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火葬)

화장

한자명

火葬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구미래(具美來)

정의

죽은 이의 몸을 불에 태워서 처리하는 장법葬法.

역사

우리나라에서 화장의 흔적은 신석기시대부터 발견된다. 불교가 들어오고 나서 5세기경부터는 화장한 다음 뼈를 추려 용기에 담아 매장하는 화장묘火葬墓의 풍습이 생겨났다. 7세기 중엽에 이르면 불교의 영향권 속에서 화장이 본격적인 장법으로 조명되기 시작하며, 기록상 최초로 화장된 이는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590~658)으로, 화장 후 석혈石穴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이어 문무왕을 비롯해 효성왕・선덕왕・원성왕・진성여왕・효공왕・신덕왕・경명왕 등 8명의 왕이 화장되었으니, 왕실과 지배층에 불교적 죽음관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전까지 많은 부장품으로 치장하던 거대하고 화려한 무덤이 사라지고 무덤의 크기와 수가 축소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통일신라 중반까지는 승려사회에서도 화장이 일반화되지 않다가,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에서 선종禪宗이 들어오면서부터 화장이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선불교가 크게 일어나 선문구산禪門九山이 확립되자, 각 선문의 문도들은 조사祖師가 입적한 뒤 후세에 보존될 조형적인 장골처藏骨處를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고승이 입적한 뒤 화장을 하면 사리가 나온다고 하여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는 묘탑으로 부도浮屠를 조성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본격적으로 화장이 사회전반에 정착된 것은 고려 중기인 12세기 이후로, 왕실・민간에서도 점차 광범위하게 화장을 수용하였다.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도 화장한 다음 유골을 매장하는 이중장二重葬을 치렀는데, 묘지명墓誌銘 등의 기록을 참조하여 정리한 고려시대 불자들의 화장풍습은 다음과 같다. ①사찰이나 집에서 사망하면 그곳에 2~26일간 빈소를 차리고 ②좋은 날을 받아 산기슭이나 사찰 주변 화장지에서 화장한 뒤 ③유골을 수합해 사찰에 일정기간(2~76개월) 모시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권안權安을 거쳐 ④좋은 날을 받아 용기에 넣은 유골을 매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과 맞지 않는 화장을 전면적으로 금하였으나 화장풍습이 계속되자 금령을 어기는 자들을 처벌하였다. 이에 화장은 민간의 풍습에서 점차 사라져 극빈자나 특수하게 죽은 자에게 적용하는 장법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화장이 배척 대상이었다면, 일제강점기의 화장은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일제는 우리의 전통과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관혼상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1912년 6월에 총독부령으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을 공포하였고, 그 결과 화장이 다시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이후 대도시를 중심으로 화장장이 설치되어, 1923년 707건에 불과했던 화장 숫자가 4년 뒤에는 배 이상인 1,530건로 증가하였다. 일제강점기의 화장은 외세에 의해 주도 되었다는 점에서 타율적 수용이다. 그렇지만 수백 년간 화장을 금지했음에도, 화장에 대한 서민들의 기본적인 수요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광복 이후에는 화장이 1천 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장례의 하나가 아니라, 식민문화의 잔재로 여겨졌다. 그래서 1971년의 화장 비율은 7%에 불과하였고 1980년대까지 화장 비율의 증가는 미미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증가하여 2005년에 전국의 화장 비율은 절반을 넘어선 53%에 달하였고, 2012년 현재 74%에 이르렀다. 매장은 자연친화적이고 전통적정서에 적합한 장례방식이지만, 무덤으로 인한 국토의 잠식, 산림의 황폐화, 무연고 무덤의 증가 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친환경적 대안으로 화장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내용

근대 이후의 화장은 불교적 의미와 무관하게 치러지고 있지만, 화장이 불교적 장법임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일반인은 화장시설 이외의 장소에서 화장을 할 수 없지만, 승려는 사찰에서 일정한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을 행할 수 있다. 승려의 다비식茶毘式은 장작더미・숯 등으로 화장장을 만들고, 그 위에 관을 올려놓은 뒤 불을 붙여 태우고 유골을 거두는 의식으로 치른다 . 세부절차는 불을 지피는 거화擧火, 나무에 불을 붙이는 하화下火, 주검에서 분리된 망혼을 떠나보내는 봉송奉送, 새 몸을 받아 옷을 갈아입는 창의唱衣, 유골을 살피고 수습하여 부수는 기골起骨・습골拾骨・쇄골碎骨의 순으로 진행하며, 각 절차에 따라 의식문을 염송한다.

일반인은 공공화장장인 승화원昇華園에서 화장을 한다. 승화원에 관을 인도한 다음 순서가 되면 화구火口를 배정받고, 화장이 끝나면 유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로에서 나온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담는다. 화장은 특히 ‘유골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초점이 되어 왔다. 유골은 대개 화장을 마친 날 모시지만, 사찰이나 가정에 49일 또는 일정 기간 두었다가 탈상을 겸하여 모시기도 한다. 유골을 모시는 방식으로는 크게 산골, 봉안시설 안치, 자연장 등을 들 수 있다.

첫째, 산골散骨은 유골을 가루 낸 다음 지정된 장소나 산・강・바다에 뿌리는 방식이다. 고인의 마지막 흔적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산골은 화장의 원형적 모습에 해당한다. 산골을 할 때는 골분骨粉을 그대로 뿌리거나 환丸을 만들어 뿌린다. 환을 만들 때는 반죽한 곡식가루를 골분과 섞어서 콩알 크기로 만든 뒤 연못이나 강의 물고기에게 먹이로 주거나 산속에 놓아 새나 들짐승이 먹도록 하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친환경적 장법으로 화장 후 산골이나 자연장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둘째, 유골을 용기에 담아 봉안시설에 안치하는 방식이다. 유골을 안치하는 것은 고인의 유체를 남겨 추모하기 위함이며, 이는 화장한 뒤에 다시 화장무덤을 만들었던 옛사람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는 형식이다 . 봉안방식은 하나의 시설 안에 유골함을 대량으로 보관하는 것에서부터 무덤이나 탑의 형태로 만들어 계속 합장할 수 있도록 한 것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봉안당奉安堂은 대부분 도시근교에 조성되어, 무덤보다 더 자주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일부 봉안시설의 대형 석물을 이용한 조형과 호화로운 장비의 사용은 환경훼손과 허례허식 같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셋째, 자연장自然葬은 나무・잔디・화초 등 식물 주위에 골분을 묻는 방식이다. 친환경적인 장법으로 권장되는 자연장은 다양한 방식이 개발 중이다. 대표적인 자연장으로는 나무 주위에 땅을 파서 골분을 묻는 수목장樹木葬을 꼽는다. 고인이 묻힌 나무를 찾아 추모하고 정성들여 가꿈으로써, 정서적인 위안을 얻고 나무의 성장에도 도움을 주므로 수목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징 및 의의

화장은 고대 인도사회의 장법 가운데 하나로, 불교에서 이를 수용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화장을 통해 흙・물・불・바람의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구성된 인간의 몸을 본래대로 돌려보내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여긴다. 윤회사상에 따르면 몸은 이승에서 잠시 빌러 입었던 옷이므로, 헌 옷과 같은 몸을 태움으로써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새 옷의 주인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화장은 우리 민족의 내세관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의 윤회사상이 반영된 장법으로, 사후의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통일신라시대부터 호화로운 무덤을 꾸미는 대신 생전의 선업을 강조하고 망자를 위한 의례에 더 치중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 성행한 화장묘가 전통무덤에 불교식 화장이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라면, 종교와 무관하게 ‘봉안’에서 ‘산골’로 진행되는 현재의 장례방식이 오히려 불교식 화장의 원형에 가깝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참고문헌

茶毘文, 三國史記, 三國遺事, 고려시대 화장에 대한 고찰(정길자, 역사와경계7, 부산경남사학회, 1983), 불교 전래에 따른 화장의 수용양상과 변화요인(구미래, 한국종교민속시론, 민속원, 2004), 석문의범(안진호, 만상회, 1935), 조선초기 상장의례 연구(정종수,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화장

화장
한자명

火葬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구미래(具美來)

정의

죽은 이의 몸을 불에 태워서 처리하는 장법葬法.

역사

우리나라에서 화장의 흔적은 신석기시대부터 발견된다. 불교가 들어오고 나서 5세기경부터는 화장한 다음 뼈를 추려 용기에 담아 매장하는 화장묘火葬墓의 풍습이 생겨났다. 7세기 중엽에 이르면 불교의 영향권 속에서 화장이 본격적인 장법으로 조명되기 시작하며, 기록상 최초로 화장된 이는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590~658)으로, 화장 후 석혈石穴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이어 문무왕을 비롯해 효성왕・선덕왕・원성왕・진성여왕・효공왕・신덕왕・경명왕 등 8명의 왕이 화장되었으니, 왕실과 지배층에 불교적 죽음관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전까지 많은 부장품으로 치장하던 거대하고 화려한 무덤이 사라지고 무덤의 크기와 수가 축소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통일신라 중반까지는 승려사회에서도 화장이 일반화되지 않다가,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에서 선종禪宗이 들어오면서부터 화장이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선불교가 크게 일어나 선문구산禪門九山이 확립되자, 각 선문의 문도들은 조사祖師가 입적한 뒤 후세에 보존될 조형적인 장골처藏骨處를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고승이 입적한 뒤 화장을 하면 사리가 나온다고 하여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는 묘탑으로 부도浮屠를 조성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본격적으로 화장이 사회전반에 정착된 것은 고려 중기인 12세기 이후로, 왕실・민간에서도 점차 광범위하게 화장을 수용하였다.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도 화장한 다음 유골을 매장하는 이중장二重葬을 치렀는데, 묘지명墓誌銘 등의 기록을 참조하여 정리한 고려시대 불자들의 화장풍습은 다음과 같다. ①사찰이나 집에서 사망하면 그곳에 2~26일간 빈소를 차리고 ②좋은 날을 받아 산기슭이나 사찰 주변 화장지에서 화장한 뒤 ③유골을 수합해 사찰에 일정기간(2~76개월) 모시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권안權安을 거쳐 ④좋은 날을 받아 용기에 넣은 유골을 매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과 맞지 않는 화장을 전면적으로 금하였으나 화장풍습이 계속되자 금령을 어기는 자들을 처벌하였다. 이에 화장은 민간의 풍습에서 점차 사라져 극빈자나 특수하게 죽은 자에게 적용하는 장법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화장이 배척 대상이었다면, 일제강점기의 화장은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일제는 우리의 전통과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관혼상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1912년 6월에 총독부령으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을 공포하였고, 그 결과 화장이 다시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이후 대도시를 중심으로 화장장이 설치되어, 1923년 707건에 불과했던 화장 숫자가 4년 뒤에는 배 이상인 1,530건로 증가하였다. 일제강점기의 화장은 외세에 의해 주도 되었다는 점에서 타율적 수용이다. 그렇지만 수백 년간 화장을 금지했음에도, 화장에 대한 서민들의 기본적인 수요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광복 이후에는 화장이 1천 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장례의 하나가 아니라, 식민문화의 잔재로 여겨졌다. 그래서 1971년의 화장 비율은 7%에 불과하였고 1980년대까지 화장 비율의 증가는 미미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증가하여 2005년에 전국의 화장 비율은 절반을 넘어선 53%에 달하였고, 2012년 현재 74%에 이르렀다. 매장은 자연친화적이고 전통적정서에 적합한 장례방식이지만, 무덤으로 인한 국토의 잠식, 산림의 황폐화, 무연고 무덤의 증가 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친환경적 대안으로 화장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내용

근대 이후의 화장은 불교적 의미와 무관하게 치러지고 있지만, 화장이 불교적 장법임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일반인은 화장시설 이외의 장소에서 화장을 할 수 없지만, 승려는 사찰에서 일정한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을 행할 수 있다. 승려의 다비식茶毘式은 장작더미・숯 등으로 화장장을 만들고, 그 위에 관을 올려놓은 뒤 불을 붙여 태우고 유골을 거두는 의식으로 치른다 . 세부절차는 불을 지피는 거화擧火, 나무에 불을 붙이는 하화下火, 주검에서 분리된 망혼을 떠나보내는 봉송奉送, 새 몸을 받아 옷을 갈아입는 창의唱衣, 유골을 살피고 수습하여 부수는 기골起骨・습골拾骨・쇄골碎骨의 순으로 진행하며, 각 절차에 따라 의식문을 염송한다.

일반인은 공공화장장인 승화원昇華園에서 화장을 한다. 승화원에 관을 인도한 다음 순서가 되면 화구火口를 배정받고, 화장이 끝나면 유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로에서 나온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담는다. 화장은 특히 ‘유골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초점이 되어 왔다. 유골은 대개 화장을 마친 날 모시지만, 사찰이나 가정에 49일 또는 일정 기간 두었다가 탈상을 겸하여 모시기도 한다. 유골을 모시는 방식으로는 크게 산골, 봉안시설 안치, 자연장 등을 들 수 있다.

첫째, 산골散骨은 유골을 가루 낸 다음 지정된 장소나 산・강・바다에 뿌리는 방식이다. 고인의 마지막 흔적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산골은 화장의 원형적 모습에 해당한다. 산골을 할 때는 골분骨粉을 그대로 뿌리거나 환丸을 만들어 뿌린다. 환을 만들 때는 반죽한 곡식가루를 골분과 섞어서 콩알 크기로 만든 뒤 연못이나 강의 물고기에게 먹이로 주거나 산속에 놓아 새나 들짐승이 먹도록 하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친환경적 장법으로 화장 후 산골이나 자연장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둘째, 유골을 용기에 담아 봉안시설에 안치하는 방식이다. 유골을 안치하는 것은 고인의 유체를 남겨 추모하기 위함이며, 이는 화장한 뒤에 다시 화장무덤을 만들었던 옛사람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는 형식이다 . 봉안방식은 하나의 시설 안에 유골함을 대량으로 보관하는 것에서부터 무덤이나 탑의 형태로 만들어 계속 합장할 수 있도록 한 것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봉안당奉安堂은 대부분 도시근교에 조성되어, 무덤보다 더 자주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일부 봉안시설의 대형 석물을 이용한 조형과 호화로운 장비의 사용은 환경훼손과 허례허식 같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셋째, 자연장自然葬은 나무・잔디・화초 등 식물 주위에 골분을 묻는 방식이다. 친환경적인 장법으로 권장되는 자연장은 다양한 방식이 개발 중이다. 대표적인 자연장으로는 나무 주위에 땅을 파서 골분을 묻는 수목장樹木葬을 꼽는다. 고인이 묻힌 나무를 찾아 추모하고 정성들여 가꿈으로써, 정서적인 위안을 얻고 나무의 성장에도 도움을 주므로 수목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징 및 의의

화장은 고대 인도사회의 장법 가운데 하나로, 불교에서 이를 수용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화장을 통해 흙・물・불・바람의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구성된 인간의 몸을 본래대로 돌려보내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여긴다. 윤회사상에 따르면 몸은 이승에서 잠시 빌러 입었던 옷이므로, 헌 옷과 같은 몸을 태움으로써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새 옷의 주인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화장은 우리 민족의 내세관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의 윤회사상이 반영된 장법으로, 사후의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통일신라시대부터 호화로운 무덤을 꾸미는 대신 생전의 선업을 강조하고 망자를 위한 의례에 더 치중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 성행한 화장묘가 전통무덤에 불교식 화장이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라면, 종교와 무관하게 ‘봉안’에서 ‘산골’로 진행되는 현재의 장례방식이 오히려 불교식 화장의 원형에 가깝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참고문헌

茶毘文, 三國史記, 三國遺事, 고려시대 화장에 대한 고찰(정길자, 역사와경계7, 부산경남사학회, 1983), 불교 전래에 따른 화장의 수용양상과 변화요인(구미래, 한국종교민속시론, 민속원, 2004), 석문의범(안진호, 만상회, 1935), 조선초기 상장의례 연구(정종수,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