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심연옥(沈蓮玉)

정의

목화에서 뽑은 실로 제직된 전통 면직물.

내용

면직물은 순우하고 검박하며, 위생적이어서 인류가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의복의 재료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 용품의 소재로 가장 널리 애용하는 천연 식물성 섬유 직물이다. 우리나라에서 면직물을 제직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당시에는 백첩포白疊布라고 불렀다. 『한원翰苑』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백첩포를 만드는데 청포靑布가 특히 아름답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경문왕조(869년)에는 당나라로 “사십승백첩포四十升白氎布 40필”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까지 출토된 가장 오래된 연대의 면직물은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시대의 면직물이다. 직물은 평조직으로 제직되었으며, 위사緯絲에 좌연左撚과 우연右撚의 강연사를 사용하여 표면에 추문皺紋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면의 재배가 본격화된 것은 고려 말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文益漸(1331~1400)이 교지국交趾國에서 새로운 면 종자를 반입하면서부터이다. 교지국은 현재의 베트남 지역으로 민광 지역과 더불어 일찍부터 목화를 재배하고 면직물을 제직하였다. 고려시대 면직물 유물은 안동 태사묘에 소장된 신발의 안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유물은 고려 공민왕이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문익점이 반입한 면 종자는 국내의 기후와 토양조건에도 적합하여 면직물 재배는 반세기도 못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1398년(태조 6)의 기록에는 “여남은 개 씨앗 중 선생이 뿌린 것은 실패하고 정천익에게 건네 준 것 중 겨우 한 알만이 성장하여 그해 가을에는 씨앗 300여 개를 얻어 매년 그것을 늘려 나가다 1367년(공민왕 16) 춘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 재배하게 하였다. 또 호승胡僧 홍원弘願의 힘을 빌고 가비家婢로 하여금 실을 뽑고 무명 짜는 기법과 기구機具 조작법을 터득하게 하여 무명 한 필을 짜내기에 성공하였다. 이윽고 이웃들과 서로 배우고 익히게 되어 10년이 못 가서 목화의 재배, 무명 짜기의 기법은 향내에 퍼지고, 또 10년이 못 가서 일국 안에 번져 나갔다.”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1398년(공양왕 3)에는 백성에게 혼수용으로 값비싼 견직물 대신 무명을 쓰라고 영을 내렸으며, 조선시대 1401년(태종 1)에는 백성 상하가 모두 면직물을 입게 되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太宗實錄』에도 있어 조선 초기에 이미 면의 재배가 확산되고 의료衣料로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면직물은 목木· 면포綿布·목면木棉 등으로 문헌에 기록되었으며, 일반적으로는 ‘무명’ 또는 ‘미영(명)’으로 불렸다. 정련의 유무에 따라 정련하지 않은 면은 생목 또는 생목면이라고 했으며, 잿물마전하여 햇볕에 하얗게 바랜 것은 백목, 백목면이라고 했다. 백목뿐만 아니라 천연의 갈색을 띠는 황목黃木이 있었으며, 30~40년 전까지도 전라도 일대에서 제직되었다. 전체를 황색으로 짜기도 하고 날실 또는 씨실에 백면사와 황면사를 섞어 줄무늬를 짜기도 했다. 나주에서는 황목을 ‘노랑미영’이라고 한다.
섬세한 정도에 따라 34승·21승·13승(삼승三升이라고도 함)·11승·10승·9승·8승·7승·6승·5승으로 나뉜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가 가장 섬세하게 제직하는 것이 11승 정도이므로 34승, 21승의 면포는 가히 ‘공기와 안개 같은 면직물’이라고 표현할 만큼 고운 무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직기를 이용한 직문織紋의 면직물을 제직한 기록은 없으나, 축면직물을 짠 기록은 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전공지展功志 권3에는 “중국의 면포는 운화사문상안雲花斜文象眼 등의 무늬가 있다. 동인東人은 방차로 실을 자을 때 좌측으로 돌리면 좌사左絲가 되고 우측으로 돌리면 우사右絲가 되니 좌우사左右絲를 서로 경사와 위사로 하여 짜니 무늬가 생긴다.”라고 하였다.
「궁중발기宮中撥記」에 기록된 세목細木으로 이름난 고장은 경주·창원·상주·진주·밀양·거재·거창·하동·고성·초계·청도·영천·예천·금산·함양·합천·영덕·개성· 의령·문경·고령·현풍·영일·창령 등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고양高揚의 세면포가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문경의 세목이 유명하다고 했다.
조선시대 면직업은 국내의 수요를 충당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 수출할 정도로 발달하였다. 세종 즉위년인 1418년에는 일본에 1,539필의 면포를 수출하였고, 차차 그 수량이 늘어 1423년(세종 5)에는 2,640필의 면포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중국에 예물로 보낸 면포의 종류에는 백목면白木棉·생목면生木棉·세목면細木棉· 각색세목면各色細木棉·각색세면포各色細綿布·생상목生上木 등이 있다.
조선시대 육의전六矣廛 중에는 면포전綿布廛이 있어 면포를 전담 판매하였으며 후에는 백목전白木廛, 은목전銀木廛이라고도 하였다. 『임원경제지』의 통계를 인용하면 출시되는 상품이 기록된 324개의 시장 중 면포는 240개소, 삼베는 139개소, 주紬는 60개소, 모시는 40개소이다. 조선 후기 시장에서 면직물이 가장 많이 유통되는 직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오면서 기계직 면포인 광목·옥양목 등이 대량 수입되고, 국내에서도 기계직 면포의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나라 재래의 수공 면직물의 생산은 점차 줄어들게 되어 근래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에서는 무명 짜기의 전승을 위하여 1969년 전라남도 나주 지역의 샛골나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기능보유자로 김만애를 지정하여 그 기능을 전승하게 하였다. 그 뒤를 이어 며느리인 노진남이 계승하였으나 2017년 별세하였다.

특징 및 의의

면직물은 천연섬유 중에서도 가장 인간 친화적이며 위생적인 직물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의복의 재료뿐 아니라 생활용품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또한 섬유의 특성이 무기교하고 검박하여 사대부에서 일반 백성까지 상하 구별 없이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 입은 옷감이다.
무명은 춘하추동 어느 계절에나 사용할 수 있고 빨래하기 손쉬운 의복 재료로 수요가 많았다. 오늘날에는 간혹 무명의 질감을 좋아하여 응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명 대용으로 광목, 옥양목이 쓰인다. 이 직물들은 이불이나 홑이불로나 쓰일 뿐이며 옥양목은 여인들의 상복으로나 쓰이는 현실이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무명은 남자들의 겹바지, 또는 솜을 넣은 고리·조끼·두루마기·홑바지·적삼과 여인들의 치마·저고리· 적삼·속바지·단속곳·두루마기 감으로 쓰였다. 아주 고운 무명은 연옥색 또는 분홍으로 물들인 명주로 안을 받쳐 치마를 지어 입기도 하였다. 무명옷의 안감으로 명주가 많이 쓰인 것은 겉으로 보이기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귀중히 여길 줄 알았던 우리 민족의 의생활 방식의 일면이다.

참고문헌

林園經濟志, 閨閤叢書, 五洲衍文長箋散稿, 宮中撥記, 나주샛골나이(심연옥,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전통옷감(민길자, 대원사, 1998), 한국직물 오천년(심연옥, 고대직물연구소, 2002).

무명

무명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심연옥(沈蓮玉)

정의

목화에서 뽑은 실로 제직된 전통 면직물.

내용

면직물은 순우하고 검박하며, 위생적이어서 인류가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의복의 재료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 용품의 소재로 가장 널리 애용하는 천연 식물성 섬유 직물이다. 우리나라에서 면직물을 제직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당시에는 백첩포白疊布라고 불렀다. 『한원翰苑』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백첩포를 만드는데 청포靑布가 특히 아름답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경문왕조(869년)에는 당나라로 “사십승백첩포四十升白氎布 40필”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까지 출토된 가장 오래된 연대의 면직물은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시대의 면직물이다. 직물은 평조직으로 제직되었으며, 위사緯絲에 좌연左撚과 우연右撚의 강연사를 사용하여 표면에 추문皺紋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면의 재배가 본격화된 것은 고려 말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文益漸(1331~1400)이 교지국交趾國에서 새로운 면 종자를 반입하면서부터이다. 교지국은 현재의 베트남 지역으로 민광 지역과 더불어 일찍부터 목화를 재배하고 면직물을 제직하였다. 고려시대 면직물 유물은 안동 태사묘에 소장된 신발의 안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유물은 고려 공민왕이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문익점이 반입한 면 종자는 국내의 기후와 토양조건에도 적합하여 면직물 재배는 반세기도 못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1398년(태조 6)의 기록에는 “여남은 개 씨앗 중 선생이 뿌린 것은 실패하고 정천익에게 건네 준 것 중 겨우 한 알만이 성장하여 그해 가을에는 씨앗 300여 개를 얻어 매년 그것을 늘려 나가다 1367년(공민왕 16) 춘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 재배하게 하였다. 또 호승胡僧 홍원弘願의 힘을 빌고 가비家婢로 하여금 실을 뽑고 무명 짜는 기법과 기구機具 조작법을 터득하게 하여 무명 한 필을 짜내기에 성공하였다. 이윽고 이웃들과 서로 배우고 익히게 되어 10년이 못 가서 목화의 재배, 무명 짜기의 기법은 향내에 퍼지고, 또 10년이 못 가서 일국 안에 번져 나갔다.”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1398년(공양왕 3)에는 백성에게 혼수용으로 값비싼 견직물 대신 무명을 쓰라고 영을 내렸으며, 조선시대 1401년(태종 1)에는 백성 상하가 모두 면직물을 입게 되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太宗實錄』에도 있어 조선 초기에 이미 면의 재배가 확산되고 의료衣料로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면직물은 목木· 면포綿布·목면木棉 등으로 문헌에 기록되었으며, 일반적으로는 ‘무명’ 또는 ‘미영(명)’으로 불렸다. 정련의 유무에 따라 정련하지 않은 면은 생목 또는 생목면이라고 했으며, 잿물에 마전하여 햇볕에 하얗게 바랜 것은 백목, 백목면이라고 했다. 백목뿐만 아니라 천연의 갈색을 띠는 황목黃木이 있었으며, 30~40년 전까지도 전라도 일대에서 제직되었다. 전체를 황색으로 짜기도 하고 날실 또는 씨실에 백면사와 황면사를 섞어 줄무늬를 짜기도 했다. 나주에서는 황목을 ‘노랑미영’이라고 한다.
섬세한 정도에 따라 34승·21승·13승(삼승三升이라고도 함)·11승·10승·9승·8승·7승·6승·5승으로 나뉜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가 가장 섬세하게 제직하는 것이 11승 정도이므로 34승, 21승의 면포는 가히 ‘공기와 안개 같은 면직물’이라고 표현할 만큼 고운 무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직기를 이용한 직문織紋의 면직물을 제직한 기록은 없으나, 축면직물을 짠 기록은 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전공지展功志 권3에는 “중국의 면포는 운화사문상안雲花斜文象眼 등의 무늬가 있다. 동인東人은 방차로 실을 자을 때 좌측으로 돌리면 좌사左絲가 되고 우측으로 돌리면 우사右絲가 되니 좌우사左右絲를 서로 경사와 위사로 하여 짜니 무늬가 생긴다.”라고 하였다.
「궁중발기宮中撥記」에 기록된 세목細木으로 이름난 고장은 경주·창원·상주·진주·밀양·거재·거창·하동·고성·초계·청도·영천·예천·금산·함양·합천·영덕·개성· 의령·문경·고령·현풍·영일·창령 등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고양高揚의 세면포가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문경의 세목이 유명하다고 했다.
조선시대 면직업은 국내의 수요를 충당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 수출할 정도로 발달하였다. 세종 즉위년인 1418년에는 일본에 1,539필의 면포를 수출하였고, 차차 그 수량이 늘어 1423년(세종 5)에는 2,640필의 면포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중국에 예물로 보낸 면포의 종류에는 백목면白木棉·생목면生木棉·세목면細木棉· 각색세목면各色細木棉·각색세면포各色細綿布·생상목生上木 등이 있다.
조선시대 육의전六矣廛 중에는 면포전綿布廛이 있어 면포를 전담 판매하였으며 후에는 백목전白木廛, 은목전銀木廛이라고도 하였다. 『임원경제지』의 통계를 인용하면 출시되는 상품이 기록된 324개의 시장 중 면포는 240개소, 삼베는 139개소, 주紬는 60개소, 모시는 40개소이다. 조선 후기 시장에서 면직물이 가장 많이 유통되는 직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오면서 기계직 면포인 광목·옥양목 등이 대량 수입되고, 국내에서도 기계직 면포의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나라 재래의 수공 면직물의 생산은 점차 줄어들게 되어 근래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에서는 무명 짜기의 전승을 위하여 1969년 전라남도 나주 지역의 샛골나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기능보유자로 김만애를 지정하여 그 기능을 전승하게 하였다. 그 뒤를 이어 며느리인 노진남이 계승하였으나 2017년 별세하였다.

특징 및 의의

면직물은 천연섬유 중에서도 가장 인간 친화적이며 위생적인 직물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의복의 재료뿐 아니라 생활용품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또한 섬유의 특성이 무기교하고 검박하여 사대부에서 일반 백성까지 상하 구별 없이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 입은 옷감이다.
무명은 춘하추동 어느 계절에나 사용할 수 있고 빨래하기 손쉬운 의복 재료로 수요가 많았다. 오늘날에는 간혹 무명의 질감을 좋아하여 응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명 대용으로 광목, 옥양목이 쓰인다. 이 직물들은 이불이나 홑이불로나 쓰일 뿐이며 옥양목은 여인들의 상복으로나 쓰이는 현실이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무명은 남자들의 겹바지, 또는 솜을 넣은 저고리·조끼·두루마기·홑바지·적삼과 여인들의 치마·저고리· 적삼·속바지·단속곳·두루마기 감으로 쓰였다. 아주 고운 무명은 연옥색 또는 분홍으로 물들인 명주로 안을 받쳐 치마를 지어 입기도 하였다. 무명옷의 안감으로 명주가 많이 쓰인 것은 겉으로 보이기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귀중히 여길 줄 알았던 우리 민족의 의생활 방식의 일면이다.

참고문헌

林園經濟志, 閨閤叢書, 五洲衍文長箋散稿, 宮中撥記, 나주샛골나이(심연옥,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전통옷감(민길자, 대원사, 1998), 한국직물 오천년(심연옥, 고대직물연구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