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곡밥 유래

오곡밥 유래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전설

집필자 김명자(金明子)

정의

정월대보름 오곡밥을 먹는 유래에 관한 설화.

역사

우리나라에서 농경이 시작된 시기는 신석기문화 중기이다. 청동기문화시대에 들어오면 농경 지역이 크게 확대된다. 농작물 역시 벼, 보리, 조, 피, 수수, 콩과 같이 대단히 다양하다. 따라서 곡물을 이용한 음식이 일찍이 있었다. 대보름의 명절식인 오곡밥을 먹는 유래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부터 나타나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 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오곡밥이라 하지 않고 찰밥으로 나타나 있다. 오곡밥이라는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줄거리

신라 제21대 비처왕(毗處王)은 소지왕(炤知王)이라고도 하는데, 왕이 즉위한 지 10년째인 무진년(戊辰年, 488)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고, 쥐가 말하기를 까마귀가 있는 곳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령하여 뒤쫓게 하였다. 남쪽의 피촌(避村, 지금의 경주 남산 동쪽 기슭)에 이르렀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멈춰 서서 이 모습을 구경하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연못 가운데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 겉봉에 “이를 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사신이 와서 글을 바치니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일관(日官)은 “두 사람이란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뜯어 보니 “금갑(琴匣)을 쏴라.”라고 씌어 있었다. 왕은 궁궐로 돌아와 금갑을 쏘았다. 그 바람에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는 승려와 비빈이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다가 주살되었다.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따라 매년 정월 상해(上亥), 상자(上子), 상오(上午)일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로 하여 찰밥으로 제사지냈다. 이를 속어로는 달도(怛忉)라고 하며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모든 일을 금한다는 말이다.

분석

오곡밥이 찰기가 있는 밥인 탓에 약밥[藥飯]과 혼재될 수가 있다. 약밥은 찰밥에서 변형, 발전된 후대의 음식으로 오곡밥과는 확연히 다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상원 조에는 약밥과 오곡밥을 구별하여 기록한다. 『경도잡지(京都雜志)』와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는 약밥에 대한 기록이 있다. 특히 『경도잡지』에는 약밥이 신라 때부터의 음식이라 설명하여 오곡밥과 약밥이 혼재되는 결과를 낳았다. 고려시대 『목은선생문집(牧隱先生文集)』에 약밥을 주제로 한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약밥을 명절식으로 시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약밥은 조선시대에도 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짓고 오곡밥은 어느 가정에서나 짓는 정월대보름 명절식이었다.

의의

오곡밥은 대보름을 맞이하는 명절식이다. 또한 아직은 추운 때의 영양을 보충하면서 온갖 곡물의 풍요를 예축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 설화는 이러한 명절식의 유래를 설명하는 설화로서 문화 기원 설화의 의의를 지닌다.

출처

三國遺事, 東國歲時記, 京都雜志, 冽陽歲時記.

참고문헌

농경생활의 문화읽기(배영동, 민속원, 2000),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삼국·고려시대(국립민속박물관, 2003).

오곡밥 유래

오곡밥 유래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전설

집필자 김명자(金明子)

정의

정월대보름 오곡밥을 먹는 유래에 관한 설화.

역사

우리나라에서 농경이 시작된 시기는 신석기문화 중기이다. 청동기문화시대에 들어오면 농경 지역이 크게 확대된다. 농작물 역시 벼, 보리, 조, 피, 수수, 콩과 같이 대단히 다양하다. 따라서 곡물을 이용한 음식이 일찍이 있었다. 대보름의 명절식인 오곡밥을 먹는 유래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부터 나타나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 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오곡밥이라 하지 않고 찰밥으로 나타나 있다. 오곡밥이라는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줄거리

신라 제21대 비처왕(毗處王)은 소지왕(炤知王)이라고도 하는데, 왕이 즉위한 지 10년째인 무진년(戊辰年, 488)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고, 쥐가 말하기를 까마귀가 있는 곳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령하여 뒤쫓게 하였다. 남쪽의 피촌(避村, 지금의 경주 남산 동쪽 기슭)에 이르렀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멈춰 서서 이 모습을 구경하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연못 가운데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 겉봉에 “이를 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사신이 와서 글을 바치니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일관(日官)은 “두 사람이란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뜯어 보니 “금갑(琴匣)을 쏴라.”라고 씌어 있었다. 왕은 궁궐로 돌아와 금갑을 쏘았다. 그 바람에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는 승려와 비빈이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다가 주살되었다.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따라 매년 정월 상해(上亥), 상자(上子), 상오(上午)일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로 하여 찰밥으로 제사지냈다. 이를 속어로는 달도(怛忉)라고 하며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모든 일을 금한다는 말이다.

분석

오곡밥이 찰기가 있는 밥인 탓에 약밥[藥飯]과 혼재될 수가 있다. 약밥은 찰밥에서 변형, 발전된 후대의 음식으로 오곡밥과는 확연히 다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상원 조에는 약밥과 오곡밥을 구별하여 기록한다. 『경도잡지(京都雜志)』와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는 약밥에 대한 기록이 있다. 특히 『경도잡지』에는 약밥이 신라 때부터의 음식이라 설명하여 오곡밥과 약밥이 혼재되는 결과를 낳았다. 고려시대 『목은선생문집(牧隱先生文集)』에 약밥을 주제로 한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약밥을 명절식으로 시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약밥은 조선시대에도 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짓고 오곡밥은 어느 가정에서나 짓는 정월대보름 명절식이었다.

의의

오곡밥은 대보름을 맞이하는 명절식이다. 또한 아직은 추운 때의 영양을 보충하면서 온갖 곡물의 풍요를 예축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 설화는 이러한 명절식의 유래를 설명하는 설화로서 문화 기원 설화의 의의를 지닌다.

출처

三國遺事, 東國歲時記, 京都雜志, 冽陽歲時記.

참고문헌

농경생활의 문화읽기(배영동, 민속원, 2000),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삼국·고려시대(국립민속박물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