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탈해신화(昔脱解神话)

석탈해신화

한자명

昔脱解神话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신화

집필자 이지영(李志映)

정의

신라 제4대 왕이며 석씨 왕가의 시조인 탈해에 관한 신화.

역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탈해왕 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조가 주된 자료이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탈해왕과 김수로왕의 왕위 싸움’에 관한 부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줄거리

삼국유사』 탈해왕 조 기사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왕 때 아진포에서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할미였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어느 날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 궤를 열자 안에는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여러 보물과 노비 둘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사내아이는.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다.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나 버림받아 이곳에 닿았다.”라고 하였다.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종(從)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가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 곳에서 성 안에 살 만한 곳을 찾은 뒤, 호공(瓠公)의 집에 갔다. 아이는 속임수를 써서 호공 집 곁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었다. 다음 날 아침 호공 집에 가서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라 우겼다. 그리고 관가에 고발하여 “나는 본래 대장장이로,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다른 자가 차지한 것이니, 그 땅을 파보면 알 것이다.”고 하였다. 그 말대로 숫돌과 숯이 있어서, 아이가 호공의 집을 차지하였다. 이 사내아이가 탈해이다. 남해왕이 탈해의 슬기로움을 알고, 맏사위로 삼았다.

탈해가 동악(東岳,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백의에게 물을 떠오라 하였는데, 백의가 요내정에서 물을 떠오다가 먼저 그 물을 마시자, 물그릇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고 백의가 사죄하니 그릇이 떨어졌다. 그 후로 백의가 두려워 속이지 않았다. 노례왕을 이어서 탈해가 왕이 되었지만, 왕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어 소천구(疏川丘)에 모셔졌다. 훗날 신조(神詔, 탈해 신령의 말)로 뼈를 묻었는데, 그 크기가 역사(力士)의 뼈였다. 이에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에 모셨다. 다시 신령의 말에 따라 그 상을 동악에 봉안하였고, 나라에서 계속 그를 동악신으로 모셨다.

변이

탈해 관련 기사를 싣고 있는 세 문헌에는 서로 차이가 나는 내용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탈해와 수로의 경쟁 기사인데, 『삼국유사』 가락국기 조에는 ‘탈해가 수로와 왕위 싸움에서 밀려난 뒤, 계림으로 달아났다.’라고 하였지만, 같은 책 탈해왕 조에는 ‘수로왕이 백성들과 함께 탈해를 환영하여 맞이하나, 탈해의 배는 외면하고 아진포에 이르렀다.’라고 하여 가야와 신라 쪽의 입장에 따라 기술된 기사의 내용이 다르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용성국왕이 왕비가 알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면서 알을 궤에 넣고 칠보와 노비를 함께 배에 실어 띄워 보낸다.’ 하였으나, 『삼국사기』에는 ‘국왕이 알을 버리려 하자, 왕비가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 속에 넣고 배에 띄워 보낸다.’ 하여, 알을 배에 띄워 보낸 주체가 다르다. 그밖에도 『삼국사기』에는 노파 아진의선이 탈해에게 학문에 정진하도록 권유하는 내용이 있지만, 『삼국유사』처럼 ‘왕 사후의 이중장 및 산신화’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이는 『삼국사기』가 유가의 합리주의 입장에서 기술되었기 때문이다.

분석

이 신화에는 고대의 역사 민속과 고고학 자료가 부족한 사정을 볼 때 풀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석탈해와 그 집단의 출신과 문화적 성격이다. 탈해의 출생지가 왜의 동북 1천리에 있는 용성국이며, 그곳에 28명의 용왕이 있다거나, 그 모친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라 하였고 또한 탈해는 붉은 용이 호위하는 배를 타고 가야의 남해를 거쳐 계림(곧 신라) 동쪽 해안 하서지촌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탈해 집단은 해양문화를 가지며 출생 원천이 물(바다)과 친연성이 깊다는 점을 나타내며, 한국 고대신화에서 천상에 근본을 둔 신화 말고도 물이라는 신성한 초월계를 상정한 신화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탈해의 출신지 기록에 근거하여, 동북 시베리아의 어로문화를 가진 집단이 해류를 따라 동해안을 거쳐 경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왔으며, 선진 청동기 내지 철기문화를 가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둘째는 탈해가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남의 집을 빼앗은 속임수는 이 신화를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우선, 탈해가 ‘사술(詐術)을 통한 지능의 과시’로 호공과 겨루어 집을 빼앗고, 이 때문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며 나아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지능겨루기’가 왕위 등극의 전제였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그에 앞서 있었던 ‘토함산 돌무덤 속에 7일간 머물기’를 ‘상징적 죽음과 재생’으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지능겨루기’는 결국 ‘입사식의 시련’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으로 탈해가 자신을 본래 ‘대장장이’라 한 것은 탈해가 새로운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임을 말한다. 더욱이 시베리아 사회에서 금속, 철기, 무기들의 주술적 힘을 가진 대장장이가 샤먼(무당)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신라 2대 남해왕이 차차웅 곧 무당을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탈해는 야무왕(冶巫王)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석탈해 사후(死後)의 기록은 민속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탈해의 골상이 역사처럼 거대하며, 신령으로 현몽하여 이중장(二重葬)을 치르게 하고, 시신의 뼈를 소상으로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여 동악신이 되고, 대대로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먼저 이중장은 고대부터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조상숭배 관념, 뼈 속에 영혼이 깃든다는 조상유골 관념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뼈를 소상으로 모신 것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온곤(ongon, 신체를 깃털, 천, 가죽, 나무로도 만듦)’에 비교될 수 있다. 또한 탈해가 사후에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한 것은 산신이 원래 여성이었다가 점차 남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그 일이 태종무열왕 때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토함산이 국방의 요충지로서 국가의 제사처인 오악의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탈해의 산신화는 무력이 중시된 삼국전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석탈해신화>는 서사문학상 그 내용이 풍부하여 ‘영웅의 일생’의 전기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세계 영웅신화의 보편적인 서사구조에 해당한다.

의의

<석탈해신화>는 신라의 건국신화가 아니라 석씨 왕가의 시조신화로, 이와 유사한 것은 김씨 왕가의 시조신화인 <김알지신화>가 있다. 아울러 신라 육촌장신화와 함께 성씨시조신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신화는 건국시조신화 못지않게 중요하다. 탈해가 야무왕의 성격을 지니고, 고대국가 초기에 왕과 샤먼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사후의 이중장 및 남성 신격의 산신화라는 민속적 사례를 제공하여 한국 서사문학상 풍부한 내용의 ‘영웅의 일생’이라는 전기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三國遺事, 三國史記.

참고문헌

석탈해 신화의 연구(김화경, 어문학69, 한국어문학회, 1998), 풀어쓴 한국의 신화(장주근, 집문당, 2000), 한국신화와 무속연구(김열규, 일조각, 1977).

석탈해신화

석탈해신화
한자명

昔脱解神话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신화

집필자 이지영(李志映)

정의

신라 제4대 왕이며 석씨 왕가의 시조인 탈해에 관한 신화.

역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탈해왕 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조가 주된 자료이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탈해왕과 김수로왕의 왕위 싸움’에 관한 부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줄거리

『삼국유사』 탈해왕 조 기사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왕 때 아진포에서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할미였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어느 날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 궤를 열자 안에는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여러 보물과 노비 둘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사내아이는.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다.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나 버림받아 이곳에 닿았다.”라고 하였다.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종(從)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가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 곳에서 성 안에 살 만한 곳을 찾은 뒤, 호공(瓠公)의 집에 갔다. 아이는 속임수를 써서 호공 집 곁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었다. 다음 날 아침 호공 집에 가서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라 우겼다. 그리고 관가에 고발하여 “나는 본래 대장장이로,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다른 자가 차지한 것이니, 그 땅을 파보면 알 것이다.”고 하였다. 그 말대로 숫돌과 숯이 있어서, 아이가 호공의 집을 차지하였다. 이 사내아이가 탈해이다. 남해왕이 탈해의 슬기로움을 알고, 맏사위로 삼았다.

탈해가 동악(東岳,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백의에게 물을 떠오라 하였는데, 백의가 요내정에서 물을 떠오다가 먼저 그 물을 마시자, 물그릇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고 백의가 사죄하니 그릇이 떨어졌다. 그 후로 백의가 두려워 속이지 않았다. 노례왕을 이어서 탈해가 왕이 되었지만, 왕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어 소천구(疏川丘)에 모셔졌다. 훗날 신조(神詔, 탈해 신령의 말)로 뼈를 묻었는데, 그 크기가 역사(力士)의 뼈였다. 이에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에 모셨다. 다시 신령의 말에 따라 그 상을 동악에 봉안하였고, 나라에서 계속 그를 동악신으로 모셨다.

변이

탈해 관련 기사를 싣고 있는 세 문헌에는 서로 차이가 나는 내용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탈해와 수로의 경쟁 기사인데, 『삼국유사』 가락국기 조에는 ‘탈해가 수로와 왕위 싸움에서 밀려난 뒤, 계림으로 달아났다.’라고 하였지만, 같은 책 탈해왕 조에는 ‘수로왕이 백성들과 함께 탈해를 환영하여 맞이하나, 탈해의 배는 외면하고 아진포에 이르렀다.’라고 하여 가야와 신라 쪽의 입장에 따라 기술된 기사의 내용이 다르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용성국왕이 왕비가 알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면서 알을 궤에 넣고 칠보와 노비를 함께 배에 실어 띄워 보낸다.’ 하였으나, 『삼국사기』에는 ‘국왕이 알을 버리려 하자, 왕비가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 속에 넣고 배에 띄워 보낸다.’ 하여, 알을 배에 띄워 보낸 주체가 다르다. 그밖에도 『삼국사기』에는 노파 아진의선이 탈해에게 학문에 정진하도록 권유하는 내용이 있지만, 『삼국유사』처럼 ‘왕 사후의 이중장 및 산신화’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이는 『삼국사기』가 유가의 합리주의 입장에서 기술되었기 때문이다.

분석

이 신화에는 고대의 역사 민속과 고고학 자료가 부족한 사정을 볼 때 풀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석탈해와 그 집단의 출신과 문화적 성격이다. 탈해의 출생지가 왜의 동북 1천리에 있는 용성국이며, 그곳에 28명의 용왕이 있다거나, 그 모친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라 하였고 또한 탈해는 붉은 용이 호위하는 배를 타고 가야의 남해를 거쳐 계림(곧 신라) 동쪽 해안 하서지촌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탈해 집단은 해양문화를 가지며 출생 원천이 물(바다)과 친연성이 깊다는 점을 나타내며, 한국 고대신화에서 천상에 근본을 둔 신화 말고도 물이라는 신성한 초월계를 상정한 신화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탈해의 출신지 기록에 근거하여, 동북 시베리아의 어로문화를 가진 집단이 해류를 따라 동해안을 거쳐 경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왔으며, 선진 청동기 내지 철기문화를 가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둘째는 탈해가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남의 집을 빼앗은 속임수는 이 신화를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우선, 탈해가 ‘사술(詐術)을 통한 지능의 과시’로 호공과 겨루어 집을 빼앗고, 이 때문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며 나아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지능겨루기’가 왕위 등극의 전제였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그에 앞서 있었던 ‘토함산 돌무덤 속에 7일간 머물기’를 ‘상징적 죽음과 재생’으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지능겨루기’는 결국 ‘입사식의 시련’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으로 탈해가 자신을 본래 ‘대장장이’라 한 것은 탈해가 새로운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임을 말한다. 더욱이 시베리아 사회에서 금속, 철기, 무기들의 주술적 힘을 가진 대장장이가 샤먼(무당)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신라 2대 남해왕이 차차웅 곧 무당을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탈해는 야무왕(冶巫王)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석탈해 사후(死後)의 기록은 민속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탈해의 골상이 역사처럼 거대하며, 신령으로 현몽하여 이중장(二重葬)을 치르게 하고, 시신의 뼈를 소상으로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여 동악신이 되고, 대대로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먼저 이중장은 고대부터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조상숭배 관념, 뼈 속에 영혼이 깃든다는 조상유골 관념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뼈를 소상으로 모신 것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온곤(ongon, 신체를 깃털, 천, 가죽, 나무로도 만듦)’에 비교될 수 있다. 또한 탈해가 사후에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한 것은 산신이 원래 여성이었다가 점차 남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그 일이 태종무열왕 때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토함산이 국방의 요충지로서 국가의 제사처인 오악의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탈해의 산신화는 무력이 중시된 삼국전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석탈해신화>는 서사문학상 그 내용이 풍부하여 ‘영웅의 일생’의 전기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세계 영웅신화의 보편적인 서사구조에 해당한다.

의의

<석탈해신화>는 신라의 건국신화가 아니라 석씨 왕가의 시조신화로, 이와 유사한 것은 김씨 왕가의 시조신화인 <김알지신화>가 있다. 아울러 신라 육촌장신화와 함께 성씨시조신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신화는 건국시조신화 못지않게 중요하다. 탈해가 야무왕의 성격을 지니고, 고대국가 초기에 왕과 샤먼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사후의 이중장 및 남성 신격의 산신화라는 민속적 사례를 제공하여 한국 서사문학상 풍부한 내용의 ‘영웅의 일생’이라는 전기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三國遺事, 三國史記.

참고문헌

석탈해 신화의 연구(김화경, 어문학69, 한국어문학회, 1998), 풀어쓴 한국의 신화(장주근, 집문당, 2000), 한국신화와 무속연구(김열규, 일조각,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