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일(六二五事變日)

6·25사변일

한자명

六二五事變日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6월 > 양력세시

집필자 양영조(梁寧祚)

정의

매년 6월 25일은 ‘6·25사변일’라는 국가기념일이다. 6·25사변일은 1973년 3월에 시행된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에 따라 정부가 제정, 주관하고 있다. 그 후 매년 기념행사를 통해 6·25의 의의를 되새기면서 나라사랑 정신과 안보의식을 강조하고 이의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나 정부의 공식기관에서 ‘6·25사변’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6·25전쟁, 한국전쟁이라고 표현한다. 북한을 국가체로 인정한 후부터는 사변, 동란이라는 말 대신 전쟁이라고 불러 오고 있다. 사변과 전쟁의 차이는 주체의 성격에 따라 구분된다.

사변은 “한 국가 또는 사회 내부에서 권력 및 정통성을 획득 유지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성을 띤 무력 폭력이며, 아방의 주체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불법시하는 경우”에 쓴다. 전쟁은 “국가간(교전단체)에 상호 자국의 의사를 상대국에 강제하기 위한 무력 행사이며, 두 나라 또는 이상이 그들의 평화상태를 끝내고 병력에 의하여 적대행위 또는 적대조치를 취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구분에 따라 6·25를 전쟁으로 정의하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으나, 아직 6·25 전쟁과 한국전쟁의 용어는 통일되지 못하였다. 두 용어의 차이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내란적인 성격에 비중을 두느냐 아니면 국제전적인 성격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편이다. 한편 학자에 따라서는 6·25의 용어를 ‘남북전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6·25가 역사학계에서 역사용어로 제자리를 잡으려면 보다 심도 있는 성격 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내용

6·25사변일이 법으로 제정되기 전에도 기념행사는 계속 있어 왔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부터 국방부와 문공부가 주관하여 매년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반공웅변대회, 반공포스터대회, 글짓기대회 같은 것이었는데 이런 대회를 통해 북한의 남침 사실을 성토하고 국민들의 반공 안보의식을 높였다. 기념대회는 각 도시별, 직장별, 학교별로 전국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국민들에게 6·25의 참상과 교훈을 상기시켜 반공정신을 가다듬는 한편, 참전용사와 전몰용사,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명예를 선양한다는 의미가 있다. 1973년부터는 국가기념일로 법제화되어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다.

6·25전쟁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어 유엔군의 반격, 중공군의 개입과 후퇴, 그리고 전선의 교착과 휴전이라는 국면을 거치면서 3년 1개월 동안 전개되었으며 국내외적으로 복잡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전개되었다. 지금까지 6·25전쟁에 관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내용 중 전쟁의 결과와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북한은 3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38도 분단선을 허물어뜨리지 못하고 다시 휴전선으로 대체하여 재분단되었다. 이 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군사작전으로 인한 1차적 피해와 이념투쟁에 의한 2차적 피해가 중첩되었으며, 핵무기를 제외한 최신 살상무기가 좁은 전장에 동원됨으로써 살상력을 더하였다.

인명 피해를 보면 한국군(경찰 포함) 63만 명, 유엔군 55만 명을 포함 119만 명이 전사, 전상, 실종되었고, 북한군 80만 명, 중공군 123만 명, 약 204만 명의 손실이 생겨 군인 피해만도 총 322만 명에 달하였다. 또한 1952년 3월 15일까지 발생한 전재민 수가 천만 명을 넘어섰다. 휴전 때까지 이 숫자는 훨씬 늘어났겠지만, 결과적으로 전체인구의 1/2 이상이 전화(戰禍)를 입었다. 따라서 피해를 입지 않은 가족이 없었으며 전사상자의 혈육과 이산가족 같이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6·25의 연장선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물적 피해도 인명 피해 못지않게 컸다. 부산 교두보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7도선과 38도선 사이의 지역에서는 세 차례의 피탈과 탈환이 반복되었다. 남한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2퍼센트가 파괴되었고, 폭격의 피해가 컸던 북한은 1949년 대비 공업의 60퍼센트가 파괴되었다. 이런 가운데서 개인의 가옥과 재산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군사작전에 이용된 도로, 철도, 교량, 항만 및 산업시설이 크게 파손되었고, 군사시설로 전용된 학교,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국민생활의 터전과 사회 경제체제의 기반이 황폐화되었다.

무엇보다 쌍방은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거나 남북통일로 승화시키는 데 실패하고 불안한 휴전상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는 남북이 하나로 되기는커녕 전쟁 이전 현상으로 회귀한 채 냉전굴레를 벗지 못하고, 그 틀 속에서 분단과 대결을 다시 계획하게 된 불행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휴전은 ‘군사행동(적대행위)의 일시적 중지’를 의미하는 군사적 조치였다. 휴전(Armistice)은 종전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의 가교였고, 이에 따라 휴전으로 일단 정전(Cease-fire) 조치를 취하고 휴전체제를 구축한 다음 이를 평화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곧 3개월 내에 정치회담을 열어 평화적 해결 방안과 외국군의 철군 등 정치현안을 다루기로 협정하였다.

그러나 정치회담은 회담 참가국과 장소 문제로 판문점 예비회담에서 좌초되어 본회담은 협상에 명시된 3개월 내에 열리지도 못하였다. 다행히 이듬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문제를 다루던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 외상회담의 주선으로 1954년 4월 26일 뒤늦게 정치회담이 제네바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통일정부 수립 방안에 있어 자유선거 방식과 유엔 감시를 둘러싸고 타협의 자세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6월 15일 결렬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쌍방은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거나 남북통일로 승화시키는 데 실패하고 불안한 휴전상태로 계속해서 대치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의 이행관리 및 감독기능이 마비되어 휴전이 언제 열전으로 바뀔지 예측할 수 없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전후 우리 민족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인고의 한 세대를 지냈으며, 그것이 곧 복구와 재건의 원동력이 되었다.

특징

{6·25전쟁의 성격} 6·25전쟁은 국내외적으로 복잡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성격도 다양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으며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6·25전쟁은 민족전쟁인 동시에 침략전쟁이며 이념전쟁의 성격을 띤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북한정권이 남북한 내부의 민족 갈등 속에서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구상한 데서 비롯되었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한국 정부를 타도하고 대신 통일된 공산주의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여 개시된 전쟁이었다.

둘째, 6·25전쟁은 기원과 배경 그리고 전개 과정에서 국제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전쟁은 특이하게도 준비, 결정, 개시, 전개 등 모든 과정에서 스탈린의 지도와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특히 유엔군과 중국군이 참전한 후에는 지원의 차원을 넘어 유엔군사령관과 중국군사령관이 남한과 북한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공산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였다는 점에서도 국제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셋째, 전장이 한반도에 국한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었다. 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침략자를 격퇴하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참전하고 이에 대응해 소련을 중심으로 한 중국군 등 공산군이 가세함으로써 20개국의 전투부대와 그 밖의 여러 국가의 지원부대가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열전을 벌인 전쟁이었다.

넷째,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핵시대에 치러진 국지전이며 제한전이었다. 군사적으로 당시 미소 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였고 미국이 전술 핵무기를 개발하였음에도 이의 사용을 억제하였으며 또 유엔군측이 전쟁을 한반도 내에 국한시키고 전쟁 목표를 공산군의 침략을 격퇴한다는 데 한정시켰다는 점에서도 제한전의 성격을 띤다.

참고문헌

나의 回顧錄 (趙炳玉, 民敎社, 1959), 老兵의 恨 (金錫源, 育法社, 1977),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용하 외, 동아일보사, 1987), 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연구 (서중석, 지식산업사, 1989), 실증자료로 본 한국전쟁 (문화공보부, 1990),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 (한국사회학회, 풀빛, 1992),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조선일보, 1995),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 2 (박명림, 나남, 1996), 한국전쟁 (채한국·정석균·양영조, 국방군사연구소, 1997)

6·25사변일

6·25사변일
한자명

六二五事變日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6월 > 양력세시

집필자 양영조(梁寧祚)

정의

매년 6월 25일은 ‘6·25사변일’라는 국가기념일이다. 6·25사변일은 1973년 3월에 시행된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에 따라 정부가 제정, 주관하고 있다. 그 후 매년 기념행사를 통해 6·25의 의의를 되새기면서 나라사랑 정신과 안보의식을 강조하고 이의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나 정부의 공식기관에서 ‘6·25사변’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6·25전쟁, 한국전쟁이라고 표현한다. 북한을 국가체로 인정한 후부터는 사변, 동란이라는 말 대신 전쟁이라고 불러 오고 있다. 사변과 전쟁의 차이는 주체의 성격에 따라 구분된다.

사변은 “한 국가 또는 사회 내부에서 권력 및 정통성을 획득 유지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성을 띤 무력 폭력이며, 아방의 주체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불법시하는 경우”에 쓴다. 전쟁은 “국가간(교전단체)에 상호 자국의 의사를 상대국에 강제하기 위한 무력 행사이며, 두 나라 또는 이상이 그들의 평화상태를 끝내고 병력에 의하여 적대행위 또는 적대조치를 취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구분에 따라 6·25를 전쟁으로 정의하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으나, 아직 6·25 전쟁과 한국전쟁의 용어는 통일되지 못하였다. 두 용어의 차이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내란적인 성격에 비중을 두느냐 아니면 국제전적인 성격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편이다. 한편 학자에 따라서는 6·25의 용어를 ‘남북전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6·25가 역사학계에서 역사용어로 제자리를 잡으려면 보다 심도 있는 성격 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내용

6·25사변일이 법으로 제정되기 전에도 기념행사는 계속 있어 왔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부터 국방부와 문공부가 주관하여 매년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반공웅변대회, 반공포스터대회, 글짓기대회 같은 것이었는데 이런 대회를 통해 북한의 남침 사실을 성토하고 국민들의 반공 안보의식을 높였다. 기념대회는 각 도시별, 직장별, 학교별로 전국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국민들에게 6·25의 참상과 교훈을 상기시켜 반공정신을 가다듬는 한편, 참전용사와 전몰용사,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명예를 선양한다는 의미가 있다. 1973년부터는 국가기념일로 법제화되어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다.

6·25전쟁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어 유엔군의 반격, 중공군의 개입과 후퇴, 그리고 전선의 교착과 휴전이라는 국면을 거치면서 3년 1개월 동안 전개되었으며 국내외적으로 복잡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전개되었다. 지금까지 6·25전쟁에 관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내용 중 전쟁의 결과와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북한은 3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38도 분단선을 허물어뜨리지 못하고 다시 휴전선으로 대체하여 재분단되었다. 이 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군사작전으로 인한 1차적 피해와 이념투쟁에 의한 2차적 피해가 중첩되었으며, 핵무기를 제외한 최신 살상무기가 좁은 전장에 동원됨으로써 살상력을 더하였다.

인명 피해를 보면 한국군(경찰 포함) 63만 명, 유엔군 55만 명을 포함 119만 명이 전사, 전상, 실종되었고, 북한군 80만 명, 중공군 123만 명, 약 204만 명의 손실이 생겨 군인 피해만도 총 322만 명에 달하였다. 또한 1952년 3월 15일까지 발생한 전재민 수가 천만 명을 넘어섰다. 휴전 때까지 이 숫자는 훨씬 늘어났겠지만, 결과적으로 전체인구의 1/2 이상이 전화(戰禍)를 입었다. 따라서 피해를 입지 않은 가족이 없었으며 전사상자의 혈육과 이산가족 같이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6·25의 연장선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물적 피해도 인명 피해 못지않게 컸다. 부산 교두보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7도선과 38도선 사이의 지역에서는 세 차례의 피탈과 탈환이 반복되었다. 남한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2퍼센트가 파괴되었고, 폭격의 피해가 컸던 북한은 1949년 대비 공업의 60퍼센트가 파괴되었다. 이런 가운데서 개인의 가옥과 재산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군사작전에 이용된 도로, 철도, 교량, 항만 및 산업시설이 크게 파손되었고, 군사시설로 전용된 학교,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국민생활의 터전과 사회 경제체제의 기반이 황폐화되었다.

무엇보다 쌍방은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거나 남북통일로 승화시키는 데 실패하고 불안한 휴전상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는 남북이 하나로 되기는커녕 전쟁 이전 현상으로 회귀한 채 냉전굴레를 벗지 못하고, 그 틀 속에서 분단과 대결을 다시 계획하게 된 불행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휴전은 ‘군사행동(적대행위)의 일시적 중지’를 의미하는 군사적 조치였다. 휴전(Armistice)은 종전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의 가교였고, 이에 따라 휴전으로 일단 정전(Cease-fire) 조치를 취하고 휴전체제를 구축한 다음 이를 평화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곧 3개월 내에 정치회담을 열어 평화적 해결 방안과 외국군의 철군 등 정치현안을 다루기로 협정하였다.

그러나 정치회담은 회담 참가국과 장소 문제로 판문점 예비회담에서 좌초되어 본회담은 협상에 명시된 3개월 내에 열리지도 못하였다. 다행히 이듬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문제를 다루던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 외상회담의 주선으로 1954년 4월 26일 뒤늦게 정치회담이 제네바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통일정부 수립 방안에 있어 자유선거 방식과 유엔 감시를 둘러싸고 타협의 자세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6월 15일 결렬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쌍방은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거나 남북통일로 승화시키는 데 실패하고 불안한 휴전상태로 계속해서 대치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의 이행관리 및 감독기능이 마비되어 휴전이 언제 열전으로 바뀔지 예측할 수 없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전후 우리 민족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인고의 한 세대를 지냈으며, 그것이 곧 복구와 재건의 원동력이 되었다.

특징

{6·25전쟁의 성격} 6·25전쟁은 국내외적으로 복잡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성격도 다양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으며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6·25전쟁은 민족전쟁인 동시에 침략전쟁이며 이념전쟁의 성격을 띤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북한정권이 남북한 내부의 민족 갈등 속에서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구상한 데서 비롯되었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한국 정부를 타도하고 대신 통일된 공산주의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여 개시된 전쟁이었다.

둘째, 6·25전쟁은 기원과 배경 그리고 전개 과정에서 국제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전쟁은 특이하게도 준비, 결정, 개시, 전개 등 모든 과정에서 스탈린의 지도와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특히 유엔군과 중국군이 참전한 후에는 지원의 차원을 넘어 유엔군사령관과 중국군사령관이 남한과 북한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공산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였다는 점에서도 국제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셋째, 전장이 한반도에 국한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었다. 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침략자를 격퇴하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참전하고 이에 대응해 소련을 중심으로 한 중국군 등 공산군이 가세함으로써 20개국의 전투부대와 그 밖의 여러 국가의 지원부대가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열전을 벌인 전쟁이었다.

넷째,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핵시대에 치러진 국지전이며 제한전이었다. 군사적으로 당시 미소 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였고 미국이 전술 핵무기를 개발하였음에도 이의 사용을 억제하였으며 또 유엔군측이 전쟁을 한반도 내에 국한시키고 전쟁 목표를 공산군의 침략을 격퇴한다는 데 한정시켰다는 점에서도 제한전의 성격을 띤다.

참고문헌

나의 回顧錄 (趙炳玉, 民敎社, 1959)
老兵의 恨 (金錫源, 育法社, 1977)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용하 외, 동아일보사, 1987)
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연구 (서중석, 지식산업사, 1989)
실증자료로 본 한국전쟁 (문화공보부, 1990)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 (한국사회학회, 풀빛, 1992)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조선일보, 1995)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 2 (박명림, 나남, 1996)
한국전쟁 (채한국·정석균·양영조, 국방군사연구소,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