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한자명

武夷九曲圖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윤진영(尹軫暎)

정의

남송대 주자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가 머물던 중국 복건성 무이산에 위치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그린 그림.

내용

<무이구곡도>는 16세기의 조선에 전래된 이후 구한말까지 약 400년 동안 꾸준히 그려진 그림이다. 여말선초에 전래된 주자성리학을 깊이 탐구한 16세기의 유학자들에게 주희는 학문의 종주이자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로 인해 주희가 은거하던 무이구곡은 학자들에게 주자 학문의 본산이자 이상향으로 떠올랐다. 무이구곡을 그린 <무이구곡도>는 16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큰 인기를 끌며 유행하였다. 특히 원본을 베껴 그린 모사본模寫本이 서울과 지방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무이구곡도>의 현장인 중국 복건성의 무이산 구곡계九曲溪는 기이한 층암절벽과 그 사이를 흐르는 계류가 수십 리에 걸쳐 펼쳐진 곳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전설과 고사가 깃든 장소로도 유명하다. 주희는 관직에 있던 9년간을 제외한 일생의 대부분을 무이산 인근의 숭안崇安·건양建陽·건안建安 등지에서 살았다. 54세 되던 1183년부터는 제자들과 함께 무이구곡에 정사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강론과 저술 작업에 전념하였다.
무이구곡은 원대元代 이후 주자성리학의 발원지로서 또는 주희의 학통學統을 이은 후학들의 활동 공간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주희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징물로서 <무이구곡도>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주자성리학을 최고의 학문 가치로 여긴 조선의 사대부들이 <무이구곡도>를 선호한 배경에는 주자를 향한 존경과 감화의 정서가 배어 있었다.
<무이구곡도>는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국립중앙박물관의 1591년작 이성길李成吉의 <무이구곡도>이다. 두루마리로 된 이 그림에는 화면 전체에 걸쳐 아홉 곡의 굽이가 묘사되었다. 감상자가 제1곡에서 제9곡까지 차례로 감상하는 과정은 마치 탐승의 여정旅情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화면의 구성은 무이구곡의 경관적 특성과 두루마리 그림의 기능을 활용한 것이다. 화면에서 각 곡의 명칭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각 곡마다의 특징적인 경관을 일정한 간격으로 화면 안에 배치하여 그린 것이 특징이다.
이성길의 <무이구곡도>와 함께 살펴보아야 할 그림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주문공무이구곡도朱文公武夷九曲圖>이다. 원본을 여러 번에 걸쳐 베껴 그린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모사를 거듭하며 화격이 상당히 소략해져 원화原畵의 양식이 온전하지 않다. 그러나 경물의 구성이 이성길의 <무이구곡도>와 유사한 점은 이 그림의 원본이 16세기 그림의 전형典型에서 유래되었음을 알려 준다. 두루마리 전체에 적힌 글씨는 모두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서체로 판단된다. 이성길의 <무이구곡도>가 중국에서 전래된 가장 높은 화격을 보여 주는 사례라면,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주문공무이구곡도>는 16세기 중엽에 지방에서 그린 모사본에 해당한다. 중앙 양식과 지방 양식의 실질적인 특징을 잘 비교해 볼 수 있는 사례이다.
17세기 이전까지 <무이구곡도>의 감상층은 성리학을 공부한 지식인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화원 화가와 문인 화가, 그리고 무명無名 화가에 이르는 폭넓은 층을 형성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세황姜世晃의 <무이구곡도>와 온릉봉릉도감溫陵封陵都監에서 만든 계병稧屛 <무이구곡도>이다.
강세황이 그린 <무이구곡도>는 당시에 전하던 두루마리 형식의 <무이구곡도>를 간략한 선묘 위주로 베껴 그린 그림이다. 문인화 취향의 분위기가 간결하고도 함축적인 선묘에 잘 집약되어 있다.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계병 <무이구곡도>는 8폭을 연이어 그린 것으로 1739년(영조 15) 중종비 단경 왕후端敬王后 신씨의 복위로 인해 능을 단장하는 일을 맡은 도감의 관원들이 기념물로 만든 것이다. 이 두 점의 <무이구곡도>는 화원 화가들의 공력이 담긴 그림과 문인들의 취향이 담긴 그림으로서 화원화와 문인화의 대비를 잘 보여 준다. 18세기 전반에는 이처럼 표현 방법이 다채로운 <무이구곡도>가 널리 그려지고 있었다.
조선 말기의 <무이구곡도>는 대중화의 단계를 거치며 민화民畵로까지 이어져 뚜렷한 양식의 변모를 이루었다. <무이구곡도>는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전통의 형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그림으로도 그려져 대중의 수요와 접목되었고, 이후 상상력이 가미된 민화로 그려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립중앙박물관의 18세기 작 <무이구곡도첩>과 가회민화박물관의 <무이구곡도병>이다.
조선 후기에 민화로 그려진 구곡도는 원래 유학자나 양반들 사이에서 감상되던 그림이었다. 그런 구곡도가 민간양식으로 그려져 민화의 저변을 넓히는 소재로 다루어진 점은 매우 의외의 현상이다. 이러한 구곡도의 민화화라는 이면에는 변화하는 시대 환경, 새로운 수요 층의 등장과 수요에 따른 민간 양식의 그림들이 생산되었기에 가능하였다.
1785년(정조 8)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의 <무이구곡도첩>은 무이구곡의 주요 경물을 의인화擬人化 내지 의물화하여 그린 것이다. 예컨대 제2곡의 중심 경물인옥녀봉玉女峯은 한복을 차려입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옥녀봉이 미인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형상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단연 감상자의 시선을 흥미롭게 사로잡는 요소이다. <무이구곡도>가 지식이 있어야만 보는 어려운 그림이 아니라 누구나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인 점을 강조한 파격적인 구성이다.
가회민화박물관 소장의 10폭 <무이구곡도병>은 상상의 경관과 조형성을 강조한 민화풍의 그림이다. 이 병풍 그림은 각 폭마다 대부분 비슷한 구도와 필치로 그려져 있다. 특히 무이구곡의 고유한 지형적 특징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고, 상상으로 그린 부분들이 비중을 차지한다. 산의 굴곡을 비슷한 간격의 반복되는 운필로 표현하였다. 화면 내에서 갈지자형의 경물 구성과 대칭형, 혹은 특별한 형식이 없는 구도를 보여 준다. 경물 묘사에 원근의 차이가 없지만, 전통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조형적표현이 신선하다. 여기에 적힌 주자의 무이구곡 시가 이 그림이 <무이구곡도>임을 알려 주는 단서이다.

특징 및 의의

<무이구곡도>는 구한말 대중적 취향을 담은 민화로 그려짐으로써 상류층으로부터 중서민층에 이르기까지 가장 폭넓은 계층을 대상으로 한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구곡도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중국 도상을 한국적인 화풍으로 전환해 낸 사례로서 중국문화의 수용과 한국화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시사하는 의미와 비중이 매우 크다. 특히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금강산도金剛山圖 등 전통적인 상류층 회화의 주제가 19세기에 이르러 대중화되는 경향과 맥락을 같이 하였다. 이는 조선 말기 양반 사대부층과 더불어 신흥 부유층으로 부상한 중인이나 상업가들의 수요에 부응한 현상의 하나였다. 또한 이들이 지닌 양반문화에 대한 동일시 관념은 상류층 회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배경이 되어 조선 말기까지 다양한 <무이구곡도>가 그려질 수 있었다.

참고문헌

구곡도의 발생과 기능에 대하여(유준영, 고고미술151, 한국미술사학회, 1981), 아름다운 산수화 전(가회민화박물관, 2007), 율곡 이이의고산구곡과 고산구곡도(윤진영, 신사임당 가족의 시서화, 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2006), 조선시대 구곡도의 수용과 전개(윤진영, 미술사학연구217·218, 한국미술사학회, 1998), 조형예술과 성리학 화음동정사에 나타난 구조와 사상적 계보(유준영, 한국미술사 논문집1,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4), 한강 정구의 유거공간과 무흘구곡도(윤진영, 한강 정구, 남명학연구원, 2011), 한국회화의 전통(안휘준, 문예출판사, 1988).

무이구곡도

무이구곡도
한자명

武夷九曲圖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윤진영(尹軫暎)

정의

남송대 주자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가 머물던 중국 복건성 무이산에 위치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그린 그림.

내용

<무이구곡도>는 16세기의 조선에 전래된 이후 구한말까지 약 400년 동안 꾸준히 그려진 그림이다. 여말선초에 전래된 주자성리학을 깊이 탐구한 16세기의 유학자들에게 주희는 학문의 종주이자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로 인해 주희가 은거하던 무이구곡은 학자들에게 주자 학문의 본산이자 이상향으로 떠올랐다. 무이구곡을 그린 <무이구곡도>는 16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큰 인기를 끌며 유행하였다. 특히 원본을 베껴 그린 모사본模寫本이 서울과 지방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무이구곡도>의 현장인 중국 복건성의 무이산 구곡계九曲溪는 기이한 층암절벽과 그 사이를 흐르는 계류가 수십 리에 걸쳐 펼쳐진 곳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전설과 고사가 깃든 장소로도 유명하다. 주희는 관직에 있던 9년간을 제외한 일생의 대부분을 무이산 인근의 숭안崇安·건양建陽·건안建安 등지에서 살았다. 54세 되던 1183년부터는 제자들과 함께 무이구곡에 정사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강론과 저술 작업에 전념하였다.
무이구곡은 원대元代 이후 주자성리학의 발원지로서 또는 주희의 학통學統을 이은 후학들의 활동 공간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주희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징물로서 <무이구곡도>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주자성리학을 최고의 학문 가치로 여긴 조선의 사대부들이 <무이구곡도>를 선호한 배경에는 주자를 향한 존경과 감화의 정서가 배어 있었다.
<무이구곡도>는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국립중앙박물관의 1591년작 이성길李成吉의 <무이구곡도>이다. 두루마리로 된 이 그림에는 화면 전체에 걸쳐 아홉 곡의 굽이가 묘사되었다. 감상자가 제1곡에서 제9곡까지 차례로 감상하는 과정은 마치 탐승의 여정旅情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화면의 구성은 무이구곡의 경관적 특성과 두루마리 그림의 기능을 활용한 것이다. 화면에서 각 곡의 명칭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각 곡마다의 특징적인 경관을 일정한 간격으로 화면 안에 배치하여 그린 것이 특징이다.
이성길의 <무이구곡도>와 함께 살펴보아야 할 그림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주문공무이구곡도朱文公武夷九曲圖>이다. 원본을 여러 번에 걸쳐 베껴 그린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모사를 거듭하며 화격이 상당히 소략해져 원화原畵의 양식이 온전하지 않다. 그러나 경물의 구성이 이성길의 <무이구곡도>와 유사한 점은 이 그림의 원본이 16세기 그림의 전형典型에서 유래되었음을 알려 준다. 두루마리 전체에 적힌 글씨는 모두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서체로 판단된다. 이성길의 <무이구곡도>가 중국에서 전래된 가장 높은 화격을 보여 주는 사례라면,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주문공무이구곡도>는 16세기 중엽에 지방에서 그린 모사본에 해당한다. 중앙 양식과 지방 양식의 실질적인 특징을 잘 비교해 볼 수 있는 사례이다.
17세기 이전까지 <무이구곡도>의 감상층은 성리학을 공부한 지식인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화원 화가와 문인 화가, 그리고 무명無名 화가에 이르는 폭넓은 층을 형성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세황姜世晃의 <무이구곡도>와 온릉봉릉도감溫陵封陵都監에서 만든 계병稧屛 <무이구곡도>이다.
강세황이 그린 <무이구곡도>는 당시에 전하던 두루마리 형식의 <무이구곡도>를 간략한 선묘 위주로 베껴 그린 그림이다. 문인화 취향의 분위기가 간결하고도 함축적인 선묘에 잘 집약되어 있다.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계병 <무이구곡도>는 8폭을 연이어 그린 것으로 1739년(영조 15) 중종비 단경 왕후端敬王后 신씨의 복위로 인해 능을 단장하는 일을 맡은 도감의 관원들이 기념물로 만든 것이다. 이 두 점의 <무이구곡도>는 화원 화가들의 공력이 담긴 그림과 문인들의 취향이 담긴 그림으로서 화원화와 문인화의 대비를 잘 보여 준다. 18세기 전반에는 이처럼 표현 방법이 다채로운 <무이구곡도>가 널리 그려지고 있었다.
조선 말기의 <무이구곡도>는 대중화의 단계를 거치며 민화民畵로까지 이어져 뚜렷한 양식의 변모를 이루었다. <무이구곡도>는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전통의 형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그림으로도 그려져 대중의 수요와 접목되었고, 이후 상상력이 가미된 민화로 그려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립중앙박물관의 18세기 작 <무이구곡도첩>과 가회민화박물관의 <무이구곡도병>이다.
조선 후기에 민화로 그려진 구곡도는 원래 유학자나 양반들 사이에서 감상되던 그림이었다. 그런 구곡도가 민간양식으로 그려져 민화의 저변을 넓히는 소재로 다루어진 점은 매우 의외의 현상이다. 이러한 구곡도의 민화화라는 이면에는 변화하는 시대 환경, 새로운 수요 층의 등장과 수요에 따른 민간 양식의 그림들이 생산되었기에 가능하였다.
1785년(정조 8)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의 <무이구곡도첩>은 무이구곡의 주요 경물을 의인화擬人化 내지 의물화하여 그린 것이다. 예컨대 제2곡의 중심 경물인옥녀봉玉女峯은 한복을 차려입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옥녀봉이 미인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형상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단연 감상자의 시선을 흥미롭게 사로잡는 요소이다. <무이구곡도>가 지식이 있어야만 보는 어려운 그림이 아니라 누구나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인 점을 강조한 파격적인 구성이다.
가회민화박물관 소장의 10폭 <무이구곡도병>은 상상의 경관과 조형성을 강조한 민화풍의 그림이다. 이 병풍 그림은 각 폭마다 대부분 비슷한 구도와 필치로 그려져 있다. 특히 무이구곡의 고유한 지형적 특징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고, 상상으로 그린 부분들이 비중을 차지한다. 산의 굴곡을 비슷한 간격의 반복되는 운필로 표현하였다. 화면 내에서 갈지자형의 경물 구성과 대칭형, 혹은 특별한 형식이 없는 구도를 보여 준다. 경물 묘사에 원근의 차이가 없지만, 전통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조형적표현이 신선하다. 여기에 적힌 주자의 무이구곡 시가 이 그림이 <무이구곡도>임을 알려 주는 단서이다.

특징 및 의의

<무이구곡도>는 구한말 대중적 취향을 담은 민화로 그려짐으로써 상류층으로부터 중서민층에 이르기까지 가장 폭넓은 계층을 대상으로 한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구곡도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중국 도상을 한국적인 화풍으로 전환해 낸 사례로서 중국문화의 수용과 한국화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시사하는 의미와 비중이 매우 크다. 특히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금강산도金剛山圖 등 전통적인 상류층 회화의 주제가 19세기에 이르러 대중화되는 경향과 맥락을 같이 하였다. 이는 조선 말기 양반 사대부층과 더불어 신흥 부유층으로 부상한 중인이나 상업가들의 수요에 부응한 현상의 하나였다. 또한 이들이 지닌 양반문화에 대한 동일시 관념은 상류층 회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배경이 되어 조선 말기까지 다양한 <무이구곡도>가 그려질 수 있었다.

참고문헌

구곡도의 발생과 기능에 대하여(유준영, 고고미술151, 한국미술사학회, 1981), 아름다운 산수화 전(가회민화박물관, 2007), 율곡 이이의고산구곡과 고산구곡도(윤진영, 신사임당 가족의 시서화, 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2006), 조선시대 구곡도의 수용과 전개(윤진영, 미술사학연구217·218, 한국미술사학회, 1998), 조형예술과 성리학 화음동정사에 나타난 구조와 사상적 계보(유준영, 한국미술사 논문집1,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4), 한강 정구의 유거공간과 무흘구곡도(윤진영, 한강 정구, 남명학연구원, 2011), 한국회화의 전통(안휘준, 문예출판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