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义湘)

의상

한자명

义湘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전설

집필자 오대혁(吳大赫)

정의

신라의 승려 의상(義相)에 대해 전하는 설화.

역사

의상에 관련된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이야기들에 대해 일연 선사는 『국사(國史)』, 『고기(古記)』, 『고전(古傳)』, 『신라고전(新羅古傳)』과 최치원의 「부석본비(浮石本碑)」 등을 참고했다고 했다. 일연 당시만 하더라도 의상과 관련된 설화가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음을 알려 준다. 하지만 이 기록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다만 「부석본비」에 대해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이 간략하게 「부석본비」를 소개한 대목이 보인다. 원효와 더불어 신라 사상계를 이끌었던 의상의 비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줄거리

의상은 29세가 되던 해에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 의상은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가던 도중 요동에서 간첩 혐의로 갇힌 지 열흘 만에 돌아와야 했다. 650년(진덕여왕 4)에 의상은 당나라의 배를 만나 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의상은 양주에 도착해 유지인의 청으로 관아에 머물게 되었다. 마침내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을 찾아뵈었다. 지엄은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보는 꿈을 꾸고 맞이하노라고 했다. 비로소 의상은 화엄을 비롯한 묘지의 깊은 뜻까지도 해석하게 되었다. 이 당시 당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김흠순(또는 김인문)과 양도 등이 의상에게 고국으로 돌아가 당 고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 달라고 했다. 의상은 귀국하여 조정에 그 사실을 알렸다. 이에 신인대덕인 명랑(明朗)으로 하여금 제단을 가설하고 비법으로 저들을 물리쳐 국난을 면하게 하였다. 676년에 의상은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불교의 강론을 폈으며, 많은 영험한 이적들을 남겼다. 문인 현수는 의상 법사에게 소를 지어 올리고, 참으로 은근하고 간절한 서한을 지어 보냈다. 의상은 열 곳에 사찰을 지어 화엄의 교학을 전하게 하였다. 오진, 지통, 표훈 등 열 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모두가 성인에 버금가는 제자들이었다.

위의 내용은 『삼국유사』 의상전교(義湘傳敎) 조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데, 의상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설화인 부석사 창건 연기설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의상은 원효와 더불어 당으로 들어서다 토감(土龕)에 머무르게 된다. 거기에서 원효는 귀신을 만나 놀라는 경험을 통해 일심(一心)이 진리임을 깨닫고 돌아간다. 혼자서 등주의 바닷가에 이른 의상은 한 신자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빼어난 용모의 선묘(善妙)라는 처자를 만난다. 선묘는 의상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그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세세생생(世世生生) 스님께 귀의하겠다고 다짐한다. 나중에 의상은 귀국하는 길에 옛 단월의 집에 이르러 예전에 신세를 졌던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상선을 불러 닻줄을 풀게 하였다. 선묘는 미처 의상을 만나지 못하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를 상자에 넣어 떠나가는 배를 향해 던진다. 그러면서 선묘는 큰 용이 되어 배가 무사히 항해하도록 돕고, 의상이 고국에 돌아가 불법을 펼치기를 기원한다. 지극한 정성으로 선묘는 용이 되어 배를 보호하고, 의상이 무사히 신라로 돌아가도록 했다. 환국한 의상은 화엄사상을 일으킬 생각으로 산천을 두루 돌아다녔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으려 한 곳에 다른 종파의 승려들이 있었다. 선묘는 신통력을 내어 큰 바위로 변신해 가람의 위를 덮었다. 승도(僧徒)들은 그 모습에 놀라 달아났다. 의상이 그제야 절에 들어가 화엄경을 한 해 내내 밤낮 없이 강론했고, 일부러 모으지 않아도 절로 찾아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변이

줄거리에 있는 내용과는 다른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의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取調信) 조에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정진했던 의상의 이야기가 전한다. 당에서 돌아온 의상 법사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보기 위해 7일간 재계(齋戒)한다. 그러자 용중과 천중 등 용천팔부의 시종이 굴 속으로 그를 인도였다. 의상이 공중을 향해 참례하여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았다. 그리고 또 다시 7일 동안 재계하니 마침내 그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관음보살의 말씀에 따라 산꼭대기에 솟아오른 한 쌍의 대나무가 있는 자리에 사찰을 짓게 된다.

부석사 관련 연기설화는 구비설화로도 많은 이본들이 있는데,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의상조사가 지은 부석사>, <까치가 터를 정한 부석사>,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의 사찰 창건과 득도> 등 9편 정도가 전하고 있다. 이 설화들에는 『송고승전(宋高僧傳)』(988년)에 나타난 화엄의 교리를 펴기 위해 창건되었다는 의도를 약화시키면서 뚜렷한 인과 관계 없이 전개되거나, 선묘와의 관련을 배제한 변이형들도 출현한다. 예컨대 <선묘룡의 도움으로 지은 부석사>에는 승도들이 도둑들로 나타나고, <부석사의 한샘>에는 선묘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의상이 ‘한샘’에 절을 지으려는데 아홉 마리의 용이 나타나 방해하자 용과 대결하여 승리함으로써 부석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범어사의 창건 연기에도 의상과의 관련성이 나타난다.

분석

의상 관련 설화들은 화엄사상이 관음 신앙과 관련을 맺고 낙산사 설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관음 신앙의 흐름은 찬녕(贊寧)이 편찬한 『송고승전』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에 전하는 <선묘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는 부석사의 창건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다. 의상의 부석사 창건 연기가 되는 이야기는 선묘가 불법을 수호하는 용으로 변신하고, 화엄교학이 이교도들을 내쫓으면서 근거지를 확보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기존의 설화들을 수습하여 의상전교 조와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 조를 구성하였다. 또한 의상 관련 설화는 『송고승전』의 「의상전」을 기반으로 한 부석사 창건 연기설화의 변이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설화들이 모두 의상이 해동화엄의 초조(初祖)로서 화엄 사상과 관음 신앙을 결합하여 대중 교화를 펼쳤던 역사적 사실을 흥미롭게 서사화하는 과정 중에 나타났음을 잘 보여 준다.

의의

의상 관련 설화는 설화와 승전의 구성 방식, 사찰 창건설화의 서사 형태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의상의 불교 사상을 설화적으로 잘 구현하고 있다는 데 그 의의가 깊다.

출처

梵魚寺誌, 三國遺事, 宋高僧傳,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2-4, 100; 7-10, 779; 7-9, 714.

참고문헌

한국사찰연기설화의 연구(김승호, 동국대출판부, 2005), 화엄십찰연기설화연구(이광우, 불교어문논집1, 한국불교어문학회, 1996).

의상

의상
한자명

义湘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전설

집필자 오대혁(吳大赫)

정의

신라의 승려 의상(義相)에 대해 전하는 설화.

역사

의상에 관련된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이야기들에 대해 일연 선사는 『국사(國史)』, 『고기(古記)』, 『고전(古傳)』, 『신라고전(新羅古傳)』과 최치원의 「부석본비(浮石本碑)」 등을 참고했다고 했다. 일연 당시만 하더라도 의상과 관련된 설화가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음을 알려 준다. 하지만 이 기록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다만 「부석본비」에 대해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이 간략하게 「부석본비」를 소개한 대목이 보인다. 원효와 더불어 신라 사상계를 이끌었던 의상의 비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줄거리

의상은 29세가 되던 해에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 의상은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가던 도중 요동에서 간첩 혐의로 갇힌 지 열흘 만에 돌아와야 했다. 650년(진덕여왕 4)에 의상은 당나라의 배를 만나 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의상은 양주에 도착해 유지인의 청으로 관아에 머물게 되었다. 마침내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을 찾아뵈었다. 지엄은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보는 꿈을 꾸고 맞이하노라고 했다. 비로소 의상은 화엄을 비롯한 묘지의 깊은 뜻까지도 해석하게 되었다. 이 당시 당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김흠순(또는 김인문)과 양도 등이 의상에게 고국으로 돌아가 당 고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 달라고 했다. 의상은 귀국하여 조정에 그 사실을 알렸다. 이에 신인대덕인 명랑(明朗)으로 하여금 제단을 가설하고 비법으로 저들을 물리쳐 국난을 면하게 하였다. 676년에 의상은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불교의 강론을 폈으며, 많은 영험한 이적들을 남겼다. 문인 현수는 의상 법사에게 소를 지어 올리고, 참으로 은근하고 간절한 서한을 지어 보냈다. 의상은 열 곳에 사찰을 지어 화엄의 교학을 전하게 하였다. 오진, 지통, 표훈 등 열 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모두가 성인에 버금가는 제자들이었다.

위의 내용은 『삼국유사』 의상전교(義湘傳敎) 조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데, 의상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설화인 부석사 창건 연기설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의상은 원효와 더불어 당으로 들어서다 토감(土龕)에 머무르게 된다. 거기에서 원효는 귀신을 만나 놀라는 경험을 통해 일심(一心)이 진리임을 깨닫고 돌아간다. 혼자서 등주의 바닷가에 이른 의상은 한 신자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빼어난 용모의 선묘(善妙)라는 처자를 만난다. 선묘는 의상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그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세세생생(世世生生) 스님께 귀의하겠다고 다짐한다. 나중에 의상은 귀국하는 길에 옛 단월의 집에 이르러 예전에 신세를 졌던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상선을 불러 닻줄을 풀게 하였다. 선묘는 미처 의상을 만나지 못하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를 상자에 넣어 떠나가는 배를 향해 던진다. 그러면서 선묘는 큰 용이 되어 배가 무사히 항해하도록 돕고, 의상이 고국에 돌아가 불법을 펼치기를 기원한다. 지극한 정성으로 선묘는 용이 되어 배를 보호하고, 의상이 무사히 신라로 돌아가도록 했다. 환국한 의상은 화엄사상을 일으킬 생각으로 산천을 두루 돌아다녔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으려 한 곳에 다른 종파의 승려들이 있었다. 선묘는 신통력을 내어 큰 바위로 변신해 가람의 위를 덮었다. 승도(僧徒)들은 그 모습에 놀라 달아났다. 의상이 그제야 절에 들어가 화엄경을 한 해 내내 밤낮 없이 강론했고, 일부러 모으지 않아도 절로 찾아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변이

줄거리에 있는 내용과는 다른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의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取調信) 조에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정진했던 의상의 이야기가 전한다. 당에서 돌아온 의상 법사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보기 위해 7일간 재계(齋戒)한다. 그러자 용중과 천중 등 용천팔부의 시종이 굴 속으로 그를 인도였다. 의상이 공중을 향해 참례하여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았다. 그리고 또 다시 7일 동안 재계하니 마침내 그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관음보살의 말씀에 따라 산꼭대기에 솟아오른 한 쌍의 대나무가 있는 자리에 사찰을 짓게 된다.

또 부석사 관련 연기설화는 구비설화로도 많은 이본들이 있는데,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의상조사가 지은 부석사>, <까치가 터를 정한 부석사>,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의 사찰 창건과 득도> 등 9편 정도가 전하고 있다. 이 설화들에는 『송고승전(宋高僧傳)』(988년)에 나타난 화엄의 교리를 펴기 위해 창건되었다는 의도를 약화시키면서 뚜렷한 인과 관계 없이 전개되거나, 선묘와의 관련을 배제한 변이형들도 출현한다. 예컨대 <선묘룡의 도움으로 지은 부석사>에는 승도들이 도둑들로 나타나고, <부석사의 한샘>에는 선묘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의상이 ‘한샘’에 절을 지으려는데 아홉 마리의 용이 나타나 방해하자 용과 대결하여 승리함으로써 부석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범어사의 창건 연기에도 의상과의 관련성이 나타난다.

분석

의상 관련 설화들은 화엄사상이 관음 신앙과 관련을 맺고 낙산사 설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관음 신앙의 흐름은 찬녕(贊寧)이 편찬한 『송고승전』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에 전하는 <선묘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는 부석사의 창건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다. 의상의 부석사 창건 연기가 되는 이야기는 선묘가 불법을 수호하는 용으로 변신하고, 화엄교학이 이교도들을 내쫓으면서 근거지를 확보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기존의 설화들을 수습하여 의상전교 조와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 조를 구성하였다. 또한 의상 관련 설화는 『송고승전』의 「의상전」을 기반으로 한 부석사 창건 연기설화의 변이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설화들이 모두 의상이 해동화엄의 초조(初祖)로서 화엄 사상과 관음 신앙을 결합하여 대중 교화를 펼쳤던 역사적 사실을 흥미롭게 서사화하는 과정 중에 나타났음을 잘 보여 준다.

의의

의상 관련 설화는 설화와 승전의 구성 방식, 사찰 창건설화의 서사 형태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의상의 불교 사상을 설화적으로 잘 구현하고 있다는 데 그 의의가 깊다.

출처

梵魚寺誌, 三國遺事, 宋高僧傳,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2-4, 100; 7-10, 779; 7-9, 714.

참고문헌

한국사찰연기설화의 연구(김승호, 동국대출판부, 2005), 화엄십찰연기설화연구(이광우, 불교어문논집1, 한국불교어문학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