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관대례복(文官大禮服)

한자명

文官大禮服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이경미(李京美)

정의

개화기 문관의 복장 중 황제를 알현하거나 궁중에서 공식적인 연회에 참석할 때 착용한 예복.

내용

대례복大禮服이란 개항 이후 복식제도에서 등장하는 용어이다. 특히 문관이 황제를 알현하거나 궁중에서 공식적인 연회 등에 참석할 때 착용한 예복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대례복을 궁정복식court dress, court costume이라고 불렀는데, 대한제국과 일본이 대례복으로 명명하여 복식제도로 수용하였다. 일반적으로 문관대례복文官大禮服은 산형山形의 모자·연미복 형태의 상의·조끼·바지·검으로 구성된다. 서양식인 대례복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모자·상의·검 등에 국가를 상징하는 문양을 자수하거나 새긴 것을 들 수 있다. 문관대례복은 19세기 중후반 이후 서양 주도의 국제사회에 편입된 국가에서 받아들였는데, 대표적으로 대한제국과 일본을 들 수 있다. 대한제국은 서구식 문관대례복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통식 대례복을 제정하여 어느 정도 운영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 대례복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1894년 갑오개혁 시기이다. 12월에 발표된 칙령 제17호에서는, 조신朝臣의 대례복은 흑단령을 쓰고, 궁에 나아갈 때 통상예복通常禮服으로는 토산의 명주로 만든 두루마기[周衣]·답호褡護·사모紗帽·화자靴子를 착용하라고 하였다. 간단하게 발표된 칙령이지만 그 내용에는 문관의 대례복이 흑단령이고 통상예복은 두루마기에 답호·사모·화자라는 것과 통상예복의 착용일은 궁에 나아갈 때라는 것이 규정되어 있어서 불완전하지만 일종의 문관복장규칙이다. 칙령 제17호에서 처음으로 대례복 규정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전통양식인 흑단령이었다. 다음 해인 1895년 을미년에는 더욱 정교해진 형태인 ‘궁내부대신 조신이하 복장식 봉칙 반포’로 다시 발표되었다. 이를 을미의제개혁이라고 한다. 문관대례복 규정에 따르면 “대례복은 흑단령·사모·품대·화자 차림을 하되 모든 동가시動駕時·경절慶節·문안· 예접시禮接時에 착용한다.” 이외에도 조복제복·소례복·통상복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갑오의제개혁에 비해 좀 더 자세하게 규정된 대례복제도는 이전 시기와 같이 흑단령·사모·품대·화자로 구성되었고, 착용일이 대군주의 동가, 국가의 경절, 문안과 예를 갖추어 접할 때 착용하도록 규정되었다.
이처럼 갑오의제개혁과 을미의제개혁은 근대 서양에서 유래한 대례복이라는 형식에 전통적 형태인 흑단령을 대응시킨 과도기적인 문관대례복제도였다. 이를 전통식 대례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한제국이 성립한 초기인 1890년대 후반까지 이 대례복 규정을 따랐다.
대한제국은 1900년 4월 17일 칙령 제13호 훈장조례와 함께 칙령 제14호 문관복장규칙, 칙령 제15호 문관대례복제식을 반포하였다. 문관복장규칙은 문관이 착용해야 하는 대례복·소례복·통상복의 착용자·착용일·일습의 구성을 규정한 것이다. 문관대례복제식은 이 중 대례복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1901년에는 문관대례복의 형태를 도식으로 발표하였다.
문관복장규칙에서 대례복은 칙임관과 주임관만 착용하고 황제께 문안드릴 때, 황제의 동가동여動駕動輿(임금이나 왕세자가 탄 수레가 대궐 밖으로 나감)를 수행할 때, 공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때 착용하게 하였다. 이는 위의 을미의제개혁의 착용일을 계승한 것이다. 대례복 한 벌을 구성하는 품목은 대례모·대례의·조끼·바지·검·검대·백포하금白布下襟(옷깃 아래에 대는 흰색 땀받이용 천), 흰색 장갑이었다.
칙령 제14호 문관대례복제식에서는 상의·조끼·바지·모자·검의 형태적인 특징을 설명하였다. 먼저 상의는 짙은 흑감색黑紺色 라사羅紗로 만드는데, 형태는 연미복형이었다. 라사는 모직의 털을 일으킨 방모직을 말한다. 상의에는 칼라, 흉부의 좌우, 뒷길의 목 아래와 허리, 커프스, 포켓에 무궁화의 계급에 따라 무궁화 개수에 차등을 두어 자수하도록 하였다. 가장 높은 계급인 칙임관 1등의 경우 앞중심선 좌우에 반근화半槿花 6개, 가슴 좌우에는 전근화全槿花 6개를 자수하였다. 전근화의 개수는 계급이 2등, 3등, 4등으로 내려갈수록 4, 2, 0으로 줄어든다. 주임관은 반근화만 좌우에 4개를 자수하였다.
1900년 규정에 따라 제작된 대례복 유물로는 한국자수박물관의 칙임관 민철훈 유물, 부산시립박물관의 칙임관 박기종 유물, 고려대학교박물관의 주임관 유물, 국립민속박물관의 주임관 유물이 있다. 현재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은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해외에서 제작하여 들여온 것으로 파악된다.
문관복장규칙은 1904년, 1905년, 1907년에 걸쳐 관보에 정오正誤의 형식으로 개정이 있었다. 정오 개정에는 이전에 연미복 중 한 가지였던 소례복이 연미복과 프록코트로 분화되어 규정되었고, 상장喪章 규정이 추가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문관대례복제식은 1904년, 1905년에 마찬가지로 관보에 정오의 형식으로 개정되었다. 형태의 변화는 없었지만 자수하는 무궁화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서 앞중심에 자수하였던 반근화는 모두 사라졌다. 칙임관은 전근화의 개수를 6, 4, 2로 하여 계급을 구별하고, 주임관은 앞길에서 자수가 모두 생략되었다. 이러한 정오 규정에 따라 제작된 유물로는 연세대학교박물관의 칙임관 윤치호 유물, 광주민속박물관의 주임관 김봉선 유물, 국립민속박물관의 주임관 유물 1점이 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인 1906년에 문관대례복 규정이 크게 개정되었다. 먼저, 2월에 궁내부와 예식원 관원의 대례복이 문관대례복에서 분화하였다. 그 형태는 코트형이었고, 오얏꽃이 활짝 핀 형태, 반만 핀 형태, 봉우리 형태로 도안하여 가지에 도안하여 가지와 함께 자수하고 그 가지 수에 차이를 두어 11개, 9개, 7개씩 자수하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문관대례복의 형태가 변경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1900년 규정의 대례복은 앞중심선에서 여며질 때 목 아래가 파여 있고 V자 형태였는데, 1906년 규정의 대례복은 앞목점에서 여며지는 세워진 칼라[入襟]의 형태였다. 현재 1906년 규정의 대례복 유물은 보고되어 있지 않으며 당시 촬영된 사진들을 통해 이를 착용했다는 것만 확인된다.
대한제국의 문관대례복은 1910년 국권이 상실된 후 정체성이 상실되는 과정을 겪었다. 1910년 12월 17일에 일본 황실령 제22호에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의 귀족은 일본의 유작자有爵者 대례복을 착용하라는 규정이 발표되었다. 유작자란 공작·자작·남작과 같은 작위가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대한제국이 독립된 주권 국가의 외관을 갖추어 국제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마련한 문관대례복의 성격이 변질되었다.

특징 및 의의

조선이 개항한 후 서양이 주도하는 외교 의례에 착용하여야 할 복식제도를 정하였다. 이를 문관대례복이라고 하고 일습은 산형의 모자·연미복형 상의· 조끼·바지·검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문관대례복은 국가 상징 이미지를 문양화하여 금사로 자수한 것이 중요한 특징이었다. 대한제국이 제정한 문관대례복의 문양은 무궁화 문양으로 오늘날의 국화로 계승되는 문양을 처음으로 자수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官報, 高宗實錄, 개항기 전통식 소례복 연구(이경미, 복식64, 한국복식학회, 2014), 대한제국 1900년 문관대례복 제도와 무궁화 문양의 상징성(이경미, 복식60, 한국복식학회, 2010), 대한제국기 궁내부 대례복 연구(최규순, 정신문화연구31-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대한제국기 서구식 문관 대례복 제도의 개정과 국가정체성 상실(이경미, 복식61, 한국복식학회, 2011), 제복의 탄생-대한제국 서구식 문관대례복의 성립과 변천(이경미, 민속원, 2012).

문관대례복

문관대례복
한자명

文官大禮服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이경미(李京美)

정의

개화기 문관의 복장 중 황제를 알현하거나 궁중에서 공식적인 연회에 참석할 때 착용한 예복.

내용

대례복大禮服이란 개항 이후 복식제도에서 등장하는 용어이다. 특히 문관이 황제를 알현하거나 궁중에서 공식적인 연회 등에 참석할 때 착용한 예복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대례복을 궁정복식court dress, court costume이라고 불렀는데, 대한제국과 일본이 대례복으로 명명하여 복식제도로 수용하였다. 일반적으로 문관대례복文官大禮服은 산형山形의 모자·연미복 형태의 상의·조끼·바지·검으로 구성된다. 서양식인 대례복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모자·상의·검 등에 국가를 상징하는 문양을 자수하거나 새긴 것을 들 수 있다. 문관대례복은 19세기 중후반 이후 서양 주도의 국제사회에 편입된 국가에서 받아들였는데, 대표적으로 대한제국과 일본을 들 수 있다. 대한제국은 서구식 문관대례복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통식 대례복을 제정하여 어느 정도 운영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 대례복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1894년 갑오개혁 시기이다. 12월에 발표된 칙령 제17호에서는, 조신朝臣의 대례복은 흑단령을 쓰고, 궁에 나아갈 때 통상예복通常禮服으로는 토산의 명주로 만든 두루마기[周衣]·답호褡護·사모紗帽·화자靴子를 착용하라고 하였다. 간단하게 발표된 칙령이지만 그 내용에는 문관의 대례복이 흑단령이고 통상예복은 두루마기에 답호·사모·화자라는 것과 통상예복의 착용일은 궁에 나아갈 때라는 것이 규정되어 있어서 불완전하지만 일종의 문관복장규칙이다. 칙령 제17호에서 처음으로 대례복 규정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전통양식인 흑단령이었다. 다음 해인 1895년 을미년에는 더욱 정교해진 형태인 ‘궁내부대신 조신이하 복장식 봉칙 반포’로 다시 발표되었다. 이를 을미의제개혁이라고 한다. 문관대례복 규정에 따르면 “대례복은 흑단령·사모·품대·화자 차림을 하되 모든 동가시動駕時·경절慶節·문안· 예접시禮接時에 착용한다.” 이외에도 조복과 제복·소례복·통상복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갑오의제개혁에 비해 좀 더 자세하게 규정된 대례복제도는 이전 시기와 같이 흑단령·사모·품대·화자로 구성되었고, 착용일이 대군주의 동가, 국가의 경절, 문안과 예를 갖추어 접할 때 착용하도록 규정되었다.
이처럼 갑오의제개혁과 을미의제개혁은 근대 서양에서 유래한 대례복이라는 형식에 전통적 형태인 흑단령을 대응시킨 과도기적인 문관대례복제도였다. 이를 전통식 대례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한제국이 성립한 초기인 1890년대 후반까지 이 대례복 규정을 따랐다.
대한제국은 1900년 4월 17일 칙령 제13호 훈장조례와 함께 칙령 제14호 문관복장규칙, 칙령 제15호 문관대례복제식을 반포하였다. 문관복장규칙은 문관이 착용해야 하는 대례복·소례복·통상복의 착용자·착용일·일습의 구성을 규정한 것이다. 문관대례복제식은 이 중 대례복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1901년에는 문관대례복의 형태를 도식으로 발표하였다.
문관복장규칙에서 대례복은 칙임관과 주임관만 착용하고 황제께 문안드릴 때, 황제의 동가동여動駕動輿(임금이나 왕세자가 탄 수레가 대궐 밖으로 나감)를 수행할 때, 공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때 착용하게 하였다. 이는 위의 을미의제개혁의 착용일을 계승한 것이다. 대례복 한 벌을 구성하는 품목은 대례모·대례의·조끼·바지·검·검대·백포하금白布下襟(옷깃 아래에 대는 흰색 땀받이용 천), 흰색 장갑이었다.
칙령 제14호 문관대례복제식에서는 상의·조끼·바지·모자·검의 형태적인 특징을 설명하였다. 먼저 상의는 짙은 흑감색黑紺色 라사羅紗로 만드는데, 형태는 연미복형이었다. 라사는 모직의 털을 일으킨 방모직을 말한다. 상의에는 칼라, 흉부의 좌우, 뒷길의 목 아래와 허리, 커프스, 포켓에 무궁화의 계급에 따라 무궁화 개수에 차등을 두어 자수하도록 하였다. 가장 높은 계급인 칙임관 1등의 경우 앞중심선 좌우에 반근화半槿花 6개, 가슴 좌우에는 전근화全槿花 6개를 자수하였다. 전근화의 개수는 계급이 2등, 3등, 4등으로 내려갈수록 4, 2, 0으로 줄어든다. 주임관은 반근화만 좌우에 4개를 자수하였다.
1900년 규정에 따라 제작된 대례복 유물로는 한국자수박물관의 칙임관 민철훈 유물, 부산시립박물관의 칙임관 박기종 유물, 고려대학교박물관의 주임관 유물, 국립민속박물관의 주임관 유물이 있다. 현재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은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해외에서 제작하여 들여온 것으로 파악된다.
문관복장규칙은 1904년, 1905년, 1907년에 걸쳐 관보에 정오正誤의 형식으로 개정이 있었다. 정오 개정에는 이전에 연미복 중 한 가지였던 소례복이 연미복과 프록코트로 분화되어 규정되었고, 상장喪章 규정이 추가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문관대례복제식은 1904년, 1905년에 마찬가지로 관보에 정오의 형식으로 개정되었다. 형태의 변화는 없었지만 자수하는 무궁화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서 앞중심에 자수하였던 반근화는 모두 사라졌다. 칙임관은 전근화의 개수를 6, 4, 2로 하여 계급을 구별하고, 주임관은 앞길에서 자수가 모두 생략되었다. 이러한 정오 규정에 따라 제작된 유물로는 연세대학교박물관의 칙임관 윤치호 유물, 광주민속박물관의 주임관 김봉선 유물, 국립민속박물관의 주임관 유물 1점이 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인 1906년에 문관대례복 규정이 크게 개정되었다. 먼저, 2월에 궁내부와 예식원 관원의 대례복이 문관대례복에서 분화하였다. 그 형태는 코트형이었고, 오얏꽃이 활짝 핀 형태, 반만 핀 형태, 봉우리 형태로 도안하여 가지에 도안하여 가지와 함께 자수하고 그 가지 수에 차이를 두어 11개, 9개, 7개씩 자수하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문관대례복의 형태가 변경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1900년 규정의 대례복은 앞중심선에서 여며질 때 목 아래가 파여 있고 V자 형태였는데, 1906년 규정의 대례복은 앞목점에서 여며지는 세워진 칼라[入襟]의 형태였다. 현재 1906년 규정의 대례복 유물은 보고되어 있지 않으며 당시 촬영된 사진들을 통해 이를 착용했다는 것만 확인된다.
대한제국의 문관대례복은 1910년 국권이 상실된 후 정체성이 상실되는 과정을 겪었다. 1910년 12월 17일에 일본 황실령 제22호에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의 귀족은 일본의 유작자有爵者 대례복을 착용하라는 규정이 발표되었다. 유작자란 공작·자작·남작과 같은 작위가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대한제국이 독립된 주권 국가의 외관을 갖추어 국제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마련한 문관대례복의 성격이 변질되었다.

특징 및 의의

조선이 개항한 후 서양이 주도하는 외교 의례에 착용하여야 할 복식제도를 정하였다. 이를 문관대례복이라고 하고 일습은 산형의 모자·연미복형 상의· 조끼·바지·검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문관대례복은 국가 상징 이미지를 문양화하여 금사로 자수한 것이 중요한 특징이었다. 대한제국이 제정한 문관대례복의 문양은 무궁화 문양으로 오늘날의 국화로 계승되는 문양을 처음으로 자수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官報, 高宗實錄, 개항기 전통식 소례복 연구(이경미, 복식64, 한국복식학회, 2014), 대한제국 1900년 문관대례복 제도와 무궁화 문양의 상징성(이경미, 복식60, 한국복식학회, 2010), 대한제국기 궁내부 대례복 연구(최규순, 정신문화연구31-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대한제국기 서구식 문관 대례복 제도의 개정과 국가정체성 상실(이경미, 복식61, 한국복식학회, 2011), 제복의 탄생-대한제국 서구식 문관대례복의 성립과 변천(이경미, 민속원,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