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이태원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전설

집필자 김준기(金俊基)

정의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이태원’이라는 마을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는 전설.

줄거리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서울로 쳐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지금의 이태원 황학골이란 곳에 비구니들이 거주하는 운종사(雲鐘寺)라는 절이 있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부하들을 이끌고 이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들을 탈취하여 얼마 동안 머무르며 지내다가, 이곳을 떠나며 그 절을 불태워 버렸다. 그때 왜장들과 관계를 가졌던 비구니들은 갈 데가 없어 융경산(隆景山) 부군당 밑에 토막을 짓고 살다가, 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를 알고 그곳을 이태(異胎)가 있는 집이라고 하였고, 그 일대를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분석

이태원에 대한 지명유래담은 어떤 한자로 마을 명칭을 표기하느냐에 따른 민간어원적인 설명이 특징이다. 위에서 언급된 이태원(異胎院)의 전설과 유사한 내용이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한 왜군들이 귀화해서 이곳에 살았는데, 그들을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불렀고, 여기에서 마을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한자를 이태원(梨泰院)이라고 하는 경우의 전설은 어떤 이가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배 농사가 잘 되었으므로 마을 이름에 ‘배 이(梨)’ 자가 쓰였다는 것이다.

특징

조선시대 이곳에는 역원(驛院)이 위치해 있었고, 인접해 있는 용산과 서빙고는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물류가 활발히 유통되던 주요 포구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징으로 인해 이 일대는 한양으로 통하는 주요 관문으로서,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용산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의 주둔지가 되었고, 광복 이후 미군의 주둔지로 이용되면서, 이태원에는 외국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현재 외국인의 집단 거주지이자 외국문화의 집결지로서 이태원의 모습은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이태원은 현재도 외국인들로 붐비는 곳이고, 이들을 위한 호텔, 음식점, 상가 등이 밀집된 지역이어서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의 진위를 떠나 ‘이태(異胎)’, ‘이타인(異他人)’이 사는 지역이라는 전설의 내용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이태원의 정체성을 잘 반영하고 있어 흥미롭다.

출처

東國輿地備攷, 한국민간전설집(최상수, 통문관, 1958),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서울(문화공보부, 1979).

참고문헌

서울사화(박경룡, 정음문화사, 1986), 서울 육백년사(서울시사편찬위원회, 민속편, 1995), 용산구지(용산구, 1992).

이태원

이태원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전설

집필자 김준기(金俊基)

정의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이태원’이라는 마을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는 전설.

줄거리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서울로 쳐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지금의 이태원 황학골이란 곳에 비구니들이 거주하는 운종사(雲鐘寺)라는 절이 있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부하들을 이끌고 이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들을 탈취하여 얼마 동안 머무르며 지내다가, 이곳을 떠나며 그 절을 불태워 버렸다. 그때 왜장들과 관계를 가졌던 비구니들은 갈 데가 없어 융경산(隆景山) 부군당 밑에 토막을 짓고 살다가, 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를 알고 그곳을 이태(異胎)가 있는 집이라고 하였고, 그 일대를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분석

이태원에 대한 지명유래담은 어떤 한자로 마을 명칭을 표기하느냐에 따른 민간어원적인 설명이 특징이다. 위에서 언급된 이태원(異胎院)의 전설과 유사한 내용이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한 왜군들이 귀화해서 이곳에 살았는데, 그들을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불렀고, 여기에서 마을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한자를 이태원(梨泰院)이라고 하는 경우의 전설은 어떤 이가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배 농사가 잘 되었으므로 마을 이름에 ‘배 이(梨)’ 자가 쓰였다는 것이다.

특징

조선시대 이곳에는 역원(驛院)이 위치해 있었고, 인접해 있는 용산과 서빙고는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물류가 활발히 유통되던 주요 포구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징으로 인해 이 일대는 한양으로 통하는 주요 관문으로서,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용산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의 주둔지가 되었고, 광복 이후 미군의 주둔지로 이용되면서, 이태원에는 외국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현재 외국인의 집단 거주지이자 외국문화의 집결지로서 이태원의 모습은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이태원은 현재도 외국인들로 붐비는 곳이고, 이들을 위한 호텔, 음식점, 상가 등이 밀집된 지역이어서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의 진위를 떠나 ‘이태(異胎)’, ‘이타인(異他人)’이 사는 지역이라는 전설의 내용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이태원의 정체성을 잘 반영하고 있어 흥미롭다.

출처

東國輿地備攷, 한국민간전설집(최상수, 통문관, 1958),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서울(문화공보부, 1979).

참고문헌

서울사화(박경룡, 정음문화사, 1986), 서울 육백년사(서울시사편찬위원회, 민속편, 1995), 용산구지(용산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