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령(團領)

한자명

團領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최은수(崔銀水)

정의

깃이 둥근 형태의 포袍로 의례용과 집무용 등 백관들이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 입는 관복官服의 하나.

역사

단령團領은 둥근 깃이라는 뜻이지만, 깃을 둥글게 만든 겉옷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명대에는 원령圓領, 원령의圓領衣, 반령盤嶺, 반령삼盤嶺衫, 반령착수포盤嶺窄袖袍, 반령착수삼盤嶺窄袖衫, 반령의盤嶺衣, 단령團領, 단령삼團領衫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다가 점차 관리가 겉에 입는 둥근 깃의 포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둥근 깃의 의복은 남북조시대 북위에서 입었던 호복胡服에서 시작되어 수隋 문제文帝 때 공복公服으로 채택되어 당唐대에 이르러 토착화되었다. 당이 주변국에 단령을 사여하기 시작했고 이런 전통이 명明대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에, 토번·위구르·발해·신라·일본 등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단령을 입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천자부터 서민까지 모든 계층에서 단령을 입었으나, 신라는 중국의 단령을 관리의 의복으로 채택하여 입었다.
당의 예복 제도 중에서 제복조복은 주周의 제도에 기반을 두어 이전 왕조들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공복은 새로운 양식인 복두와 단령을 착용하면서 이에 따라 신라와 발해, 일본 등도 복두와 단령을 관복으로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단령을 관복으로 입을 때는 관모는 검은색으로 통일하였고, 관직의 등급에 따라 단령의 색상을 다르게 하였으며, 허리띠와 손에 드는 홀笏의 재료에도 차등을 두었다. 사자·호랑이·표범·기린·매·기러기 등의 무늬로 문관과 무관의 관직을 구분하는 방식의 기본 틀이 당대에 만들어져 이후 송宋·명대까지 이어졌으며 색상과 재료에 차이는 있었으나 이 구분법이 우리나라와 일본 등의 주변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송대에는 단령이 백관들의 공복으로 정착되었다. 공복으로 착용한 단령은 소매가 넓고 도련에 가로 방향의 란襴이 있으며, 여기에 복두를 쓰고 가죽 허리띠를 두르고 가죽으로 만든 흑피화를 함께 갖추었다. 관복의 색상에 따라서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어대를 차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삼한시대까지는 국풍을 따르다가 648년(진덕여왕 2)에 김춘추가 당에 원병을 청하러 가서 중국의 제도를 들여온 이후 관복제도가 중국과 비슷해졌다고 한다. 고려 초 960년(광종 11)에는 관리들의 공복을 단령의 아래에 가로로 란襴을 대고, 소매가 약간 넓으며, 옆트임이 있는 난삼襴衫으로 제정하였다. 백관의 예복도 함께 정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관리의 상복과 공복을 구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광종 때 정한 관복제도에는 계급에 따라서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綠衫으로 구분하였다. 이후 의종毅宗 대에는 관복의 색상이 자紫·단丹·비緋·녹綠에서 자·비·녹·조皂로 바뀌었다. 사색공복제도가 실행된 지 150년 후 고려를 방문한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보면 고려는 송의 관복 제도의 영향을 받았으나, 관복이 송과 같지 않았으며 평상복은 더욱 달랐다고 한다.
명대의 공복과 상복常服의 제도는 당대의 원령포삼圓領袍衫, 송의 곡령대수曲領大袖로 불렸던 관리들의 예복에서 비롯되었다. 명대의 상복은 둥근 깃이 달린 포에 사모를 쓰고 대를 둘렀는데, 가장 큰 특징은 가슴과 등에 달린 보자補子였다. 이처럼 보자를 달아 품계를 나타내는 제도는 당대 측천무후가 실시한 수포繡袍에서 유래한 것이다. 1391년(명 홍무 24, 공양왕 3) 관복을 정비하면서 문관의 상복에는 날짐승(선학, 금계, 공작, 운안, 백한, 노사, 계칙鸂鶒, 꾀꼬리, 메추리, 연작練鵲)을, 무관의 상복에는 길짐승(사자, 호虎, 표豹, 웅비, 표彪, 서우犀牛, 해마, 해치)을 수놓도록 하면서 보자 제도가 시작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관복의 흉배 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공복은 곡령대수, 즉 둥근 옷깃에 우임이며 넓은 소매이고 옆트임이 없는 옷이다. 고려의 공복은 960년(광종 11) 후주後周의 영향을 받아 제정하였으며, 형태는 우임에 곡령이고 대수인데 옷깃과 수구에 이색선이 둘러져 있고 송제는 선이 없다. 한편 소매가 좁고 옆트임이 있는 단령은 계속 입혀지고 있었다. 중국 명은 소매가 넓은 곡령대수인 송의 공복 제도와 함께 소매가 좁고 옆트임이 있는 상복 제도를 제정하였다.
조선시대의 공복은 곡령대수로 하고, 복두와 단령을 기본으로 하여 허리띠를 하고 흑피화를 신고 홀을 들었다. 단령의 색상과 허리띠 및 홀의 재료는 품계에 따라 달랐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공복 차림에서 단령은 1품~정3품은 홍포, 종3품~6품은 청포, 7~9품은 녹포를 입었다. 후에 1746년(영조 22) 『속대전續大典』에서는 3품 이상은 담홍포, 3품 이하는 홍포를 입는 것으로 변하였다. 또 1785년(정조 9)에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3품 이하는 청록색 공복으로 변경되었다가 1884년(고종 21)에 관복이 간소화되면서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상복으로 입은 단령은 색상에 대한 제한이 원칙적으로 없었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서는 명대 관복 중 상복의 포로 입었고, 잡색雜色, 즉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였으므로 명의 제도를 수용한 조선 초기 백관의 상복의 단령도 색상 규정이 없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시대에 따라서 현록색 등 선호한 색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493년의 『악학궤범樂學軌範』의 관복도설冠服圖說에는 악사의 공복용 단령과 상복용 단령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보면 악사공복과 상복의 단령은 소매넓이나 무의 제작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복도 1884년 관복이 간소화되면서 공복과 마찬가지로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다.

내용

단령을 관복으로 착용하는 제도는 고려 말 우왕때 받아들인 명의 관복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단령에 사모를 쓰고 품계에 따라서 서犀·금金·은銀 등의 품대品帶를 두르며 흑화를 신는데, 특히 상복은 흑단령(아청색 혹은 현록색)에 흉배를 단 것이고, 시복은 홍단령(담홍색, 홍색)으로 흉배 장식이 없는 것이다.
조선 초기 단령의 상복의 색상은 일정한 규정이 없이 다양한 색상이 사용되었으므로 상복의 허리띠만으로 백관의 품계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그 구별이 쉽지 않아서 세종대에 처음으로 흉배 제정을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1454년(단종 2)에 비로소 흉배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후에도 수차례 흉배 제도의 변화가 있었으며, 1505년(연산군 11)에는 1품에서 9품까지 흉배를 사용하게 하였으나,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1691년(숙종 11)에 문관은 날짐승, 무관은 길짐승으로 정했고, 1745년(영조 21)과 1897년(고종 34)에는 문관 당상관은 쌍학, 문관 당하관은 단학, 무관 당상관은 쌍호, 당하관은 단호흉배로 더욱 단순화하여 말기까지 사용하였다. 조선의 관복 제도는 중국의 왕조가 청淸으로 바뀐 후에도 전 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속대전』, 『국혼정례』, 『상방정례』에서 관복을 비롯한 예복제도를 정비하였고, 이 제도가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조선 후기의 관리 복식의 기본적인 틀은 조선 전기의 제도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변화된 부분도 많았다. 공복은 착용빈도는 줄었으나, 국말까지도 예복으로 사용하였다.
『경국대전』에 상복은 품계에 따라 흉배를 달며 관모로 사모를 쓰고, 공복은 복두를 쓰고 홀을 들며 품계에 따라서 홍포·청포·녹포로 옷의 색상을 다르게 규정하였다. 공복과 상복의 차이는 관모가 복두, 사모라는 것과 흉배와 홀의 여부에 있었다. 또한 상복은 공복과는 달리 품계에 따른 옷의 색상이 정해지지 않아서 다양한 색상의 단령을 착용할 수 있었다. 상복의 가장 큰 특징은 품계를 상징하는 흉배였다. 그러나 『경국대전』이 제정된 성종 대에도 모든 단령에 흉배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조회朝會나 예연禮宴에 입던 흑단령에만 흉배를 다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잡았고, 점차 아청색이나 현록색 등의 검은색 단령이 선호되면서 흑단령에 흉배를 단 형식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단령에 사모를 쓰는 관복으로는 상복과 함께 시복時服이 있었다. 상복과 시복은 조선 초기부터 용도와 명칭의 혼란이 심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시복에 관한 규정이 없었으나, 대체로 일상 공무를 볼 때 입는 관리의 집무복을 시복이라 하였다. 형태는 상복과 같지만 흉배를 달지 않았다. 즉 격식과 위의를 갖추어야 할 때는 흉배를 단 흑단령을 착용하였고, 일상적인 업무에서는 흉배없는 홍단령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6세기 초에 상복에서 발전된 흑단령의 용도가 명확해지면서 시복과 상복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하였고, 다시 1610년(광해군 2)에 관복 제도를 정비한 것을 계기로 흑단령은 상복으로, 홍단령은 시복으로 정착되었다. 즉, 관리의 집무복 중에서 흉배 달린 흑단령은 의례복의 성격이 강한 상복으로, 홍단령은 일상 업무복의 성격이 강한 시복으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공복·상복·시복의 제도는 1884년(고종 21)에 이뤄진 관복제도 간소화와 함께 흉배가 달린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다.

특징 및 의의

유물을 통해서 보면 시기별로 단령의 형태 변화가 보이는데 조선 전기에는 주로 홑옷으로 만들었으므로 속에 입는 직령을 별도로 제작하여 겹쳐 입는 방식이었고, 17세기 무렵부터는 홑단령과 홑직령을 따로 제작하여 징그는 형식의 겹옷이 등장한다. 이후부터는 안감으로 제작된 홑직령을 단령에 끼워서 깃· 섶·무·수구·밑단 부분만 맞추어 공그르기나 성근 감침질을 하여 징거서 붙이는 겹옷으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에는 소매배래와 옆솔기, 등솔과 같은 부위에서 두 벌을 붙여 세 겹이나 네 겹을 같이 바느질하여 한 벌 옷으로 만들었다.
단령의 옷길이는 전기에는 앞이 짧고 뒤가 긴 형식의 전단후장형이 보이는데, 3~11 정도까지 차이가 나기도 한다. 17세기 이후의 유물에는 앞뒤 길이에 차이가 나는 유물은 보이지 않는다. 소매통은 조선 전기에는 진동과 부리가 매우 좁고 배래가 수구쪽으로 사선이 되는 통수에서 후대로 갈수록 부리 부분이 넓어졌고, 말기에는 넓은 사각형의 양옆을 굴린 두리소매 형태로 발전하였다. 17세기 말~18세기 사이에는 소매통이 60~64가 넘는 넓은 두리소매도 나타나다가 말기에는 다시 좁아져서 50~55 정도가 된다.
단령의 무 양식은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며, 무의 형태·봉재 방법·무의 주름의 갯수 등은 시대를 구분하는 요소가 되고, 단령을 구성하는 섶의 유형이나 소매 형태 등과도 관련이 있다. 이은주가 분류한 무의 형태는 시기별로 다섯 개 유형의 무가 보인다. 15~16세기에는 길의 옆선 안으로 소형 주름을 접어 넣고 밖으로 큰 주름 하나를 만들어 무 머리 부분을 삼각으로 접어 넣어 옆으로 뻗친 양식인 ‘대소 안팎 주름형 무’, 옆트임 안으로 여러 개의 주름을 잡아 정리한 ‘네 겹 주름형 무’, 옆선 밖으로 뻗친 큰 주름으로 구성된 ‘대형 밖 주름형 무’ 양식 이 세 가지가 공존한다. 이후 17세기에는 무를 뒤로 젖히면서 앞길 옆선에 새롭게 삼각무를 삽입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뒤 젖힘 대주름형 무’는 ‘뒤 젖힘 사다리꼴형 무’로 변화되었다. 사다리꼴형 무가 등장하고, 뒤로 젖혀진 사다리꼴의 무 상부를 매듭단추나 상침으로 뒷길에 고정시킨다. 조선 후기에는 사다리꼴 무를 뒷길에 상침으로 고정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1884년(고종 21) 관복제도 간소화 이후에는 좁은 소매의 흑단령에 어울리는 삼각형의 두루마기 무가 나타난다.
단령의 둥근 깃은 조선 전기에는 2~3의 좁은 깃을 목 위에 바트게 붙였고, 점차 후대로 갈수록 너비가 넓어지고 파임이 깊어져서 U자형을 이루게 되었다. 고름은 전기에는 고려시대 유물에서 보이는 것처럼 고리에 끈을 끼워서 매는 간접고름형이었다가 직접고름을 부착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대체로 후기로 가면서 고름의 너비가 넓어지고 길이도 길어지는 경향이다. 후기에는 안감의 직령 고름과 단령의 고름을 함께 매는 이중고름이 등장하면서 단령의 형태가 정착되었다.
기록을 보면 단령은 목면·면포의 면직물, 세마포· 마포·생추포·숙포熟布·저사·세저포 등의 저마직물, 교기交綺·사紗·라·운문단雲紋緞·주견·금錦·명주紬의 견직물 등 다양한 직물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단령이 공복이었기에 남성들만 입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조선 전기 출토유물을 보면 여성들도 단령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평 윤씨(?~1566), 청주 한씨(1600년 전후), 연안 김씨(16세기 말), 의인 박씨(16세기 말), 장기 정씨(1565~1614) 묘에서 출토된 여자 단령은 대개 홑이며, 소매는 통수이고, 긴소매와 반소매가 있다. 앞길보다 뒷길이 길며, 직물로 만든 허리 띠가 같이 출토된다. 겉깃과 겉섶, 안섶의 형태는 남자 단령과 동일하나, 무의 형태가 다르다. 무는 대부분 여러 겹의 맞주름으로 되어 있으며, 겉에서 앞뒤의 길쪽으로 고정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직금된 노사흉배나 공작흉배 등이 달린 경우도 있다. 또한 김확의 부인이었던 동래 정씨(1567~1631) 묘에서는 단령과 원삼의 중간 형태를 띄는 의복이 출토되었다. 깃 모양은 단령 깃과 비슷하나, 여밈이 맞깃으로 되어 있어 앞모양은 원삼과 유사하며 소매 끝에는 한삼이 달려있다. 여성 단령의 존재에 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이견이 있어서 아직은 단정하여 설명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홍나영·신혜성·이은진, 교문사, 2011), 조선시대 백관의 단령(최은수, 민속원, 2007), 조선시대 백관의 시복상복 제도 변천(이은주, 복식55-6, 한국복식학회, 2005), 조선시대 여성 단령에 관한 연구(송미경, 복식52-8, 한국복식학회, 2002).

단령

단령
한자명

團領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최은수(崔銀水)

정의

깃이 둥근 형태의 포袍로 의례용과 집무용 등 백관들이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 입는 관복官服의 하나.

역사

단령團領은 둥근 깃이라는 뜻이지만, 깃을 둥글게 만든 겉옷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명대에는 원령圓領, 원령의圓領衣, 반령盤嶺, 반령삼盤嶺衫, 반령착수포盤嶺窄袖袍, 반령착수삼盤嶺窄袖衫, 반령의盤嶺衣, 단령團領, 단령삼團領衫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다가 점차 관리가 겉에 입는 둥근 깃의 포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둥근 깃의 의복은 남북조시대 북위에서 입었던 호복胡服에서 시작되어 수隋 문제文帝 때 공복公服으로 채택되어 당唐대에 이르러 토착화되었다. 당이 주변국에 단령을 사여하기 시작했고 이런 전통이 명明대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에, 토번·위구르·발해·신라·일본 등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단령을 입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천자부터 서민까지 모든 계층에서 단령을 입었으나, 신라는 중국의 단령을 관리의 의복으로 채택하여 입었다.
당의 예복 제도 중에서 제복과 조복은 주周의 제도에 기반을 두어 이전 왕조들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공복은 새로운 양식인 복두와 단령을 착용하면서 이에 따라 신라와 발해, 일본 등도 복두와 단령을 관복으로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단령을 관복으로 입을 때는 관모는 검은색으로 통일하였고, 관직의 등급에 따라 단령의 색상을 다르게 하였으며, 허리띠와 손에 드는 홀笏의 재료에도 차등을 두었다. 사자·호랑이·표범·기린·매·기러기 등의 무늬로 문관과 무관의 관직을 구분하는 방식의 기본 틀이 당대에 만들어져 이후 송宋·명대까지 이어졌으며 색상과 재료에 차이는 있었으나 이 구분법이 우리나라와 일본 등의 주변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송대에는 단령이 백관들의 공복으로 정착되었다. 공복으로 착용한 단령은 소매가 넓고 도련에 가로 방향의 란襴이 있으며, 여기에 복두를 쓰고 가죽 허리띠를 두르고 가죽으로 만든 흑피화를 함께 갖추었다. 관복의 색상에 따라서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어대를 차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삼한시대까지는 국풍을 따르다가 648년(진덕여왕 2)에 김춘추가 당에 원병을 청하러 가서 중국의 제도를 들여온 이후 관복제도가 중국과 비슷해졌다고 한다. 고려 초 960년(광종 11)에는 관리들의 공복을 단령의 아래에 가로로 란襴을 대고, 소매가 약간 넓으며, 옆트임이 있는 난삼襴衫으로 제정하였다. 백관의 예복도 함께 정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관리의 상복과 공복을 구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광종 때 정한 관복제도에는 계급에 따라서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綠衫으로 구분하였다. 이후 의종毅宗 대에는 관복의 색상이 자紫·단丹·비緋·녹綠에서 자·비·녹·조皂로 바뀌었다. 사색공복제도가 실행된 지 150년 후 고려를 방문한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보면 고려는 송의 관복 제도의 영향을 받았으나, 관복이 송과 같지 않았으며 평상복은 더욱 달랐다고 한다.
명대의 공복과 상복常服의 제도는 당대의 원령포삼圓領袍衫, 송의 곡령대수曲領大袖로 불렸던 관리들의 예복에서 비롯되었다. 명대의 상복은 둥근 깃이 달린 포에 사모를 쓰고 대를 둘렀는데, 가장 큰 특징은 가슴과 등에 달린 보자補子였다. 이처럼 보자를 달아 품계를 나타내는 제도는 당대 측천무후가 실시한 수포繡袍에서 유래한 것이다. 1391년(명 홍무 24, 공양왕 3) 관복을 정비하면서 문관의 상복에는 날짐승(선학, 금계, 공작, 운안, 백한, 노사, 계칙鸂鶒, 꾀꼬리, 메추리, 연작練鵲)을, 무관의 상복에는 길짐승(사자, 호虎, 표豹, 웅비, 표彪, 서우犀牛, 해마, 해치)을 수놓도록 하면서 보자 제도가 시작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관복의 흉배 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공복은 곡령대수, 즉 둥근 옷깃에 우임이며 넓은 소매이고 옆트임이 없는 옷이다. 고려의 공복은 960년(광종 11) 후주後周의 영향을 받아 제정하였으며, 형태는 우임에 곡령이고 대수인데 옷깃과 수구에 이색선이 둘러져 있고 송제는 선이 없다. 한편 소매가 좁고 옆트임이 있는 단령은 계속 입혀지고 있었다. 중국 명은 소매가 넓은 곡령대수인 송의 공복 제도와 함께 소매가 좁고 옆트임이 있는 상복 제도를 제정하였다.
조선시대의 공복은 곡령대수로 하고, 복두와 단령을 기본으로 하여 허리띠를 하고 흑피화를 신고 홀을 들었다. 단령의 색상과 허리띠 및 홀의 재료는 품계에 따라 달랐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공복 차림에서 단령은 1품~정3품은 홍포, 종3품~6품은 청포, 7~9품은 녹포를 입었다. 후에 1746년(영조 22) 『속대전續大典』에서는 3품 이상은 담홍포, 3품 이하는 홍포를 입는 것으로 변하였다. 또 1785년(정조 9)에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3품 이하는 청록색 공복으로 변경되었다가 1884년(고종 21)에 관복이 간소화되면서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상복으로 입은 단령은 색상에 대한 제한이 원칙적으로 없었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서는 명대 관복 중 상복의 포로 입었고, 잡색雜色, 즉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였으므로 명의 제도를 수용한 조선 초기 백관의 상복의 단령도 색상 규정이 없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시대에 따라서 현록색 등 선호한 색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493년의 『악학궤범樂學軌範』의 관복도설冠服圖說에는 악사의 공복용 단령과 상복용 단령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보면 악사공복과 상복의 단령은 소매넓이나 무의 제작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복도 1884년 관복이 간소화되면서 공복과 마찬가지로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다.

내용

단령을 관복으로 착용하는 제도는 고려 말 우왕때 받아들인 명의 관복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단령에 사모를 쓰고 품계에 따라서 서犀·금金·은銀 등의 품대品帶를 두르며 흑화를 신는데, 특히 상복은 흑단령(아청색 혹은 현록색)에 흉배를 단 것이고, 시복은 홍단령(담홍색, 홍색)으로 흉배 장식이 없는 것이다.
조선 초기 단령의 상복의 색상은 일정한 규정이 없이 다양한 색상이 사용되었으므로 상복의 허리띠만으로 백관의 품계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그 구별이 쉽지 않아서 세종대에 처음으로 흉배 제정을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1454년(단종 2)에 비로소 흉배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후에도 수차례 흉배 제도의 변화가 있었으며, 1505년(연산군 11)에는 1품에서 9품까지 흉배를 사용하게 하였으나,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1691년(숙종 11)에 문관은 날짐승, 무관은 길짐승으로 정했고, 1745년(영조 21)과 1897년(고종 34)에는 문관 당상관은 쌍학, 문관 당하관은 단학, 무관 당상관은 쌍호, 당하관은 단호흉배로 더욱 단순화하여 말기까지 사용하였다. 조선의 관복 제도는 중국의 왕조가 청淸으로 바뀐 후에도 전 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속대전』, 『국혼정례』, 『상방정례』에서 관복을 비롯한 예복제도를 정비하였고, 이 제도가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조선 후기의 관리 복식의 기본적인 틀은 조선 전기의 제도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변화된 부분도 많았다. 공복은 착용빈도는 줄었으나, 국말까지도 예복으로 사용하였다.
『경국대전』에 상복은 품계에 따라 흉배를 달며 관모로 사모를 쓰고, 공복은 복두를 쓰고 홀을 들며 품계에 따라서 홍포·청포·녹포로 옷의 색상을 다르게 규정하였다. 공복과 상복의 차이는 관모가 복두, 사모라는 것과 흉배와 홀의 여부에 있었다. 또한 상복은 공복과는 달리 품계에 따른 옷의 색상이 정해지지 않아서 다양한 색상의 단령을 착용할 수 있었다. 상복의 가장 큰 특징은 품계를 상징하는 흉배였다. 그러나 『경국대전』이 제정된 성종 대에도 모든 단령에 흉배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조회朝會나 예연禮宴에 입던 흑단령에만 흉배를 다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잡았고, 점차 아청색이나 현록색 등의 검은색 단령이 선호되면서 흑단령에 흉배를 단 형식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단령에 사모를 쓰는 관복으로는 상복과 함께 시복時服이 있었다. 상복과 시복은 조선 초기부터 용도와 명칭의 혼란이 심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시복에 관한 규정이 없었으나, 대체로 일상 공무를 볼 때 입는 관리의 집무복을 시복이라 하였다. 형태는 상복과 같지만 흉배를 달지 않았다. 즉 격식과 위의를 갖추어야 할 때는 흉배를 단 흑단령을 착용하였고, 일상적인 업무에서는 흉배없는 홍단령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6세기 초에 상복에서 발전된 흑단령의 용도가 명확해지면서 시복과 상복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하였고, 다시 1610년(광해군 2)에 관복 제도를 정비한 것을 계기로 흑단령은 상복으로, 홍단령은 시복으로 정착되었다. 즉, 관리의 집무복 중에서 흉배 달린 흑단령은 의례복의 성격이 강한 상복으로, 홍단령은 일상 업무복의 성격이 강한 시복으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공복·상복·시복의 제도는 1884년(고종 21)에 이뤄진 관복제도 간소화와 함께 흉배가 달린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다.

특징 및 의의

유물을 통해서 보면 시기별로 단령의 형태 변화가 보이는데 조선 전기에는 주로 홑옷으로 만들었으므로 속에 입는 직령을 별도로 제작하여 겹쳐 입는 방식이었고, 17세기 무렵부터는 홑단령과 홑직령을 따로 제작하여 징그는 형식의 겹옷이 등장한다. 이후부터는 안감으로 제작된 홑직령을 단령에 끼워서 깃· 섶·무·수구·밑단 부분만 맞추어 공그르기나 성근 감침질을 하여 징거서 붙이는 겹옷으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에는 소매배래와 옆솔기, 등솔과 같은 부위에서 두 벌을 붙여 세 겹이나 네 겹을 같이 바느질하여 한 벌 옷으로 만들었다.
단령의 옷길이는 전기에는 앞이 짧고 뒤가 긴 형식의 전단후장형이 보이는데, 3~11 정도까지 차이가 나기도 한다. 17세기 이후의 유물에는 앞뒤 길이에 차이가 나는 유물은 보이지 않는다. 소매통은 조선 전기에는 진동과 부리가 매우 좁고 배래가 수구쪽으로 사선이 되는 통수에서 후대로 갈수록 부리 부분이 넓어졌고, 말기에는 넓은 사각형의 양옆을 굴린 두리소매 형태로 발전하였다. 17세기 말~18세기 사이에는 소매통이 60~64가 넘는 넓은 두리소매도 나타나다가 말기에는 다시 좁아져서 50~55 정도가 된다.
단령의 무 양식은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며, 무의 형태·봉재 방법·무의 주름의 갯수 등은 시대를 구분하는 요소가 되고, 단령을 구성하는 섶의 유형이나 소매 형태 등과도 관련이 있다. 이은주가 분류한 무의 형태는 시기별로 다섯 개 유형의 무가 보인다. 15~16세기에는 길의 옆선 안으로 소형 주름을 접어 넣고 밖으로 큰 주름 하나를 만들어 무 머리 부분을 삼각으로 접어 넣어 옆으로 뻗친 양식인 ‘대소 안팎 주름형 무’, 옆트임 안으로 여러 개의 주름을 잡아 정리한 ‘네 겹 주름형 무’, 옆선 밖으로 뻗친 큰 주름으로 구성된 ‘대형 밖 주름형 무’ 양식 이 세 가지가 공존한다. 이후 17세기에는 무를 뒤로 젖히면서 앞길 옆선에 새롭게 삼각무를 삽입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뒤 젖힘 대주름형 무’는 ‘뒤 젖힘 사다리꼴형 무’로 변화되었다. 사다리꼴형 무가 등장하고, 뒤로 젖혀진 사다리꼴의 무 상부를 매듭단추나 상침으로 뒷길에 고정시킨다. 조선 후기에는 사다리꼴 무를 뒷길에 상침으로 고정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1884년(고종 21) 관복제도 간소화 이후에는 좁은 소매의 흑단령에 어울리는 삼각형의 두루마기 무가 나타난다.
단령의 둥근 깃은 조선 전기에는 2~3의 좁은 깃을 목 위에 바트게 붙였고, 점차 후대로 갈수록 너비가 넓어지고 파임이 깊어져서 U자형을 이루게 되었다. 고름은 전기에는 고려시대 유물에서 보이는 것처럼 고리에 끈을 끼워서 매는 간접고름형이었다가 직접고름을 부착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대체로 후기로 가면서 고름의 너비가 넓어지고 길이도 길어지는 경향이다. 후기에는 안감의 직령 고름과 단령의 고름을 함께 매는 이중고름이 등장하면서 단령의 형태가 정착되었다.
기록을 보면 단령은 목면·면포의 면직물, 세마포· 마포·생추포·숙포熟布·저사·세저포 등의 저마직물, 교기交綺·사紗·라·운문단雲紋緞·주견·금錦·명주紬의 견직물 등 다양한 직물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단령이 공복이었기에 남성들만 입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조선 전기 출토유물을 보면 여성들도 단령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평 윤씨(?~1566), 청주 한씨(1600년 전후), 연안 김씨(16세기 말), 의인 박씨(16세기 말), 장기 정씨(1565~1614) 묘에서 출토된 여자 단령은 대개 홑이며, 소매는 통수이고, 긴소매와 반소매가 있다. 앞길보다 뒷길이 길며, 직물로 만든 허리 띠가 같이 출토된다. 겉깃과 겉섶, 안섶의 형태는 남자 단령과 동일하나, 무의 형태가 다르다. 무는 대부분 여러 겹의 맞주름으로 되어 있으며, 겉에서 앞뒤의 길쪽으로 고정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직금된 노사흉배나 공작흉배 등이 달린 경우도 있다. 또한 김확의 부인이었던 동래 정씨(1567~1631) 묘에서는 단령과 원삼의 중간 형태를 띄는 의복이 출토되었다. 깃 모양은 단령 깃과 비슷하나, 여밈이 맞깃으로 되어 있어 앞모양은 원삼과 유사하며 소매 끝에는 한삼이 달려있다. 여성 단령의 존재에 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이견이 있어서 아직은 단정하여 설명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홍나영·신혜성·이은진, 교문사, 2011), 조선시대 백관의 단령(최은수, 민속원, 2007), 조선시대 백관의 시복과 상복 제도 변천(이은주, 복식55-6, 한국복식학회, 2005), 조선시대 여성 단령에 관한 연구(송미경, 복식52-8, 한국복식학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