· 두부순물 등을 사용하였다. 조상의 지혜에서 나온 천연 세제들은 근래에 와서 친환경 천연세제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제주도는 잿물 이외에 식물이나 해조류를 세탁 재료로 사용한 것이 특징적이다.
2. 세탁용구: 빨래바구니는 함지박이나 오지그릇(자배기)을 사용하였고, 나무로 만든 빨랫방망이로 옷감을 두들겨 때를 뺐다. 손목의 힘을 이용해 빨래를 주물러 빨거나 빨랫감을 물이 담긴 통에 넣고 막대로 휘휘 젓는 방법을 사용하는 서양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빨랫돌은 냇가에 고정시켜 놓고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 세탁장소: 주로 마을 근처의 흐르는 냇가나 강가나 도랑, 우물가였다. 서울 사람들의 빨래터로 유명한 곳은 자하문 밖 세검정 주변이었다. 현재 경복궁 근처의 북촌 사람이 이용하였고, 청계천변은 서울 사람의 가장 큰 빨래터였다. 한편 특수한 경우로 제주에서는 바닷물이 썰물일 때 물이 빠져나간 갯가의 용천수가 흘러나오는 곳이 임시 빨래터가 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 유료로 운영되는 공동세탁장이 생겼으나 이용자가 많지 않았다.

지역사례

빨랫방망이는 다듬잇방망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둥글고 긴 형태인데, 제주도 지역은 그 형태가 다르다. 제주도에서는 빨랫방망이를 ‘서답막개’, ‘물막개’라 불렀다. 서답막개는 나무를 넓적하게 깎아 만드는데, 그 형태는 탁구채와 유사하다.
빨래와 관련된 속설은 크게 장례와 제례에 관련된 속설, 빨래와 건조하는 시기에 관련된 속설로 나뉜다.

특징 및 의의

순전히 여성들의 노동력으로만 했기에 이를 배려해 명절 또는 산후 등에는 빨래를 금기시했다. 여성들이 시냇가를 빨래터로 선택한 것은 용수시설 부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시냇가의 빨래터는 가정에서 해방되는 장소이자 대화의 공간으로 여성들이 위로받는 곳이었다.

참고문헌

경기민속지-의식주(경기도박물관, 2001), 문헌으로 본 한국 전통의복 관리법 연구(한지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우리 생활 100년·옷(고부자, 현암사, 2001),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의생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2012), 한국복식 2천년(국립민속박물관,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