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기념일(四一九革命記念日)

4·19혁명기념일

한자명

四一九革命記念日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4월 > 양력세시

집필자 정호기(鄭滈基)

정의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이승만 정권 및 자유당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를 시작으로 민주주의, 통일, 자주, 자립경제를 주장하며 전개되었던 사회변혁운동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날. 4·19혁명은 평가와 의미 부여에 따라 ‘혁명’에서 ‘의거’로, 다시 ‘혁명’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4·19혁명 기념식은 국가 차원에서 개최되었으나, 박정희 군사정권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점차 축소되었다. 1973년 3월에 ‘4·19의거기념일’은 정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1994년 ‘4·19혁명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의의가 격상되었다.

배경

4·19혁명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1960년 3월 15일 실시될 정·부통령 선거를 부정으로 일관하던 자유당 정권에 항거하여 2월 28일 대구에서 발생한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한정한 것이다. 둘째, 앞서 언급한 시기를 4·19혁명의 제1단계로 보고,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여 사회변혁운동이 좌절되기까지를 제2단계로 본다. 일반적으로 국가가 기념하는 4·19혁명은 첫 번째 시기로 한정하고 있으나, 두 번째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통치체제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정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경찰과 군의 폭력 그리고 반공이데올로기에 의존하였다. 그 구체적 행위는 부정과 부패, 민중의 탄압이었다. 1956년에 실시된 민의원선거에서 알 수 있듯이, 민중은 새로운 체제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위기로 받아들였던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의 선거를 부정으로 일관하였다.

부정선거에 대한 민중의 항거는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유세에 학생들의 참석을 차단하기 위해 일요일에도 등교를 시켰으나,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일으켰다. 경찰은 시위대에게 발포를 하며 진압하였으나, 이것은 오히려 시위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날의 시위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경찰에 체포 구금된 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내무부장관과 현지 경찰 책임자를 교체하고, 구속된 일부 시민을 석방하는 선에서 종결지으려 했으나, 이기붕이 발포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는 등 표리부동했다.

그리고 3월 15일의 사건 이후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모습으로 떠오르면서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다시 불붙었다. 이 시위는 4월 13일까지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졌고, 또다시 사망자와 총상자 및 구금자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은 마산에서의 시위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정된 것”이라고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등 진압을 합리화하는 데 급급했다.

마산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승만 정권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발전하는 데 불씨가 되었다. 첫 시위는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000여 명이 경찰의 방어선을 뚫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으나, 100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귀교하던 학생들에게 폭행을 가하면서 상황은 급진전되었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계획하고 있던 시위계획을 앞당겨 4월 19일 오전 대학별로 궐기선언문을 낭독한 후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시가행진을 단행하였다. 이에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이승만 정권의 통치기구들을 공격하였다. 시위대는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경무대로 진출했는데, 이를 방어하던 경찰이 발포하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밖에도 중앙청 앞, 덕수궁 파출소 앞과 같이 곳곳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시위가 확산되자 오후 5시에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부산과 광주에서도 일어나 역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국무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 사퇴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총재직 사퇴와 이기붕의 모든 공직 사퇴에 이르기까지 사건 수습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유지한 채 모든 정당관계에서 벗어나겠다고 함으로써 마지막까지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미 미국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고 있었고,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단이 시민과 학생의 호위를 받으면서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임으로써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는 시위는 26일에도 대규모로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이날 오후 2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일련의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마산에서 시작되어 이승만 하야에 이르기까지 국가폭력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서울에서 104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으로 모두 186명이었고, 부상자는 6,026명이었다.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민권확립과 책임정치의 발전, 경제건설 제일주의, 사회정의의 실현’ 등을 제시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4·19혁명의 주체세력이 아니었던 민주당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혁명과제 수행, 곧 민주반역자 및 부패자 처벌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4·19혁명의 열기를 잠재우는 정책을 펴다가 5·16군사정변이 발발하면서 몰락하였다. 한편, 혁신세력과 민중진영은 ‘2·28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 반공법 및 데모규제법 반대투쟁, 통일운동’ 등을 전개함으로써 4·19혁명의 실질적 성과를 정착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비록 이러한 활동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섬으로써 좌절되었으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에 역사적 자산이 되었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1980년대 이후의 민족·민주·자주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내용

4·19혁명 기념일 행사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국립 4·19묘지에서 이루어지는 기념식, 사건이 크게 발생한 지역에서 개최되는 기념식, 그리고 학생 및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로 구분된다. 국가보훈처는 2004년 제44주년 기념행사 계획에서 기념식을 개최하는 목적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 정신을 기리고 자유·민주·정의의 4·19 민주이념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기념식에는 3부 및 헌법기관의 장, 정당대표, 국가보훈처장, 행정자치부장관, 서울특별시장, 4·19 및 보훈단체장, 민주화운동 관련단체장이 주요 인사로 참석하고, 이 밖에 4·19 관련단체 회원, 학생, 공무원, 시민들이 참석하고 있다. 식순은 개식, 국민의례, 헌화, 4·19혁명 경과보고, 기념공연, 추모 헌시 낭송, 기념사, 기념노래 제창, 폐식으로 진행된다. 지역 행사는 주로 4·19혁명 관련 기념시설물이 있는 장소에서 각 자치단체 및 관련단체 주관으로 개최한다. 기타 기념행사는 4·19혁명 관련단체들의 주관으로 이루어지는데, 추모제, 추모음악회, 사진 및 자료 전시회, 영상제, 정신계승 마라톤대회, 웅변대회, 백일장으로 10여 개 안팎이다.

학생 및 민중·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는 1980년대에 비하면 대폭 축소되었으나, 각각 기념식을 갖은 후 학술행사, 마라톤대회, 문화행사로 진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기념행사는 사회 현안을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사회운동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변천

4·19혁명 기념일 행사는 사건이 발발한 이듬해부터 국가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한편에서는 국가가 주관하는 행사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기념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이는 196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개최한 4·19혁명 기념행사로 발전하였다.

1962년 학생단체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도록 권고함에 따라 4·19의거기념일로 지정되어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1973년 3월 30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제정되면서 4·19혁명은 정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4·19혁명의 기념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기부터 급격하게 축소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김영삼 정권에 들어서 4·19혁명을 재조명하였으며, 이에 발맞추어 기념일도 보다 규모 있게 거행하기 시작했다.

기타

최근 경남 마산에서는 3·15의거를 4·19혁명에서 분리하여 독자적인 사건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흐름이 일고 있다. 박정희 정권 때에도 3·15의거 기념식을 독자적으로 개최해 왔고 국립 4·19묘지와 별개로 ‘국립 3·15묘지’가 조성된 점 은 사건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일면 타당성을 부여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희생자를 안장한 집단묘지로 서울에 국립 4·19묘지가, 마산에 국립 3·15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기붕의 집터에 ‘4·19혁명기념도서관’을 건립하여 4·19혁명 정신을 기념하고 계승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 밖에 전국의 주요 대학과 도시에 4·19혁명을 기념 혹은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물이 건립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사건에 따라 기념사업이 진행 중이다.

참고문헌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 혁명1, 2 (사월혁명연구소 편, 한길사, 1990), 1960년대의 사회운동 (박태순·김동춘, 까치, 1991), 문민정부의 ‘4·19’재조명 (국가보훈처, 1995), 달력 속에서 만나는 숨은 우리 날 찾기1 (김선섭, 씨앤드씨그룹, 2000), 4월 혁명과 피의 화요일 (오유석, 20세기 한국의 야만, 일빛, 2001), 三·一五義擧史 (삼일오의거기념사업회, 2004)

4·19혁명기념일

4·19혁명기념일
한자명

四一九革命記念日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4월 > 양력세시

집필자 정호기(鄭滈基)

정의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이승만 정권 및 자유당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를 시작으로 민주주의, 통일, 자주, 자립경제를 주장하며 전개되었던 사회변혁운동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날. 4·19혁명은 평가와 의미 부여에 따라 ‘혁명’에서 ‘의거’로, 다시 ‘혁명’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4·19혁명 기념식은 국가 차원에서 개최되었으나, 박정희 군사정권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점차 축소되었다. 1973년 3월에 ‘4·19의거기념일’은 정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1994년 ‘4·19혁명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의의가 격상되었다.

배경

4·19혁명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1960년 3월 15일 실시될 정·부통령 선거를 부정으로 일관하던 자유당 정권에 항거하여 2월 28일 대구에서 발생한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한정한 것이다. 둘째, 앞서 언급한 시기를 4·19혁명의 제1단계로 보고,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여 사회변혁운동이 좌절되기까지를 제2단계로 본다. 일반적으로 국가가 기념하는 4·19혁명은 첫 번째 시기로 한정하고 있으나, 두 번째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통치체제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정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경찰과 군의 폭력 그리고 반공이데올로기에 의존하였다. 그 구체적 행위는 부정과 부패, 민중의 탄압이었다. 1956년에 실시된 민의원선거에서 알 수 있듯이, 민중은 새로운 체제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위기로 받아들였던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의 선거를 부정으로 일관하였다.

부정선거에 대한 민중의 항거는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유세에 학생들의 참석을 차단하기 위해 일요일에도 등교를 시켰으나,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일으켰다. 경찰은 시위대에게 발포를 하며 진압하였으나, 이것은 오히려 시위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날의 시위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경찰에 체포 구금된 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내무부장관과 현지 경찰 책임자를 교체하고, 구속된 일부 시민을 석방하는 선에서 종결지으려 했으나, 이기붕이 발포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는 등 표리부동했다.

그리고 3월 15일의 사건 이후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모습으로 떠오르면서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다시 불붙었다. 이 시위는 4월 13일까지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졌고, 또다시 사망자와 총상자 및 구금자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은 마산에서의 시위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정된 것”이라고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등 진압을 합리화하는 데 급급했다.

마산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승만 정권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발전하는 데 불씨가 되었다. 첫 시위는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000여 명이 경찰의 방어선을 뚫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으나, 100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귀교하던 학생들에게 폭행을 가하면서 상황은 급진전되었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계획하고 있던 시위계획을 앞당겨 4월 19일 오전 대학별로 궐기선언문을 낭독한 후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시가행진을 단행하였다. 이에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이승만 정권의 통치기구들을 공격하였다. 시위대는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경무대로 진출했는데, 이를 방어하던 경찰이 발포하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밖에도 중앙청 앞, 덕수궁 파출소 앞과 같이 곳곳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시위가 확산되자 오후 5시에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부산과 광주에서도 일어나 역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국무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 사퇴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총재직 사퇴와 이기붕의 모든 공직 사퇴에 이르기까지 사건 수습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유지한 채 모든 정당관계에서 벗어나겠다고 함으로써 마지막까지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미 미국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고 있었고,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단이 시민과 학생의 호위를 받으면서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임으로써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는 시위는 26일에도 대규모로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이날 오후 2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일련의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마산에서 시작되어 이승만 하야에 이르기까지 국가폭력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서울에서 104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으로 모두 186명이었고, 부상자는 6,026명이었다.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민권확립과 책임정치의 발전, 경제건설 제일주의, 사회정의의 실현’ 등을 제시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4·19혁명의 주체세력이 아니었던 민주당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혁명과제 수행, 곧 민주반역자 및 부패자 처벌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4·19혁명의 열기를 잠재우는 정책을 펴다가 5·16군사정변이 발발하면서 몰락하였다. 한편, 혁신세력과 민중진영은 ‘2·28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 반공법 및 데모규제법 반대투쟁, 통일운동’ 등을 전개함으로써 4·19혁명의 실질적 성과를 정착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비록 이러한 활동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섬으로써 좌절되었으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에 역사적 자산이 되었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1980년대 이후의 민족·민주·자주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내용

4·19혁명 기념일 행사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국립 4·19묘지에서 이루어지는 기념식, 사건이 크게 발생한 지역에서 개최되는 기념식, 그리고 학생 및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로 구분된다. 국가보훈처는 2004년 제44주년 기념행사 계획에서 기념식을 개최하는 목적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 정신을 기리고 자유·민주·정의의 4·19 민주이념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기념식에는 3부 및 헌법기관의 장, 정당대표, 국가보훈처장, 행정자치부장관, 서울특별시장, 4·19 및 보훈단체장, 민주화운동 관련단체장이 주요 인사로 참석하고, 이 밖에 4·19 관련단체 회원, 학생, 공무원, 시민들이 참석하고 있다. 식순은 개식, 국민의례, 헌화, 4·19혁명 경과보고, 기념공연, 추모 헌시 낭송, 기념사, 기념노래 제창, 폐식으로 진행된다. 지역 행사는 주로 4·19혁명 관련 기념시설물이 있는 장소에서 각 자치단체 및 관련단체 주관으로 개최한다. 기타 기념행사는 4·19혁명 관련단체들의 주관으로 이루어지는데, 추모제, 추모음악회, 사진 및 자료 전시회, 영상제, 정신계승 마라톤대회, 웅변대회, 백일장으로 10여 개 안팎이다.

학생 및 민중·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는 1980년대에 비하면 대폭 축소되었으나, 각각 기념식을 갖은 후 학술행사, 마라톤대회, 문화행사로 진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기념행사는 사회 현안을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사회운동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변천

4·19혁명 기념일 행사는 사건이 발발한 이듬해부터 국가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한편에서는 국가가 주관하는 행사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기념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이는 196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개최한 4·19혁명 기념행사로 발전하였다.

1962년 학생단체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도록 권고함에 따라 4·19의거기념일로 지정되어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1973년 3월 30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제정되면서 4·19혁명은 정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4·19혁명의 기념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기부터 급격하게 축소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김영삼 정권에 들어서 4·19혁명을 재조명하였으며, 이에 발맞추어 기념일도 보다 규모 있게 거행하기 시작했다.

기타

최근 경남 마산에서는 3·15의거를 4·19혁명에서 분리하여 독자적인 사건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흐름이 일고 있다. 박정희 정권 때에도 3·15의거 기념식을 독자적으로 개최해 왔고 국립 4·19묘지와 별개로 ‘국립 3·15묘지’가 조성된 점 은 사건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일면 타당성을 부여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희생자를 안장한 집단묘지로 서울에 국립 4·19묘지가, 마산에 국립 3·15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기붕의 집터에 ‘4·19혁명기념도서관’을 건립하여 4·19혁명 정신을 기념하고 계승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 밖에 전국의 주요 대학과 도시에 4·19혁명을 기념 혹은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물이 건립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사건에 따라 기념사업이 진행 중이다.

참고문헌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 혁명1, 2 (사월혁명연구소 편, 한길사, 1990)
1960년대의 사회운동 (박태순·김동춘, 까치, 1991)
문민정부의 ‘4·19’재조명 (국가보훈처, 1995)
달력 속에서 만나는 숨은 우리 날 찾기1 (김선섭, 씨앤드씨그룹, 2000)
4월 혁명과 피의 화요일 (오유석, 20세기 한국의 야만, 일빛, 2001)
三·一五義擧史 (삼일오의거기념사업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