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최은수(崔銀水)

정의

양쪽으로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가랑이가 나누어져 있는 형태의 의복으로, 남자가 겉에 입는 아래옷.

개관

바지는 북방 기마민족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 남녀 모두가 착용하는 일반적인 복식이다. 문헌에는 고袴·고의袴衣·곤褌·가반柯半·가배柯背·말군襪裙·리의裏衣· 바지[把持, 把赤]·봉디·봉지 등의 다양한 용어로 나타난다. 바지의 형태와 색상, 직물, 구성법에 따라서 많은 용어가 선택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단 색상에 의해서는 적황고赤黃袴·청금고靑錦袴· 자고紫袴·백고白袴·백저궁고白紵窮袴·황고黃袴·조고早袴· 백주고白紬袴 등의 기록이 보이고, 직물의 종류에 따라서는 청금고靑錦袴·릉고綾袴·갈고褐袴·백저궁고白紵窮袴· 문릉관고文綾寬袴·백주고白紬袴 등으로 나뉘며, 바지의 구성법에 따라서는 홑바지[單袴]·겹바지[裌袴]·솜바지[緜袴]·누비바지 등으로 구분된다. 바지의 형태에 의해서는 궁고窮袴·태구고太口袴·대구고大口袴·고대구袴大口·관고寬袴·장고長袴·광고廣袴·당고唐袴·고장고古長袴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바지의 다양한 명칭에 따른 형태의 차이는 다음 표와 같다.

바지를 지칭하는 용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이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문헌까지 이 용어가 가장 지속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고는 전 시대를 걸쳐 남녀 하의를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바지라는 명칭의 어원인 ‘파지把持’는 『고려사高麗史』에 흔적이 보이고, 조선 초기부터 바지 형태의 하의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영조 때 『국혼정례國婚定例』에는 여자의 말군에 대응하여 남자의 하의를 가리켰고, 『상방정례尙方定例』에도 모두 ‘파지’로 기록되어 있다가 「궁중의대발기」에서 처음 ‘바지’라는 표기가 사용되었다. 또 16세기 순천 김씨 언문 간찰, 17세기 현풍 곽씨 서간류, 조선 말의 다양한 의복 발기류에도 바지라는 용어가 나타나며, 남녀 모두의 하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바지의 명칭은 남녀 바지 모두 사용한 기록도 있고, 남녀를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하의류를 지칭하는 남녀 공용의 명칭으로는 ‘단고單袴’와 ‘곤자褌子’가 있었으며, ‘바지’라는 우리말 표기는 16세기부터 남녀에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자의 하의류에서는 일반적으로 속읏을 지칭하는 ‘리의裏衣’가 문헌에 더 일찍 등장하였고, 이 밖에도 속속곳·단속곳·너른바지 등 여자 속바지의 명칭이 세분화된 것으로 보아 치마 안에 바지를 겹쳐 입었던 당시 여성의 옷차림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

조선시대 남자 바지는 형태·시기별로 세 단계의 변화 과정이 보인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임진왜란 이전 시기까지로 속곳형 바지를 주로 입은 시기이다. 다음은 임진왜란 전후의 과도기 형태로 속곳형 바지와 사폭 바지의 중간 형태의 바지를 입은 것으로 현재 여러 출토유물을 통해 확인된다. 마지막 단계는 사폭 바지로, 임진왜란 이후부터 많이 보이며 현재까지 입고 있는 바지와 거의 같은 형태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도 중간 과도기형 바지와 사폭 바지가 혼용된 유물이 나오고 있어서 시기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속곳형 바지는 당襠이나 밑이 있는 바지로 바지통과 부리가 넓고 트임이 있으며, 허리에 주름이 잡혀 있다. 크게 개당고형開襠袴形·합당고형合襠袴形·세가닥 바지로 나눌 수 있다. 개당고형은 여자 속바지와 같은 양식으로 바짓가랑이 밑에 당이 각각 달려 있으며, 좌우 당이 겹쳐져서 입으면 속이 가려진다. 합당고형바지는 밑이 막혀 있으며, 허리에 트임이 있어서 입고 벗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허리 중심 방향으로 주름이 잡혀 있으며, 단속곳과 같이 바지통은 넓다. 세 가닥 바지는 가랑이 한쪽이 짧은 것과 긴 것이 같이 달린 이중구조 형태로 현재까지 네 개의 분묘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밑이 막혀 있으며 솜을 두고 누벼져 있다. 용변 시에는 이중으로 된 가랑이에서 짧은 것을 위로 걷고 간편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사폭 바지는 큰사폭· 작은사폭·마루폭과 허리로 구성되어 있고, 트임과 주름이 없으며, 바짓부리에 대님을 매고 허리에는 허리띠로 여며서 입는다. 현재 입는 한복 바지와 같으며, 임진왜란 전후 시기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속곳형 바지와 사폭 바지의 중간 형태의 과도기 단계로 보이는 바지로는 고여우(?~1640) 묘에서 출토된 것이 있는데, 전체 형태는 허리에 주름이 있는 속곳형 바지인데 특이하게 사폭과 마루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몰 시기가 임진왜란 전후 것으로 추정되는 전傳 박장군의 바지는 사폭 바지처럼 바지통은 좁으나 사폭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가랑이 부분에 당이 대어져 있다. 장흥 임씨(1590년대 추정) 묘 바지는 사폭과 마루폭으로 구성된 사폭 바지이나, 사폭이 매우 좁고 허리에 맞주름이 잡혀 있다. 이러한 과도기 단계의 유물들로 봤을 때 속곳형 바지와 사폭 바지가 혼용되다가 서서히 사폭 바지로 바뀌어 가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자 바지가 사폭 바지로 변화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로, 이러한 변화는 명明의 영향으로 보인다. “본국의 바지는 넓고 커 비용이 많이 든다. 중국의 바지는 세 폭이면 된다.”라는 1431년(세종 13) 조선 초기의 기록과, 심재(1722~1784)의 『송천필담松泉筆譚』의 “선조 임진왜란 후에 …… 우리나라 남자는 중국에서 전래된 당고唐袴를 입게 되었고, 여자는 종래에 남자가 입던 고장고古長袴와 광고廣袴를 함께 입게 되었다고 하였다.”라는 18세기의 기록을 비교했을 때, 임진왜란 이전에 남자 바지는 여자의 속곳 형태처럼 폭이 넓은 바지였다. 전쟁을 치르면서 물자가 부족해지자 폭넓고 거추장스러운 복식에 대한 반성을 하고, 활동의 불편함 등으로 인하여 중국의 남자 바지인 사폭 바지를 도입하여 널리 입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징 및 의의

시기별 출토유물을 통해 남자 바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속곳형 바지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변수邊隋(1447~1524) 바지는 속곳형 바지 두 점이 습의용으로 한 허리에 꿰매서 입혀져 있었다. 개당고형 바지로 속에 솜을 두었고 삼각무가 있으며, 허리 좌우 앞뒤에는 한쪽에 네 개씩 바지 중심 쪽으로 주름이 잡혀 있으며 넓게 퍼진 형이다. 직물은 겉감과 안감 모두 거친 주紬로, 겹이다. 최경선崔景璿(1561~1622) 바지는 속곳형 바지가 여섯 점이 출토되었는데, 개당고형(3점)은 부리 쪽이 약간 좁아지는 형이고, 합당고형(3점)은 넓게 퍼진 형이다. 직물은 면포綿布·주·삼베[麻布]이고, 구성은 홑(4점)·솜(1점)·겹(1점)이다. 습용襲用 바지는 속에 합당고를 입고 겉에 개당고를 입었다.
이진숭李鎭嵩(1702~1756) 바지는 사폭 바지형으로 다섯 점이 출토되었고, 보공으로 넣은 네 점은 직물이 주이고, 겹누비 바지이다. 속에 솜을 넣지 않고 누빈 것이 특징이며, 누비 간격은 1~1.2로 고운 것과 5.5로 간격이 넓은 것도 있다. 습용 바지도 직물은 주이고, 바지 두 벌(겹바지, 홑바지)을 한 허리에 꿰매서 입었다.
신광헌申光憲(1731~1784) 바지는 사폭 바지형으로 세 점을 습용으로 입었다. 속에 홑바지를 입고, 그 위에 겹바지를 겹쳐 입은 후에 바짓부리에 행전을 찼으며, 허리띠와 대님이 남아 있는 드문 사례이다. 바지·허리띠·대님 직물은 모두 주이며, 허리띠 길이는 200cm, 대님은 65cm이다.

참고문헌

변수 묘 출토복식 고찰(최은수, 생활문물연구11, 국립민속박물관, 2003), 여산 송씨 일가 묘 출토바지 고찰(권영숙·김정순·백영미, 한국의류산업학회지9-4, 한국의류산업학회, 2007), 의복명칭의 분화를 통해 본 조선시대 복식문화 고찰(강순제·김은정, 복식53-4, 한국복식학회, 2003), 이진숭 묘 출토복식에 관한 연구(최은수, 이진숭 묘 출토 복식, 국립민속박물관, 2010), 조선시대 남자바지에 관한 연구(구남옥, 복식52-7, 한국복식학회, 2002), 최경선 묘 출토복식 연구(김진경·송미경·진덕순, 복식66-5, 한국복식학회, 2016).

바지

바지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최은수(崔銀水)

정의

양쪽으로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가랑이가 나누어져 있는 형태의 의복으로, 남자가 겉에 입는 아래옷.

개관

바지는 북방 기마민족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 남녀 모두가 착용하는 일반적인 복식이다. 문헌에는 고袴·고의袴衣·곤褌·가반柯半·가배柯背·말군襪裙·리의裏衣· 바지[把持, 把赤]·봉디·봉지 등의 다양한 용어로 나타난다. 바지의 형태와 색상, 직물, 구성법에 따라서 많은 용어가 선택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단 색상에 의해서는 적황고赤黃袴·청금고靑錦袴· 자고紫袴·백고白袴·백저궁고白紵窮袴·황고黃袴·조고早袴· 백주고白紬袴 등의 기록이 보이고, 직물의 종류에 따라서는 청금고靑錦袴·릉고綾袴·갈고褐袴·백저궁고白紵窮袴· 문릉관고文綾寬袴·백주고白紬袴 등으로 나뉘며, 바지의 구성법에 따라서는 홑바지[單袴]·겹바지[裌袴]·솜바지[緜袴]·누비바지 등으로 구분된다. 바지의 형태에 의해서는 궁고窮袴·태구고太口袴·대구고大口袴·고대구袴大口·관고寬袴·장고長袴·광고廣袴·당고唐袴·고장고古長袴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바지의 다양한 명칭에 따른 형태의 차이는 다음 표와 같다.

바지를 지칭하는 용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이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문헌까지 이 용어가 가장 지속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고는 전 시대를 걸쳐 남녀 하의를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바지라는 명칭의 어원인 ‘파지把持’는 『고려사高麗史』에 흔적이 보이고, 조선 초기부터 바지 형태의 하의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영조 때 『국혼정례國婚定例』에는 여자의 말군에 대응하여 남자의 하의를 가리켰고, 『상방정례尙方定例』에도 모두 ‘파지’로 기록되어 있다가 「궁중의대발기」에서 처음 ‘바지’라는 표기가 사용되었다. 또 16세기 순천 김씨 언문 간찰, 17세기 현풍 곽씨 서간류, 조선 말의 다양한 의복 발기류에도 바지라는 용어가 나타나며, 남녀 모두의 하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바지의 명칭은 남녀 바지 모두 사용한 기록도 있고, 남녀를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하의류를 지칭하는 남녀 공용의 명칭으로는 ‘단고單袴’와 ‘곤자褌子’가 있었으며, ‘바지’라는 우리말 표기는 16세기부터 남녀에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자의 하의류에서는 일반적으로 속읏을 지칭하는 ‘리의裏衣’가 문헌에 더 일찍 등장하였고, 이 밖에도 속속곳·단속곳·너른바지 등 여자 속바지의 명칭이 세분화된 것으로 보아 치마 안에 바지를 겹쳐 입었던 당시 여성의 옷차림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

조선시대 남자 바지는 형태·시기별로 세 단계의 변화 과정이 보인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임진왜란 이전 시기까지로 속곳형 바지를 주로 입은 시기이다. 다음은 임진왜란 전후의 과도기 형태로 속곳형 바지와 사폭 바지의 중간 형태의 바지를 입은 것으로 현재 여러 출토유물을 통해 확인된다. 마지막 단계는 사폭 바지로, 임진왜란 이후부터 많이 보이며 현재까지 입고 있는 바지와 거의 같은 형태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도 중간 과도기형 바지와 사폭 바지가 혼용된 유물이 나오고 있어서 시기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속곳형 바지는 당襠이나 밑이 있는 바지로 바지통과 부리가 넓고 트임이 있으며, 허리에 주름이 잡혀 있다. 크게 개당고형開襠袴形·합당고형合襠袴形·세가닥 바지로 나눌 수 있다. 개당고형은 여자 속바지와 같은 양식으로 바짓가랑이 밑에 당이 각각 달려 있으며, 좌우 당이 겹쳐져서 입으면 속이 가려진다. 합당고형바지는 밑이 막혀 있으며, 허리에 트임이 있어서 입고 벗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허리 중심 방향으로 주름이 잡혀 있으며, 단속곳과 같이 바지통은 넓다. 세 가닥 바지는 가랑이 한쪽이 짧은 것과 긴 것이 같이 달린 이중구조 형태로 현재까지 네 개의 분묘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밑이 막혀 있으며 솜을 두고 누벼져 있다. 용변 시에는 이중으로 된 가랑이에서 짧은 것을 위로 걷고 간편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사폭 바지는 큰사폭· 작은사폭·마루폭과 허리로 구성되어 있고, 트임과 주름이 없으며, 바짓부리에 대님을 매고 허리에는 허리띠로 여며서 입는다. 현재 입는 한복 바지와 같으며, 임진왜란 전후 시기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속곳형 바지와 사폭 바지의 중간 형태의 과도기 단계로 보이는 바지로는 고여우(?~1640) 묘에서 출토된 것이 있는데, 전체 형태는 허리에 주름이 있는 속곳형 바지인데 특이하게 사폭과 마루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몰 시기가 임진왜란 전후 것으로 추정되는 전傳 박장군의 바지는 사폭 바지처럼 바지통은 좁으나 사폭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가랑이 부분에 당이 대어져 있다. 장흥 임씨(1590년대 추정) 묘 바지는 사폭과 마루폭으로 구성된 사폭 바지이나, 사폭이 매우 좁고 허리에 맞주름이 잡혀 있다. 이러한 과도기 단계의 유물들로 봤을 때 속곳형 바지와 사폭 바지가 혼용되다가 서서히 사폭 바지로 바뀌어 가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자 바지가 사폭 바지로 변화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로, 이러한 변화는 명明의 영향으로 보인다. “본국의 바지는 넓고 커 비용이 많이 든다. 중국의 바지는 세 폭이면 된다.”라는 1431년(세종 13) 조선 초기의 기록과, 심재(1722~1784)의 『송천필담松泉筆譚』의 “선조 임진왜란 후에 …… 우리나라 남자는 중국에서 전래된 당고唐袴를 입게 되었고, 여자는 종래에 남자가 입던 고장고古長袴와 광고廣袴를 함께 입게 되었다고 하였다.”라는 18세기의 기록을 비교했을 때, 임진왜란 이전에 남자 바지는 여자의 속곳 형태처럼 폭이 넓은 바지였다. 전쟁을 치르면서 물자가 부족해지자 폭넓고 거추장스러운 복식에 대한 반성을 하고, 활동의 불편함 등으로 인하여 중국의 남자 바지인 사폭 바지를 도입하여 널리 입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징 및 의의

시기별 출토유물을 통해 남자 바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속곳형 바지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변수邊隋(1447~1524) 바지는 속곳형 바지 두 점이 습의용으로 한 허리에 꿰매서 입혀져 있었다. 개당고형 바지로 속에 솜을 두었고 삼각무가 있으며, 허리 좌우 앞뒤에는 한쪽에 네 개씩 바지 중심 쪽으로 주름이 잡혀 있으며 넓게 퍼진 형이다. 직물은 겉감과 안감 모두 거친 주紬로, 겹이다. 최경선崔景璿(1561~1622) 바지는 속곳형 바지가 여섯 점이 출토되었는데, 개당고형(3점)은 부리 쪽이 약간 좁아지는 형이고, 합당고형(3점)은 넓게 퍼진 형이다. 직물은 면포綿布·주·삼베[麻布]이고, 구성은 홑(4점)·솜(1점)·겹(1점)이다. 습용襲用 바지는 속에 합당고를 입고 겉에 개당고를 입었다.
이진숭李鎭嵩(1702~1756) 바지는 사폭 바지형으로 다섯 점이 출토되었고, 보공으로 넣은 네 점은 직물이 주이고, 겹누비 바지이다. 속에 솜을 넣지 않고 누빈 것이 특징이며, 누비 간격은 1~1.2로 고운 것과 5.5로 간격이 넓은 것도 있다. 습용 바지도 직물은 주이고, 바지 두 벌(겹바지, 홑바지)을 한 허리에 꿰매서 입었다.
신광헌申光憲(1731~1784) 바지는 사폭 바지형으로 세 점을 습용으로 입었다. 속에 홑바지를 입고, 그 위에 겹바지를 겹쳐 입은 후에 바짓부리에 행전을 찼으며, 허리띠와 대님이 남아 있는 드문 사례이다. 바지·허리띠·대님 직물은 모두 주이며, 허리띠 길이는 200cm, 대님은 65cm이다.

참고문헌

변수 묘 출토복식 고찰(최은수, 생활문물연구11, 국립민속박물관, 2003), 여산 송씨 일가 묘 출토바지 고찰(권영숙·김정순·백영미, 한국의류산업학회지9-4, 한국의류산업학회, 2007), 의복명칭의 분화를 통해 본 조선시대 복식문화 고찰(강순제·김은정, 복식53-4, 한국복식학회, 2003), 이진숭 묘 출토복식에 관한 연구(최은수, 이진숭 묘 출토 복식, 국립민속박물관, 2010), 조선시대 남자바지에 관한 연구(구남옥, 복식52-7, 한국복식학회, 2002), 최경선 묘 출토복식 연구(김진경·송미경·진덕순, 복식66-5, 한국복식학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