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김용문(金容文)

정의

관례나 결혼 후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끌어올린 후,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높이 세우는 성인 남자의 대표적 머리모양.

내용

상투는 결혼한 남자가 땋은머리를 풀고 자신의 머리를 모아 빗어 올린 머리모양으로 머리 위에서 묶은 머리모양이 추와 비슷하다고 해서 ‘추계’라고 하였다.
『사기史記』에는 조선왕 만滿이 연燕나라 사람이며 연나라에서 망명해 무려 천여 명을 모아 머리모양을 추계椎髻로 하고 호복胡服을 입고 동쪽의 요새를 벗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 ‘괴두노계魁頭露紒’, 즉 관모를 쓰지 않는 날상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구당서舊唐書』의 “춤추는 네 사람은 뒤쪽에 추계를 하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두르고 …… ”라는 기록에서 오래 전부터 남자의 머리모양이 상투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삼실총三室塚과 무용총舞踊塚 벽화에 그려진 서역인은 큰상투로 빗고 있으며, 깊고 큰 눈과 높은 코로 보아 서역에서 온 사람이다. 무용총의 주인과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의 선인은 자신의 머리카락만으로 올린 상투머리를 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상투의 모양은 커다랗고 둥근 것, 작고 둥근 것, 쌍상투가 있다. 큰 상투는 관모를 쓰지 않은 장사도壯士圖나 역사상力士像에 많고, 작은 상투는 관모를 쓰는 귀인층에서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상투는 경주 금령총金鈴塚 출토의 도기로 만들어진 기마인물에 잘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冠·건巾·복두幞頭를 썼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종류의 관모들이 상투 위에 쓰기 적합한 모양이다. 1278년(충렬왕 4) 충렬왕의 개체령에 의하여 모든 관료층에서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아 내린 몽골의 개체변발開剃辮髮을 하였다. 개체변발은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만 남겨 놓고 뒤로 길게 땋아 늘어뜨리며 겁구아怯仇兒라고 하며, 몽골식 변발辮髮을 의미하는 몽골어 kegul의 음차音借 표기이다. 충렬왕과 왕족 및 신하들이 개체변발로 바꾸었으나 일반 백성들까지 개체변발을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1389년에 공민왕은 변발호복辮髮胡服이 우리의 제도가 아니라는 신하의 말에 곧 변발을 풀었다고 한다. 공민왕의 중흥 정책 이후에는 다시 상투로 돌아갔다.
조선시대는 초상화나 풍속화를 통하여 계층을 막론하고 상투 튼 모습을 볼 수 있다. 상투를 틀 때는 ‘배코치다.’라고 하여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깎아내고 나머지 머리만을 빗어 올려 틀게 된다. 많은 머리카락이 정수리에 모이면 열이 발산하기 어려워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이후 조혼早婚 풍습이 퍼지면서 10세 안팎의 소년이 관례冠禮를 치르고 상투를 틀어 올리면 머리가 무겁고 머리 밑이 당겨 심한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상투는 하나만 트는 것이 보통이지만,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쌍상투를 하기도 하였다. 전통사회에서는 혼인한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엄격한 차별을 두어 어린 아이라도 장가가면 상투를 틀고 성인 대접을 받았고, 나이가 많아도 혼인하지 않은 자에게는 하댓말을 썼다. 그래서 혼인한 것처럼 보이려고 상투를 틀기도 하였는데 혼인 절차를 밟지 않고 상투를 트는 것을 건상투라고 하였다. 상투 꼭지의 정상에는 장식을 위하여 금, 은, 동 등으로 만든 동곳을 꽂았고,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리지 않게 이마 둘레에 망건網巾을 썼다. 망건 앞이마 부분에는 갓을 고정하기 위해 풍잠風簪을 달고, 그 위에 다양한 관모를 썼다. 상민常民은 망건 대신 수건을 동이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11월 16일 조칙에 “국민들에 앞서 내가 먼저 단발하니 백성들은 내 뜻을 받들어 만국과 병립할 수 있는 대업을 성취케 하라.”라는 단발령斷髮令이 공식적으로 공포되어 상투를 자르게 하였다. 『조광早光』에 단발령에 관한 기사가 있다. “머리를 깎는 것은 위생에 이롭고 일을 하는 데 편리하므로 왕이 정치개혁과 나라의 부강을 도모하시는 이때 먼저 친히 단발을 하여 모범을 보이셨다고 한다. 내부대신內部大臣 유길준兪吉濬은 고시告示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상투 베기를 권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순검을 풀어서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도록 하였다. 보배와 같이 생각하고 생명과 같이 귀한 상투를 할 일 없이 가위가 한번 움직이는 바람에 추풍낙엽과 같이 땅에 떨어지니 그 형상이 진실로 참담하였다.”라고 전해진다. 유건儒巾을 쓴 선비들은 상투를 베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니 단발령을 걷으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그 밖의 백성들은 죽으면 죽었지 상투는 놓지 못하겠다고 죽기를 무릅쓰고 반대하였다. 민심을 진정시키고 상투를 베는 것의 이해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한 번 더 알리기 위하여 단발령을 내린 다음 해에 고종이 한 번 더 영을 내리었지만 민심을 진정시키지는 못하였다. 완강한 상투 옹호자들은 만일 국법으로 한다면 무서운 반역자로 상투 대신에 목이 베일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의 단발령과 관련된 기록에 의하면 상투를 자르지 않으려고 낙향하거나 잘린 상투를 주머니 속에 넣고 통곡하며 성을 나갔다고 한다. “삭발한다는 말이 점차 일어나더니 10월 중에 일본 공사가 왕을 위협하여 조속히 머리를 깎도록 하였으나 왕은 명성황후의 장사를 치룬 뒤로 미루었다. 마침내 그때가 되자 유길준과 조희연 등이 일본군을 인도하여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한 후 머리를 깎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고 선언하니 고종은 긴 한숨을 들이쉬며 정병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이 짐의 머리를 깎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정병하는 가위를 가지고 손을 놀려 왕의 머리를 깎았으며 유길준은 왕태자의 머리를 깎았다.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이 이미 내려지니 곡성이 하늘을 진동하고 사람들은 분하고 노해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형세가 바야흐로 격변하여 일본인들은 군대를 엄히 하여 대기시켰으며, 경무사 허진은 순검들을 인솔하고 칼을 들고 길을 막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를 깎았다. 또한 인가에 들어가 조사해서 찾아 헤매니 깊숙하게 숨지 않고서는 머리를 깎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손님으로 왔다가 상투를 집어서 주머니 속에 감추고 통곡을 하며 성을 나갔다. 머리를 깎인 자는 빡빡 깎지 아니하고 상투만 자르고 머리털은 남겨 놓아 장발승 같았는데 오직 부인네와 어린아이들만 깎이지 않았다. 학부대신 이도재는 반박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상투 싸움은 정치 문제로 번져 친러시아파가 중심이 된 반대파에게 음모할 기회를 주어 개화당 내각은 또다시 비운을 겪는다. 1895년 을미개혁 때 단발령이 내려졌으며, 10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의 전통을 고집하고 머리 깎기를 거부하였으며, 머리를 깎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까까중’이라고 하면서 거센 반발을 일으키거나 학교 당국에서 삭발을 요구하면 자퇴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특징 및 의의

상투는 고대부터 단발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된 성인 남자의 대표적인 머리모양으로 관례혼인 후 자신의 머리카락을 끌어올려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높이 세우고 동곳을 꽂아 고정하였다. 한국에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라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총독정치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단발이 단행될 때까지 상투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圖經, 高麗史, 상투(백화랑, 조광2-5, 조광사 1936), 아시아의 수발양식에 관한 연구(김용문,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상투

상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김용문(金容文)

정의

관례나 결혼 후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끌어올린 후,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높이 세우는 성인 남자의 대표적 머리모양.

내용

상투는 결혼한 남자가 땋은머리를 풀고 자신의 머리를 모아 빗어 올린 머리모양으로 머리 위에서 묶은 머리모양이 추와 비슷하다고 해서 ‘추계’라고 하였다.
『사기史記』에는 조선왕 만滿이 연燕나라 사람이며 연나라에서 망명해 무려 천여 명을 모아 머리모양을 추계椎髻로 하고 호복胡服을 입고 동쪽의 요새를 벗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 ‘괴두노계魁頭露紒’, 즉 관모를 쓰지 않는 날상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구당서舊唐書』의 “춤추는 네 사람은 뒤쪽에 추계를 하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두르고 …… ”라는 기록에서 오래 전부터 남자의 머리모양이 상투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삼실총三室塚과 무용총舞踊塚 벽화에 그려진 서역인은 큰상투로 빗고 있으며, 깊고 큰 눈과 높은 코로 보아 서역에서 온 사람이다. 무용총의 주인과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의 선인은 자신의 머리카락만으로 올린 상투머리를 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상투의 모양은 커다랗고 둥근 것, 작고 둥근 것, 쌍상투가 있다. 큰 상투는 관모를 쓰지 않은 장사도壯士圖나 역사상力士像에 많고, 작은 상투는 관모를 쓰는 귀인층에서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상투는 경주 금령총金鈴塚 출토의 도기로 만들어진 기마인물에 잘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冠·건巾·복두幞頭를 썼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종류의 관모들이 상투 위에 쓰기 적합한 모양이다. 1278년(충렬왕 4) 충렬왕의 개체령에 의하여 모든 관료층에서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아 내린 몽골의 개체변발開剃辮髮을 하였다. 개체변발은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만 남겨 놓고 뒤로 길게 땋아 늘어뜨리며 겁구아怯仇兒라고 하며, 몽골식 변발辮髮을 의미하는 몽골어 kegul의 음차音借 표기이다. 충렬왕과 왕족 및 신하들이 개체변발로 바꾸었으나 일반 백성들까지 개체변발을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1389년에 공민왕은 변발호복辮髮胡服이 우리의 제도가 아니라는 신하의 말에 곧 변발을 풀었다고 한다. 공민왕의 중흥 정책 이후에는 다시 상투로 돌아갔다.
조선시대는 초상화나 풍속화를 통하여 계층을 막론하고 상투 튼 모습을 볼 수 있다. 상투를 틀 때는 ‘배코치다.’라고 하여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깎아내고 나머지 머리만을 빗어 올려 틀게 된다. 많은 머리카락이 정수리에 모이면 열이 발산하기 어려워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이후 조혼早婚 풍습이 퍼지면서 10세 안팎의 소년이 관례冠禮를 치르고 상투를 틀어 올리면 머리가 무겁고 머리 밑이 당겨 심한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상투는 하나만 트는 것이 보통이지만,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쌍상투를 하기도 하였다. 전통사회에서는 혼인한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엄격한 차별을 두어 어린 아이라도 장가가면 상투를 틀고 성인 대접을 받았고, 나이가 많아도 혼인하지 않은 자에게는 하댓말을 썼다. 그래서 혼인한 것처럼 보이려고 상투를 틀기도 하였는데 혼인 절차를 밟지 않고 상투를 트는 것을 건상투라고 하였다. 상투 꼭지의 정상에는 장식을 위하여 금, 은, 동 등으로 만든 동곳을 꽂았고,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리지 않게 이마 둘레에 망건網巾을 썼다. 망건 앞이마 부분에는 갓을 고정하기 위해 풍잠風簪을 달고, 그 위에 다양한 관모를 썼다. 상민常民은 망건 대신 수건을 동이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11월 16일 조칙에 “국민들에 앞서 내가 먼저 단발하니 백성들은 내 뜻을 받들어 만국과 병립할 수 있는 대업을 성취케 하라.”라는 단발령斷髮令이 공식적으로 공포되어 상투를 자르게 하였다. 『조광早光』에 단발령에 관한 기사가 있다. “머리를 깎는 것은 위생에 이롭고 일을 하는 데 편리하므로 왕이 정치개혁과 나라의 부강을 도모하시는 이때 먼저 친히 단발을 하여 모범을 보이셨다고 한다. 내부대신內部大臣 유길준兪吉濬은 고시告示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상투 베기를 권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순검을 풀어서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도록 하였다. 보배와 같이 생각하고 생명과 같이 귀한 상투를 할 일 없이 가위가 한번 움직이는 바람에 추풍낙엽과 같이 땅에 떨어지니 그 형상이 진실로 참담하였다.”라고 전해진다. 유건儒巾을 쓴 선비들은 상투를 베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니 단발령을 걷으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그 밖의 백성들은 죽으면 죽었지 상투는 놓지 못하겠다고 죽기를 무릅쓰고 반대하였다. 민심을 진정시키고 상투를 베는 것의 이해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한 번 더 알리기 위하여 단발령을 내린 다음 해에 고종이 한 번 더 영을 내리었지만 민심을 진정시키지는 못하였다. 완강한 상투 옹호자들은 만일 국법으로 한다면 무서운 반역자로 상투 대신에 목이 베일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의 단발령과 관련된 기록에 의하면 상투를 자르지 않으려고 낙향하거나 잘린 상투를 주머니 속에 넣고 통곡하며 성을 나갔다고 한다. “삭발한다는 말이 점차 일어나더니 10월 중에 일본 공사가 왕을 위협하여 조속히 머리를 깎도록 하였으나 왕은 명성황후의 장사를 치룬 뒤로 미루었다. 마침내 그때가 되자 유길준과 조희연 등이 일본군을 인도하여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한 후 머리를 깎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고 선언하니 고종은 긴 한숨을 들이쉬며 정병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이 짐의 머리를 깎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정병하는 가위를 가지고 손을 놀려 왕의 머리를 깎았으며 유길준은 왕태자의 머리를 깎았다.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이 이미 내려지니 곡성이 하늘을 진동하고 사람들은 분하고 노해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형세가 바야흐로 격변하여 일본인들은 군대를 엄히 하여 대기시켰으며, 경무사 허진은 순검들을 인솔하고 칼을 들고 길을 막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를 깎았다. 또한 인가에 들어가 조사해서 찾아 헤매니 깊숙하게 숨지 않고서는 머리를 깎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손님으로 왔다가 상투를 집어서 주머니 속에 감추고 통곡을 하며 성을 나갔다. 머리를 깎인 자는 빡빡 깎지 아니하고 상투만 자르고 머리털은 남겨 놓아 장발승 같았는데 오직 부인네와 어린아이들만 깎이지 않았다. 학부대신 이도재는 반박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상투 싸움은 정치 문제로 번져 친러시아파가 중심이 된 반대파에게 음모할 기회를 주어 개화당 내각은 또다시 비운을 겪는다. 1895년 을미개혁 때 단발령이 내려졌으며, 10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의 전통을 고집하고 머리 깎기를 거부하였으며, 머리를 깎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까까중’이라고 하면서 거센 반발을 일으키거나 학교 당국에서 삭발을 요구하면 자퇴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특징 및 의의

상투는 고대부터 단발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된 성인 남자의 대표적인 머리모양으로 관례나 혼인 후 자신의 머리카락을 끌어올려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높이 세우고 동곳을 꽂아 고정하였다. 한국에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라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총독정치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단발이 단행될 때까지 상투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圖經, 高麗史, 상투(백화랑, 조광2-5, 조광사 1936), 아시아의 수발양식에 관한 연구(김용문,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