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령(斷髮令)

한자명

斷髮令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남경미(南瓊美)

정의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한 명령.

내용

단발령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기초사전』에 의하면 1895년(고종 32) 11월 김홍집金弘集(1842~1896) 내각에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명령을 말한다.
조정에서는 1894년 7월부터 김홍집을 위시한 온건개화파들의 주도로 근대화 운동이 추진되었다.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배일친로정책排日親露政策을 표방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은 음력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일으키고 국면 전환을 꾀하였다. 단발령의 조짐은 1894년 의복 제도를 개정한 변복령變服令이 공포되면서, 곧 단발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돌았다. 이후 일본 관리가 고종에게 단발을 강요하였을 때, 고종은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을 이유로 시기를 미루고 있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인해 백성들의 반일의식은 한층 고조되었고, 또 사건을 기만적으로 처리한 김홍집 내각에 대한 불신도 깊어져 갔음에도 불구하고 1895년 음력 11월15일 일본군은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하였다. 이런 위협 속에서 고종은 탄식하며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鄭秉夏(1849~1896)에게 머리를 자르라고 하여 단발하였고, 유길준俞吉濬(1856~1914)은 태자의 머리를 잘랐다. 정부가 단발령을 내린 이유는 “단발은 양생養生에 유익하고 일하는 데에 편리하기 때문(고종실록 권33 고종 32년 11월 15일)” 이라고 하였다. 단발령 직후 정부의 관료, 군인·순검 등의 관인이 먼저 단발을 행하였고, 역법을 음력에서 양력으로 전환하기로 한 음력 1895년 11월 17일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단발 실시가 더욱 강요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일부 관리들은 단발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는 관직을 사임하였고, 각처에서 단발령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유길준이 당대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1833~1906)을 잡아들여 투옥한 뒤 단발을 강행하려 하자, 최익현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하며 단발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단발의 명을 받은 관리 중에도 이를 시행하지 못하는 자가 많았다. 당시 서울에 머무르던 지방 사람들은 단발령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향하였으며, 미처 피하지 못해 강제로 상투를 잘린 사람들도 상투를 주머니에 넣고 통곡하면서 서울을 떠나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서울 사람들은 단발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이 찾아오는 것조차 사양하였으며, 지방으로 임시 도피를 하기도 하였다. 단발이 두려워 지방에서 서울에 가는 것을 꺼려하여 서울에 물자가 부족해지고, 물가가 상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발령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체두관剃頭官이 파견되어 통행인은 물론 민가에까지 들어가 강행되었는데, 단발을 행하던 지방관리가 지방민에게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1895년 단발령의 배후에는 일본이 있었는데, 그 의도를 여러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문화적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으나 먼저 정치·군사적 측면으로 일본은 조선의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가 한편으로는 조선 조정을 확고히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의 소요사태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군을 파병할 구실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일본 정부가 대한침략정책對韓侵略政策에서 보인 주요한 수단의 하나였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상업·무역의 측면이다. 일본은 조선을 개항시킨 이래 꾸준히 조선 시장의 확대를 모색하여 왔다. 메이지유신 이후 생산된 일본상품의 판로를 우선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에서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단발령, 태양력 사용, 의제개혁 등은 조선 내각의 이름으로 행해졌고, 내각 인사들 중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호응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기보다는 일본공사 및 일본인 고문관의 의도와 계획 하에 조치가 파행적으로 진행되었다. 고종의 자의도, 내각 전체의 의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이런 술책에 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단발령은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더불어 반일 감정을 격화시킨 결정적 기폭제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서울의 친위대를 파견하여 각지의 의병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이 틈에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온건개화파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내각이 등장하였으며, 새 내각은 그 동안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1896년 “단발斷髮하는 문제는 편리한 대로 하게 허락(고종실록 권34, 고종 33년 2월 18일)”하고, 1897년에는 “을미년(1895) 11월 15일에 내린 조령과 조칙詔勅은 모두 취소하라(고종실록 권35 고종 34년 8월 12일).”라고 하여 1895년 강제로 시행했던 단발령은 일단락되었다.
그 후 1902년 군부·경무청에 소속된 군인·경찰·관원에 단발을 명하였는데, 심상훈 등이 군사들의 머리를 깎는 문제에 대하여 아뢰니 이미 군대내무서軍隊內務書 제16장 24조에 어길 수 없는 법으로 명백히 실려 있으니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고종실록 권42 고종 39년 9월 13일). 이후 1904년 갑진개화운동 이후 단발에 관한 논의가 확산되었고, 1907년 양력 8월 15일 순종은 “짐이 이제 개선하기 위한 정사를 베풀어서 한 세상을 유신維新하고자 할진대 반드시 짐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날에 머리를 깎고 군복을 입겠으니 신민들은 잘 알고 짐의 뜻을 잘 따를 것이다.(순종실록 권1 순종 원년 8월 15일)”하여 단발령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1895년처럼 강압적으로 시행하지는 않았다.
1910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 옷 착용과 단발령 강요를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조선총독부에서 1895년처럼 단발을 심하게 강제하는 단발령을 내리지는 않았고, 색의와 단발에 대한 언급은 계속되었다. 1937년 학생들의 머리 모양을 단속하며 단발령을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상투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사치하고 멋 내는 학생들의 머리를 자르고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그 성격이 1895년의 단발령과는 달랐다. 광복 이후에는 주로 학생들 머리 모양 단속에서 단발령이 등장하고, 1968년에는 가발 수출업자들이 가발 제작을 위해 문교부에 단발령 철회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는 풍속 사범을 단속한다고 하며 장발을 단속하기도 하였고, 국민학생(초등학생), 공무원을 대상으로 단발령이 행하기도 하였다.

특징 및 의의

1895년 단발령은 상투를 자르게 한 정부의 명령이었지만, 여기에는 일제의 정치·군사·상업·문화적도가 담겨 있었다. 단발령 이후 을미의병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아관파천 이후 단발령이 철회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단발령은 근대화를 구현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이후에 갑진개화운동, 순종 즉위(1907) 등을 계기로 추진되기도 하였다. 조선인에게 상투는 효孝, 성인 남성, 신분, 유교적 수양, 그리고 일부 보수파에서는 중화사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단발령은 조선 남성들에게 전통적 신분 체계의 파괴 그리고 유교 라는 기존 사상과 단절되는 것이었고, 백성들은 단발령 시행이 살아 있는 신체에 가해지는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여, 정부에 대한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단발의 강요로 인해 생긴 반감은 개화 자체를 증오하는 것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또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 의식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단발령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중·일 모두 겪어야 했던 문화적 충격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 특히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 모양은 차차 바뀌었고, 단발 이후 근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단발 이후 일본에 대한 반일 정서가 기독교적 교화를 긍정적이게 만들었으며 서구 문화를 호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참고문헌

단발령에 관한 문화현상학적 연구(정경숙, 서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문명 표준으로서의 두발 양식(김어진,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상투와 단발령(이민원, 사학지, 1998), 상투와 단발령 그리고 하이카라머리(이상현, 실천민속학연구4, 실천민속학회, 2002), 신편 한국사41(국사편찬위원회, 2002), 한국 머리카락 논란의 역사-단발령에서 노컷운동까지, 1895∼2007(강준만, 인물과사상113, 인물과사상사, 2007).

단발령

단발령
한자명

斷髮令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남경미(南瓊美)

정의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한 명령.

내용

단발령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기초사전』에 의하면 1895년(고종 32) 11월 김홍집金弘集(1842~1896) 내각에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명령을 말한다.
조정에서는 1894년 7월부터 김홍집을 위시한 온건개화파들의 주도로 근대화 운동이 추진되었다.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배일친로정책排日親露政策을 표방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은 음력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일으키고 국면 전환을 꾀하였다. 단발령의 조짐은 1894년 의복 제도를 개정한 변복령變服令이 공포되면서, 곧 단발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돌았다. 이후 일본 관리가 고종에게 단발을 강요하였을 때, 고종은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을 이유로 시기를 미루고 있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인해 백성들의 반일의식은 한층 고조되었고, 또 사건을 기만적으로 처리한 김홍집 내각에 대한 불신도 깊어져 갔음에도 불구하고 1895년 음력 11월15일 일본군은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하였다. 이런 위협 속에서 고종은 탄식하며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鄭秉夏(1849~1896)에게 머리를 자르라고 하여 단발하였고, 유길준俞吉濬(1856~1914)은 태자의 머리를 잘랐다. 정부가 단발령을 내린 이유는 “단발은 양생養生에 유익하고 일하는 데에 편리하기 때문(고종실록 권33 고종 32년 11월 15일)” 이라고 하였다. 단발령 직후 정부의 관료, 군인·순검 등의 관인이 먼저 단발을 행하였고, 역법을 음력에서 양력으로 전환하기로 한 음력 1895년 11월 17일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단발 실시가 더욱 강요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일부 관리들은 단발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는 관직을 사임하였고, 각처에서 단발령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유길준이 당대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1833~1906)을 잡아들여 투옥한 뒤 단발을 강행하려 하자, 최익현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하며 단발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단발의 명을 받은 관리 중에도 이를 시행하지 못하는 자가 많았다. 당시 서울에 머무르던 지방 사람들은 단발령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향하였으며, 미처 피하지 못해 강제로 상투를 잘린 사람들도 상투를 주머니에 넣고 통곡하면서 서울을 떠나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서울 사람들은 단발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이 찾아오는 것조차 사양하였으며, 지방으로 임시 도피를 하기도 하였다. 단발이 두려워 지방에서 서울에 가는 것을 꺼려하여 서울에 물자가 부족해지고, 물가가 상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발령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체두관剃頭官이 파견되어 통행인은 물론 민가에까지 들어가 강행되었는데, 단발을 행하던 지방관리가 지방민에게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1895년 단발령의 배후에는 일본이 있었는데, 그 의도를 여러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문화적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으나 먼저 정치·군사적 측면으로 일본은 조선의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가 한편으로는 조선 조정을 확고히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의 소요사태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군을 파병할 구실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일본 정부가 대한침략정책對韓侵略政策에서 보인 주요한 수단의 하나였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상업·무역의 측면이다. 일본은 조선을 개항시킨 이래 꾸준히 조선 시장의 확대를 모색하여 왔다. 메이지유신 이후 생산된 일본상품의 판로를 우선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에서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단발령, 태양력 사용, 의제개혁 등은 조선 내각의 이름으로 행해졌고, 내각 인사들 중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호응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기보다는 일본공사 및 일본인 고문관의 의도와 계획 하에 조치가 파행적으로 진행되었다. 고종의 자의도, 내각 전체의 의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이런 술책에 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단발령은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더불어 반일 감정을 격화시킨 결정적 기폭제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서울의 친위대를 파견하여 각지의 의병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이 틈에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온건개화파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내각이 등장하였으며, 새 내각은 그 동안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1896년 “단발斷髮하는 문제는 편리한 대로 하게 허락(고종실록 권34, 고종 33년 2월 18일)”하고, 1897년에는 “을미년(1895) 11월 15일에 내린 조령과 조칙詔勅은 모두 취소하라(고종실록 권35 고종 34년 8월 12일).”라고 하여 1895년 강제로 시행했던 단발령은 일단락되었다.
그 후 1902년 군부·경무청에 소속된 군인·경찰·관원에 단발을 명하였는데, 심상훈 등이 군사들의 머리를 깎는 문제에 대하여 아뢰니 이미 군대내무서軍隊內務書 제16장 24조에 어길 수 없는 법으로 명백히 실려 있으니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고종실록 권42 고종 39년 9월 13일). 이후 1904년 갑진개화운동 이후 단발에 관한 논의가 확산되었고, 1907년 양력 8월 15일 순종은 “짐이 이제 개선하기 위한 정사를 베풀어서 한 세상을 유신維新하고자 할진대 반드시 짐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날에 머리를 깎고 군복을 입겠으니 신민들은 잘 알고 짐의 뜻을 잘 따를 것이다.(순종실록 권1 순종 원년 8월 15일)”하여 단발령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1895년처럼 강압적으로 시행하지는 않았다.
1910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 옷 착용과 단발령 강요를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조선총독부에서 1895년처럼 단발을 심하게 강제하는 단발령을 내리지는 않았고, 색의와 단발에 대한 언급은 계속되었다. 1937년 학생들의 머리 모양을 단속하며 단발령을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상투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사치하고 멋 내는 학생들의 머리를 자르고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그 성격이 1895년의 단발령과는 달랐다. 광복 이후에는 주로 학생들 머리 모양 단속에서 단발령이 등장하고, 1968년에는 가발 수출업자들이 가발 제작을 위해 문교부에 단발령 철회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는 풍속 사범을 단속한다고 하며 장발을 단속하기도 하였고, 국민학생(초등학생), 공무원을 대상으로 단발령이 행하기도 하였다.

특징 및 의의

1895년 단발령은 상투를 자르게 한 정부의 명령이었지만, 여기에는 일제의 정치·군사·상업·문화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단발령 이후 을미의병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아관파천 이후 단발령이 철회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단발령은 근대화를 구현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이후에 갑진개화운동, 순종 즉위(1907) 등을 계기로 추진되기도 하였다. 조선인에게 상투는 효孝, 성인 남성, 신분, 유교적 수양, 그리고 일부 보수파에서는 중화사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단발령은 조선 남성들에게 전통적 신분 체계의 파괴 그리고 유교 라는 기존 사상과 단절되는 것이었고, 백성들은 단발령 시행이 살아 있는 신체에 가해지는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여, 정부에 대한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단발의 강요로 인해 생긴 반감은 개화 자체를 증오하는 것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또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 의식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단발령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중·일 모두 겪어야 했던 문화적 충격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 특히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 모양은 차차 바뀌었고, 단발 이후 근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단발 이후 일본에 대한 반일 정서가 기독교적 교화를 긍정적이게 만들었으며 서구 문화를 호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참고문헌

단발령에 관한 문화현상학적 연구(정경숙, 서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문명 표준으로서의 두발 양식(김어진,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상투와 단발령(이민원, 사학지, 1998), 상투와 단발령 그리고 하이카라머리(이상현, 실천민속학연구4, 실천민속학회, 2002), 신편 한국사41(국사편찬위원회, 2002), 한국 머리카락 논란의 역사-단발령에서 노컷운동까지, 1895∼2007(강준만, 인물과사상113, 인물과사상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