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화(風俗畵)

한자명

風俗畵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윤진영(尹軫暎)

정의

다양한 인물상으로 구성된 과거의 생활 습속이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

역사

넓은 의미에서 풍속화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생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범주로 한다. 풍속화는 특정 시기에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그린 그 시대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풍속화의 기원을 알려 주는 청동기시대의 암각화巖刻畵에는 농경과 수렵 등의 장면이 간략히 새겨져 있다. 예컨대 <농경문청동기>에는 농부가 밭을 갈고 항아리에 곡식을 담는 장면이 들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에 근거한 풍속화적인 요소가 잘 반영되어 있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현실을 그린 생활상의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다. 357년에 조성된 안악3호분安岳3號墳에 나타난 묘주墓主 부부와 음식을 장만하는 주방, 우물의 물을 긷는 장면 등은 당시의 생활상을 진솔하게 전해 준다. 무용총, 쌍영총 등에 묘사된 인물의 복식이나 사냥 장면, 춤추는 동작 등도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시각화한 풍속화로서 손색이 없다. 특히 고구려인들의 점무늬 의상, 주름치마, 모자 등에는 당시 고구려인이 착용한 복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에는 남아 있는 그림이 적은 편이지만, 공민왕의 <호렵도>와 이제현李齊賢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에는 호복胡服 복장을 하고 사냥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 시대의 사냥 장면과 복식의 일면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또한 최당崔讜이 조직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 장면을 그린 그림도 기록으로 전한다. 고려불화나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에도 종교적인 이야기의 설정 속에 담긴일반적인 풍속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풍속화는 특정 시기에 국한하지 않고 전시기에 걸쳐 살필 수 있다. 상류층으로부터 서민층에 이르는 각 계층별 인물들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체험하는 공식적이거나 사적인 일상은 그 자체로 풍속화의 주요 모티프이다. 왕실에서 제작한 궁중행사도나 기록화는 궁중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행사나 의례의 장면을 그린 것이므로 이 또한 풍속화적 요소가 강한 그림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궁중풍속화는 왕을 비롯한 왕실 인물, 관료 및 행사 참여자들의 구성과 복식, 의례의 절차에 따른 장면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각자료이다.
또한 기록을 목적으로 그린 관료들의 계회도,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감계화, 일생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그린 평생도는 물론, 이름 없이 살다간 서민 촌부와 여인들의 모습까지도 모두 풍속화에 포함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풍속화는 우리나라 생활풍속의 역사를 가장 자세하고 입체적으로 기록한 사료이자 기록물이다. 풍속화를 그린 화가들은 일부 사대부화가와 전문 화원畵員을 포함한 직업화가로 나뉜다. 다양한 인물을 정확히 묘사하고 배경까지 그려야 하는 풍속화는 오랜 숙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완성도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다.

내용

조선시대의 풍속화는 그림 속에 그려진 사람들의 신분을 기준으로 관인官人·사인士人·서민庶民의 풍속화로 나뉜다.
관인풍속화는 관직에 있던 관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기록화의 일종인 계회도로 그려진 사례가 많다. 계회도는 같은 관청에 근무하는 관원들이나 과거 합격 동기생 등의 특별한 만남이나 기념적인 일이 있을 때 제작한 그림이다. 계회도를 포함한 기록화는 그것을 소유한 개인에게는 관직의 이력을 상징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전반기에는 계회도를 포함한 특별 행사 장면을 담은 여러 종류의 기록화가 그려졌다. 그림이 전해 주지 못한 모임의 취지 등에 관해서는 서문序文과 발문跋文 등의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은 참석자들에 대한 정보와 그림의 제작 배경을 알 수 있어 명확한 고증의 근거가 된다.
사인풍속화는 조선 초기와 중기에 그려진 예가 많다. 관료가 아닌 선비들의 일상이나 기념적인 일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그린 사례들이다. 즉, 만남의 장면, 특별한 기념일이나 행사일, 일생의 가장 소중한 장면들을 그린 평생도, 과거시험 장면, 그리고 조선 후기의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의 모습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들이 포함된다.
서민풍속화는 조선 후기에 유행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을 말한다. 서민이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전반기에는 볼 수 없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18세기 이후의 정치적인 안정, 경제적인 발전, 자아의식의 팽배, 실학實學에 대한 관심의 증대, 서민문학 등 서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진전을 보게 된 그림이다. 이 시기에는 기량 있는 화가들의 등장으로 현장감 있고 역동적인 서민의 일상을 표현한 풍속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국왕은 백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를 보며 민생民生을 살폈고, 서민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왕이 백성들의 실생활을 알기 위해 제작한 그림은 풍속화적 요소가 강하지만 감계화에 포함되기도 한다. 감계화는 왕이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늘 가까이 두고 바라보았던 그림인데, 백성들의 생활풍속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예컨대 사농공상의 연중행사를 그린 사민도四民圖, 농사짓는 장면을 그린 가색도稼穡圖, 농경도의 일종인 관가도觀稼圖, 경작과 관련된 농포도農圃圖와 누에 치는 장면을 그린 잠도蠶圖 등을 들 수 있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기록으로만 전하지만, 풍속화의 성격이 뚜렷한 그림들이다. 지방관이 백성들의 절박한 생활상을 그려 왕에게 올린 안민도安民圖, 흉년에 백성들이 겪는 참혹한 실상을 그린 기민도飢民圖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 그림들은 백성의 생활 현실을 그대로 전해주는 생생한 시각자료이자 왕에게는 민생을 파악하는 국정 자료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서민과 양반이 등장하는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그것이 가능한 시대적인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서민이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한다는 데 조선 후기 풍속화의 의미가 있다. 역사 속에 존재감 없이 살았던 서민들이 화폭 위에 주역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중인·상민·천민의 네 계층으로 신분이 분화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풍속화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양반도 있지만, 주로 상민층이 많았다. 또한 천민을 제외한 전체 사회구성원은 사士·농農·공工·상商의 사민四民으로 나뉘는데, 여기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사’를 제외한 농·공·상이 바로 서민에 해당하는 계층이자 서민풍속화의 주인공이다.
서민이 등장하는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17세기 말에 활동한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18세기의 조영석趙榮祏, 1686~1761과 같은 선비화가들이 그 서막을 열었다. 그들은 의외로 전문화가가 아니라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지식인이자, 새로운 현실을 응시하는 사대부들이었다.
윤두서는 새로운 시대와 문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서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지닌 실학자였다.대표작인 <짚신 삼기>에는 짚신을 삼는 평민이 등장한다. 이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일하는 서민이 당당하게 풍속화의 주인공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윤두서의 일생을 기록한 행장行狀에 “그림을 그릴 때 오직 물체의 형상을 그리는 것을 주로 했다.”라고 소개된 것은 그가 얼마나 객관적인 묘사에 치중했는가를 전해 준다. 이외에도 윤두서가 그린 것으로는 <석공>, <나물 캐는 여인>등의 그림이 있다.
조영석 역시 뛰어난 관찰력과 소묘력을 지닌 사대 부화가로 서민들의 생활현장을 주제로 한 스케치풍의 그림들을 남겼다. 대표작인 <목기 깎기>는 두 인물이 공구를 사이에 두고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이는 풍속화 15점을 묶은 화첩인 『사제첩麝臍帖』에 실려 있다. 이 그림들은 주로 현장에서 대상 인물을 직접 마주하여 유탄柳炭으로 스케치한 뒤 수묵과 담채로 그린 그림들이다. 조영석의 그림은 “사물을 직접 마주하여 그 참모습을 그려야만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고 자신이 말한 사실주의적 사고와 잘 부합된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존재와 그들이 살아가는 생활문화의 재발견에 기여했다. 이는 윤두서와 조영석처럼 고증적인 학문태도를 지닌 사대부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한편으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층에 대한 애정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그림이다. 윤두서와 조영석이 선도한 서민 풍속화는 다음 세대의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 등의 화원화가에게로 전승되어 다시 한 번 절정의 시기를 꽃피울 수 있었다.
도화서圖畵署 화원을 지낸 김홍도는 탁월한 개성과 조형감각으로 서민들의 진솔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특히 해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장면 묘사로 풍속화의한 전형을 이루었다. 대표작인 <점심>은 농사일을 하던 여가에 소박한 점심을 나누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김홍도의 시선이 화면 속의 공간을 장악하면서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250년 전 초등교육의 현장을 그린 <서당>에는 아이들의 해맑고 천진난만한 표정이 잘 살아나 있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해학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는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에 25점이 실려 있다.
김득신은 김홍도의 화풍을 계승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그림세계를 개척한 화가이다. 현실감 있는 배경과 상황 묘사, 능숙한 담채 사용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궁중행사 등 국가적인 주요 화역에 화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정조로부터 김홍도와 더불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작인 <짚신 삼기>는 현실감 있는 배경의 설정과 생동감 있는 인물묘사로 자신의 특장을 발휘하였다.
김홍도와 김득신은 평민들의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노동의 소중함을 그림의 모티프로 삼았다면, 신윤복은 남녀 간의 연정, 양반과 기녀, 도시 뒤편에서 볼 수 있는 유흥의 풍정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특히 여성들을 잘 그렸고 많이 그렸다. 대표작인 <단오풍정>은 한적한 산간계곡에 놀러 나온 기녀들의 휴식 장면을 그린 것이다. 남성 중심의 유교사회에 가려진 여성들의 존재감을 파격적인 장면 설정과 세련된 필묵으로 그려 내었다. 배경의 묘사에는 신윤복 특유의 감성적인 표현으로 조선 후기 풍속화의 새로운 면모를 성취하였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서로 다른 사회의 단면을 보았고, 이를 수준 높은 화격畵格으로 승화시켰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 담긴 서민들의 군상群像에는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생활상도 포함하고 있어 다양한 삶의 단면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삶의 현장을 묘사하는 사실성과 현장성, 그리고 그림 속의 풍물이 보여주는 시대성 등을 뛰어난 조형예술로 성취해 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조선 말기와 근대기에 활동한 김준근金俊根은 원산, 부산 제물포 등 개항장에서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풍속화를 그려 판매하였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서 볼 수 없던 형벌, 제사, 장례, 굿 등을 소재를 다룬 것이 김준근 그림의 특징이다. 김준근의 풍속화는 조선 풍속화의 감상자와 향유층을 국외로 확대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조선 후기의 불화인 감로탱화甘露幀畵의 하단부에는 당시의 풍속을 보여 주는 장면들이 들어 있다. 감로탱화는 종교미술에 속하지만, 여기에 묘사된 인간의 모습에는 행복과 욕망에 대한 추구와 당대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어 풍속화의 범주에 둘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속화俗畵’라고도 불렸다. 다분히 양반의 입장에서 붙인 “저속한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풍속화와 속화라는 말을 썼다. 풍속화는 사대부화가 조영석을 소개하며 인물과 풍속화를 잘 그렸다고 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여염집의 벽에 붙이는 그림을 속화라고 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속화에 해당하는 그림을 남극노인도南極老人圖와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라고 한 부분이다. 이는 19세기 중엽에 사용된 속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18세기 말 강이천姜彛天, 1768~1801은 한양 광통교 일대의 그림 시장을 묘사하면서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속화가 인기를 끌었으며, 그림이 살아 있듯이 묘하다고 했다. 화원들의 솜씨가 돋보이는 그림을 광통교에 걸어 두거나 펼쳐 두고서 판매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언급한 ‘속화俗畵’는 일반적인 ‘풍속화’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복을 구하는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그림으로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풍속화는 감상자가 그 시대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이다. 문자가 아닌 조형으로 기록한 풍속화는 어느 시대든 역사의 현장과 소박한 삶의 공간까지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한국문화사의 소중한 기록유산이다.

참고문헌

조선시대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2002), 조선시대 회화사론(홍선표, 문예출판사, 1999), 풍속화1·2(이태호, 대원사, 1995·1996), 한국의 미19-풍속화(안휘준, 중앙일보사, 1985), 한국의 풍속화(정병모, 한길아트, 2000).

풍속화

풍속화
한자명

風俗畵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윤진영(尹軫暎)

정의

다양한 인물상으로 구성된 과거의 생활 습속이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

역사

넓은 의미에서 풍속화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생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범주로 한다. 풍속화는 특정 시기에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그린 그 시대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풍속화의 기원을 알려 주는 청동기시대의 암각화巖刻畵에는 농경과 수렵 등의 장면이 간략히 새겨져 있다. 예컨대 <농경문청동기>에는 농부가 밭을 갈고 항아리에 곡식을 담는 장면이 들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에 근거한 풍속화적인 요소가 잘 반영되어 있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현실을 그린 생활상의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다. 357년에 조성된 안악3호분安岳3號墳에 나타난 묘주墓主 부부와 음식을 장만하는 주방, 우물의 물을 긷는 장면 등은 당시의 생활상을 진솔하게 전해 준다. 무용총, 쌍영총 등에 묘사된 인물의 복식이나 사냥 장면, 춤추는 동작 등도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시각화한 풍속화로서 손색이 없다. 특히 고구려인들의 점무늬 의상, 주름치마, 모자 등에는 당시 고구려인이 착용한 복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에는 남아 있는 그림이 적은 편이지만, 공민왕의 <호렵도>와 이제현李齊賢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에는 호복胡服 복장을 하고 사냥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 시대의 사냥 장면과 복식의 일면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또한 최당崔讜이 조직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 장면을 그린 그림도 기록으로 전한다. 고려불화나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에도 종교적인 이야기의 설정 속에 담긴일반적인 풍속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풍속화는 특정 시기에 국한하지 않고 전시기에 걸쳐 살필 수 있다. 상류층으로부터 서민층에 이르는 각 계층별 인물들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체험하는 공식적이거나 사적인 일상은 그 자체로 풍속화의 주요 모티프이다. 왕실에서 제작한 궁중행사도나 기록화는 궁중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행사나 의례의 장면을 그린 것이므로 이 또한 풍속화적 요소가 강한 그림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궁중풍속화는 왕을 비롯한 왕실 인물, 관료 및 행사 참여자들의 구성과 복식, 의례의 절차에 따른 장면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각자료이다.
또한 기록을 목적으로 그린 관료들의 계회도,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감계화, 일생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그린 평생도는 물론, 이름 없이 살다간 서민 촌부와 여인들의 모습까지도 모두 풍속화에 포함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풍속화는 우리나라 생활풍속의 역사를 가장 자세하고 입체적으로 기록한 사료이자 기록물이다. 풍속화를 그린 화가들은 일부 사대부화가와 전문 화원畵員을 포함한 직업화가로 나뉜다. 다양한 인물을 정확히 묘사하고 배경까지 그려야 하는 풍속화는 오랜 숙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완성도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다.

내용

조선시대의 풍속화는 그림 속에 그려진 사람들의 신분을 기준으로 관인官人·사인士人·서민庶民의 풍속화로 나뉜다.
관인풍속화는 관직에 있던 관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기록화의 일종인 계회도로 그려진 사례가 많다. 계회도는 같은 관청에 근무하는 관원들이나 과거 합격 동기생 등의 특별한 만남이나 기념적인 일이 있을 때 제작한 그림이다. 계회도를 포함한 기록화는 그것을 소유한 개인에게는 관직의 이력을 상징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전반기에는 계회도를 포함한 특별 행사 장면을 담은 여러 종류의 기록화가 그려졌다. 그림이 전해 주지 못한 모임의 취지 등에 관해서는 서문序文과 발문跋文 등의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은 참석자들에 대한 정보와 그림의 제작 배경을 알 수 있어 명확한 고증의 근거가 된다.
사인풍속화는 조선 초기와 중기에 그려진 예가 많다. 관료가 아닌 선비들의 일상이나 기념적인 일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그린 사례들이다. 즉, 만남의 장면, 특별한 기념일이나 행사일, 일생의 가장 소중한 장면들을 그린 평생도, 과거시험 장면, 그리고 조선 후기의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의 모습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들이 포함된다.
서민풍속화는 조선 후기에 유행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을 말한다. 서민이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전반기에는 볼 수 없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18세기 이후의 정치적인 안정, 경제적인 발전, 자아의식의 팽배, 실학實學에 대한 관심의 증대, 서민문학 등 서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진전을 보게 된 그림이다. 이 시기에는 기량 있는 화가들의 등장으로 현장감 있고 역동적인 서민의 일상을 표현한 풍속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국왕은 백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를 보며 민생民生을 살폈고, 서민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왕이 백성들의 실생활을 알기 위해 제작한 그림은 풍속화적 요소가 강하지만 감계화에 포함되기도 한다. 감계화는 왕이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늘 가까이 두고 바라보았던 그림인데, 백성들의 생활풍속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예컨대 사농공상의 연중행사를 그린 사민도四民圖, 농사짓는 장면을 그린 가색도稼穡圖, 농경도의 일종인 관가도觀稼圖, 경작과 관련된 농포도農圃圖와 누에 치는 장면을 그린 잠도蠶圖 등을 들 수 있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기록으로만 전하지만, 풍속화의 성격이 뚜렷한 그림들이다. 지방관이 백성들의 절박한 생활상을 그려 왕에게 올린 안민도安民圖, 흉년에 백성들이 겪는 참혹한 실상을 그린 기민도飢民圖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 그림들은 백성의 생활 현실을 그대로 전해주는 생생한 시각자료이자 왕에게는 민생을 파악하는 국정 자료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서민과 양반이 등장하는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그것이 가능한 시대적인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서민이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한다는 데 조선 후기 풍속화의 의미가 있다. 역사 속에 존재감 없이 살았던 서민들이 화폭 위에 주역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중인·상민·천민의 네 계층으로 신분이 분화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풍속화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양반도 있지만, 주로 상민층이 많았다. 또한 천민을 제외한 전체 사회구성원은 사士·농農·공工·상商의 사민四民으로 나뉘는데, 여기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사’를 제외한 농·공·상이 바로 서민에 해당하는 계층이자 서민풍속화의 주인공이다.
서민이 등장하는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17세기 말에 활동한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18세기의 조영석趙榮祏, 1686~1761과 같은 선비화가들이 그 서막을 열었다. 그들은 의외로 전문화가가 아니라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지식인이자, 새로운 현실을 응시하는 사대부들이었다.
윤두서는 새로운 시대와 문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서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지닌 실학자였다.대표작인 <짚신 삼기>에는 짚신을 삼는 평민이 등장한다. 이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일하는 서민이 당당하게 풍속화의 주인공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윤두서의 일생을 기록한 행장行狀에 “그림을 그릴 때 오직 물체의 형상을 그리는 것을 주로 했다.”라고 소개된 것은 그가 얼마나 객관적인 묘사에 치중했는가를 전해 준다. 이외에도 윤두서가 그린 것으로는 <석공>, <나물 캐는 여인>등의 그림이 있다.
조영석 역시 뛰어난 관찰력과 소묘력을 지닌 사대 부화가로 서민들의 생활현장을 주제로 한 스케치풍의 그림들을 남겼다. 대표작인 <목기 깎기>는 두 인물이 공구를 사이에 두고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이는 풍속화 15점을 묶은 화첩인 『사제첩麝臍帖』에 실려 있다. 이 그림들은 주로 현장에서 대상 인물을 직접 마주하여 유탄柳炭으로 스케치한 뒤 수묵과 담채로 그린 그림들이다. 조영석의 그림은 “사물을 직접 마주하여 그 참모습을 그려야만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고 자신이 말한 사실주의적 사고와 잘 부합된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존재와 그들이 살아가는 생활문화의 재발견에 기여했다. 이는 윤두서와 조영석처럼 고증적인 학문태도를 지닌 사대부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한편으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층에 대한 애정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그림이다. 윤두서와 조영석이 선도한 서민 풍속화는 다음 세대의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 등의 화원화가에게로 전승되어 다시 한 번 절정의 시기를 꽃피울 수 있었다.
도화서圖畵署 화원을 지낸 김홍도는 탁월한 개성과 조형감각으로 서민들의 진솔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특히 해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장면 묘사로 풍속화의한 전형을 이루었다. 대표작인 <점심>은 농사일을 하던 여가에 소박한 점심을 나누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김홍도의 시선이 화면 속의 공간을 장악하면서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250년 전 초등교육의 현장을 그린 <서당>에는 아이들의 해맑고 천진난만한 표정이 잘 살아나 있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해학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는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에 25점이 실려 있다.
김득신은 김홍도의 화풍을 계승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그림세계를 개척한 화가이다. 현실감 있는 배경과 상황 묘사, 능숙한 담채 사용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궁중행사 등 국가적인 주요 화역에 화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정조로부터 김홍도와 더불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작인 <짚신 삼기>는 현실감 있는 배경의 설정과 생동감 있는 인물묘사로 자신의 특장을 발휘하였다.
김홍도와 김득신은 평민들의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노동의 소중함을 그림의 모티프로 삼았다면, 신윤복은 남녀 간의 연정, 양반과 기녀, 도시 뒤편에서 볼 수 있는 유흥의 풍정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특히 여성들을 잘 그렸고 많이 그렸다. 대표작인 <단오풍정>은 한적한 산간계곡에 놀러 나온 기녀들의 휴식 장면을 그린 것이다. 남성 중심의 유교사회에 가려진 여성들의 존재감을 파격적인 장면 설정과 세련된 필묵으로 그려 내었다. 배경의 묘사에는 신윤복 특유의 감성적인 표현으로 조선 후기 풍속화의 새로운 면모를 성취하였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서로 다른 사회의 단면을 보았고, 이를 수준 높은 화격畵格으로 승화시켰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 담긴 서민들의 군상群像에는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생활상도 포함하고 있어 다양한 삶의 단면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삶의 현장을 묘사하는 사실성과 현장성, 그리고 그림 속의 풍물이 보여주는 시대성 등을 뛰어난 조형예술로 성취해 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조선 말기와 근대기에 활동한 김준근金俊根은 원산, 부산 제물포 등 개항장에서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풍속화를 그려 판매하였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서 볼 수 없던 형벌, 제사, 장례, 굿 등을 소재를 다룬 것이 김준근 그림의 특징이다. 김준근의 풍속화는 조선 풍속화의 감상자와 향유층을 국외로 확대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조선 후기의 불화인 감로탱화甘露幀畵의 하단부에는 당시의 풍속을 보여 주는 장면들이 들어 있다. 감로탱화는 종교미술에 속하지만, 여기에 묘사된 인간의 모습에는 행복과 욕망에 대한 추구와 당대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어 풍속화의 범주에 둘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속화俗畵’라고도 불렸다. 다분히 양반의 입장에서 붙인 “저속한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풍속화와 속화라는 말을 썼다. 풍속화는 사대부화가 조영석을 소개하며 인물과 풍속화를 잘 그렸다고 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여염집의 벽에 붙이는 그림을 속화라고 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속화에 해당하는 그림을 남극노인도南極老人圖와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라고 한 부분이다. 이는 19세기 중엽에 사용된 속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18세기 말 강이천姜彛天, 1768~1801은 한양 광통교 일대의 그림 시장을 묘사하면서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속화가 인기를 끌었으며, 그림이 살아 있듯이 묘하다고 했다. 화원들의 솜씨가 돋보이는 그림을 광통교에 걸어 두거나 펼쳐 두고서 판매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언급한 ‘속화俗畵’는 일반적인 ‘풍속화’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복을 구하는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그림으로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풍속화는 감상자가 그 시대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이다. 문자가 아닌 조형으로 기록한 풍속화는 어느 시대든 역사의 현장과 소박한 삶의 공간까지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한국문화사의 소중한 기록유산이다.

참고문헌

조선시대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2002), 조선시대 회화사론(홍선표, 문예출판사, 1999), 풍속화1·2(이태호, 대원사, 1995·1996), 한국의 미19-풍속화(안휘준, 중앙일보사, 1985), 한국의 풍속화(정병모, 한길아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