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서(圖畵署)

한자명

圖畵署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윤진영(尹軫暎)

정의

조선시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공적인 용도의 도화圖畵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

내용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도화 업무를 담당한 관청인 도화원圖畵院의 명칭을 그대로 썼으나 1471년경 도화서로 개칭하였다. 도화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도화 업무를 담당한 관청으로 예조에 소속된 종6품의 아문衙門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도화서에는 제조提調 1인과 별제別提, 종6품 2인, 잡직雜職으로 화원畵員 20인을 두었다. 화원의 보직은 선화善畵 1인, 선회善繪 1인, 화사畵史 1인, 회사繪史 2인으로 규정되어 있다. 경험 많은 화원을 확보하기 위해 임기를 마친 화원들이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 3인을 두었다. 이 밖에도 견습 화원인 화학생도畵學生徒 15명, 차비노 5명, 근수노 2명, 배첩장 2명도 소속되어 있었다.
화원은 실력을 평가하는 취재取才를 통해 선발하였다. 취재의 과목으로는 대나무[竹]·산수·인물·영모翎毛·화초 등을 두었다. 이 가운데 두 가지를 선택하여 시험을 보되 대나무를 1등으로 하고, 산수를 2등, 영모를 3등, 화초를 4등으로 등급을 나누었다. 대나무나 산수를 중시한 것은 사대부들이 지닌 문인화에 대한 관심과 취향이 반영되었음을 시사한다.
정조 때는 규장각에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을 선발하여 운영하였다. 도화서 화원 가운데 다시 시험을 보아 국왕의 측근에서 도화 업무를 수행하는 제도를 두었다. 1894년에 갑오개혁 이후에는 도화서가 규장각에 소속되었고, 화원은 화원도화주사畵員圖畵主事로 명칭이 바뀌었다.
도화서의 업무는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국왕이나 공신功臣의 초상화 제작, 행사에 필요한 각종 병풍, 기물, 의장물, 궁중행사의 장면을 그린 기록화, 시가행진을 하는 행렬을 그린 의궤儀軌의 반차도班次圖 등을 그리는 일, 왕이 보는 어람용御覽用전적에 칸을 치는 인찰印札 등 다양했다.
도화서 소속의 화원들은 화려한 채색과 섬세한 묘사를 위주로 한 공필화 계통의 그림을 그렸다. 이에 그림에 대한 재능과 오랜 기간의 수련이 필요했으며, 그림에 따라서는 공동으로 작업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화원들은 공적으로 그리는 도화 업무 외에 산수화화조화 등에도 뛰어난 개인의 기량을 발휘했으며, 주문과 수요에 의해 사적私的인 도화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실 수요의 공적인 그림을 그릴 때에는 자신의 개성은 드러내지 못했다. 이처럼 화원화가들은 공식적인 화역畵役과 사적인 도화 활동 사이에서 경륜을 쌓을 수 있었으며, 다양한 화제를 폭넓게 그리는 과정은 곧 필력을 키우는 토대가 되었다.

특징 및 의의

도화서는 애초에 지금의 조계사 부근인 견평방堅平坊에 있었으나, 1676년(숙종 2) 혼례를 앞둔 현종顯宗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 1664~1687에게 귀속되었다. 이후 도화서는 10여 년간 의정부의 남쪽 예빈시, 통례원, 충익부 옛터 등을 거쳐 태평관 옛터로 자리를 옮겼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태평방太平坊으로 이전하였다. 19세기 당시의 도화서는 태평방의 광통교廣通橋로부터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하동 64번지 자리이다. 1770년대에 제작된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에 도화서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 18세기 중엽 이전부터 이곳에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태평방에 정착한 도화서의 입지 조건은 광통교 주변의 지전紙廛과 서화포書畵鋪가 등장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도화서는 화가들의 잦은 출입과 수시로 그림이 반출입되는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도화서 인근의 지전은 공적인 도화 업무 외에 사적으로 그려서 팔기 위한 화원들의 그림이 진열되는 곳이었다. 또한 도화서 인근은 무명화가들이 머문 공간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그 주변에 그림을 사고파는 유통 공간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도화서의 가장 핵심 인력은 화원과 생도生徒이다. 공적인 용도로 필요한 그림을 제작하는 주역이었다. 18세기 이후의 법전에 기록된 화원과 생도의 규정을 보면, 당시 도화서 안팎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에는 도화서의 정원이 화원 20명에 생도 30명이었다. 조선 초기의 『경국대전』(1485)과 비교하면, 생도가 두배로 늘어난 셈이다. 18세기 이후 증가한 도화 업무에 대비하려면 화원 후보생인 생도의 수를 늘려야 했고, 화원의 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후에 편찬된 『대전통편大典通編』(1785)에는 화원 10명이 증원되어 30명으로 늘었다. 19세기의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에 이르면 화원과 생도는 각 30명으로 변함이 없지만, 별제別提 2명이 폐지되고, 겸교수兼敎授 1명이 새로 증원되었다. 겸교수를 둔 것은 생도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도화서의 직제와 정원은 법전이 후속으로 편찬될 때마다 개편되는 과정을 거쳤다.
19세기 중엽의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화원들의 임무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궁중장식화 등의 밑그림 그리는 일, 왕의 관을 보관해 두는 찬궁欑宮에 들어가는 사수도四獸圖, 왕릉의 석물조각에 필요한 밑그림, 의궤반차도와 도설圖說, 죽책문竹冊文 등에 찍은 어보御寶의 획을 단정하게 정리하는 보획補劃, 돌에 글자를 새길 때 종이에 붉은 선으로 글자획을 그리는 북칠北漆 등이 그 업무로 명시되어 있다. 도화서는 조선 왕조 5백 년간 한번도 폐지한 적이 없을 정도로 국가와 왕실의 도화 업무를 맡아 수행하였고, 이를 통해 왕실의 권위와 왕실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19세기 광통교에 나온 민화(윤진영, 광통교 서화사, 서울역사박물관, 2016), 왕의 화가들(강민기·박정혜·윤진영・황정연, 돌베개, 2012),조선 궁궐의 그림(강민기·박정혜·윤진영·황정연, 돌베개, 2012), 조선시대 회화사론(홍선표, 문예출판사, 1999), 조선왕조시대의 도화서와 화원(김동원,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0),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상(강관식,돌베개, 2001), 한국회화사 연구(안휘준, 시공사, 2000).

도화서

도화서
한자명

圖畵署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윤진영(尹軫暎)

정의

조선시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공적인 용도의 도화圖畵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

내용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도화 업무를 담당한 관청인 도화원圖畵院의 명칭을 그대로 썼으나 1471년경 도화서로 개칭하였다. 도화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도화 업무를 담당한 관청으로 예조에 소속된 종6품의 아문衙門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도화서에는 제조提調 1인과 별제別提, 종6품 2인, 잡직雜職으로 화원畵員 20인을 두었다. 화원의 보직은 선화善畵 1인, 선회善繪 1인, 화사畵史 1인, 회사繪史 2인으로 규정되어 있다. 경험 많은 화원을 확보하기 위해 임기를 마친 화원들이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 3인을 두었다. 이 밖에도 견습 화원인 화학생도畵學生徒 15명, 차비노 5명, 근수노 2명, 배첩장 2명도 소속되어 있었다.
화원은 실력을 평가하는 취재取才를 통해 선발하였다. 취재의 과목으로는 대나무[竹]·산수·인물·영모翎毛·화초 등을 두었다. 이 가운데 두 가지를 선택하여 시험을 보되 대나무를 1등으로 하고, 산수를 2등, 영모를 3등, 화초를 4등으로 등급을 나누었다. 대나무나 산수를 중시한 것은 사대부들이 지닌 문인화에 대한 관심과 취향이 반영되었음을 시사한다.
정조 때는 규장각에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을 선발하여 운영하였다. 도화서 화원 가운데 다시 시험을 보아 국왕의 측근에서 도화 업무를 수행하는 제도를 두었다. 1894년에 갑오개혁 이후에는 도화서가 규장각에 소속되었고, 화원은 화원도화주사畵員圖畵主事로 명칭이 바뀌었다.
도화서의 업무는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국왕이나 공신功臣의 초상화 제작, 행사에 필요한 각종 병풍, 기물, 의장물, 궁중행사의 장면을 그린 기록화, 시가행진을 하는 행렬을 그린 의궤儀軌의 반차도班次圖 등을 그리는 일, 왕이 보는 어람용御覽用전적에 칸을 치는 인찰印札 등 다양했다.
도화서 소속의 화원들은 화려한 채색과 섬세한 묘사를 위주로 한 공필화 계통의 그림을 그렸다. 이에 그림에 대한 재능과 오랜 기간의 수련이 필요했으며, 그림에 따라서는 공동으로 작업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화원들은 공적으로 그리는 도화 업무 외에 산수화와 화조화 등에도 뛰어난 개인의 기량을 발휘했으며, 주문과 수요에 의해 사적私的인 도화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실 수요의 공적인 그림을 그릴 때에는 자신의 개성은 드러내지 못했다. 이처럼 화원화가들은 공식적인 화역畵役과 사적인 도화 활동 사이에서 경륜을 쌓을 수 있었으며, 다양한 화제를 폭넓게 그리는 과정은 곧 필력을 키우는 토대가 되었다.

특징 및 의의

도화서는 애초에 지금의 조계사 부근인 견평방堅平坊에 있었으나, 1676년(숙종 2) 혼례를 앞둔 현종顯宗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 1664~1687에게 귀속되었다. 이후 도화서는 10여 년간 의정부의 남쪽 예빈시, 통례원, 충익부 옛터 등을 거쳐 태평관 옛터로 자리를 옮겼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태평방太平坊으로 이전하였다. 19세기 당시의 도화서는 태평방의 광통교廣通橋로부터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하동 64번지 자리이다. 1770년대에 제작된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에 도화서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 18세기 중엽 이전부터 이곳에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태평방에 정착한 도화서의 입지 조건은 광통교 주변의 지전紙廛과 서화포書畵鋪가 등장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도화서는 화가들의 잦은 출입과 수시로 그림이 반출입되는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도화서 인근의 지전은 공적인 도화 업무 외에 사적으로 그려서 팔기 위한 화원들의 그림이 진열되는 곳이었다. 또한 도화서 인근은 무명화가들이 머문 공간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그 주변에 그림을 사고파는 유통 공간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도화서의 가장 핵심 인력은 화원과 생도生徒이다. 공적인 용도로 필요한 그림을 제작하는 주역이었다. 18세기 이후의 법전에 기록된 화원과 생도의 규정을 보면, 당시 도화서 안팎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에는 도화서의 정원이 화원 20명에 생도 30명이었다. 조선 초기의 『경국대전』(1485)과 비교하면, 생도가 두배로 늘어난 셈이다. 18세기 이후 증가한 도화 업무에 대비하려면 화원 후보생인 생도의 수를 늘려야 했고, 화원의 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후에 편찬된 『대전통편大典通編』(1785)에는 화원 10명이 증원되어 30명으로 늘었다. 19세기의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에 이르면 화원과 생도는 각 30명으로 변함이 없지만, 별제別提 2명이 폐지되고, 겸교수兼敎授 1명이 새로 증원되었다. 겸교수를 둔 것은 생도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도화서의 직제와 정원은 법전이 후속으로 편찬될 때마다 개편되는 과정을 거쳤다.
19세기 중엽의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화원들의 임무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궁중장식화 등의 밑그림 그리는 일, 왕의 관을 보관해 두는 찬궁欑宮에 들어가는 사수도四獸圖, 왕릉의 석물조각에 필요한 밑그림, 의궤반차도와 도설圖說, 죽책문竹冊文 등에 찍은 어보御寶의 획을 단정하게 정리하는 보획補劃, 돌에 글자를 새길 때 종이에 붉은 선으로 글자획을 그리는 북칠北漆 등이 그 업무로 명시되어 있다. 도화서는 조선 왕조 5백 년간 한번도 폐지한 적이 없을 정도로 국가와 왕실의 도화 업무를 맡아 수행하였고, 이를 통해 왕실의 권위와 왕실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19세기 광통교에 나온 민화(윤진영, 광통교 서화사, 서울역사박물관, 2016), 왕의 화가들(강민기·박정혜·윤진영・황정연, 돌베개, 2012),조선 궁궐의 그림(강민기·박정혜·윤진영·황정연, 돌베개, 2012), 조선시대 회화사론(홍선표, 문예출판사, 1999), 조선왕조시대의 도화서와 화원(김동원,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0),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상(강관식,돌베개, 2001), 한국회화사 연구(안휘준, 시공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