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도(百子圖)

한자명

百子圖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김선정(金善晶)

정의

백 명 내외의 남자아이들의 놀이 모습을 그린 그림.

개관

백자도는 그림 속 백 명의 아이들만큼 많은 자손을 낳고 또 그 아이들이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라길 바라는 기원을 담은 길상화吉祥畵이다. 중국에서 남자아이의 형상은 전통적으로 다산多産을 상징하여 회화, 자수, 공예 등 여러 방면에서 일찍이 등장하였다. 아이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당대唐代부터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다산을 상징하는 욕조나 연꽃 등과 함께 그려져 길상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백자도의 기원은 중국 송대宋代까지 올라간다. 한자문화권에서 ‘백百’은 문자 그대로의 숫자라기보다는 ‘가득해서 족하다’는 의미로 길상의 최대치를 뜻한다. 중국에서 백자도라는 화제畵題는 많은 수의 아들, 즉 복의 최대치를 뜻하는 ‘백자百子’의 개념과 아이들의 놀이 장면을 그린 ‘영희도嬰戱圖’의 형식이 결합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남송대 백자도는 화려하고 정교한 궁정화풍으로 그려졌고 명청대明淸代에는 연화年畵로 제작되어 민간에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백자도는 조선 후기 이후 화려하고 장식적인 채색의 병풍 형태로 많이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 이전의 백자도는 전해지지 않으나 기록을 통해 조선 초기부터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장 이른 기록으로는 1478년 도화서 화원에게 백자도와 유사한 <궁중유희도宮中遊戱圖>를 그리게 하였다는 문헌이 있다. 그리고 1819년 효명세자孝明世子 가례嘉禮, 1882년 순종의 가례에 백자동百子童 병풍을 제작하였다는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도화서圖畵署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들의 녹취재祿取才 화과畵科의 시험문제로 백자도 화제畵題를 출제하였다는 『내각일력內閣日曆』의 기록에 의해 조선 후기 궁중에서 의례와 장엄용으로 제작된 화목畵目임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경도잡지京都雜誌』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한양가漢陽歌>, <성조가成造歌> 등의 18~19세기 문헌 백자도 병풍이 광통교 아래 병풍 가게에서 판매되었고, 일반 가정의 혼례병풍 용도나 부녀자 또는 아이들의 방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백자도 병풍은 점차 수요층이 확대되면서 민화풍의 자유로운 양상으로도 제작 유통되었다.

내용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 백자도는 축軸, 선면扇面, 횡권橫卷 등 다양한 화폭 형식을 보이는 중국의 백자도와 달리 대부분 6·8·10폭의 병풍 형태로 제작되었다. 각 장면마다 6~18명의 남자아이들이 나무, 태호석, 꽃, 전각 등이 있는 정원에서 갖가지 놀이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병풍 전체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100명 안팎이 된다. 아이들의 몇 가지 놀이 장면으로 구성 된 백자도 병풍은 효종孝宗에게 헌상된 17세기 후반 중국화가 맹영광孟永光의 <백동도百童圖>에 대해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남긴 제화시題畵詩를 통해 연원을 추측 할 수 있다.
백자도의 놀이 장면은 대략 8가지로 유형화되어 있다. 각 장면은 계절감과 화면 구도에 따라 대략 배열 순서를 추정할 수 있다. 대개의 8폭 백자도 병풍은 오른쪽부터 제1폭 장군 놀이, 제2폭 닭싸움, 제3폭 연꽃 따기·풀싸움, 제4폭 낮잠·새 놀이, 제5폭 나비 잡기, 제6폭관리행차, 제7폭 원숭이 놀이, 제8폭 매화 따기 등 춘하추동의 순으로 구성되었다. 이 8가지 놀이 장면이 백자도 병풍 8폭의 기본 구성이다. 6폭이면 이중 여섯 장면만으로 구성하며 10폭의 경우 유사한 구도의 다른 놀이 장면이 추가되는 등 약간의 변형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백자도 병풍들은 그려진 놀이의 내용은 물론 쌍계형雙紒形 머리 모양과 중국식 복식을 한 남자아이들의 모습과 배치, 세부 화면 구성요소와 구도가 공통되어 정형화된 그림본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자도는 그림 속 여러 구성 요소들을 통해 다자다남多子多男, 입신출세立身出世, 부귀, 장수와 같은 현세기복現世祈福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백자도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은 다자다남이다. 백 명의 아이들 즉 ‘백자’ 자체가 수많은 자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씨가 많은 연꽃이 만발한 연못 장면도 다산을 상징한다. 나비 잡기 장면에서 나비는 부부간의 금슬과 80세가 되도록 장수한다는 질수耋壽를 뜻하며, 장수를 의미하는 바위 ‘수壽’와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이 함께 그려져 ‘부귀수富貴壽’, 즉 부귀와 장수를 뜻하기도 한다. 백자도에서 강하게 부각되는 것은 입신출세에 대한 소망이다. 무관복을 입고 ‘영令’ 기를 든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의 장군놀이, 죽마와 수레를 타고 행렬하는 관리 행차 놀이는 어른들의 모습을 흉내 내며 노는 아이들을 통해 관직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또한 5명의 아이가 매화나무에 매달린 장면은 ‘오자등과五子登科’, 즉 5명의 아들의 과거 급제를 의미한다. 닭싸움 장면의 머리 위에 볏을 세운 닭의 모습은 관冠을 쓴 것과 비슷하여 입신출세를 상징하며, 원숭이[猴] 놀이는 제후[侯]와 동음동성으로 제후에 봉직하고싶은 바람을 담고 있다.

특징 및 의의

병풍 형태의 백자도는 화면의 구성 방식에 따라 각폭各幅 형식과 연폭連幅 형식, 그리고 전각殿閣을 배경으로 한 것과 전각이 그려지지 않은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각이 그려진 백자도는 화려한 전각이 그려져 화면 구성이 화려하고 정교하여 전각이 없는 형식보다 그림 바탕 재질, 안료 사용, 화면 구성 면에서 좀 더 정성과 많은 제작비를 들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연폭식의 백자도는 각 폭 형식보다 장대한 구도와 다채로운 세부 구성을 갖추어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요지연도瑤池宴圖> 등과 같은 궁중 장엄·의례용 병풍화와 견줄 만하다.
창덕궁 소장품으로 전해 오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백자도>는 병풍 6면 전체를 하나의 화면으로 구성한 연폭식 백자도로서, 궁중에서 제작된 백자도의 귀중한 예이다.
연못 장면, 관리 행차 놀이, 원숭이 놀이, 매화 따기 등 기본적인 놀이의 도상은 각폭 형식의 백자도와 일치한다. 하지만 연못 장면에서 연꽃 따기 외에 고기 잡는 모습이 함께 묘사되어 있고, 관리 행차 장면이 병풍 두 폭에 장대하게 배치되어 각폭식 백자도와 화면 비례와 구성에서 차이가 있다. 아이들 의복 문양과 건물 기와장식에 사용된 금색 안료, 건물 기왓골과 기둥의 음영표현, 전경 바위의 채색, 상서로운 구름의 형태 등 진한 채색과 정교하고 화려한 묘사의 궁중 장식화풍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흰 사슴이나 주렴을 친 사모지붕의 전각, 원추형의 괴석 등 모티프는 19세기 궁중에서 제작되었던 <곽분양행락도>, <요지연도> 등의 궁중 장엄·의례용 병풍그림들과 공통된다. 그림에 표현된 음영법과 채색 안료를 제작 연대가 있는 기록화 등과 비교할 때 현존하는 백자도 병풍은 대부분 19세기 이후 제작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19세기 왕세자 가례와 녹취재 화과로 백자도가 제작되었다는 기록과도 부합한다. 왕실을 비롯한 상층에서 향유되던 의례·장엄용 그림인 백자도가 민간으로 수요가 확대되면서 나타난 궁중 회화와 민간회화 간의 구별과 관계의 재설정은 민화의 개념에 대한 재검토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백자도의 연원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몇 가지 놀이 장면으로 정형화된 병풍 형식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 우리나라 백자도만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백자도 병풍의 애호는 조선 후기 다양한 의례·장엄용 병풍화의 유행과 흐름을 같이한다.

참고문헌

장서각 소장 가례도감의궤(이성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장서각 소장 조선왕조 가례도감의궤의 미술사적 고찰(이성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조선시대 회화사론(홍선표, 문예출판사, 1999),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강관식, 돌베개, 2001), 조선후기 백자도 연구(김선정,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한국문화 상징사전(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두산동아, 1995).

백자도

백자도
한자명

百子圖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김선정(金善晶)

정의

백 명 내외의 남자아이들의 놀이 모습을 그린 그림.

개관

백자도는 그림 속 백 명의 아이들만큼 많은 자손을 낳고 또 그 아이들이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라길 바라는 기원을 담은 길상화吉祥畵이다. 중국에서 남자아이의 형상은 전통적으로 다산多産을 상징하여 회화, 자수, 공예 등 여러 방면에서 일찍이 등장하였다. 아이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당대唐代부터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다산을 상징하는 욕조나 연꽃 등과 함께 그려져 길상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백자도의 기원은 중국 송대宋代까지 올라간다. 한자문화권에서 ‘백百’은 문자 그대로의 숫자라기보다는 ‘가득해서 족하다’는 의미로 길상의 최대치를 뜻한다. 중국에서 백자도라는 화제畵題는 많은 수의 아들, 즉 복의 최대치를 뜻하는 ‘백자百子’의 개념과 아이들의 놀이 장면을 그린 ‘영희도嬰戱圖’의 형식이 결합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남송대 백자도는 화려하고 정교한 궁정화풍으로 그려졌고 명청대明淸代에는 연화年畵로 제작되어 민간에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백자도는 조선 후기 이후 화려하고 장식적인 채색의 병풍 형태로 많이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 이전의 백자도는 전해지지 않으나 기록을 통해 조선 초기부터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장 이른 기록으로는 1478년 도화서 화원에게 백자도와 유사한 <궁중유희도宮中遊戱圖>를 그리게 하였다는 문헌이 있다. 그리고 1819년 효명세자孝明世子 가례嘉禮, 1882년 순종의 가례에 백자동百子童 병풍을 제작하였다는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도화서圖畵署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들의 녹취재祿取才 화과畵科의 시험문제로 백자도 화제畵題를 출제하였다는 『내각일력內閣日曆』의 기록에 의해 조선 후기 궁중에서 의례와 장엄용으로 제작된 화목畵目임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경도잡지京都雜誌』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한양가漢陽歌>, <성조가成造歌> 등의 18~19세기 문헌 백자도 병풍이 광통교 아래 병풍 가게에서 판매되었고, 일반 가정의 혼례병풍 용도나 부녀자 또는 아이들의 방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백자도 병풍은 점차 수요층이 확대되면서 민화풍의 자유로운 양상으로도 제작 유통되었다.

내용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 백자도는 축軸, 선면扇面, 횡권橫卷 등 다양한 화폭 형식을 보이는 중국의 백자도와 달리 대부분 6·8·10폭의 병풍 형태로 제작되었다. 각 장면마다 6~18명의 남자아이들이 나무, 태호석, 꽃, 전각 등이 있는 정원에서 갖가지 놀이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병풍 전체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100명 안팎이 된다. 아이들의 몇 가지 놀이 장면으로 구성 된 백자도 병풍은 효종孝宗에게 헌상된 17세기 후반 중국화가 맹영광孟永光의 <백동도百童圖>에 대해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남긴 제화시題畵詩를 통해 연원을 추측 할 수 있다.
백자도의 놀이 장면은 대략 8가지로 유형화되어 있다. 각 장면은 계절감과 화면 구도에 따라 대략 배열 순서를 추정할 수 있다. 대개의 8폭 백자도 병풍은 오른쪽부터 제1폭 장군 놀이, 제2폭 닭싸움, 제3폭 연꽃 따기·풀싸움, 제4폭 낮잠·새 놀이, 제5폭 나비 잡기, 제6폭관리행차, 제7폭 원숭이 놀이, 제8폭 매화 따기 등 춘하추동의 순으로 구성되었다. 이 8가지 놀이 장면이 백자도 병풍 8폭의 기본 구성이다. 6폭이면 이중 여섯 장면만으로 구성하며 10폭의 경우 유사한 구도의 다른 놀이 장면이 추가되는 등 약간의 변형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백자도 병풍들은 그려진 놀이의 내용은 물론 쌍계형雙紒形 머리 모양과 중국식 복식을 한 남자아이들의 모습과 배치, 세부 화면 구성요소와 구도가 공통되어 정형화된 그림본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자도는 그림 속 여러 구성 요소들을 통해 다자다남多子多男, 입신출세立身出世, 부귀, 장수와 같은 현세기복現世祈福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백자도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은 다자다남이다. 백 명의 아이들 즉 ‘백자’ 자체가 수많은 자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씨가 많은 연꽃이 만발한 연못 장면도 다산을 상징한다. 나비 잡기 장면에서 나비는 부부간의 금슬과 80세가 되도록 장수한다는 질수耋壽를 뜻하며, 장수를 의미하는 바위 ‘수壽’와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이 함께 그려져 ‘부귀수富貴壽’, 즉 부귀와 장수를 뜻하기도 한다. 백자도에서 강하게 부각되는 것은 입신출세에 대한 소망이다. 무관복을 입고 ‘영令’ 기를 든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의 장군놀이, 죽마와 수레를 타고 행렬하는 관리 행차 놀이는 어른들의 모습을 흉내 내며 노는 아이들을 통해 관직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또한 5명의 아이가 매화나무에 매달린 장면은 ‘오자등과五子登科’, 즉 5명의 아들의 과거 급제를 의미한다. 닭싸움 장면의 머리 위에 볏을 세운 닭의 모습은 관冠을 쓴 것과 비슷하여 입신출세를 상징하며, 원숭이[猴] 놀이는 제후[侯]와 동음동성으로 제후에 봉직하고싶은 바람을 담고 있다.

특징 및 의의

병풍 형태의 백자도는 화면의 구성 방식에 따라 각폭各幅 형식과 연폭連幅 형식, 그리고 전각殿閣을 배경으로 한 것과 전각이 그려지지 않은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각이 그려진 백자도는 화려한 전각이 그려져 화면 구성이 화려하고 정교하여 전각이 없는 형식보다 그림 바탕 재질, 안료 사용, 화면 구성 면에서 좀 더 정성과 많은 제작비를 들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연폭식의 백자도는 각 폭 형식보다 장대한 구도와 다채로운 세부 구성을 갖추어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요지연도瑤池宴圖> 등과 같은 궁중 장엄·의례용 병풍화와 견줄 만하다.
창덕궁 소장품으로 전해 오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백자도>는 병풍 6면 전체를 하나의 화면으로 구성한 연폭식 백자도로서, 궁중에서 제작된 백자도의 귀중한 예이다.
연못 장면, 관리 행차 놀이, 원숭이 놀이, 매화 따기 등 기본적인 놀이의 도상은 각폭 형식의 백자도와 일치한다. 하지만 연못 장면에서 연꽃 따기 외에 고기 잡는 모습이 함께 묘사되어 있고, 관리 행차 장면이 병풍 두 폭에 장대하게 배치되어 각폭식 백자도와 화면 비례와 구성에서 차이가 있다. 아이들 의복 문양과 건물 기와장식에 사용된 금색 안료, 건물 기왓골과 기둥의 음영표현, 전경 바위의 채색, 상서로운 구름의 형태 등 진한 채색과 정교하고 화려한 묘사의 궁중 장식화풍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흰 사슴이나 주렴을 친 사모지붕의 전각, 원추형의 괴석 등 모티프는 19세기 궁중에서 제작되었던 <곽분양행락도>, <요지연도> 등의 궁중 장엄·의례용 병풍그림들과 공통된다. 그림에 표현된 음영법과 채색 안료를 제작 연대가 있는 기록화 등과 비교할 때 현존하는 백자도 병풍은 대부분 19세기 이후 제작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19세기 왕세자 가례와 녹취재 화과로 백자도가 제작되었다는 기록과도 부합한다. 왕실을 비롯한 상층에서 향유되던 의례·장엄용 그림인 백자도가 민간으로 수요가 확대되면서 나타난 궁중 회화와 민간회화 간의 구별과 관계의 재설정은 민화의 개념에 대한 재검토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백자도의 연원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몇 가지 놀이 장면으로 정형화된 병풍 형식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 우리나라 백자도만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백자도 병풍의 애호는 조선 후기 다양한 의례·장엄용 병풍화의 유행과 흐름을 같이한다.

참고문헌

장서각 소장 가례도감의궤(이성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장서각 소장 조선왕조 가례도감의궤의 미술사적 고찰(이성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조선시대 회화사론(홍선표, 문예출판사, 1999),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강관식, 돌베개, 2001), 조선후기 백자도 연구(김선정,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한국문화 상징사전(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두산동아,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