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무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정미숙(鄭美淑)

정의

전설상의 새인 봉황을 소재로 도안한 무늬.

내용

봉황鳳凰은 날개 달린 족속의 수장으로 사람들은 흔히 조왕鳥王이라 하였고, 어진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나라가 편안하면 나타난다고 믿어,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상서로운 새로 여겼다. 봉황의 모습에 대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신성한 새[神鳥]이며, “앞부분은 기러기. 뒷부분은 기린,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와 원앙의 깃, 용과 같은 비늘무늬와 호랑이 같은 등. 제비의 턱과 부리는 닭과 같으며, 깃털은 오색을 갖추었다. 동쪽의 군자가 사는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의 밖을 날아 곤륜산을 지나 황하의 중류에 있는 지주라는 바위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약수에 깃털을 씻고 저녁에 풍혈에서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안녕해진다.”라고 하여 여러 동물의 모습을 조합하여 새들 중 가장 화려한 새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봉황 한 쌍이 춤을 추는 도안으로도 나타났는데, 이때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 하였다. 암수의 모습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기준은 없었으나 꼬리의 모양을 다르게 하여 하나는 꼬리를 지그재그로, 다른 하나는 꼬리를 긴 곡선으로 뻗은 넝쿨 모양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간혹 꼬리가 같은 모양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는데, 17세기 김확金矱의 부인 동래 정씨 묘에서 출토된 치마의 봉황무늬가 그 예이며, 조선 후기 베갯모를 장식하는 구봉문九鳳紋 역시 한 쌍의 봉황이 동일한 모습이다. 또한 한 마리 혹은 여러 마리의 봉황을 함께 표현하더라도 암수를 구분하는 ‘봉황’이라는 명칭 대신 주로 ‘봉’이라 하였다. 그 예로 궁궐을 ‘봉궐鳳闕’, 임금이 타는 수레를 ‘봉련鳳輦’이라 하였으며, 왕실 부인의 예복에 장식하던 흉배를 ‘봉흉배’, 봉황 장식이 있는 비녀를 ‘봉잠鳳簪’, 예복용 대를 ‘봉대鳳帶’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꼬리의 모양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암수를 구분하는 의미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한 쌍을 조화롭고 화려하게 표현하려는 장식적 효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봉황무늬가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는 삼국시대 고분벽화의 주작朱雀이다. 주작은 봉황과 유사한 형태에서 출발하였으되 용도와 형태에 있어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주작은 주로 남쪽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봉황은 용과 함께 왕실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에 따라 더욱 화려해지면서 구별이 분명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봉황무늬가 확인되는 복식자료는 고려 말 불복장으로 쓰인 직물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高麗史』에는 서울과 지방 민서民庶들의 의복과 기물器物에 용과 봉황무늬를 금지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시대 용과 봉황의 무늬를 사용하는 데에 신분에 따른 규제가 있었다는 것과 더불어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는 내용으로 고려시대 봉황무늬 직물과의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신분에 따른 규제가 강화되면서 용봉무늬는 왕실을 상징하는 무늬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세종 대의 기록에 의하면 “대연(왕의 가마) 장식은 황금으로, 밖에는 구름과 용을, 안에는 구름과 봉황을 그려 넣는다.”라고 하였고, 왕실 사찰로 잘 알려진 회암사 터에서는 용과 봉황무늬가 있는 기와가 발견되어 왕과 왕비의 업무 공간이나 처소 등 궁궐의 주요 건축물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봉황과 왕실 사이의 관련성을 증명하고 봉황이 왕실의 상징적 무늬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이후로는 봉황무늬가 있는 복식이 종종 확인되는데, 바탕색과 무늬가 동일한 색조로 직조된 것과, 금이나 색사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되는 경우가 있다. 동일한 색으로 직조된 봉황무늬 직물은 왕실이나 상류층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직물로 왕실의 상징보다는 장식적으로 활용된 것이었다. 이러한 봉황무늬는 17~18세기 초까지 확인되는데, 봉황과 꽃무늬가 함께 규칙적으로 반복되거나 원형의 용과 봉황이 반복된 무늬이다. 그 예로는 광해군 부인 유씨의 고리, 김확 부인 동래 정씨(1567~1631) 묘 출토 치마, 류성구 부인 전주 이씨(1620~1663) 묘 출토 치마, 심익창沈益昌 부인 사천 목씨(1657~1699) 묘 출토 저고리 등이 있다. 왕실 복식에 표현된 봉황무늬는 모두 금가루를 아교에 개어 그리는 니금, 금실을 넣어 짜는 직금, 금을 얇게 펴 만든 금박, 금사와 오색의 색사를 사용한 자수 등으로 화려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왕실의 상징으로 사용된 봉황무늬는 17~18세기에는 왕실과 관련된 가문의 복식에서도 드러나는데, 그중 성종의 손자며느리인 완산군 부인 평양 이씨(1502~1579)의 무덤에서 출토된 예복이 있다. 직물은 봉황무늬 부분에 특별히 굵은 실을 넣어 입체적으로 짠 고급 비단으로, 지름 8의 원형 안에 다섯 갈래의 꼬리가 하나는 지그재그, 다른 하나는 넝쿨모양으로 표현된 두 종류의 봉황이 번갈아 반복된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봉황무늬는 회암사지에서 발견된 봉황무늬수막새와도 유사하다. 그 외 심익창 부인 성산 이씨(1651~1671)의 묘에서 출토된 자수스란치마와 직금봉스란치마, 이단하李端夏(1625~1689) 부인 청주 한씨의 원삼에 부착된 자수봉흉배가 있다.
왕실 여성 예복에 봉황무늬에 대한 기록은 1638년 『인조장열왕후가례도감의궤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며, 이후로 20세기 초까지 왕실 여성의 상징적 의미로 꾸준하게 사용되었다. 인조장렬왕후 가례 때의 기록에 의하면 적의·노의·흉배겹장삼, 단삼單衫이 봉황무늬로 예복을 장식하였다. 적의에는 금사를 넣어 직조한 봉흉배를 달고 오채화운봉금원문(오색의 물감과 금가루를 사용하여 그린 둥근 봉황무늬) 36개를 앞과 뒤에 그려 넣도록 하였다. 금원문의 원형 안에는 여의주를 중심으로 좌우에 구름을, 상하에 봉황을 배치하였는데, 꼬리의 형태를 서로 다르게 표현하여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노의 역시 원형봉황무늬(금원문양) 315개를 전후좌우에 금박(부금)하도록 하였고, 흉배겹장삼과 단삼에도 금실을 넣어 직조한 봉황흉배를 달도록 하였다. 숙선옹주(1793~1836)의 묘에서 출토된 원삼에 부착된 금사자수봉흉배 등도 왕실 여성의 봉황 장식 사례를 보여 준다. 19세기 이후의 봉황무늬는 왕실 여성의 복식에서만 확인되는데, 고종의 후궁 귀인 양씨의 봉보鳳補가 부착된 원삼의 착용 모습을 통하여 조선 말기 왕실 여성의 봉보와 예복 착용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영친왕비(1897~1970)의 유품인 적의, 원삼, 봉스란치마 등을 통해 조선 말기에 제작된 금사를 넣어 직조하거나 금박으로 장식한 봉황무늬를 볼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봉황은 존귀한 성품을 가진 신령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어 길조인 동시에 성군을 상징하게 되면서 왕실과 관련된 건축과 물품에 장식무늬로 사용되었다. 특히 17세기 이후부터 조선 말기까지 왕실 여성의 예복을 봉황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봉황무늬는 왕실 여성을 상징하는 무늬 중 대표 격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문헌

說文解字, 궁궐 장식(허균, 돌베개 2011), 영친왕 일가 복식(국립고궁박물관, 2010), 우리나라 전통무늬1-직물(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의문의 조선-무늬(경기도박물관·민속원, 2016), 조선 왕실 선성군 모자의 특별한 외출(경기도박물관·민속원, 2014).

봉황무늬

봉황무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정미숙(鄭美淑)

정의

전설상의 새인 봉황을 소재로 도안한 무늬.

내용

봉황鳳凰은 날개 달린 족속의 수장으로 사람들은 흔히 조왕鳥王이라 하였고, 어진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나라가 편안하면 나타난다고 믿어,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상서로운 새로 여겼다. 봉황의 모습에 대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신성한 새[神鳥]이며, “앞부분은 기러기. 뒷부분은 기린,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와 원앙의 깃, 용과 같은 비늘무늬와 호랑이 같은 등. 제비의 턱과 부리는 닭과 같으며, 깃털은 오색을 갖추었다. 동쪽의 군자가 사는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의 밖을 날아 곤륜산을 지나 황하의 중류에 있는 지주라는 바위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약수에 깃털을 씻고 저녁에 풍혈에서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안녕해진다.”라고 하여 여러 동물의 모습을 조합하여 새들 중 가장 화려한 새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봉황 한 쌍이 춤을 추는 도안으로도 나타났는데, 이때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 하였다. 암수의 모습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기준은 없었으나 꼬리의 모양을 다르게 하여 하나는 꼬리를 지그재그로, 다른 하나는 꼬리를 긴 곡선으로 뻗은 넝쿨 모양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간혹 꼬리가 같은 모양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는데, 17세기 김확金矱의 부인 동래 정씨 묘에서 출토된 치마의 봉황무늬가 그 예이며, 조선 후기 베갯모를 장식하는 구봉문九鳳紋 역시 한 쌍의 봉황이 동일한 모습이다. 또한 한 마리 혹은 여러 마리의 봉황을 함께 표현하더라도 암수를 구분하는 ‘봉황’이라는 명칭 대신 주로 ‘봉’이라 하였다. 그 예로 궁궐을 ‘봉궐鳳闕’, 임금이 타는 수레를 ‘봉련鳳輦’이라 하였으며, 왕실 부인의 예복에 장식하던 흉배를 ‘봉흉배’, 봉황 장식이 있는 비녀를 ‘봉잠鳳簪’, 예복용 대를 ‘봉대鳳帶’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꼬리의 모양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암수를 구분하는 의미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한 쌍을 조화롭고 화려하게 표현하려는 장식적 효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봉황무늬가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는 삼국시대 고분벽화의 주작朱雀이다. 주작은 봉황과 유사한 형태에서 출발하였으되 용도와 형태에 있어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주작은 주로 남쪽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봉황은 용과 함께 왕실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에 따라 더욱 화려해지면서 구별이 분명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봉황무늬가 확인되는 복식자료는 고려 말 불복장으로 쓰인 직물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高麗史』에는 서울과 지방 민서民庶들의 의복과 기물器物에 용과 봉황무늬를 금지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시대 용과 봉황의 무늬를 사용하는 데에 신분에 따른 규제가 있었다는 것과 더불어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는 내용으로 고려시대 봉황무늬 직물과의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신분에 따른 규제가 강화되면서 용봉무늬는 왕실을 상징하는 무늬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세종 대의 기록에 의하면 “대연(왕의 가마) 장식은 황금으로, 밖에는 구름과 용을, 안에는 구름과 봉황을 그려 넣는다.”라고 하였고, 왕실 사찰로 잘 알려진 회암사 터에서는 용과 봉황무늬가 있는 기와가 발견되어 왕과 왕비의 업무 공간이나 처소 등 궁궐의 주요 건축물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봉황과 왕실 사이의 관련성을 증명하고 봉황이 왕실의 상징적 무늬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이후로는 봉황무늬가 있는 복식이 종종 확인되는데, 바탕색과 무늬가 동일한 색조로 직조된 것과, 금이나 색사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되는 경우가 있다. 동일한 색으로 직조된 봉황무늬 직물은 왕실이나 상류층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직물로 왕실의 상징보다는 장식적으로 활용된 것이었다. 이러한 봉황무늬는 17~18세기 초까지 확인되는데, 봉황과 꽃무늬가 함께 규칙적으로 반복되거나 원형의 용과 봉황이 반복된 무늬이다. 그 예로는 광해군 부인 유씨의 저고리, 김확 부인 동래 정씨(1567~1631) 묘 출토 치마, 류성구 부인 전주 이씨(1620~1663) 묘 출토 치마, 심익창沈益昌 부인 사천 목씨(1657~1699) 묘 출토 저고리 등이 있다. 왕실 복식에 표현된 봉황무늬는 모두 금가루를 아교에 개어 그리는 니금, 금실을 넣어 짜는 직금, 금을 얇게 펴 만든 금박, 금사와 오색의 색사를 사용한 자수 등으로 화려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왕실의 상징으로 사용된 봉황무늬는 17~18세기에는 왕실과 관련된 가문의 복식에서도 드러나는데, 그중 성종의 손자며느리인 완산군 부인 평양 이씨(1502~1579)의 무덤에서 출토된 예복이 있다. 직물은 봉황무늬 부분에 특별히 굵은 실을 넣어 입체적으로 짠 고급 비단으로, 지름 8의 원형 안에 다섯 갈래의 꼬리가 하나는 지그재그, 다른 하나는 넝쿨모양으로 표현된 두 종류의 봉황이 번갈아 반복된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봉황무늬는 회암사지에서 발견된 봉황무늬수막새와도 유사하다. 그 외 심익창 부인 성산 이씨(1651~1671)의 묘에서 출토된 자수스란치마와 직금봉스란치마, 이단하李端夏(1625~1689) 부인 청주 한씨의 원삼에 부착된 자수봉흉배가 있다.
왕실 여성 예복에 봉황무늬에 대한 기록은 1638년 『인조장열왕후가례도감의궤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며, 이후로 20세기 초까지 왕실 여성의 상징적 의미로 꾸준하게 사용되었다. 인조장렬왕후 가례 때의 기록에 의하면 적의·노의·흉배겹장삼, 단삼單衫이 봉황무늬로 예복을 장식하였다. 적의에는 금사를 넣어 직조한 봉흉배를 달고 오채화운봉금원문(오색의 물감과 금가루를 사용하여 그린 둥근 봉황무늬) 36개를 앞과 뒤에 그려 넣도록 하였다. 금원문의 원형 안에는 여의주를 중심으로 좌우에 구름을, 상하에 봉황을 배치하였는데, 꼬리의 형태를 서로 다르게 표현하여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노의 역시 원형봉황무늬(금원문양) 315개를 전후좌우에 금박(부금)하도록 하였고, 흉배겹장삼과 단삼에도 금실을 넣어 직조한 봉황흉배를 달도록 하였다. 숙선옹주(1793~1836)의 묘에서 출토된 원삼에 부착된 금사자수봉흉배 등도 왕실 여성의 봉황 장식 사례를 보여 준다. 19세기 이후의 봉황무늬는 왕실 여성의 복식에서만 확인되는데, 고종의 후궁 귀인 양씨의 봉보鳳補가 부착된 원삼의 착용 모습을 통하여 조선 말기 왕실 여성의 봉보와 예복 착용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영친왕비(1897~1970)의 유품인 적의, 원삼, 봉스란치마 등을 통해 조선 말기에 제작된 금사를 넣어 직조하거나 금박으로 장식한 봉황무늬를 볼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봉황은 존귀한 성품을 가진 신령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어 길조인 동시에 성군을 상징하게 되면서 왕실과 관련된 건축과 물품에 장식무늬로 사용되었다. 특히 17세기 이후부터 조선 말기까지 왕실 여성의 예복을 봉황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봉황무늬는 왕실 여성을 상징하는 무늬 중 대표 격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문헌

說文解字, 궁궐 장식(허균, 돌베개 2011), 영친왕 일가 복식(국립고궁박물관, 2010), 우리나라 전통무늬1-직물(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의문의 조선-무늬(경기도박물관·민속원, 2016), 조선 왕실 선성군 모자의 특별한 외출(경기도박물관·민속원,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