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이경미(李京美)

정의

고무를 재료로 만든 신.

내용

우리나라에서 고무신은 일제강점기 때 본격적으로 일본을 통해 공급되었다. 일본에서 고무제 신발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생산량이 급증했지만, 정작 일본인들은 원활한 공기 순환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고무제 신발을 외면했다. 이로 인해 재고품이 급증하자 일본의 고무기업에서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우리나라와 중국에 본격적으로 수출을 했다. 1919년경부터 신문에서 일본산 고무제 신발이 빈번하게 홍보되었다. 가격이 가죽 구두의 3분의 1 수준으로 저렴했고, 방수防水 기능이 있어 여름철에 신는 외래신으로 소개되었다. 비록 처음에는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서양 문물과 접촉이 잦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수용되었다. 1920년 초반에 우리나라의 미감美感을 갖춘 고무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무신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평양의 일본인 잡화상 ‘내덕內德 상점’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이병두의 활약이 있었다. 이병두는 일본 청년에게 고무 단화가 인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본으로 건너가 거래 공장에서 제조 공정과 고무 배합 기술을 배워 우리나라 사람의 기호에 맞게 바꾸었다. 남자 고무신은 짚신을, 여자 고무신은 코신을 본떠 만든 ‘조선식 고무신’은 짚신보다 내구성이 뛰어났다. 비가 와도 신을 수 있었고, 모양도 비단신이나 갖신(가죽으로 만든 우리 고유의 신을 총칭하는 말)과 비슷했기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고무신이 인기를 끌자 고무신 공장이 급증했다. 고무신은 소재가 질기고 물이 새지 않아 실용성이 뛰어났다. 그래서 도시 빈민이나 농민이 주로 애용했다. 처음 등장한 고무신은 검은색 민무늬였다. 수요가 늘어나자 문양이나 색깔을 넣은 다양한 형태의 고무신이 등장하게 된다. 이로 인해 고무신을 구하기 어려워지기도 했다. 특히 흰색 고무신은 여성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었으며, 아이들은 고무신을 잃어 버릴까봐 머리맡에 놓고 자거나, 아까워서 길을 걸을 때도 들고 다녔다.

특징 및 의의

고무신은 1920년경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전통신과 달리 버선양말에 모두 신을 수 있는 신발이었다. 남성용 고무신은 신 등에 가로선이 새겨진 양식으로, 구두의 스트레이트 팁straight tip(신발 앞부분을 보강시켜 견고하게 하고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구두 앞 끝에 일직선의 이음매가 있는 디자인으로 장식된 것)과 짚신의 뒷갱기를 형상화한 복합적인 디자인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여성용 고무신은 당·운혜에 나타난 신코를 반영한 코고무신 형태로 발전하였다. 상류층 여성의 전유물이었던 당·운혜를 모방한 고무신의 등장으로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은 일종의 모방 심리로 고무신을 신었다.
조선인 중 최초로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창덕궁에 유배된 순종이었다. 순종은 흰색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고무신은 누구나 신었기 때문에 신발만으로는 황제인지 양반인지 상인인지 백정인지 신분을 알 수 없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고무신이 수용된 사례는 보기 드문 독특한 현상이었다. 고무신의 범계층적 수용 요인은 제도적,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구분된다. 회사령 철폐로 회사의 설립이 이전보다 자유로워져 고무 기업의 설립과 발전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섬세한 손길로 우리나라의 미감에 알맞은 코고무신을 탄생시켰다. 또한, 복식개량운동으로 양복·교복·제복 등에 양말을 수용하면서 상류층을 중심으로 고무신과 구두를 착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전통신 모양을 계승한 고무신을 애용하였고, 1920~1930년대 백의(白衣) 착용이 금지되면서 흰색에 투영하는 민족의식이 더욱 뚜렷해져 흰색 고무신을 착용함으로써 민족의 고유성을 대변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일인당 고무신 한 켤레를 배급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국사편찬위원회, 두산동아, 2006), 일제강점기 고무신에 관한 연구(이효선,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고무신

고무신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이경미(李京美)

정의

고무를 재료로 만든 신.

내용

우리나라에서 고무신은 일제강점기 때 본격적으로 일본을 통해 공급되었다. 일본에서 고무제 신발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생산량이 급증했지만, 정작 일본인들은 원활한 공기 순환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고무제 신발을 외면했다. 이로 인해 재고품이 급증하자 일본의 고무기업에서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우리나라와 중국에 본격적으로 수출을 했다. 1919년경부터 신문에서 일본산 고무제 신발이 빈번하게 홍보되었다. 가격이 가죽 구두의 3분의 1 수준으로 저렴했고, 방수防水 기능이 있어 여름철에 신는 외래신으로 소개되었다. 비록 처음에는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서양 문물과 접촉이 잦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수용되었다. 1920년 초반에 우리나라의 미감美感을 갖춘 고무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무신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평양의 일본인 잡화상 ‘내덕內德 상점’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이병두의 활약이 있었다. 이병두는 일본 청년에게 고무 단화가 인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본으로 건너가 거래 공장에서 제조 공정과 고무 배합 기술을 배워 우리나라 사람의 기호에 맞게 바꾸었다. 남자 고무신은 짚신을, 여자 고무신은 코신을 본떠 만든 ‘조선식 고무신’은 짚신보다 내구성이 뛰어났다. 비가 와도 신을 수 있었고, 모양도 비단신이나 갖신(가죽으로 만든 우리 고유의 신을 총칭하는 말)과 비슷했기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고무신이 인기를 끌자 고무신 공장이 급증했다. 고무신은 소재가 질기고 물이 새지 않아 실용성이 뛰어났다. 그래서 도시 빈민이나 농민이 주로 애용했다. 처음 등장한 고무신은 검은색 민무늬였다. 수요가 늘어나자 문양이나 색깔을 넣은 다양한 형태의 고무신이 등장하게 된다. 이로 인해 고무신을 구하기 어려워지기도 했다. 특히 흰색 고무신은 여성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었으며, 아이들은 고무신을 잃어 버릴까봐 머리맡에 놓고 자거나, 아까워서 길을 걸을 때도 들고 다녔다.

특징 및 의의

고무신은 1920년경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전통신과 달리 버선과 양말에 모두 신을 수 있는 신발이었다. 남성용 고무신은 신 등에 가로선이 새겨진 양식으로, 구두의 스트레이트 팁straight tip(신발 앞부분을 보강시켜 견고하게 하고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구두 앞 끝에 일직선의 이음매가 있는 디자인으로 장식된 것)과 짚신의 뒷갱기를 형상화한 복합적인 디자인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여성용 고무신은 당·운혜에 나타난 신코를 반영한 코고무신 형태로 발전하였다. 상류층 여성의 전유물이었던 당·운혜를 모방한 고무신의 등장으로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은 일종의 모방 심리로 고무신을 신었다.
조선인 중 최초로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창덕궁에 유배된 순종이었다. 순종은 흰색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고무신은 누구나 신었기 때문에 신발만으로는 황제인지 양반인지 상인인지 백정인지 신분을 알 수 없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고무신이 수용된 사례는 보기 드문 독특한 현상이었다. 고무신의 범계층적 수용 요인은 제도적,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구분된다. 회사령 철폐로 회사의 설립이 이전보다 자유로워져 고무 기업의 설립과 발전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섬세한 손길로 우리나라의 미감에 알맞은 코고무신을 탄생시켰다. 또한, 복식개량운동으로 양복·교복·제복 등에 양말을 수용하면서 상류층을 중심으로 고무신과 구두를 착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전통신 모양을 계승한 고무신을 애용하였고, 1920~1930년대 백의(白衣) 착용이 금지되면서 흰색에 투영하는 민족의식이 더욱 뚜렷해져 흰색 고무신을 착용함으로써 민족의 고유성을 대변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일인당 고무신 한 켤레를 배급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국사편찬위원회, 두산동아, 2006), 일제강점기 고무신에 관한 연구(이효선,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