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畵員)

한자명

畵員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윤진영(尹軫暎)

정의

조선시대 예조禮曹 산하의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되어 공적인 용도의 그림 제작에 종사한 직업화가.

내용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도화서의 화원이 20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조선 초기 도화원圖畵院 소속의 화원은 40명이었으나 이보다 20명이 축소된 것이다. 화원에게 주어진 보직은 종6품직인 선화善畵 1인, 종7품 선회善繪 1인, 종8품직 화사畵史 1인, 종9품직 회사繪史 2인으로 규정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잉사화원仍仕畵員 직을 두었다. 잉사화원은 도화서의 부족한 인력을 보완하기 위해 퇴직한 이후에도 일정 기간 종사하는 화원을 말한다.
화원들이 그린 그림은 왕이 감상하는 감계화鑑戒畵,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국가나 왕실의 행사 때 제작하는 각종 기록화, 의궤 반차도班次圖, 왕실의 주문에 의한 그림, 궁궐의 내부 공간을 장식한 그림 등이다. 주로 화려한 채색을 사용하였으며, 오랜 기간의 수련이 필요한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요구되는 그림들이었다.
도화서 화원은 취재取才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고위 관료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뒤 추천에 의해 발탁되기도 하였다. 화원들의 경제적 처우는 불안정했다. 세종대 이후로는 3개월마다 현물로 녹봉을 지급받았는데, 이마저도 계절마다 치르는 시험 성적에 따라 차등을 두어 주어졌다. 조선 후기 화원들의 지위는 기예技藝를 다루는 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는 기술직 중인신분을 유지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화원의 역할 비중이 커지면서 대우도 점차 개선되었다.
정조는 1783년(정조 7) 국왕의 직속에 둔 화원 제도인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제도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차비대령화원은 도화서 화원 가운데 임시로 차출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아 대기하는 화원을 뜻한다. 즉, 이 들은 별도의 시험을 통과한 뒤 규장각에 소속을 두었던 당대 최고수 화원들이다. 이 화원들은 도화서의 일도 수행하였으나 일반적인 도화업무보다 규장각 소관의 도서를 만들 때 선을 긋는 인찰印札 등을 전담하였다. 차비대령화원들의 운영과 직제, 주기적으로 치른 시험의 화제 등에 대해서는 『내각일력內閣日曆』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징 및 의의

민간의 그림 수요가 증가하던 19세기에는 화원들의 사적私的인 도화 활동이 빈번하였다. 이는 도화서 내부뿐 아니라 외부의 여러 정황과도 연관을 맺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도화서는 화원들의 개인적인 활동이 허용될 만큼 개방적인 분위기였다고 본다.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이 「한경사漢京詞」에서 “(광통교의 그림 가게에) 근래에 가장 많은 것은 도화서 화원의 솜씨인데”라고 한 것은 화원들이 사적으로 그림을 그려 판매하였음을 암시한 말이다. 화원들이 판매하기 위해 그린 그림은 당시의 시전市廛으로 나왔고, 여기에서 거래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민간 화가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서툰 솜씨의 민간 화가들이 베껴 그린 그림들은 화격이 낮기도 했지만 싼 값에 거래되어 서민층의 수요를 채워줄 수 있었다. 이처럼 궁중 양식에 익숙한 화원들의 그림은 민간 화가들에 의해 모방 및 재생산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은 궁중회화의 저변화를 가속시켰다.
18세기 이후의 법전에 명시된 화원과 생도生徒의 규정을 보면, 변화하는 도화서 내부의 현황을 이해할 수 있다.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에는 화원 20명에 생도 30명이 도화서의 정원이었다. 18세기 이후 증가한 도화 업무에 대비하려면 예비 화원인 생도를 추가로 양성해야 했다. 18세기 후반 『대전통편大典通編』(1785)에는 화원 10명이 보충되어 30명으로 늘었다. 19세기의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에는 화원과 생도가 각 30명으로 같았지만, 별제別提 2명을 폐지하고, 겸교수兼敎授 1명을 증원하였다. 겸교수를 둔 것은 아마도 생도의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생도의 증원과 교육의 강화는 이 시기에 공식적인 도화업무가 많아졌음을 시사한다. 19세기 후반 도화서에는 정식 도화 업무를 맡은 화원과 학습 과정에 있던 생도 등 적지 않은 인력이 그림 그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화원이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기회는 어진御眞을 그리는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선발되는 것이었다. 화원은 신분상으로 중인이지만, 어진 제작에 참여하여 어진을 완성하고 나면 그 공로로 지방관 등의 관직에 임명되어 신분과 지위의 상승을 이루었다. 어진을 그린 화원은 실력에 따라 왕의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主管畵師, 곤룡포와 의복을 그리는 동참화사同參畵師, 배경을 담당하는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나뉜다. 이 가운데 주관화사는 왕이 지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지방 출신의 화가와 함께 시재를 거쳐 선발되었다.
왕실에서는 도화서 화원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지방의 도화 업무를 지원하였다. 이를 화사군관畵師軍官이라 하였다. 이는 각 도의 감영監營·통제영統制營·수영水營 등 총 21곳에 파견되어 공식적인 도화 업무를 수행한 화원을 말한다. 이들은 2년의 임기를 채우면 다시 예조로 돌아와 근무하였다.
19세기 중엽에 펴낸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도화서 화원의 임무를 자세히 규정해 놓았다. 먼저 궁중장식화 등의 밑그림의 윤곽을 그리는 기화起畵, 빈전殯殿에 놓이는 찬궁欑宮에 들어가는 사수도四獸圖, 왕릉 조성에 들어가는 석물의 밑그림, 의궤에 들어가는 여러 도설圖說 등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어보御寶를 비롯한 인문印文의 획을 단정하게 하는 보획補劃, 왕릉의 표석이나 지석誌石에 새기기 위해 글자를 쓴 유지油紙 뒷면에 주선朱線으로 윤곽을 그리는 일, 왕릉이나 왕릉 후보지의 지형을 그리는 일 등도 담당하였다.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그림 중에는 연말연시에 그리는 세화歲畵가 주목된다. 『육전조례』의 「진상進上」조에는 차비대령화원은 각 30장, 도화서 화원은 각 20장의 세화를 그려 12월 20일에 왕실에 진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도화서에서 인간의 수명을 맡고 있다는 수성壽星과 하루의 날을 담당하는 직일신장直日神將 등을 그려서 임금께 올렸고, 또 서로 선물하는 그림을 그려오게 하고서 이를 세화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성, 선녀, 신장 등을 세화의 소재로 삼아 그 모습을 그려 대문이나 벽에 붙여 재앙을 막고 행운을 빌었다고 한다.
이러한 세화풍속은 왕이 새해에 화원들이 제작한 세화를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전통에서 비롯되었고, 일반 양반들과 서민들에게로 확산되어 세화의 풍속이 유행하였다. 세화에 대한 수요의 폭이 넓어지면 이를 목판으로 만들어 대량으로 공급하기도 했다. 즉,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세화가 민간 화가들에 의해 답습 됨으로써 민화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화원은 왕실의 위엄과 상징을 위한 그림으로부터 실용과 장식화에 이르기까지 왕실문화의 품격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19세기 광통교에 나온 민화(윤진영, 광통교 서화사, 서울역사박물관, 2016), 왕의 화가들(윤진영·황정연 외, 돌베개, 2012), 조선왕조시대의 도화서와 화원(김동원,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상(강관식, 돌베개, 2001), 화원의 형성과 직무 및 역할(홍선표, 조선화원대전, 삼성미술관리움, 2011),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윤진영·정민 외, 태학사, 2011), 한국회화사 연구(안휘준, 시공사, 2000), 한국회화사의 체계로 본 민화의 위상(정병모, 강좌미술사29, 한국미술사연구소, 2007).

화원

화원
한자명

畵員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윤진영(尹軫暎)

정의

조선시대 예조禮曹 산하의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되어 공적인 용도의 그림 제작에 종사한 직업화가.

내용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도화서의 화원이 20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조선 초기 도화원圖畵院 소속의 화원은 40명이었으나 이보다 20명이 축소된 것이다. 화원에게 주어진 보직은 종6품직인 선화善畵 1인, 종7품 선회善繪 1인, 종8품직 화사畵史 1인, 종9품직 회사繪史 2인으로 규정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잉사화원仍仕畵員 직을 두었다. 잉사화원은 도화서의 부족한 인력을 보완하기 위해 퇴직한 이후에도 일정 기간 종사하는 화원을 말한다.
화원들이 그린 그림은 왕이 감상하는 감계화鑑戒畵,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국가나 왕실의 행사 때 제작하는 각종 기록화, 의궤 반차도班次圖, 왕실의 주문에 의한 그림, 궁궐의 내부 공간을 장식한 그림 등이다. 주로 화려한 채색을 사용하였으며, 오랜 기간의 수련이 필요한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요구되는 그림들이었다.
도화서 화원은 취재取才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고위 관료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뒤 추천에 의해 발탁되기도 하였다. 화원들의 경제적 처우는 불안정했다. 세종대 이후로는 3개월마다 현물로 녹봉을 지급받았는데, 이마저도 계절마다 치르는 시험 성적에 따라 차등을 두어 주어졌다. 조선 후기 화원들의 지위는 기예技藝를 다루는 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는 기술직 중인신분을 유지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화원의 역할 비중이 커지면서 대우도 점차 개선되었다.
정조는 1783년(정조 7) 국왕의 직속에 둔 화원 제도인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제도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차비대령화원은 도화서 화원 가운데 임시로 차출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아 대기하는 화원을 뜻한다. 즉, 이 들은 별도의 시험을 통과한 뒤 규장각에 소속을 두었던 당대 최고수 화원들이다. 이 화원들은 도화서의 일도 수행하였으나 일반적인 도화업무보다 규장각 소관의 도서를 만들 때 선을 긋는 인찰印札 등을 전담하였다. 차비대령화원들의 운영과 직제, 주기적으로 치른 시험의 화제 등에 대해서는 『내각일력內閣日曆』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징 및 의의

민간의 그림 수요가 증가하던 19세기에는 화원들의 사적私的인 도화 활동이 빈번하였다. 이는 도화서 내부뿐 아니라 외부의 여러 정황과도 연관을 맺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도화서는 화원들의 개인적인 활동이 허용될 만큼 개방적인 분위기였다고 본다.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이 「한경사漢京詞」에서 “(광통교의 그림 가게에) 근래에 가장 많은 것은 도화서 화원의 솜씨인데”라고 한 것은 화원들이 사적으로 그림을 그려 판매하였음을 암시한 말이다. 화원들이 판매하기 위해 그린 그림은 당시의 시전市廛으로 나왔고, 여기에서 거래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민간 화가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서툰 솜씨의 민간 화가들이 베껴 그린 그림들은 화격이 낮기도 했지만 싼 값에 거래되어 서민층의 수요를 채워줄 수 있었다. 이처럼 궁중 양식에 익숙한 화원들의 그림은 민간 화가들에 의해 모방 및 재생산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은 궁중회화의 저변화를 가속시켰다.
18세기 이후의 법전에 명시된 화원과 생도生徒의 규정을 보면, 변화하는 도화서 내부의 현황을 이해할 수 있다.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에는 화원 20명에 생도 30명이 도화서의 정원이었다. 18세기 이후 증가한 도화 업무에 대비하려면 예비 화원인 생도를 추가로 양성해야 했다. 18세기 후반 『대전통편大典通編』(1785)에는 화원 10명이 보충되어 30명으로 늘었다. 19세기의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에는 화원과 생도가 각 30명으로 같았지만, 별제別提 2명을 폐지하고, 겸교수兼敎授 1명을 증원하였다. 겸교수를 둔 것은 아마도 생도의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생도의 증원과 교육의 강화는 이 시기에 공식적인 도화업무가 많아졌음을 시사한다. 19세기 후반 도화서에는 정식 도화 업무를 맡은 화원과 학습 과정에 있던 생도 등 적지 않은 인력이 그림 그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화원이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기회는 어진御眞을 그리는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선발되는 것이었다. 화원은 신분상으로 중인이지만, 어진 제작에 참여하여 어진을 완성하고 나면 그 공로로 지방관 등의 관직에 임명되어 신분과 지위의 상승을 이루었다. 어진을 그린 화원은 실력에 따라 왕의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主管畵師, 곤룡포와 의복을 그리는 동참화사同參畵師, 배경을 담당하는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나뉜다. 이 가운데 주관화사는 왕이 지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지방 출신의 화가와 함께 시재를 거쳐 선발되었다.
왕실에서는 도화서 화원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지방의 도화 업무를 지원하였다. 이를 화사군관畵師軍官이라 하였다. 이는 각 도의 감영監營·통제영統制營·수영水營 등 총 21곳에 파견되어 공식적인 도화 업무를 수행한 화원을 말한다. 이들은 2년의 임기를 채우면 다시 예조로 돌아와 근무하였다.
19세기 중엽에 펴낸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도화서 화원의 임무를 자세히 규정해 놓았다. 먼저 궁중장식화 등의 밑그림의 윤곽을 그리는 기화起畵, 빈전殯殿에 놓이는 찬궁欑宮에 들어가는 사수도四獸圖, 왕릉 조성에 들어가는 석물의 밑그림, 의궤에 들어가는 여러 도설圖說 등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어보御寶를 비롯한 인문印文의 획을 단정하게 하는 보획補劃, 왕릉의 표석이나 지석誌石에 새기기 위해 글자를 쓴 유지油紙 뒷면에 주선朱線으로 윤곽을 그리는 일, 왕릉이나 왕릉 후보지의 지형을 그리는 일 등도 담당하였다.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그림 중에는 연말연시에 그리는 세화歲畵가 주목된다. 『육전조례』의 「진상進上」조에는 차비대령화원은 각 30장, 도화서 화원은 각 20장의 세화를 그려 12월 20일에 왕실에 진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도화서에서 인간의 수명을 맡고 있다는 수성壽星과 하루의 날을 담당하는 직일신장直日神將 등을 그려서 임금께 올렸고, 또 서로 선물하는 그림을 그려오게 하고서 이를 세화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성, 선녀, 신장 등을 세화의 소재로 삼아 그 모습을 그려 대문이나 벽에 붙여 재앙을 막고 행운을 빌었다고 한다.
이러한 세화풍속은 왕이 새해에 화원들이 제작한 세화를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전통에서 비롯되었고, 일반 양반들과 서민들에게로 확산되어 세화의 풍속이 유행하였다. 세화에 대한 수요의 폭이 넓어지면 이를 목판으로 만들어 대량으로 공급하기도 했다. 즉,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세화가 민간 화가들에 의해 답습 됨으로써 민화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화원은 왕실의 위엄과 상징을 위한 그림으로부터 실용과 장식화에 이르기까지 왕실문화의 품격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19세기 광통교에 나온 민화(윤진영, 광통교 서화사, 서울역사박물관, 2016), 왕의 화가들(윤진영·황정연 외, 돌베개, 2012), 조선왕조시대의 도화서와 화원(김동원,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상(강관식, 돌베개, 2001), 화원의 형성과 직무 및 역할(홍선표, 조선화원대전, 삼성미술관리움, 2011),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윤진영·정민 외, 태학사, 2011), 한국회화사 연구(안휘준, 시공사, 2000), 한국회화사의 체계로 본 민화의 위상(정병모, 강좌미술사29, 한국미술사연구소,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