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씻이(洗鋤宴, 洗鋤會)

호미씻이

한자명

洗鋤宴, 洗鋤會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7월 > 정일

집필자 배영동(裵永東)

정의

농부들이 연간 농작물 재배의 핵심적인 활동을 모두 마치고, 음력 7월 초중순 무렵에 마을 단위로 날을 정하여 하루를 먹고 노는 잔치이자 의례. 이것이 호미씻이로 명명된 것은, 일년이라는 영농 주기에서 농작물 재배의 핵심적인 활동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작업이 호미를 이용한 김매기였기 때문이다.

유래

호미씻이는 조선중기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전라도 해남에 살았던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석천선생시집(石川先生詩集)』에 ‘세서(洗鋤)’라는 시가 있으니, 이것이 호미씻이에 대한 초기의 기록이다. 장유(張維, 1587~1638)의 『계곡집(谿谷集)』에도 ‘세서’라는 시가 실려 있다.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는 세서회(洗鋤會)라는 표현으로, 이어 우하영(禹夏永)의 『천일록(千一錄)』(1777~1800)에는 세서연(洗鋤宴)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조선 초기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2에는 백종(百種)날의 우란분재(盂蘭盆齋)에 대해 “7월 15일은 백종이라 부른다. 불가(佛家)에서는 100종의 화과(花果)를 모아놓고 우란분(盂蘭盆)을 마련하는데, 장안의 비구니 사찰에서는 더욱 심하였다. 부녀자들이 모여들어 쌀과 곡식을 바치며, 죽은 부모의 영혼을 창(唱)하며 제사 지내었다. 가끔 승려들이 길거리에 탁자를 마련해놓고 그렇게 하기도 하였다.”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세시기인 『경도잡지(京都雜志)』,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백중(百中) 또는 백종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호미씻이와 같은 행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세 권의 세시기에는 “이날 사찰에서는 재(齋)를 올리고, 민간에서는 망혼(亡魂)에 제사 지낸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경도잡지』에서는 “옛날 풍속에 백 가지 씨를 진열하였으므로 백종이라 한다고 하는데 황당무계한 설”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 『용재총화』를 위시하여 후대의 세시기 저자들에 따르면, 백중일은 농민들의 호미씻이와 관련 없이, 불교적인 의례가 행해진 날이었다고 풀이된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증보산림경제』와 『천일록』에 호미씻이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백중일은 불교적인 의례일이었다고 이해된다. 한편 백중이 불교적 의례일로 정착되기 이전에는 우리 고유의 농경의례가 행해지던 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호미씻이는 조선선기에 직파법 위주의 도작(稻作) 면적이 계속 확대되는 가운데 엄청난 노동압박이었던 수차례 논매기가 종료되었을 때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장치로 등장한 것 같다. 그러나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호미씻이가 일반화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다가 17~18세기에 이앙법과 도맥(稻麥) 2작 체계가 일반화되고, 수리시설의 확충으로 논 면적이 늘어나면서 호미씻이가 일반화 되었다. 이앙법으로 제초 작업에는 노동력이 절감되었으나, 새로운 농작업으로 부각된 모내기는 집약적인 노동력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앙법의 효과는 연간 도맥 2작 체계를 형성하여 토지 생산성을 높였다. 맥작(麥作)의 수확탈곡에 잇달은 도작(稻作)의 모내기는 맥작과 도작의 교체기에 노동력의 집중도를 현저히 높였다. 특히 농업용수 공급에 어려움이 있던 상태에서 진행된 모내기와 논매기는 두레와 같은 집약적인 공동협업노동으로 처리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모내기를 위하여 두레가 결성되니, 모내기 때의 여세를 몰아서 논매기까지도 마을 단위 공동 노동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년 중 논매기 작업을 마친 후에, 마을 단위 공동협업노동을 매듭짓는다는 차원에서 농민들이 함께 모여 하루를 쉬는 형태의 호미씻이가 일반화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호미씻이가 일반화 된 농업기술사적 요인은, 17세기 이래 노동력의 집중도를 증가시킨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라고 하는 답작 농업의 기술과 형태 변화였다. 아울러 공동 작업, 공동 식사, 공동 놀이를 그 기능으로 하는 두레의 성립과 활성화도 호미씻이 형성의 촌락사회적, 노동형태적 요인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호미씻이는 그 이전의 불교적 명절이던 백중 혹은 도교적 명절이던 칠석이 농경문화적으로 재편성된 것이라고 하겠다.

내용

농민들의 일년 영농 주기를 보면, 크게 농번기와 농한기가 교차하면서 그 중간 중간에 준(準) 농한기가 끼어 있다. 이것은 기후 변화라는 자연 조건, 농업 노동력, 농업 노동의 적기, 재배 작물의 생육 기간과 특성 등이 결합되면서 형성된 것이다.

호미씻이는 여름철의 최대 농작업이던 논매기뿐만 아니라 밭매기를 마치는 시점에 형성되는 준 농한기에 하루를 잡아서 온 동민이 모여 놀던 농경세시였다. 모이는 장소는 강변이나 개울가의 그늘 또는 마을 주변의 그늘진 곳이었다. 호미씻이를 하러 나갈 때는 집집마다 성의껏 음식과 술을 준비하여 갔다. 대체로 부잣집에서 더 풍성하게 마련하는 게 관례였다. 참여한 사람들은 온종일 먹고 마시며,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놀았다.

머슴들이 많던 시기 혹은 머슴이 많은 마을에서는 호미씻이의 주축이 머슴들이었다. 머슴들은 주인집에서 만들어 준 음식과 술을 가지고 나가서 은근히 과시하면서 흥겹게 놀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집마다 마련해 준 음식물을 늘어놓고 머슴들 스스로 품평회를 하기도 했다. 주인집에서 많은 음식을 제공받은 머슴은 주인한테 그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제공된 음식물로 주인의 인심이 얼마나 후한가도 헤아려졌다.

그런가 하면, 예부터 머슴들이 별로 없던 마을 그리고 과거에 머슴들이 많았던 마을이라 해도 신분제가 해체된 후의 농촌에서는, 호미씻이를 할 때 집집마다 농민들이 성의껏 음식물을 마련하여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을에서 특별히 가난한 사람은 아무런 음식을 준비하지도 않고 호미씻이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호미씻이는 머슴들에게 베푸는 잔치이며, 머슴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도록 긍정적 자극을 주는 의례였다.

이렇듯이 전통적인 호미씻이에서는 일꾼과 남성을 주축으로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하루를 먹고 마시고 즐겼다. 전통적으로는 자연마을마다 정한 날짜에 다른 장소에서 호미씻이를 했다. 호미씻이를 하던 시기는 음력 7월 초중순이지만, 원래부터 명일의 의미를 지닌 칠석이나 백중일로 선택되는 경향이 짙었다.

지역사례

호미씻이의 명칭은 다양하여 지역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표준어인 ‘호미씻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세서연, 세서회 등으로 표현할 때의 내용을 가리킨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호미로 김매는 작업의 고통을 씻는 것이라는 뜻이다. ‘호미걸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호미로 김매는 작업을 마치고 더 이상 호미를 쓰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호미를 걸어둔다는 뜻이다. 호미씻이와 호미걸이는 주로 기호(畿湖)지방에서 나타나는 말이다. 이 둘은 ‘호미씻이한다’, ‘호미걸이한다’와 같이 사용된다.

다음으로 풋구(혹은 풋꾸, 풋굿)와 초연(草宴)이라는 말도 퍽 널리 사용되었다. 풋구는 들판의 잡초(풀: 草)를 제거한 다음에 하는 굿(잔치: 宴)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풋구를 한자로 옮기면 곧 초연(草宴)이 된다. 이 말은 주로 영남지방 그것도 경북에서 흔히 보이는데, 이 둘은 ‘풋구먹는다’, ‘풋구먹이한다’, ‘풀굿먹이한다’, ‘초연먹는다’와 같이 사용된다. 영남의 일부 지역에서는 ‘꼼비기(혹은 꼼베기, 꼰비기, 꼰배기)먹기’, ‘깨이말(꽹이말)타기’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꼼비기’는 밀이나 콩을 볶은 것이라고 하며, 깨이말은 괭이를 타는 말처럼 여긴 것이라고 하지만, 이 둘의 어원은 정확하지 않다. 이런 말을 쓸 때에는 ‘꼼비기먹는다’, ‘깨이말타기한다’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두레와 관련하여 호미씻이를 명명한 것은 ‘두레먹기’이다. 이 말은 호남과 충남, 경남 남부 등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주로 쓰인다. 특히 두레가 성했던 호남지방의 호미씻이는 두레먹기로 잘 알려져 있다. 두레꾼의 공동 작업인 제초 작업이 끝난 후에 모여서 놀고 먹는다는 의미로 ‘두레먹는다’라고 하였으며, 간혹 ‘두레잔치’라고도 했다. 호남에서는 더러 두레 장원(壯元), 농사 장원, 장원례(壯元禮) 같은 말로도 일컬어졌다. 이것은 두레먹기를 할 때, 두레꾼 가운데서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뽑아 소에 태워 주인집에 가서 후하게 대접받고 즐겁게 노는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머슴들이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이므로, 경남에서는 이 행사를 머슴잔치 또는 머슴회치라 하였고, 전국적으로 이날을 머슴생일 또는 머슴날이라고도 했다.

한편 ‘백중놀이’ 혹은 ‘백중’이라고 하면서도 그 의례적 의미는 호미씻이와 같은 경우도 있다. 이것은 조선 중기까지 성행했던 불교의례인 우란분재(盂蘭盆齋)를 행하던 백중일에 후대의 농경세시인 호미씻이가 겹쳐진 현상이다. 더 소급하면, 음력 7월 15일은 삼원사상(三元思想)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중원일(中元日)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날이었다.

경북 문경시 산양면 현리에서 1950~1960년대에 행해진 ‘풋구먹이’는 음력 7월 초순부터 보름 무렵 풋구를 먹기 며칠 전부터 머슴들끼리 의논하여 날짜를 정하고, 마을길 청소와 풀베기를 했다. 풋구를 먹기 전에 머슴들은 멍석을 하나씩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머슴들은 밤에 호롱불을 켜놓고 멍석을 만들거나, 비가 와서 일을 하지 않는 날 멍석을 만들었다. 풀굿믹이 하기 전날 대방(머슴들의 우두머리)은 전머슴을 데리고 용궁장(경북 예천군 용궁면 소재)에 가서 장을 봤다. 풀굿날 대방이 박산재 꼭대기에 앉아서 집집마다 음식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 풀굿믹이날 명태찜 한 마리, 고등어 한 토막, 전(고추전, 호박전), 닭고기, 돼지고깃국 같은 음식을 장만한다. 풀굿날에는 머슴들이 주인집에서 삼베적삼 한 벌을 얻어 입기도 하는데,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박산재로 올라간다. 식모가 음식을 개상반(개다리소반)에 차려서 이고 온다. 이날 머슴들은 풍물을 치고 논다. 농기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쓰고 그걸 대나무에 맨다. 대나무 맨 위에는 가지를 치지 않는다. 풍물은 신임 있는 사람이 이웃마을 가곡, 녹문, 서중, 약서 등에 가서 빌려왔다.

의의

호미씻이는 중노동의 농번기에서 벗어나는 시점에 농민들이 집약 노동의 중압감을 씻어내고 노동 주기상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는 전환점이었다. 따라서 호미씻이는 일년 주기의 농업 노동에서 전반부의 재배기에서 후반부의 수확기로 이행하는 과정에 설정된 시간적 통과의례였다. 동시에 호미씻이는 매년 결성되던 두레와 같은 공동 협업 노동 조직이 제 기능을 다했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그런 노동 조직을 해체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호미씻이는 불교적 의례일로서 우란분재를 올리던 백중 혹은 도교적 명절이던 칠석이, 조선 후기에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의 성립 이후에 농경의례일로 바뀐 것이다. 우란분재를 올리던 불교적 의례일이나, 도교적 명절로서 견우직녀의 전설을 간직한 칠석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그 자체로서도 명절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한 갈래로 호미씻이라는 농경의례로 발전 변화되었다. 이러한 호미씻이는 중국에는 없는 한국 고유의 농경의례이다.

참고문헌

朝鮮常識-風俗 篇 (崔南善, 東明社, 1948), 韓國의 歲時風俗 (최상수, 高麗書籍, 1960), 韓國歲時風俗 (任東權, 瑞文堂, 1973), 韓國의 歲時風俗 (張籌根, 螢雪出版社, 1984), 두레共同體와 農樂의 社會史 (신용하, 한국사회연구2, 한국사회사연구회, 한길사, 1984), 韓國農耕歲時의 硏究 (金宅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5), 호미에 觀한 一硏究-그 機能과 關聯民俗을 중심으로 (裵永東, 嶺南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87), 韓·中 歲時風俗 및 歌謠硏究 (張正龍, 集文堂, 1988), 논매기의 技術과 農耕文化的 意義 (배영동, 斗山金宅圭博士華甲紀念 文化人類學論叢, 同刊行委員會, 198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백중의 기원과 성격 (이수자, 韓國民俗學25, 民俗學會, 1993), 호미의 變遷과 農耕文化 (裵永東, 민족문화6, 한성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3), 한국의 두레1 (주강현, 집문당, 1997), 한국에 전해진 目連求母 故事 (金學主, 盂蘭盆齋와 目連傳承의 文化史, 중앙인문사, 2000), 농업생산형태 변화에 따른 草宴의 소멸과 대체의례 등장 (배영동, 역사민속학12, 한국역사민속학회, 2001), 조선후기 답작형 두레의 출현 배경 (배영동, 韓國의 農耕文化6, 京畿大學校博物館, 2003), 백중과 우란분재의 발생 기원에 관한 연구 (구미래, 比較民俗學25, 比較民俗學會, 2003), 조선후기 호미씻이[洗鋤宴] 형성의 농업사적 배경 (배영동, 농업사연구2-2, 한국농업사학회, 2003)

호미씻이

호미씻이
한자명

洗鋤宴, 洗鋤會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7월 > 정일

집필자 배영동(裵永東)

정의

농부들이 연간 농작물 재배의 핵심적인 활동을 모두 마치고, 음력 7월 초중순 무렵에 마을 단위로 날을 정하여 하루를 먹고 노는 잔치이자 의례. 이것이 호미씻이로 명명된 것은, 일년이라는 영농 주기에서 농작물 재배의 핵심적인 활동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작업이 호미를 이용한 김매기였기 때문이다.

유래

호미씻이는 조선중기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전라도 해남에 살았던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석천선생시집(石川先生詩集)』에 ‘세서(洗鋤)’라는 시가 있으니, 이것이 호미씻이에 대한 초기의 기록이다. 장유(張維, 1587~1638)의 『계곡집(谿谷集)』에도 ‘세서’라는 시가 실려 있다.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는 세서회(洗鋤會)라는 표현으로, 이어 우하영(禹夏永)의 『천일록(千一錄)』(1777~1800)에는 세서연(洗鋤宴)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조선 초기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2에는 백종(百種)날의 우란분재(盂蘭盆齋)에 대해 “7월 15일은 백종이라 부른다. 불가(佛家)에서는 100종의 화과(花果)를 모아놓고 우란분(盂蘭盆)을 마련하는데, 장안의 비구니 사찰에서는 더욱 심하였다. 부녀자들이 모여들어 쌀과 곡식을 바치며, 죽은 부모의 영혼을 창(唱)하며 제사 지내었다. 가끔 승려들이 길거리에 탁자를 마련해놓고 그렇게 하기도 하였다.”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세시기인 『경도잡지(京都雜志)』,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백중(百中) 또는 백종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호미씻이와 같은 행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세 권의 세시기에는 “이날 사찰에서는 재(齋)를 올리고, 민간에서는 망혼(亡魂)에 제사 지낸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경도잡지』에서는 “옛날 풍속에 백 가지 씨를 진열하였으므로 백종이라 한다고 하는데 황당무계한 설”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 『용재총화』를 위시하여 후대의 세시기 저자들에 따르면, 백중일은 농민들의 호미씻이와 관련 없이, 불교적인 의례가 행해진 날이었다고 풀이된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증보산림경제』와 『천일록』에 호미씻이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백중일은 불교적인 의례일이었다고 이해된다. 한편 백중이 불교적 의례일로 정착되기 이전에는 우리 고유의 농경의례가 행해지던 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호미씻이는 조선선기에 직파법 위주의 도작(稻作) 면적이 계속 확대되는 가운데 엄청난 노동압박이었던 수차례 논매기가 종료되었을 때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장치로 등장한 것 같다. 그러나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호미씻이가 일반화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다가 17~18세기에 이앙법과 도맥(稻麥) 2작 체계가 일반화되고, 수리시설의 확충으로 논 면적이 늘어나면서 호미씻이가 일반화 되었다. 이앙법으로 제초 작업에는 노동력이 절감되었으나, 새로운 농작업으로 부각된 모내기는 집약적인 노동력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앙법의 효과는 연간 도맥 2작 체계를 형성하여 토지 생산성을 높였다. 맥작(麥作)의 수확과 탈곡에 잇달은 도작(稻作)의 모내기는 맥작과 도작의 교체기에 노동력의 집중도를 현저히 높였다. 특히 농업용수 공급에 어려움이 있던 상태에서 진행된 모내기와 논매기는 두레와 같은 집약적인 공동협업노동으로 처리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모내기를 위하여 두레가 결성되니, 모내기 때의 여세를 몰아서 논매기까지도 마을 단위 공동 노동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년 중 논매기 작업을 마친 후에, 마을 단위 공동협업노동을 매듭짓는다는 차원에서 농민들이 함께 모여 하루를 쉬는 형태의 호미씻이가 일반화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호미씻이가 일반화 된 농업기술사적 요인은, 17세기 이래 노동력의 집중도를 증가시킨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라고 하는 답작 농업의 기술과 형태 변화였다. 아울러 공동 작업, 공동 식사, 공동 놀이를 그 기능으로 하는 두레의 성립과 활성화도 호미씻이 형성의 촌락사회적, 노동형태적 요인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호미씻이는 그 이전의 불교적 명절이던 백중 혹은 도교적 명절이던 칠석이 농경문화적으로 재편성된 것이라고 하겠다.

내용

농민들의 일년 영농 주기를 보면, 크게 농번기와 농한기가 교차하면서 그 중간 중간에 준(準) 농한기가 끼어 있다. 이것은 기후 변화라는 자연 조건, 농업 노동력, 농업 노동의 적기, 재배 작물의 생육 기간과 특성 등이 결합되면서 형성된 것이다.

호미씻이는 여름철의 최대 농작업이던 논매기뿐만 아니라 밭매기를 마치는 시점에 형성되는 준 농한기에 하루를 잡아서 온 동민이 모여 놀던 농경세시였다. 모이는 장소는 강변이나 개울가의 그늘 또는 마을 주변의 그늘진 곳이었다. 호미씻이를 하러 나갈 때는 집집마다 성의껏 음식과 술을 준비하여 갔다. 대체로 부잣집에서 더 풍성하게 마련하는 게 관례였다. 참여한 사람들은 온종일 먹고 마시며,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놀았다.

머슴들이 많던 시기 혹은 머슴이 많은 마을에서는 호미씻이의 주축이 머슴들이었다. 머슴들은 주인집에서 만들어 준 음식과 술을 가지고 나가서 은근히 과시하면서 흥겹게 놀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집마다 마련해 준 음식물을 늘어놓고 머슴들 스스로 품평회를 하기도 했다. 주인집에서 많은 음식을 제공받은 머슴은 주인한테 그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제공된 음식물로 주인의 인심이 얼마나 후한가도 헤아려졌다.

그런가 하면, 예부터 머슴들이 별로 없던 마을 그리고 과거에 머슴들이 많았던 마을이라 해도 신분제가 해체된 후의 농촌에서는, 호미씻이를 할 때 집집마다 농민들이 성의껏 음식물을 마련하여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을에서 특별히 가난한 사람은 아무런 음식을 준비하지도 않고 호미씻이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호미씻이는 머슴들에게 베푸는 잔치이며, 머슴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도록 긍정적 자극을 주는 의례였다.

이렇듯이 전통적인 호미씻이에서는 일꾼과 남성을 주축으로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하루를 먹고 마시고 즐겼다. 전통적으로는 자연마을마다 정한 날짜에 다른 장소에서 호미씻이를 했다. 호미씻이를 하던 시기는 음력 7월 초중순이지만, 원래부터 명일의 의미를 지닌 칠석이나 백중일로 선택되는 경향이 짙었다.

지역사례

호미씻이의 명칭은 다양하여 지역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표준어인 ‘호미씻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세서연, 세서회 등으로 표현할 때의 내용을 가리킨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호미로 김매는 작업의 고통을 씻는 것이라는 뜻이다. ‘호미걸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호미로 김매는 작업을 마치고 더 이상 호미를 쓰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호미를 걸어둔다는 뜻이다. 호미씻이와 호미걸이는 주로 기호(畿湖)지방에서 나타나는 말이다. 이 둘은 ‘호미씻이한다’, ‘호미걸이한다’와 같이 사용된다.

다음으로 풋구(혹은 풋꾸, 풋굿)와 초연(草宴)이라는 말도 퍽 널리 사용되었다. 풋구는 들판의 잡초(풀: 草)를 제거한 다음에 하는 굿(잔치: 宴)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풋구를 한자로 옮기면 곧 초연(草宴)이 된다. 이 말은 주로 영남지방 그것도 경북에서 흔히 보이는데, 이 둘은 ‘풋구먹는다’, ‘풋구먹이한다’, ‘풀굿먹이한다’, ‘초연먹는다’와 같이 사용된다. 영남의 일부 지역에서는 ‘꼼비기(혹은 꼼베기, 꼰비기, 꼰배기)먹기’, ‘깨이말(꽹이말)타기’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꼼비기’는 밀이나 콩을 볶은 것이라고 하며, 깨이말은 괭이를 타는 말처럼 여긴 것이라고 하지만, 이 둘의 어원은 정확하지 않다. 이런 말을 쓸 때에는 ‘꼼비기먹는다’, ‘깨이말타기한다’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두레와 관련하여 호미씻이를 명명한 것은 ‘두레먹기’이다. 이 말은 호남과 충남, 경남 남부 등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주로 쓰인다. 특히 두레가 성했던 호남지방의 호미씻이는 두레먹기로 잘 알려져 있다. 두레꾼의 공동 작업인 제초 작업이 끝난 후에 모여서 놀고 먹는다는 의미로 ‘두레먹는다’라고 하였으며, 간혹 ‘두레잔치’라고도 했다. 호남에서는 더러 두레 장원(壯元), 농사 장원, 장원례(壯元禮) 같은 말로도 일컬어졌다. 이것은 두레먹기를 할 때, 두레꾼 가운데서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뽑아 소에 태워 주인집에 가서 후하게 대접받고 즐겁게 노는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머슴들이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이므로, 경남에서는 이 행사를 머슴잔치 또는 머슴회치라 하였고, 전국적으로 이날을 머슴생일 또는 머슴날이라고도 했다.

한편 ‘백중놀이’ 혹은 ‘백중’이라고 하면서도 그 의례적 의미는 호미씻이와 같은 경우도 있다. 이것은 조선 중기까지 성행했던 불교의례인 우란분재(盂蘭盆齋)를 행하던 백중일에 후대의 농경세시인 호미씻이가 겹쳐진 현상이다. 더 소급하면, 음력 7월 15일은 삼원사상(三元思想)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중원일(中元日)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날이었다.

경북 문경시 산양면 현리에서 1950~1960년대에 행해진 ‘풋구먹이’는 음력 7월 초순부터 보름 무렵 풋구를 먹기 며칠 전부터 머슴들끼리 의논하여 날짜를 정하고, 마을길 청소와 풀베기를 했다. 풋구를 먹기 전에 머슴들은 멍석을 하나씩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머슴들은 밤에 호롱불을 켜놓고 멍석을 만들거나, 비가 와서 일을 하지 않는 날 멍석을 만들었다. 풀굿믹이 하기 전날 대방(머슴들의 우두머리)은 전머슴을 데리고 용궁장(경북 예천군 용궁면 소재)에 가서 장을 봤다. 풀굿날 대방이 박산재 꼭대기에 앉아서 집집마다 음식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 풀굿믹이날 명태찜 한 마리, 고등어 한 토막, 전(고추전, 호박전), 닭고기, 돼지고깃국 같은 음식을 장만한다. 풀굿날에는 머슴들이 주인집에서 삼베적삼 한 벌을 얻어 입기도 하는데,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박산재로 올라간다. 식모가 음식을 개상반(개다리소반)에 차려서 이고 온다. 이날 머슴들은 풍물을 치고 논다. 농기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쓰고 그걸 대나무에 맨다. 대나무 맨 위에는 가지를 치지 않는다. 풍물은 신임 있는 사람이 이웃마을 가곡, 녹문, 서중, 약서 등에 가서 빌려왔다.

의의

호미씻이는 중노동의 농번기에서 벗어나는 시점에 농민들이 집약 노동의 중압감을 씻어내고 노동 주기상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는 전환점이었다. 따라서 호미씻이는 일년 주기의 농업 노동에서 전반부의 재배기에서 후반부의 수확기로 이행하는 과정에 설정된 시간적 통과의례였다. 동시에 호미씻이는 매년 결성되던 두레와 같은 공동 협업 노동 조직이 제 기능을 다했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그런 노동 조직을 해체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호미씻이는 불교적 의례일로서 우란분재를 올리던 백중 혹은 도교적 명절이던 칠석이, 조선 후기에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의 성립 이후에 농경의례일로 바뀐 것이다. 우란분재를 올리던 불교적 의례일이나, 도교적 명절로서 견우직녀의 전설을 간직한 칠석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그 자체로서도 명절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한 갈래로 호미씻이라는 농경의례로 발전 변화되었다. 이러한 호미씻이는 중국에는 없는 한국 고유의 농경의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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