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민요 > 용어

집필자 전경욱(田耕旭)

정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유랑 예인 집단.

내용

사당패는 본래 남자만으로 구성된 연희 집단으로서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男色)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암동모는 초입자인 삐리들이 감당했는데, 삐리는 연희자인 가열이 되기까지 머리를 땋아서 길게 늘어뜨리고 여장(女裝)을 했다. 사당패가 인기를 끌면서 기예를 갖춘 사당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여장한 남자가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남사당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꼭두쇠(우두머리)를 정점으로 풍물(농악버나(대접 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이)·덜미(인형극, 꼭두각시놀이) 등을 공연했다. 옛날에는 이 여섯 연희 외에 요술(환술)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과 약간의 노자만 제공받을 수 있으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현재 남사당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위의 여섯 가지 연희를 전승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재승(齋僧)들은 불교에 이름을 걸어놓을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재승들은 사원에서 쫓겨나 호적도 없고 부역이나 조세도 부담하지 않는 유랑 예인으로 전락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14년 5월 4일 기사에서는 “승인(僧人)의 사장(社長)들이 혹은 원각사(圓覺寺)의 불유(佛油)를 모연(募緣)한다 일컫고, 혹은 낙산사(落山寺)를 짓는 화주승(化主僧)이라고 일컬으며”라고 하여 사장이 절과 관련된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사당패나 남사당패가 특정 사찰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연희를 공연하고 다닌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사장(社長)은 고려시대 재승 계통 연희자들의 후예로서, 조선 후기의 사당(社堂)·거사(居士)·남사당·굿중패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능화는 “항간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사당은 사노비(寺奴婢)에서 비롯되었는데, 안성(安城)의 청룡사(靑龍寺)가 그 본거지라고 한다. 그래서 남녀 사당이 중을 대하게 되면 반드시 공경하고 예(禮)를 행하여, 마치 노비가 상전을 섬기듯 한다고 한다.”라고 하며, 사당패가 사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징 및 의의

사당패와 남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그래서 남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다. 사당패나 걸립패의 구성원에 승려나 보살이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고, 그들의 수입이 사종(四種, 아미타를 생각하여 떼어주는 공양물)이란 명목으로 사찰에 바쳐졌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시주질(施主秩)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 중 건사(建寺)거리에 절을 짓는 내용이 있는 것은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공연 목적과 일치한다.

남사당패는 가면극인 덧뵈기,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이뿐만 아니라, 줄타기·대접 돌리기·땅재주 등 요즘의 서커스에 해당하는 전통 연희를 전승하고 있는 유일한 전문 예인 집단이다.

참고문헌

사당패 연구(심우성, 동문선, 1989), 조선해어화사(이능화, 동양서원, 1927), 한국의 전통연희(전경욱, 학고재, 2004).

남사당패

남사당패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민요 > 용어

집필자 전경욱(田耕旭)

정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유랑 예인 집단.

내용

남사당패는 본래 남자만으로 구성된 연희 집단으로서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男色)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암동모는 초입자인 삐리들이 감당했는데, 삐리는 연희자인 가열이 되기까지 머리를 땋아서 길게 늘어뜨리고 여장(女裝)을 했다. 사당패가 인기를 끌면서 기예를 갖춘 사당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여장한 남자가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남사당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꼭두쇠(우두머리)를 정점으로 풍물(농악)·버나(대접 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이)·덜미(인형극, 꼭두각시놀이) 등을 공연했다. 옛날에는 이 여섯 연희 외에 요술(환술)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과 약간의 노자만 제공받을 수 있으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현재 남사당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위의 여섯 가지 연희를 전승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재승(齋僧)들은 불교에 이름을 걸어놓을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재승들은 사원에서 쫓겨나 호적도 없고 부역이나 조세도 부담하지 않는 유랑 예인으로 전락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14년 5월 4일 기사에서는 “승인(僧人)의 사장(社長)들이 혹은 원각사(圓覺寺)의 불유(佛油)를 모연(募緣)한다 일컫고, 혹은 낙산사(落山寺)를 짓는 화주승(化主僧)이라고 일컬으며”라고 하여 사장이 절과 관련된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사당패나 남사당패가 특정 사찰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연희를 공연하고 다닌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사장(社長)은 고려시대 재승 계통 연희자들의 후예로서, 조선 후기의 사당(社堂)·거사(居士)·남사당·굿중패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능화는 “항간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사당은 사노비(寺奴婢)에서 비롯되었는데, 안성(安城)의 청룡사(靑龍寺)가 그 본거지라고 한다. 그래서 남녀 사당이 중을 대하게 되면 반드시 공경하고 예(禮)를 행하여, 마치 노비가 상전을 섬기듯 한다고 한다.”라고 하며, 사당패가 사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징 및 의의

사당패와 남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그래서 남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다. 사당패나 걸립패의 구성원에 승려나 보살이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고, 그들의 수입이 사종(四種, 아미타를 생각하여 떼어주는 공양물)이란 명목으로 사찰에 바쳐졌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시주질(施主秩)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 중 건사(建寺)거리에 절을 짓는 내용이 있는 것은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공연 목적과 일치한다.

남사당패는 가면극인 덧뵈기,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이뿐만 아니라, 줄타기·대접 돌리기·땅재주 등 요즘의 서커스에 해당하는 전통 연희를 전승하고 있는 유일한 전문 예인 집단이다.

참고문헌

남사당패 연구(심우성, 동문선, 1989), 조선해어화사(이능화, 동양서원, 1927), 한국의 전통연희(전경욱, 학고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