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사례(鄕射禮)

향사례

한자명

鄕射禮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3월 > 정일

집필자 박경하(朴京夏)

정의

예(禮)와 악(樂)의 확립을 통해 성리학적인 향촌 교화를 목적으로 시행한 의례. 중국 주(周)에서 향대부(鄕大夫)가 3년마다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왕에게 천거할 때, 그 선택을 위해 활을 쏘던 의식에서 유래하였다.

유래

『주례(周禮)』 사도교관직조(司徒敎官職條)에는 지방 단위를 향(鄕), 주(州), 당(黨), 족(族), 여(閭), 비(比)로 나누고, 그 장(長)을 각각 향대부, 주장(州長), 당정(黨正), 족수(族帥), 여서(閭胥), 비장(比長)으로 정해 놓았다. 그리고 향사례(鄕射禮)는 주에서 행하는 의례로 향대부가 정월에 사도(司徒)로부터 교수하고, 그것을 주장에게 전수하면 주장은 정월 중의 길일을 택해 향사례를 행하였다. 향사례의 ‘사(射)’는 “그 뜻을 바르게 한다(定其志).”라는 의미이다. 『의례(儀禮)』 향사례조(鄕射禮條)에는 “주장이 춘추(春秋) 두 계절에 예법에 따라 백성을 모아 주서(州序: 州의 학교)에서 활쏘기를 익히는 것[習射].”이라고 기록하여 향사례의 또 다른 의미를 알려준다.

고려(高麗) 말 성리학(性理學)이 전래됨에 따라 향음주례(鄕飮酒禮)와 더불어 향사례가 전래되었다. 향사례에 대한 기록은 세종(世宗) 때에 보이기 시작한다. 세종 15년(1433) 왕은 술의 해로움을 경고하며 내린 교지(敎旨)에서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술잔을 주고받는 것으로 절도를 삼으며, 활을 쏘고 술 마시는 자리에서는 읍하고 사양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향사례는 친목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양로례(養老禮)는 나이와 덕 있는 사람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중앙에서 대사례(大射禮)의 시행을 통해서 예와 악을 확립하고자 한 반면, 지방에서는 향사례를 통해서 예와 악의 확립 과정을 거쳐서 지방민을 통치하고 교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식을 토대로 시행되는 향사례에 대한 의논은 성종(成宗) 때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정성근(鄭誠謹)은 조정에서 하는 양로례와 대사례에 병행해서 지방에서도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된 대로 시행해서 백성을 교화하고 선량한 풍속을 성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성종은 이러한 의견을 수용해서 맹동(孟冬)에는 개성부와 주, 부, 군, 현에서 길일을 택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고,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례를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은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재직할 때에 향사례와 향음주례에 대한 원칙을 준행하고 그 긍정적 결과를 피력하였다. 이에 따르면 향사례에 효제자(孝悌者), 재예자(才藝者)를 참여하게 하여 풍화(風化)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는 『주례』의 향사례와 향음주례의 실천을 통해서 성리학적인 향촌 교화를 성취함으로써 향촌 자치 체제 확립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유향소(留鄕所)를 활성화하려고 하였다. 향촌에서는 향사당을 별도로 설치하여 향촌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중심 기구로 삼고자 하였다. 초기에 안동, 영천, 광주에 향사당이 설치되었다. 예천(醴泉)에서 권오복(權五福)이 지은 「향사당기(鄕射堂記)」에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서 옛 법을 좇아 예교(禮敎)를 숭상하고 향사(鄕射)의 예(禮)를 마련하였다. 아, 활을 쏘는 것[射]은 한 가지 기예(技藝)에 불과하다. 그러나 손님의 차례를 정하고 좌주를 드는 예가 이 의식(儀式)에서 거행된다. 그리하여 한 고을의 선(善)과 악(惡)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이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명칭은 비록 향사당이라고 하였지만 권장하고 징계하는 깊은 뜻이 실로 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향사례가 향촌 교화(敎化)의 기능을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중앙의 의도와는 달리 지방에서는 향사례와 향음주례에 대한 시행 의지가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성종 10년(1479) 사경(司經) 조위(曹偉)가 지방 수령의 향사례 시행을 검찰할 것을 요청한 것이나, 성종 13년(1482) 전한(典翰) 정성근(鄭誠謹)이 불만 섞인 주장을 편 것 또는 성종 16년(1485) 성종(成宗)의 종용에서도 알 수 있다. 중종조(中宗朝)에 들어서서는 지방 풍속 교화의 방법으로서 향사례보다는 향음주례와 친영례(親迎禮)가 거론되고 있다.

향사례의 실행은 주례(周禮)의 회복이라는 대전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방민의 교화를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될 수 없었던 것은 그 시행 절차가 무척 번거로웠고, 또 일정하게 습사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행할 수 없는 예제인 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타인의 비웃음을 살 수 있는 취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원래 조선 초기에는 향음주례와 향사례가 고제(古制)이고, 향약은 송대의 시제(時制)이므로 전자에 더 비중을 두었으나, 중종대 사림파 조광조의 등장 이후 향약 보급 운동으로 향약 시행이 더욱 강조되고, 또 향약 규정 안에 향음주례, 향사례, 강신례(講信禮)가 함께 포함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된 듯 하다. 이후 향사례는 별도로 행해지기보다는 통상 중삼(重三, 3월 3일), 중구(重九, 9월 9일)의 향약 집회 때에 부속 행사로 행해졌다.

정조(正祖)대에는 향례(鄕禮)에 근간을 이루는 향음주례, 향사례, 향약을 종합한 『향례합편(鄕禮合偏)』을 출간하여 유교적 지배 질서에 의한 국가 차원의 풍속 교화를 강조하였다.

내용

세종대 향사례 의식과 절차는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五禮)」에 잘 나타나 있다. 향사례는 「군례의식(軍禮儀式)」의 향사의(鄕射儀) 항목에 그 절차의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향사례는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개성부(開城府)와 여러 도(道)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서 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루 전에 주인[主人, 소재관사(所在官司)]이 빈(賓)에게 알린다. 이때의 빈은 효제충신(孝悌忠信)하며 예의(禮儀)를 좋아하고 행실이 난잡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선택된다. 사단(射壇)은 학당(學堂) 근처에 만들며 단(壇)과 후(侯)와의 거리는 90보(步)이다. 주빈(主賓)이 서로 예(禮)를 행하고 제자리를 잡으면 술을 세 순배 돌리고는 사례(射禮)를 시행한다.

사사(司射)가 빈에게 활쏘기를 청하면, 빈이 이를 허락한다. 사사가 주인에게 고하고 서계(西階)로 내려와서 제자(弟子)에게 명하여 사기(射器)를 바치게 한다. 사사(司射)가 활을 가지고 네 대의 화살을 등에 꽂고 사단으로 다시 올라와서 활을 쏜다. 주빈이 임시로 서로 짝을 지어 화살 세 대를 등에 꽂고 한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서 차례대로 활을 쏜다. 화살을 쏠 때마다 풍악이 시작되고, 화살을 쏘면 반드시 절차에 맞게 한다. 활쏘기를 마치면, 맞추지 못한 사람에게는 예에 의거해서 벌주(罰酒)를 마시게 한다. 평소처럼 주인이 예(禮)를 갖추어 문 밖에서 참석자를 보내는 것으로 향사례를 마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세종실록』 「오례」 군례의식(軍禮儀式) 향사의(鄕射儀)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었다.

의의

향사례(鄕射禮)는 단순히 화살로 과녁을 맞추는 기예(技藝)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고, 뜻을 바로 하는[正志] 예의와 연고덕행자(年高德行者)를 숭상하고 백성들에게 선악(善)을 권면하고 악(惡)을 징계하는 풍속 교화의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참고문헌

國朝五禮儀, 新增東國輿地勝覽, 儀禮, 朝鮮王朝實錄, 周禮, 鄕禮合��, 조선 중기 鄕禮에 대한 인식의 변화 (高英津, 國史館論叢81, 國史編纂委員會, 1998), 韓國社會史硏究 (李泰鎭, 知識産業社, 1986), 正祖朝 『鄕禮合編』의 刊行과 鄕約의 性格 (朴京夏, 金龍德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1988)

향사례

향사례
한자명

鄕射禮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3월 > 정일

집필자 박경하(朴京夏)

정의

예(禮)와 악(樂)의 확립을 통해 성리학적인 향촌 교화를 목적으로 시행한 의례. 중국 주(周)에서 향대부(鄕大夫)가 3년마다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왕에게 천거할 때, 그 선택을 위해 활을 쏘던 의식에서 유래하였다.

유래

『주례(周禮)』 사도교관직조(司徒敎官職條)에는 지방 단위를 향(鄕), 주(州), 당(黨), 족(族), 여(閭), 비(比)로 나누고, 그 장(長)을 각각 향대부, 주장(州長), 당정(黨正), 족수(族帥), 여서(閭胥), 비장(比長)으로 정해 놓았다. 그리고 향사례(鄕射禮)는 주에서 행하는 의례로 향대부가 정월에 사도(司徒)로부터 교수하고, 그것을 주장에게 전수하면 주장은 정월 중의 길일을 택해 향사례를 행하였다. 향사례의 ‘사(射)’는 “그 뜻을 바르게 한다(定其志).”라는 의미이다. 『의례(儀禮)』 향사례조(鄕射禮條)에는 “주장이 춘추(春秋) 두 계절에 예법에 따라 백성을 모아 주서(州序: 州의 학교)에서 활쏘기를 익히는 것[習射].”이라고 기록하여 향사례의 또 다른 의미를 알려준다.

고려(高麗) 말 성리학(性理學)이 전래됨에 따라 향음주례(鄕飮酒禮)와 더불어 향사례가 전래되었다. 향사례에 대한 기록은 세종(世宗) 때에 보이기 시작한다. 세종 15년(1433) 왕은 술의 해로움을 경고하며 내린 교지(敎旨)에서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술잔을 주고받는 것으로 절도를 삼으며, 활을 쏘고 술 마시는 자리에서는 읍하고 사양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향사례는 친목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양로례(養老禮)는 나이와 덕 있는 사람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중앙에서 대사례(大射禮)의 시행을 통해서 예와 악을 확립하고자 한 반면, 지방에서는 향사례를 통해서 예와 악의 확립 과정을 거쳐서 지방민을 통치하고 교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식을 토대로 시행되는 향사례에 대한 의논은 성종(成宗) 때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정성근(鄭誠謹)은 조정에서 하는 양로례와 대사례에 병행해서 지방에서도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된 대로 시행해서 백성을 교화하고 선량한 풍속을 성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성종은 이러한 의견을 수용해서 맹동(孟冬)에는 개성부와 주, 부, 군, 현에서 길일을 택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고,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례를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은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재직할 때에 향사례와 향음주례에 대한 원칙을 준행하고 그 긍정적 결과를 피력하였다. 이에 따르면 향사례에 효제자(孝悌者), 재예자(才藝者)를 참여하게 하여 풍화(風化)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는 『주례』의 향사례와 향음주례의 실천을 통해서 성리학적인 향촌 교화를 성취함으로써 향촌 자치 체제 확립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유향소(留鄕所)를 활성화하려고 하였다. 향촌에서는 향사당을 별도로 설치하여 향촌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중심 기구로 삼고자 하였다. 초기에 안동, 영천, 광주에 향사당이 설치되었다. 예천(醴泉)에서 권오복(權五福)이 지은 「향사당기(鄕射堂記)」에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서 옛 법을 좇아 예교(禮敎)를 숭상하고 향사(鄕射)의 예(禮)를 마련하였다. 아, 활을 쏘는 것[射]은 한 가지 기예(技藝)에 불과하다. 그러나 손님의 차례를 정하고 좌주를 드는 예가 이 의식(儀式)에서 거행된다. 그리하여 한 고을의 선(善)과 악(惡)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이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명칭은 비록 향사당이라고 하였지만 권장하고 징계하는 깊은 뜻이 실로 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향사례가 향촌 교화(敎化)의 기능을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중앙의 의도와는 달리 지방에서는 향사례와 향음주례에 대한 시행 의지가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성종 10년(1479) 사경(司經) 조위(曹偉)가 지방 수령의 향사례 시행을 검찰할 것을 요청한 것이나, 성종 13년(1482) 전한(典翰) 정성근(鄭誠謹)이 불만 섞인 주장을 편 것 또는 성종 16년(1485) 성종(成宗)의 종용에서도 알 수 있다. 중종조(中宗朝)에 들어서서는 지방 풍속 교화의 방법으로서 향사례보다는 향음주례와 친영례(親迎禮)가 거론되고 있다.

향사례의 실행은 주례(周禮)의 회복이라는 대전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방민의 교화를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될 수 없었던 것은 그 시행 절차가 무척 번거로웠고, 또 일정하게 습사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행할 수 없는 예제인 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타인의 비웃음을 살 수 있는 취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원래 조선 초기에는 향음주례와 향사례가 고제(古制)이고, 향약은 송대의 시제(時制)이므로 전자에 더 비중을 두었으나, 중종대 사림파 조광조의 등장 이후 향약 보급 운동으로 향약 시행이 더욱 강조되고, 또 향약 규정 안에 향음주례, 향사례, 강신례(講信禮)가 함께 포함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된 듯 하다. 이후 향사례는 별도로 행해지기보다는 통상 중삼(重三, 3월 3일), 중구(重九, 9월 9일)의 향약 집회 때에 부속 행사로 행해졌다.

정조(正祖)대에는 향례(鄕禮)에 근간을 이루는 향음주례, 향사례, 향약을 종합한 『향례합편(鄕禮合偏)』을 출간하여 유교적 지배 질서에 의한 국가 차원의 풍속 교화를 강조하였다.

내용

세종대 향사례 의식과 절차는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五禮)」에 잘 나타나 있다. 향사례는 「군례의식(軍禮儀式)」의 향사의(鄕射儀) 항목에 그 절차의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향사례는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개성부(開城府)와 여러 도(道)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서 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루 전에 주인[主人, 소재관사(所在官司)]이 빈(賓)에게 알린다. 이때의 빈은 효제충신(孝悌忠信)하며 예의(禮儀)를 좋아하고 행실이 난잡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선택된다. 사단(射壇)은 학당(學堂) 근처에 만들며 단(壇)과 후(侯)와의 거리는 90보(步)이다. 주빈(主賓)이 서로 예(禮)를 행하고 제자리를 잡으면 술을 세 순배 돌리고는 사례(射禮)를 시행한다.

사사(司射)가 빈에게 활쏘기를 청하면, 빈이 이를 허락한다. 사사가 주인에게 고하고 서계(西階)로 내려와서 제자(弟子)에게 명하여 사기(射器)를 바치게 한다. 사사(司射)가 활을 가지고 네 대의 화살을 등에 꽂고 사단으로 다시 올라와서 활을 쏜다. 주빈이 임시로 서로 짝을 지어 화살 세 대를 등에 꽂고 한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서 차례대로 활을 쏜다. 화살을 쏠 때마다 풍악이 시작되고, 화살을 쏘면 반드시 절차에 맞게 한다. 활쏘기를 마치면, 맞추지 못한 사람에게는 예에 의거해서 벌주(罰酒)를 마시게 한다. 평소처럼 주인이 예(禮)를 갖추어 문 밖에서 참석자를 보내는 것으로 향사례를 마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세종실록』 「오례」 군례의식(軍禮儀式) 향사의(鄕射儀)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었다.

의의

향사례(鄕射禮)는 단순히 화살로 과녁을 맞추는 기예(技藝)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고, 뜻을 바로 하는[正志] 예의와 연고덕행자(年高德行者)를 숭상하고 백성들에게 선악(善)을 권면하고 악(惡)을 징계하는 풍속 교화의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참고문헌

國朝五禮儀, 新增東國輿地勝覽, 儀禮, 朝鮮王朝實錄, 周禮, 鄕禮合��
조선 중기 鄕禮에 대한 인식의 변화 (高英津, 國史館論叢81, 國史編纂委員會, 1998)
韓國社會史硏究 (李泰鎭, 知識産業社, 1986)
正祖朝 『鄕禮合編』의 刊行과 鄕約의 性格 (朴京夏, 金龍德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