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무(劒舞)

검무

한자명

劒舞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무용

집필자 임수정(林守正)

정의

검劍을 들고 추는 춤으로 상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연행되어 온 춤.

내용

검무劍舞는 이 땅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연원을 지니고 있는 춤이다. 상고시대의 수렵무용狩獵舞踊이나 의례무용儀禮舞踊 혹은 전투무용戰鬪舞踊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검무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맥脈을 이어 오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전통춤이다.
공연 형태를 갖춘 검무의 출현은 삼국시대 신라의 황창랑黃昌郞 설화에 기인한 황창검무黃昌劍舞로, 가면을 쓴 동자童子가 추는 동자가면무童子假面舞의 양식이다. 황창검무는 고려시대에도 전승되어 조선시대 초까지 처용무와 함께 연희되었다. 황창검무와 다른 양식의 검무가 출현한 것은 조선시대 숙종 이후로 가면을 벗고 여기女妓가 추는 여기검무女妓劍舞의 형태가 나타난다.
여기검무는 정조 때 궁중정재로 정착되면서 궁중연향宮中宴享의 성격에 맞도록 연행 규모가 커지고 의상도 화려해졌으며, 참여한 여기의 숫자도 많아지는 변화를 보였다. 즉, 궁중무용으로 채용되면서 여러 가지 격식이 갖추어졌고 공연형식도 더욱 예술적으로 발전하였다. 궁중정재의 하나로 조선 후기 각종 연향의 공연 종목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예술적으로 한층 다듬어지고 세련되어진 여기검무는, 궁중 연향에 참가하기 위해 궁중으로 선상選上된 각 지방 교방의 기녀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전파되면서 각 지방의 독특한 특색을 담은 현재의 향제鄕制 교방검무 양식을 파생시켰다. 현재 각 지역에서 전승되는 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 경기검무, 궁중검무, 해주검무, 평양검무 등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검무가 문헌상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동경잡기東京雜記』 「풍속조風俗條」, 『삼국사기三國史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통해 신라시대 검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동경잡기』 권1 「풍속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舞劒之戱: 黃倡郞新羅人也. 諺傳, 年七歲入百濟, 市中
舞劍, 觀者如堵, 濟王聞之, 召觀, 命升堂舞劒, 倡郞因
刺王, 國人殺之, 羅人哀之, 像其容, 爲假面, 作舞劒之
狀, 至今傳之.
무검지희: 황창랑은 신라 사람이다. 민간에 전하기를, “나이 칠 세에 백제로 들어가 칼춤을 추니 구경꾼이 담처럼 모였다. 백제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들여 보고는 당으로 올라와 칼춤을 추라고 명령했다. 황창랑은 그리하여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찔러 죽였다. 이에 백제 사람들이 황창랑을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그의 형상을 본떠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다.”라고 한다. 지금까지 그 칼춤이 전해 내려온다.

또한 『증보문헌비고』 「황창랑무조黃昌郞舞條」의 기록을 통해 신라시대의 검무는 황창랑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황창검무이며, 전투무용이나 묘기를 보이는 검무가 아닌 가면을 착용하는, 희극성을 띤 가면동자무假面童子舞의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황창검무는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 지속적으로 민간에 전승되었다.

諺傳, 八歲童子爲新羅王, 謀釋憾於百濟, 往百濟市, 以
劍舞, 市人觀者如堵墻, 百濟王聞之, 召入宮令舞, 昌郞
於座, 揕王殺之. 後世作假面以像之,與處容舞並陳.
민간에 전하기를, “8세의 동자가 신라왕을 위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풀고자 백제 거리에 들어가 검무를 추니 거리의 구경꾼이 담과 같이 모여 들었다. 백제왕이 그것을 듣고 관에 불러 들여 춤추게 하였다. 창랑은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후세에 그 상을 본떠서 가면을 만들었고, 처용무와 더불어 연희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검무는 신라의 검무를 계승하여 황창무로 불리는 가면희假面戱가 성행하였고, 처용무와 함께 추어졌으며 무무武舞의 씩씩한 기상을 나타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증보문헌비고』에서 “후세작가면이상지, 여처용무병진後世作假面以像之, 與處容舞並陳”, 즉 “후세에 가면을 만들어 쓰고 처용무와 함께 연희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황창무가 처용무와 함께 춤추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학규李學逵가 지은 『영남악부嶺南樂府』의 「황창랑黃昌郞」 에서 인용한 『경주부지慶州府志』에 의하면, 이첨李詹, 1345~1405이 1385년 겨울에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베푼 향연에서 가면동자검무를 보았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又按李詹黃倡郞辨, 曰, 乙丑冬, 客于鷄林, 府尹裵公設
鄕樂以勞之, 有假面童子, 舞釰于庭. 問之, 云, 羅代有
黃昌者, 年可十五六歲, 善舞釰.
또 이첨의 「황창랑변黃昌郞辨」 을 살펴보니, 그곳에서 이르기를, “을축년 겨울에 계림에 객으로 갔을 때 부윤 배공이 향악을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가면을 쓴 동자가 뜰에서 검을 들고 춤을 추기에 물었더니 ‘신라에 황창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열대여섯 살 정도이나 춤을 잘 추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을축년은 1385년(고려 우왕 11)에 해당되므로, 이 기록으로 본다면 고려 말까지 신라시대의 검무가 확실히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경잡기』, 『증보문헌비고』 및 『경주부지』의 기록을 통해 당시의 검무가 신라의 가면무의 양식을 계승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의 검무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계속 전승되고 있었다는 것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동도악부東都樂府』로써 증명이 된다. 이것은 김종직이 동도東都, 즉 경주에서 황창검무를 보고 감회를 피력 한 것이다. 또한 광해군 때의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 1577~1624의 『해동악부海東樂府』에도 황창검무의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 중기(숙종 이후)의 검무는 이전 시기의 형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숙종 때의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지은 『서포집西浦集』의 <관황창무觀黃昌舞>라는 칠언고시 중 ‘취미여아황창무翠眉女兒黃昌舞’라는 시구는 이때부터 여기女妓에 의한 검무가 있었던 것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같은 시대인 1712년(숙종 38) 연경사행燕京使行의 수행원이었던 김창업金昌業의 왕래견문록往來見聞錄인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의 기록을 통해 가면을 쓰지 않은 여기 2인의 검무 모습을 살필 수 있어 여기검무가 숙종 초부터 출연하여 여기가 있는 여러 고을에서 여악女樂의 출연물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숙종 이후 여러 문인들의 관무시觀舞詩에도 기녀가 검무를 추는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화백씨간검무和伯氏看劍舞>는 자신의 맏형 김창집金昌集이 평안북도 선천에서 검무를 보고 노래한 것에 화운하여 노래한 것이다.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가 1749년에 지은 <전주한벽당십이곡全州寒碧堂十二曲>에서는 호남검무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신광수가 평양 연광정練光亭에서 검무를 추는 기생 추강월秋江月에게 지어 준 시도 남아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780년(정조 4)에 지은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에는 진주검무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37~1805의 문집인 『정유각집貞蕤閣集』에는 명기 운심雲心의 밀양검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 외에 많은 여기검무시가 남겨진 것은 여기검무가 그 당시 연회의 춤 종목으로 여러 지역에서 활발히 추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말 1872년(고종 9)에 정현석이 진주목사로 부임할 당시 간행한 『교방가요』에는 진주의 교방에서 연희되는 진주검무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 문헌의 기록을 통해 여기검무의 특징은 무武적인 성향의 황창검무와는 달리 여기女妓의 예藝적 성향의 검무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여기검무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도상학적 자료는 연회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이다. 18세기 후반인 1745년(영조 21) 작인 김홍도의 <평양감사환영도平壤監司歡迎圖> 나 1758년(영조 34) 작인 신윤복의 <쌍검대무雙劍對舞>그림에서 당시 여기검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세기 말 풍속화가 김준근의 <쌍검무雙劍舞>에서는 18세기 여기검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윤복의 <쌍검대무>에 나오는 칼은 길고 곧은 직선적인 형태의 모습인 반면, 김준근의 <쌍검무>의 칼은 길이가 짧고 끝이 약간 굽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여기검무는 전승되어 오는 동안 무구의 형태가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72년(고종 9) 정현석의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동기童妓 두 명과 소기少妓 두 명 등 모두 네 명의 기녀가 목이 구부러지지 않은 칼을 들고 검무를 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편 궁중의 기록에 검무가 등장하는 것은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생모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에 행차한 일과 그것에 수반된 여러 왕실 행사의 기록을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이다. 1475년(성종 6)에 창제된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보면 처용무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으나 검무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처용무와 함께 추어지던 검무가 민간에서 널리 유행하다 정조 때 궁중정재로 정착이 된 듯하다. 이후 순조를 거쳐 고종 대에 이르는 『진찬의궤』, 『진연의궤』의 기록에 정재종목으로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다. 또한 궁중연향 때 연희되었던 춤의 형태와 종류를 기록한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검무의 무보舞譜와 음악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궁중검무의 연행 양상을 살필 수 있다. 궁중정재의 하나로 조선 후기 각종 연향의 공연 종목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예술적으로 한층 다듬어지고 세련되어진 여기검무는 궁중 연향에 참가하기 위해 선출된 각 지방 교방의 기녀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전파되면서 각 지방의 독특한 특색을 담은 현재의 향제鄕制 교방검무 양식을 파생시켰다.
조선시대 교방은 서울과 지방관아 사이에서 상호 유대성을 가지고 왕래하였으며 조선 후기는 궁중연향에 참가한 각 지방 교방청敎坊廳 소속의 기녀들 간의 상호접촉과 기예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교방청의 여기들에 의해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추어지고 정착되어 전승되고 있는 교방검무는 예술적 형식(복식구성, 장단구성, 춤의 진행방식)에 있어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무구舞具인 칼의 모습과 반주음악, 춤사위 등은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향제의 서로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교방검무의 지역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 지역 교방검무의 무복舞服은 의궤에 나타난 궁중검무의 복식인 치마·저고리·쾌자·전대·전립을 착용한다. 하지만 색상은 각 지역의 특색을 담아 다채롭게 나타난다. 의궤에 나타나지 않는 한삼은 한삼춤이 존재하는 남부 지역의 검무(진주검무·통영검무·호남검무)에서 사용된다.
둘째, 각 지역 교방검무의 무구인 칼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의궤에 나타난 검무의 칼은 칼 목이 꺾이지 않는 칼을 사용하였으나 1900년대 이후부터 칼 목이 꺾여 자유롭게 돌릴 수 있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진주검무·궁중검무 역시 칼 목이 꺾여 돌아가는 칼을 사용하였으나 현재에는 원형을 복원시켜 칼 목이 꺾이지 않는 칼을 사용한다. 나머지 지역의 교방검무는 1900년대 이후에 나타난 칼 목이 꺾여 돌아가는 칼을 사용한다. 하지만 각 지역에 따라 칼의 재질을 백동재질·철제재질·놋쇠재질·나무재질로 달리하여 사용한다.
셋째, 각 지역 교방검무에 사용하는 반주음악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교방검무의 장단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한삼춤이 존재하는 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는 염불장단·타령장단·자진타령장단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고, 그 외에 한삼춤이 없이 손춤으로 시작되는 여기검무는 타령장단·자진타령장단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단구성이 비슷하더라도 선율은 각 지역의 독특한 음악어법을 담은 향제삼현육각을 사용하고 있다.
넷째, 각 지역 교방검무의 춤사위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는 한삼춤-선 손춤-앉은 손춤-앉은 칼춤-선 칼춤-연풍대-제행이무로 구성한다. 경기검무, 궁중검무, 해주검무, 평양검무는 선 손춤-앉은 손춤-앉은 칼춤-선 칼춤-연풍대-제행이무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적으로 볼 때 남쪽의 검무(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는 한삼춤으로 시작되고, 북쪽의 검무(경기검무, 궁중검무, 해주검무, 평양검무)는 한삼춤을 추지 않고 손춤으로 시작된다.
다섯째, 각 지역 교방검무의 춤사위에 나타난 지역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춤사위 유형 중 한삼춤은 남부지역의 여기검무인 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에서 나타난다. 진주검무의 한삼춤은 궁중정재의 한삼춤과 유사하며, 통영검무의 한삼춤은 경상남도 통영 지역 민속무용의 특징인 겨드랑 사위를 많이 사용하고, 호남검무의 한삼춤은 민속무용인 승무의 춤사위들이 나타난다. 춤사위 유형 중 선 손춤에서는 각 지역의 민속춤인 입춤, 승무, 살풀이, 탈춤 등의 춤사위가 나타난다. 앉은 손춤에서는 칼을 어르는 농검弄劍에 해당하는 춤사위들로 살풀이춤(혹은 입춤)의 앉은사위(앉아서 수건을 어르는 동작)와 유사하다. 춤사위의 유형 중 칼춤사위는 권역별(남부, 중부, 북부)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남부 지역의 여기검무 중 진주검무의 칼춤사위는 진주검무에 사용되는 칼의 목이 꺾이지 않음으로 인해 손목의 사용을 많이 하고 동작들이 절도가 있고 삼진삼퇴 동작을 하며 발을 굴려 위로 도약하는 동작이 많아 무무武舞적인 성격이 강하다.
통영검무의 칼춤사위는 겨드랑사위를 많이 사용함으로, 진주검무에 비해 내향성이 강하고 아기자기한 춤사위로 구성이 되어 있다. 호남검무의 칼춤사위는 손목을 빠르게 돌리는 돌림사위, 칼을 돌리다가 꺾는 면사위, 꽃봉오리 등 기교적인 측면이 강하다. 한편 세 지역의 칼춤사위 중 공통적인 춤사위는 머리위에서 칼을 뿌리며 돌리는 윗사위(진주검무), 돌림사위(통영검무), 머릿사위(호남검무)이다.
중부 지역의 여기검무 중 경기검무의 칼춤사위에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바로 양팔을 수평으로 펴서 칼을 돌리는 옆돌림사위가 많고 상대방과 만나 힘을 겨루는 듯한 동작이 궁중검무에 비해 다양하다. 음·양머리 윗사위는 경기검무만의 독특한 칼춤사위이다. 궁중검무는 서울권번의 춤과 진주검무를 바탕으로 하여 궁중의 문헌을 토대로 재정리한 춤이기에 민속적인 성격보다 궁중 정재의 성격이 강하고 진주검무의 춤사위와 유사한 동작들이 나타난다. 중부 지역의 특징적인 춤사위로는 하·상사위와 던지고 당길사위 등이 있다.
북부 지역의 여기검무 중 해주검무의 칼춤사위는 돌림사위를 위주로 하고 있으며, 위로 뿌리는 동작이 비교적 적고 칼을 가지고 추는 다양한 춤사위가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전립테에 한손을 대고 한손으로 칼춤을 추는 특징적인 동작이 있다. 평양검무는 돌림사위와 기본동작(모듬사위)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번개사위와 위로 칼 뽑는 사위 등 위로 뿌리는 동작이 해주검무에 비해 많아 역동적이다. 또한 칼 돌려 머리쓸기와 같은 특징적인 춤사위가 존재한다. 두 지역 춤사위의 공통점은 돌림사위와 모듬사위(모듬뺄사위)로 다른 지역의 돌림사위가 팔을 스쳐서 칼을 돌리는 반면, 북부지역의 돌림사위는 팔 위에 칼을 얹지 않고(팔을 많이구부리지 않고) 손목을 돌려 칼을 움직이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서 칼을 돌리는 칼춤사위인 모듬사위는 북부 지역 교방검무만의 특징이다.
춤사위의 유형 중 연풍대사위는 권역별(남부, 중부,북부)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남부 지역의 교방검무 중 진주검무와 통영검무의 연풍대사위는 연풍대사위를 하고 나서 원의 대형에서 이열종대형으로 대형 변화가 일어난다. 진주검무는 이열종대로 밀고 당기는 삼진삼퇴와 제자리에서 기본 칼사위를 한 후 다시 원의 대형을 만들어 다음 연풍대사위를 진행한다. 통영검무 역시 연풍대사위를 하고 나서 이열종대형으로 대형변화를 일으켜 기본 칼사위를 한 후 다시 원의 대형을 만들어 다음 연풍대사위를 진행한다. 호남검무는 이러한 대형의 변화 없이 연속적으로 원의 대형으로 오른발을 놓으며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앉는다. 진주·통영검무는 앉지는 않고 상체를 숙이기만 한다. 세 지역의 연풍대사위는 공통적으로 상체를 앞으로 많이 숙이고 뒤로 많이 젖혀서 상체의 회전각도를 크게 하여 표현한다.
중부 지역 교방검무의 연풍대사위는 진주·통영검무와 같이 대형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원의 대형으로 계속 진행이 된다. 호남검무와 같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오른발을 놓으며 앉고, 상체를 뒤로 젖혀서 왼발을 들어서 놓는다. 경기검무의 연풍대사위가 모두 상체를 숙이고 오른발을 놓으며 앉고, 상체를 뒤로 젖혀서 왼발을 들어 놓는 반면, 궁중검무는 상체를 숙이는 동작, 앉는 동작, 서서 회전하는 동작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북부 지역 교방검무의 연풍대사위는 다른 지역의 연풍대사위와 달리 상체를 숙이고 젖힘이 없이 상체를 세워서 회전을 하며 진행된다. 또한 칼로 땅을 찍는 동작들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북부 지역 교방검무 만의 특징이다.

특징 및 의의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의 검무시와 풍속도 등을 통해 세밀히 묘사된 교방검무가 궁중 및 민간의 연회宴會에서 널리 추어 왔고 지금까지 각 지역에서 전승되는 이유는 예술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교방검무는 춤의 흐름에 있어 전반부에는 음성(내향성, 정적인 요소)을 표현하고, 칼을 들고 추는 후반부에서는 양성(외향성,동적인 요소)을 표출하는 이중적인 요소가 조화롭게 결합이 되어 표현되는 춤이다. 공간 사용에 있어 대지지향성과 위로 도약하는 역동성을 동시에 지니며 대형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춘다.
또한 교방검무는 다양한 유형의 춤사위(한삼춤, 선손춤, 앉은 손춤, 앉은 칼춤, 선 칼춤, 연풍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중정재의 요소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민속무용승무, 살풀이, 입춤, 탈춤의 춤사위가 담겨져 있다. 교방검무는 군무群舞로 전승된 춤이기에 홀춤에 비해 변형이 되지 않아 한국 전통춤의 원형적 춤사위를 간직한 중요성을 띤 춤이다. 또한 현재 공연되고 있는 각 지역 교방검무의 반주음악은 그 지역의 독특한 음악 어법인 향제 삼현육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향제 삼현육각은 지역마다 전승되는 과정에서 지역적 특색을 갖게 되어 음악적 특징, 악곡구성등이 각기 다르게 되어 있다.

참고문헌

교방가요(성무경, 보고사, 2002), 무형문화재 음악조사보고서4-삼현육각(이보형,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4), 정재무도홀기(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조선시대 연회도(서인화·윤진영, 민속원, 2001), 조선조 기녀검무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고찰(조혁상, 검무의 역사와 미의식, 김영희 춤연구소 심포지엄, 2015), 한국무용사(이병옥, 노리, 1996), 한국의교방검무(임수정, 민속원, 2011), 한국의 전통춤(정병호, 집문당, 1999).

검무

검무
한자명

劒舞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무용

집필자 임수정(林守正)

정의

검劍을 들고 추는 춤으로 상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연행되어 온 춤.

내용

검무劍舞는 이 땅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연원을 지니고 있는 춤이다. 상고시대의 수렵무용狩獵舞踊이나 의례무용儀禮舞踊 혹은 전투무용戰鬪舞踊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검무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맥脈을 이어 오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전통춤이다.
공연 형태를 갖춘 검무의 출현은 삼국시대 신라의 황창랑黃昌郞 설화에 기인한 황창검무黃昌劍舞로, 가면을 쓴 동자童子가 추는 동자가면무童子假面舞의 양식이다. 황창검무는 고려시대에도 전승되어 조선시대 초까지 처용무와 함께 연희되었다. 황창검무와 다른 양식의 검무가 출현한 것은 조선시대 숙종 이후로 가면을 벗고 여기女妓가 추는 여기검무女妓劍舞의 형태가 나타난다.
여기검무는 정조 때 궁중정재로 정착되면서 궁중연향宮中宴享의 성격에 맞도록 연행 규모가 커지고 의상도 화려해졌으며, 참여한 여기의 숫자도 많아지는 변화를 보였다. 즉, 궁중무용으로 채용되면서 여러 가지 격식이 갖추어졌고 공연형식도 더욱 예술적으로 발전하였다. 궁중정재의 하나로 조선 후기 각종 연향의 공연 종목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예술적으로 한층 다듬어지고 세련되어진 여기검무는, 궁중 연향에 참가하기 위해 궁중으로 선상選上된 각 지방 교방의 기녀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전파되면서 각 지방의 독특한 특색을 담은 현재의 향제鄕制 교방검무 양식을 파생시켰다. 현재 각 지역에서 전승되는 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 경기검무, 궁중검무, 해주검무, 평양검무 등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검무가 문헌상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동경잡기東京雜記』 「풍속조風俗條」, 『삼국사기三國史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통해 신라시대 검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동경잡기』 권1 「풍속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舞劒之戱: 黃倡郞新羅人也. 諺傳, 年七歲入百濟, 市中
舞劍, 觀者如堵, 濟王聞之, 召觀, 命升堂舞劒, 倡郞因
刺王, 國人殺之, 羅人哀之, 像其容, 爲假面, 作舞劒之
狀, 至今傳之.
무검지희: 황창랑은 신라 사람이다. 민간에 전하기를, “나이 칠 세에 백제로 들어가 칼춤을 추니 구경꾼이 담처럼 모였다. 백제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들여 보고는 당으로 올라와 칼춤을 추라고 명령했다. 황창랑은 그리하여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찔러 죽였다. 이에 백제 사람들이 황창랑을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그의 형상을 본떠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다.”라고 한다. 지금까지 그 칼춤이 전해 내려온다.

또한 『증보문헌비고』 「황창랑무조黃昌郞舞條」의 기록을 통해 신라시대의 검무는 황창랑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황창검무이며, 전투무용이나 묘기를 보이는 검무가 아닌 가면을 착용하는, 희극성을 띤 가면동자무假面童子舞의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황창검무는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 지속적으로 민간에 전승되었다.

諺傳, 八歲童子爲新羅王, 謀釋憾於百濟, 往百濟市, 以
劍舞, 市人觀者如堵墻, 百濟王聞之, 召入宮令舞, 昌郞
於座, 揕王殺之. 後世作假面以像之,與處容舞並陳.
민간에 전하기를, “8세의 동자가 신라왕을 위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풀고자 백제 거리에 들어가 검무를 추니 거리의 구경꾼이 담과 같이 모여 들었다. 백제왕이 그것을 듣고 관에 불러 들여 춤추게 하였다. 창랑은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후세에 그 상을 본떠서 가면을 만들었고, 처용무와 더불어 연희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검무는 신라의 검무를 계승하여 황창무로 불리는 가면희假面戱가 성행하였고, 처용무와 함께 추어졌으며 무무武舞의 씩씩한 기상을 나타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증보문헌비고』에서 “후세작가면이상지, 여처용무병진後世作假面以像之, 與處容舞並陳”, 즉 “후세에 가면을 만들어 쓰고 처용무와 함께 연희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황창무가 처용무와 함께 춤추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학규李學逵가 지은 『영남악부嶺南樂府』의 「황창랑黃昌郞」 에서 인용한 『경주부지慶州府志』에 의하면, 이첨李詹, 1345~1405이 1385년 겨울에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베푼 향연에서 가면동자검무를 보았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又按李詹黃倡郞辨, 曰, 乙丑冬, 客于鷄林, 府尹裵公設
鄕樂以勞之, 有假面童子, 舞釰于庭. 問之, 云, 羅代有
黃昌者, 年可十五六歲, 善舞釰.
또 이첨의 「황창랑변黃昌郞辨」 을 살펴보니, 그곳에서 이르기를, “을축년 겨울에 계림에 객으로 갔을 때 부윤 배공이 향악을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가면을 쓴 동자가 뜰에서 검을 들고 춤을 추기에 물었더니 ‘신라에 황창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열대여섯 살 정도이나 춤을 잘 추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을축년은 1385년(고려 우왕 11)에 해당되므로, 이 기록으로 본다면 고려 말까지 신라시대의 검무가 확실히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경잡기』, 『증보문헌비고』 및 『경주부지』의 기록을 통해 당시의 검무가 신라의 가면무의 양식을 계승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의 검무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계속 전승되고 있었다는 것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동도악부東都樂府』로써 증명이 된다. 이것은 김종직이 동도東都, 즉 경주에서 황창검무를 보고 감회를 피력 한 것이다. 또한 광해군 때의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 1577~1624의 『해동악부海東樂府』에도 황창검무의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 중기(숙종 이후)의 검무는 이전 시기의 형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숙종 때의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지은 『서포집西浦集』의 <관황창무觀黃昌舞>라는 칠언고시 중 ‘취미여아황창무翠眉女兒黃昌舞’라는 시구는 이때부터 여기女妓에 의한 검무가 있었던 것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같은 시대인 1712년(숙종 38) 연경사행燕京使行의 수행원이었던 김창업金昌業의 왕래견문록往來見聞錄인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의 기록을 통해 가면을 쓰지 않은 여기 2인의 검무 모습을 살필 수 있어 여기검무가 숙종 초부터 출연하여 여기가 있는 여러 고을에서 여악女樂의 출연물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숙종 이후 여러 문인들의 관무시觀舞詩에도 기녀가 검무를 추는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화백씨간검무和伯氏看劍舞>는 자신의 맏형 김창집金昌集이 평안북도 선천에서 검무를 보고 노래한 것에 화운하여 노래한 것이다.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가 1749년에 지은 <전주한벽당십이곡全州寒碧堂十二曲>에서는 호남검무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신광수가 평양 연광정練光亭에서 검무를 추는 기생 추강월秋江月에게 지어 준 시도 남아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780년(정조 4)에 지은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에는 진주검무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37~1805의 문집인 『정유각집貞蕤閣集』에는 명기 운심雲心의 밀양검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 외에 많은 여기검무시가 남겨진 것은 여기검무가 그 당시 연회의 춤 종목으로 여러 지역에서 활발히 추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말 1872년(고종 9)에 정현석이 진주목사로 부임할 당시 간행한 『교방가요』에는 진주의 교방에서 연희되는 진주검무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 문헌의 기록을 통해 여기검무의 특징은 무武적인 성향의 황창검무와는 달리 여기女妓의 예藝적 성향의 검무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여기검무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도상학적 자료는 연회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이다. 18세기 후반인 1745년(영조 21) 작인 김홍도의 <평양감사환영도平壤監司歡迎圖> 나 1758년(영조 34) 작인 신윤복의 <쌍검대무雙劍對舞>그림에서 당시 여기검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세기 말 풍속화가 김준근의 <쌍검무雙劍舞>에서는 18세기 여기검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윤복의 <쌍검대무>에 나오는 칼은 길고 곧은 직선적인 형태의 모습인 반면, 김준근의 <쌍검무>의 칼은 길이가 짧고 끝이 약간 굽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여기검무는 전승되어 오는 동안 무구의 형태가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72년(고종 9) 정현석의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동기童妓 두 명과 소기少妓 두 명 등 모두 네 명의 기녀가 목이 구부러지지 않은 칼을 들고 검무를 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편 궁중의 기록에 검무가 등장하는 것은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생모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에 행차한 일과 그것에 수반된 여러 왕실 행사의 기록을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이다. 1475년(성종 6)에 창제된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보면 처용무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으나 검무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처용무와 함께 추어지던 검무가 민간에서 널리 유행하다 정조 때 궁중정재로 정착이 된 듯하다. 이후 순조를 거쳐 고종 대에 이르는 『진찬의궤』, 『진연의궤』의 기록에 정재종목으로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다. 또한 궁중연향 때 연희되었던 춤의 형태와 종류를 기록한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검무의 무보舞譜와 음악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궁중검무의 연행 양상을 살필 수 있다. 궁중정재의 하나로 조선 후기 각종 연향의 공연 종목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예술적으로 한층 다듬어지고 세련되어진 여기검무는 궁중 연향에 참가하기 위해 선출된 각 지방 교방의 기녀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전파되면서 각 지방의 독특한 특색을 담은 현재의 향제鄕制 교방검무 양식을 파생시켰다.
조선시대 교방은 서울과 지방관아 사이에서 상호 유대성을 가지고 왕래하였으며 조선 후기는 궁중연향에 참가한 각 지방 교방청敎坊廳 소속의 기녀들 간의 상호접촉과 기예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교방청의 여기들에 의해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추어지고 정착되어 전승되고 있는 교방검무는 예술적 형식(복식구성, 장단구성, 춤의 진행방식)에 있어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무구舞具인 칼의 모습과 반주음악, 춤사위 등은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향제의 서로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교방검무의 지역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 지역 교방검무의 무복舞服은 의궤에 나타난 궁중검무의 복식인 치마·저고리·쾌자·전대·전립을 착용한다. 하지만 색상은 각 지역의 특색을 담아 다채롭게 나타난다. 의궤에 나타나지 않는 한삼은 한삼춤이 존재하는 남부 지역의 검무(진주검무·통영검무·호남검무)에서 사용된다.
둘째, 각 지역 교방검무의 무구인 칼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의궤에 나타난 검무의 칼은 칼 목이 꺾이지 않는 칼을 사용하였으나 1900년대 이후부터 칼 목이 꺾여 자유롭게 돌릴 수 있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진주검무·궁중검무 역시 칼 목이 꺾여 돌아가는 칼을 사용하였으나 현재에는 원형을 복원시켜 칼 목이 꺾이지 않는 칼을 사용한다. 나머지 지역의 교방검무는 1900년대 이후에 나타난 칼 목이 꺾여 돌아가는 칼을 사용한다. 하지만 각 지역에 따라 칼의 재질을 백동재질·철제재질·놋쇠재질·나무재질로 달리하여 사용한다.
셋째, 각 지역 교방검무에 사용하는 반주음악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교방검무의 장단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한삼춤이 존재하는 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는 염불장단·타령장단·자진타령장단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고, 그 외에 한삼춤이 없이 손춤으로 시작되는 여기검무는 타령장단·자진타령장단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단구성이 비슷하더라도 선율은 각 지역의 독특한 음악어법을 담은 향제삼현육각을 사용하고 있다.
넷째, 각 지역 교방검무의 춤사위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는 한삼춤-선 손춤-앉은 손춤-앉은 칼춤-선 칼춤-연풍대-제행이무로 구성한다. 경기검무, 궁중검무, 해주검무, 평양검무는 선 손춤-앉은 손춤-앉은 칼춤-선 칼춤-연풍대-제행이무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적으로 볼 때 남쪽의 검무(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는 한삼춤으로 시작되고, 북쪽의 검무(경기검무, 궁중검무, 해주검무, 평양검무)는 한삼춤을 추지 않고 손춤으로 시작된다.
다섯째, 각 지역 교방검무의 춤사위에 나타난 지역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춤사위 유형 중 한삼춤은 남부지역의 여기검무인 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에서 나타난다. 진주검무의 한삼춤은 궁중정재의 한삼춤과 유사하며, 통영검무의 한삼춤은 경상남도 통영 지역 민속무용의 특징인 겨드랑 사위를 많이 사용하고, 호남검무의 한삼춤은 민속무용인 승무의 춤사위들이 나타난다. 춤사위 유형 중 선 손춤에서는 각 지역의 민속춤인 입춤, 승무, 살풀이, 탈춤 등의 춤사위가 나타난다. 앉은 손춤에서는 칼을 어르는 농검弄劍에 해당하는 춤사위들로 살풀이춤(혹은 입춤)의 앉은사위(앉아서 수건을 어르는 동작)와 유사하다. 춤사위의 유형 중 칼춤사위는 권역별(남부, 중부, 북부)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남부 지역의 여기검무 중 진주검무의 칼춤사위는 진주검무에 사용되는 칼의 목이 꺾이지 않음으로 인해 손목의 사용을 많이 하고 동작들이 절도가 있고 삼진삼퇴 동작을 하며 발을 굴려 위로 도약하는 동작이 많아 무무武舞적인 성격이 강하다.
통영검무의 칼춤사위는 겨드랑사위를 많이 사용함으로, 진주검무에 비해 내향성이 강하고 아기자기한 춤사위로 구성이 되어 있다. 호남검무의 칼춤사위는 손목을 빠르게 돌리는 돌림사위, 칼을 돌리다가 꺾는 면사위, 꽃봉오리 등 기교적인 측면이 강하다. 한편 세 지역의 칼춤사위 중 공통적인 춤사위는 머리위에서 칼을 뿌리며 돌리는 윗사위(진주검무), 돌림사위(통영검무), 머릿사위(호남검무)이다.
중부 지역의 여기검무 중 경기검무의 칼춤사위에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바로 양팔을 수평으로 펴서 칼을 돌리는 옆돌림사위가 많고 상대방과 만나 힘을 겨루는 듯한 동작이 궁중검무에 비해 다양하다. 음·양머리 윗사위는 경기검무만의 독특한 칼춤사위이다. 궁중검무는 서울권번의 춤과 진주검무를 바탕으로 하여 궁중의 문헌을 토대로 재정리한 춤이기에 민속적인 성격보다 궁중 정재의 성격이 강하고 진주검무의 춤사위와 유사한 동작들이 나타난다. 중부 지역의 특징적인 춤사위로는 하·상사위와 던지고 당길사위 등이 있다.
북부 지역의 여기검무 중 해주검무의 칼춤사위는 돌림사위를 위주로 하고 있으며, 위로 뿌리는 동작이 비교적 적고 칼을 가지고 추는 다양한 춤사위가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전립테에 한손을 대고 한손으로 칼춤을 추는 특징적인 동작이 있다. 평양검무는 돌림사위와 기본동작(모듬사위)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번개사위와 위로 칼 뽑는 사위 등 위로 뿌리는 동작이 해주검무에 비해 많아 역동적이다. 또한 칼 돌려 머리쓸기와 같은 특징적인 춤사위가 존재한다. 두 지역 춤사위의 공통점은 돌림사위와 모듬사위(모듬뺄사위)로 다른 지역의 돌림사위가 팔을 스쳐서 칼을 돌리는 반면, 북부지역의 돌림사위는 팔 위에 칼을 얹지 않고(팔을 많이구부리지 않고) 손목을 돌려 칼을 움직이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서 칼을 돌리는 칼춤사위인 모듬사위는 북부 지역 교방검무만의 특징이다.
춤사위의 유형 중 연풍대사위는 권역별(남부, 중부,북부)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남부 지역의 교방검무 중 진주검무와 통영검무의 연풍대사위는 연풍대사위를 하고 나서 원의 대형에서 이열종대형으로 대형 변화가 일어난다. 진주검무는 이열종대로 밀고 당기는 삼진삼퇴와 제자리에서 기본 칼사위를 한 후 다시 원의 대형을 만들어 다음 연풍대사위를 진행한다. 통영검무 역시 연풍대사위를 하고 나서 이열종대형으로 대형변화를 일으켜 기본 칼사위를 한 후 다시 원의 대형을 만들어 다음 연풍대사위를 진행한다. 호남검무는 이러한 대형의 변화 없이 연속적으로 원의 대형으로 오른발을 놓으며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앉는다. 진주·통영검무는 앉지는 않고 상체를 숙이기만 한다. 세 지역의 연풍대사위는 공통적으로 상체를 앞으로 많이 숙이고 뒤로 많이 젖혀서 상체의 회전각도를 크게 하여 표현한다.
중부 지역 교방검무의 연풍대사위는 진주·통영검무와 같이 대형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원의 대형으로 계속 진행이 된다. 호남검무와 같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오른발을 놓으며 앉고, 상체를 뒤로 젖혀서 왼발을 들어서 놓는다. 경기검무의 연풍대사위가 모두 상체를 숙이고 오른발을 놓으며 앉고, 상체를 뒤로 젖혀서 왼발을 들어 놓는 반면, 궁중검무는 상체를 숙이는 동작, 앉는 동작, 서서 회전하는 동작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북부 지역 교방검무의 연풍대사위는 다른 지역의 연풍대사위와 달리 상체를 숙이고 젖힘이 없이 상체를 세워서 회전을 하며 진행된다. 또한 칼로 땅을 찍는 동작들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북부 지역 교방검무 만의 특징이다.

특징 및 의의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의 검무시와 풍속도 등을 통해 세밀히 묘사된 교방검무가 궁중 및 민간의 연회宴會에서 널리 추어 왔고 지금까지 각 지역에서 전승되는 이유는 예술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교방검무는 춤의 흐름에 있어 전반부에는 음성(내향성, 정적인 요소)을 표현하고, 칼을 들고 추는 후반부에서는 양성(외향성,동적인 요소)을 표출하는 이중적인 요소가 조화롭게 결합이 되어 표현되는 춤이다. 공간 사용에 있어 대지지향성과 위로 도약하는 역동성을 동시에 지니며 대형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춘다.
또한 교방검무는 다양한 유형의 춤사위(한삼춤, 선손춤, 앉은 손춤, 앉은 칼춤, 선 칼춤, 연풍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중정재의 요소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민속무용인 승무, 살풀이, 입춤, 탈춤의 춤사위가 담겨져 있다. 교방검무는 군무群舞로 전승된 춤이기에 홀춤에 비해 변형이 되지 않아 한국 전통춤의 원형적 춤사위를 간직한 중요성을 띤 춤이다. 또한 현재 공연되고 있는 각 지역 교방검무의 반주음악은 그 지역의 독특한 음악 어법인 향제 삼현육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향제 삼현육각은 지역마다 전승되는 과정에서 지역적 특색을 갖게 되어 음악적 특징, 악곡구성등이 각기 다르게 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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