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初八日)

초파일

한자명

初八日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4월 > 정일

집필자 홍윤식(洪潤植)

정의

불교의 개조(開祖)인 석가모니(釋迦牟尼)의 탄생일.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불탄일(佛誕日), 욕불일(浴佛日), 석탄일(釋誕日)이라고도 한다. 사월 초파일이라 하는 것은 음력 4월 8일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 모두 4월 8일을 탄생일로 기념하지만, 일본은 음력이 아닌 양력 4월 8일로 고쳐 기념하고 있다.

초파일은 불교 4대 명절 가운데 하나이다. 2월 8일 석가(釋迦) 출가일(出家日), 2월 15일 열반일(涅槃日), 12월 8일 성도일(成道日)을 합쳐 불교의 4대 명절이라 한다. 이 4대 명절 중 초파일이 가장 큰 명절이다. 그러나 이날은 불자(佛子)이건 아니건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이 함께 즐겨온 민속명절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날은 연등행사(燃燈行事)와 관등(觀燈)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갖가지 행사가 벌어진다. 중국에서도 이날 연등행사가 이루어지나 우리나라처럼 성행하지는 않으며, 일본에서는 연등축제 대신 불전(佛前)에 꽃을 올리는 ‘하나마쯔리’로 대신하고 있다.

연등행사

연등행사 또는 연등축제로 펼쳐지는 불교의 명절인 초파일이 민속명절로 전승된 것은 재래로 전승되어 온 연등행사와 불교의 연등공양(燃燈供養)이 습합(習合)된 데 연유한다.

불교적 성격을 띤 국가 행사인 연등회(燃燈會)는 551년(진흥왕 12)에 팔관회(八關會)의 개설과 함께 국가적 행사로 열리게 되었고 특히 고려 때 성행하였다. 이는 불교문화권에서 성행하던 불교의례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불전에 등(燈)을 밝히는 등공양(燈供養)이 차공양(茶供養), 과공양(果供養), 미공양(米供養) 등과 더불어 중요시되었다. 그것은 불전에 등을 밝혀서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불덕(佛德)을 찬양하고,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께 귀의하여 구제를 받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경전인 『법화경(法華經)』의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서는 등공양의 공덕이 무량하다고 지적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의 감통편(感通篇)에도 불등(佛燈)에 관한 설화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등불을 밝히는 참된 의미에 대해 말한 것이다. 등을 밝히는 것이 곧 연등이고, 연등을 보면서 마음을 밝히는 것을 간등(看燈) 또는 관등(觀燈)이라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관등행사가 매년 정월 15일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연례적으로 이 행사가 행해졌고, 4월 8일의 연등행사 이외에도 민속적으로 전승되어 온 연등행사가 있었음을 일러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속적 연등행사와 불교적 연등행사가 습합되어 오늘의 4월 8일, 곧 초파일의 연등축제로 이어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따라서 연등회를 거국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시행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정월 15일에 연등이 있었으며, 이것이 987년(성종 6) 10월에 정회(停會)되었다가 현종 때 2월 15일에 다시 시행하였으며, 그 뒤에는 고려 멸망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행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빈번히 나타난다. 현종 이후의 연등설회(燃燈設會)에 관한 기록은 104번이나 되지만, 2월 연등회로 정하였던 연등회가 반드시 그 날짜를 지켜서 거행되지는 않았다. 1105년(숙종 10)에는 정월에 연등을 행하였고, 의종 때도 정월에 20여 회가 열렸다. 그리고 1105년의 연등에 대하여 『고려사』에는 다른 연등 기사와는 달리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태조의 정신을 의식적으로 추종했음을 의미한다. 의종 당시에는 인종의 기일(忌日)을 피하기 위하여 정월 연등을 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명종 때에는 15회 연등행사를 거행하였는데 대부분 2월에 열렸다. 『고려사』에 따르면 인종의 기일이 정월이므로 2월로 하자는 청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연등은 망일(望日)에 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날이 한식(寒食)인 경우에는 15일 미리 앞당겨서 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기적인 연등회뿐만 아니라 특설 연등회가 수시로 열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1067년(문종 21) 흥왕사(興王寺)가 낙성되었을 때 축제와 함께 연등회가 5일 밤낮 동안 성대히 행해졌다. 또한 1073년 2월에는 봉은사(奉恩寺)에서 불상을 새로 조성하고 경찬(慶讚)을 위한 연등회가 열려 관등(觀燈)과 주연(酒宴)이 밤늦도록 베풀어졌음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문종 때는 경령전(景靈殿), 중광전(重光殿)에서 성대한 연등회가 있었고, 선종이 8월부터 11월 초순까지 서경(西京)에 머무르는 동안 서경의 흥국사에서 연등도량(燃燈道場)이 열렸고 거리에도 등을 달았다. 1102년(숙종 7) 9월에도 궁궐에서 신호사(神濩寺)까지의 길에 수만 개의 등을 달았고, 1296년(충렬왕 22) 5월에는 공주가 신호사에 가서 연등을 하였는데, 주옥(珠玉)으로 등을 만들어 매우 화려하였다고 한다. 1314년(충숙왕 1) 2월에는 묘련사(妙蓮寺)에서, 3월에는 왕륜사(王輪寺)에서, 1319년 2월에는 강안전(康安殿)에서 공주가 연등하였고, 1324년에는 상왕이 정경궁(廷慶宮)에서 5일 동안 점등하였다고 한다. 12월에는 정경궁에서, 1331년(충혜왕 1) 정월에는 연복사(演福寺)에서 각각 승려 2,000명을 공양함과 동시에 2,000개의 등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만등회도 열렸다고 한다. 만등회는 등 1만 개를 점등하여 공양하는 의식으로, 이 만등회는 이미 1166년(의종 20)에 열린 기록이 있다. 또한 공민왕도 문수법회(文殊法會) 때 성대하게 연등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연등 외에도 고려에는 사월 초파일의 연등이 있었다. 이날은 석가탄신일로서 매우 성대하게 행해져 인도(印道: India)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널리 행해졌다. 고려의 경우에는 4월 8일부터 3일 밤낮 동안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월 초파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의종 때 백선연(白善淵)이 4월 8일에 점등하였다는 것이며, 그 후 궁중에서도 사월 초파일연등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은 직접 초파일에 연등행사를 열었고, 이때부터 초파일연등은 일반 서민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내용

연등은 고려시대에 본격화되어 어린이들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어린이들이 연등 비용을 만들기 위하여 한 달 전부터 종이를 오려서 대나무에 기를 달고 성중(城中)을 다니면서 쌀과 베를 구하는 호기풍속(呼旗風俗)이 생겨났고, 공민왕도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들에게 쌀을 하사한 적이 있다.

이 호기풍속은 연등행사에 따르는 결정적인 민속으로 변하여 조선시대 연등행사에 영향을 주었다. 그와 같은 연등 의식과 행례는 왕이 봉은사 행향(行香)에 따르는 원칙에 준해서 총 1,500명이 넘는 대규모로 베풀어졌고, 대회(大會)와 소회(小會)로 나누어 의식을 거행하였다. 연등회 날은 공휴일이었고 이 연등회의 모든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연등도감(燃燈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언제부터 설치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초기에는 상원연등과 초파일연등이 계속되었으나 1415년(태조 15)에 초파일연등을 중지시켰고, 1416년 이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상원연등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414년부터는 정월연등을 대신하는 수륙재(水陸齋)가 열렸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사는 유주(有主), 무주(無主)의 고혼(孤魂)을 천도하는 의식이다. 조선 태조는 이 수륙재를 2월과 10월에 열었다. 이는 불교에 신심(信心)이 두터웠던 태조가 유생(儒生)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호국신앙의 성격을 띤 봄과 가을의 수륙재를 통하여 연등회와 팔관회를 정기적 행사로 합리화시킨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정월 15일 연등은 조선시대에 와서 수륙재라는 이질적인 현상을 나타내었지만, 초파일연등은 많은 기복을 겪으면서도 꾸준하게 전승되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상에서 보면 초파일은 석가탄신일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이날의 중요행사로 지혜와 광명을 밝힌다는 신앙적 의미가 부각되어 연등행사를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이 같은 연등행사는 고대부터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의 농경의례 등에 자연스럽게 뒷받침되고 습합되면서 고려시대까지는 이 세 가지 연등행사가 국가적 행사로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 연등회의 국가적 행사로서의 의미가 사라지자 점차 쇠퇴일로에 이르지만, 사월 초파일연등만은 불교교단과 신도들에 의해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초파일연등이 석가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계속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여기에는 고려시대까지 계속 성행해 온 민속적 의미가 강한 정월연등, 2월 연등의 행사까지 아울러 행하게 됨으로써 초파일은 단순히 불교적 의미만이 아닌 우리 민족 고유의 세시풍속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월 초파일은 불교인이 아니라도 우리 민족에게 세시명절의 하나로 깊이 자리잡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적 세시명절인 사월 초파일이 절대적인 석가모니의 탄신일은 아니다. 그것은 석가의 탄신일로 상징적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왜냐하면 석가탄신일을 4월 8일로 하는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뿐이며, 일본은 음력 4월 8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고 양력 4월 8일로 바꾸었고, 동남아 불교국가에서는 5월과 6월로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이 탄생을 상징하고 있는 데서 석가의 탄생일이 정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이날은 불교인만의 명절이 아니라 보편성을 지닌 만인의 명절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사월 초파일은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명절로 정착되어 온 것이다. 그것은 서양인들에 의한 성탄절이 기독교인만의 명절이 아니라 만인의 명절이 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초파일에 신도들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관불회(灌佛會), 연등행사, 탑돌이를 한다. 초파일 행사 중 연등행사가 가장 성대하게 행해지고 초파일하면 너도나도 등을 다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석가탄신일인 초파일에 등을 단다는 것은 무명(無明)을 밝힌다는 불교적 의미가 일차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모든 민족의 명절로 선행하게 된 데에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보편적 의미와 그것을 농경의례화한 우리 민족의 지혜가 한데 어우러져 세시풍속으로 또는 민족의 명절로 오늘에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등행사에서 등(燈)을 만들 때에도 민속적 취향에 따라 수박등, 거북등, 오리등, 일월등, 학등, 배등, 연화등, 잉어등, 항아리등, 누각등, 가마등, 마늘등, 화분등, 방울등, 만세등, 태평등, 병등, 수복등을 만들어 연등에 민속신앙의 의미를 한층 더 덧붙였음이 『동국세시기』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등을 다는 데에도 등대(燈臺)를 세워서 각종 깃발로 장식을 하고 휘황찬란한 연등을 하며, 강에는 연등을 실은 배를 띄워 온 누리를 연등 일색으로 변화시킨다. 이와 같은 축제 분위기의 연등행사는 자연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이를 관등(觀燈)이라고 한다. 연등과 관등이 있는 곳에는 각종 민속놀이도 성행하였다. 초파일에 하는 놀이를 총칭하여 파일[八日]놀이라고 하는데, 그 중 형형색색의 등과 그 불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만석중놀이가 있다. 이를 영등(影燈)놀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영등 안에는 갈이틀을 만들어 놓고 종이에 개와 매를 데리고 말을 탄 사람이 호랑이, 이리, 사슴, 노루 등을 사냥하는 모습을 그려서 갈이틀에 붙이게 된다. 등이 바람에 의해 빙빙 돌아가면 여러 가지 그림자가 비친다. 그리고 호화찬란하게 장식한 등대에 많이 달 때에는 10여 개의 등을, 적게 달 때에는 3개 정도를 달았다. 이와 같은 등대를 고려시대에는 사찰뿐만 아니라 관청, 시장, 일반 민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았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찰과 민가로 제한된 듯하고, 오늘날에는 일가일등운동(一家一燈運動)을 전개하고 있으나 대개 사찰에서만 연등하고 있다. 그리고 등을 다는 숫자도 과거에는 식구 수만큼 달았으나, 오늘날에는 한 등에 식구들의 이름을 모두 써서 붙이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초파일 행사에 관민(官民)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민가에서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민속행사로 치러졌으나, 오늘날에는 불교인들만이 참여하는 행사로 제한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불교 이외에도 기독교 등 다른 종교가 수용되어 다른 종교에서는 불교적인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데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재래의 사월 초파일이 비단 불교적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민속적으로도 큰 명절이었음은 그날 즐기던 여러 가지 민속놀이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날 온 장안 사람들이 절을 찾아가서 등을 달아놓은 광경을 구경하였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면 관등의 즐거움과 더불어 각종 풍악을 울렸으며, 장안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다. 한편 이날 아이들은 등대 밑에 석남(石楠) 잎을 붙인 송편과 검은콩, 미나리, 나물 등을 벌여 놓는데, 이는 석가탄신일에 간소한 음식물로 손님을 맞이하여 즐기는 뜻의 놀이라고 한다. 그리고 등대 밑에 자리를 깔고 느티떡과 소금에 볶은 콩을 먹으며 동이에다 물을 담아 바가지를 엎어놓은 채 돌아가면서 두드리는데, 이 놀이를 수부(물장구)놀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민가의 놀이와 함께 사찰에서는 초파일을 기념하는 법회를 비롯하여 신도들은 성불도(成佛圖)놀이와 탑돌이 등 불교민속적 놀이를 행하였다. 특히 어린이날이 따로 없었던 때에는 이날이 어린이날 구실을 하였다.

초파일이 되면 절 앞에는 성대한 장이 섰는데, 대부분 어린이 용품이었다.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절에 가서 예불을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진기한 장난감을 얻어들고 오는 즐거운 날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가 제등행렬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이전의 관등놀이가 일제강점기에 폐지되었는데, 광복 후에 새롭게 변용된 행사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등행렬에서 각양각색의 등(燈)과 코끼리, 가면과 풍물패가 어우러져 현대적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음은 지난날의 축제 분위기를 전승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등(燃燈)의 의미도 많이 변하고 있다. 연등이란 등불을 밝히는 것을 말하는데, 오늘날에는 연등한다는 어원이 변용되어 ‘연등을 단다’로 바뀌었다. 따라서 종전의 연등행사는 연등을 다는 행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등(燈)도 연등(蓮燈)으로 통일되고 있는 추세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는 깨끗한 꽃이란 불교적 의미가 강조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초파일이라 하면 욕불행사(浴佛行事)를 빼놓을 수 없다. 욕불행사란 석가모니가 태어나자 구룡(九龍)이 와서 목욕시켰다는 전설에 따라, 이날이 되면 탄생불(誕生佛)을 욕불기(浴佛器) 안에 모셔놓고 신도들이 돌아가면서 바가지로 물을 끼얹어 목욕시키는 의례를 행한다. 이 욕불행사는 초파일에 행하는 연등행사와 함께 2대 행사의 하나로 매우 중요하다.

의의

사월 초파일은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와서 중생들에게 자비와 광명을 준 날이란 뜻에 일차적 의미가 있고, 그와 같은 의미가 민중의 구체적인 관심사와 결합하여 민중의 축제가 된 것이다.

따라서 초파일에 행하는 연등행사와 욕불행사의 불교적 의미는 지혜를 밝힌다는 상징성이 담겨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민중문화와 습합되면서 오랜 역사를 통하여 민중의 축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이날을 공휴일로 제정하여 초파일의 역사성과 문화적 의미를 국민 모두가 되새기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東國歲時記, 東國李相國集, 世祖實錄, 朝鮮王朝實錄, 太祖實錄, 太宗實錄, 朝鮮佛敎通史 (李能和 著, 慶熙出版社, 1968), 朝鮮金石文總覽 (朝鮮總督府 編, 亞細亞文化社, 1976), 佛敎와 民俗 (洪潤植, 東國大學校 附設 譯經院, 1980)

초파일

초파일
한자명

初八日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4월 > 정일

집필자 홍윤식(洪潤植)

정의

불교의 개조(開祖)인 석가모니(釋迦牟尼)의 탄생일.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불탄일(佛誕日), 욕불일(浴佛日), 석탄일(釋誕日)이라고도 한다. 사월 초파일이라 하는 것은 음력 4월 8일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 모두 4월 8일을 탄생일로 기념하지만, 일본은 음력이 아닌 양력 4월 8일로 고쳐 기념하고 있다.

초파일은 불교 4대 명절 가운데 하나이다. 2월 8일 석가(釋迦) 출가일(出家日), 2월 15일 열반일(涅槃日), 12월 8일 성도일(成道日)을 합쳐 불교의 4대 명절이라 한다. 이 4대 명절 중 초파일이 가장 큰 명절이다. 그러나 이날은 불자(佛子)이건 아니건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이 함께 즐겨온 민속명절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날은 연등행사(燃燈行事)와 관등(觀燈)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갖가지 행사가 벌어진다. 중국에서도 이날 연등행사가 이루어지나 우리나라처럼 성행하지는 않으며, 일본에서는 연등축제 대신 불전(佛前)에 꽃을 올리는 ‘하나마쯔리’로 대신하고 있다.

연등행사

연등행사 또는 연등축제로 펼쳐지는 불교의 명절인 초파일이 민속명절로 전승된 것은 재래로 전승되어 온 연등행사와 불교의 연등공양(燃燈供養)이 습합(習合)된 데 연유한다.

불교적 성격을 띤 국가 행사인 연등회(燃燈會)는 551년(진흥왕 12)에 팔관회(八關會)의 개설과 함께 국가적 행사로 열리게 되었고 특히 고려 때 성행하였다. 이는 불교문화권에서 성행하던 불교의례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불전에 등(燈)을 밝히는 등공양(燈供養)이 차공양(茶供養), 과공양(果供養), 미공양(米供養) 등과 더불어 중요시되었다. 그것은 불전에 등을 밝혀서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불덕(佛德)을 찬양하고,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께 귀의하여 구제를 받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경전인 『법화경(法華經)』의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서는 등공양의 공덕이 무량하다고 지적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의 감통편(感通篇)에도 불등(佛燈)에 관한 설화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등불을 밝히는 참된 의미에 대해 말한 것이다. 등을 밝히는 것이 곧 연등이고, 연등을 보면서 마음을 밝히는 것을 간등(看燈) 또는 관등(觀燈)이라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관등행사가 매년 정월 15일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연례적으로 이 행사가 행해졌고, 4월 8일의 연등행사 이외에도 민속적으로 전승되어 온 연등행사가 있었음을 일러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속적 연등행사와 불교적 연등행사가 습합되어 오늘의 4월 8일, 곧 초파일의 연등축제로 이어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따라서 연등회를 거국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시행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정월 15일에 연등이 있었으며, 이것이 987년(성종 6) 10월에 정회(停會)되었다가 현종 때 2월 15일에 다시 시행하였으며, 그 뒤에는 고려 멸망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행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빈번히 나타난다. 현종 이후의 연등설회(燃燈設會)에 관한 기록은 104번이나 되지만, 2월 연등회로 정하였던 연등회가 반드시 그 날짜를 지켜서 거행되지는 않았다. 1105년(숙종 10)에는 정월에 연등을 행하였고, 의종 때도 정월에 20여 회가 열렸다. 그리고 1105년의 연등에 대하여 『고려사』에는 다른 연등 기사와는 달리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태조의 정신을 의식적으로 추종했음을 의미한다. 의종 당시에는 인종의 기일(忌日)을 피하기 위하여 정월 연등을 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명종 때에는 15회 연등행사를 거행하였는데 대부분 2월에 열렸다. 『고려사』에 따르면 인종의 기일이 정월이므로 2월로 하자는 청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연등은 망일(望日)에 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날이 한식(寒食)인 경우에는 15일 미리 앞당겨서 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기적인 연등회뿐만 아니라 특설 연등회가 수시로 열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1067년(문종 21) 흥왕사(興王寺)가 낙성되었을 때 축제와 함께 연등회가 5일 밤낮 동안 성대히 행해졌다. 또한 1073년 2월에는 봉은사(奉恩寺)에서 불상을 새로 조성하고 경찬(慶讚)을 위한 연등회가 열려 관등(觀燈)과 주연(酒宴)이 밤늦도록 베풀어졌음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문종 때는 경령전(景靈殿), 중광전(重光殿)에서 성대한 연등회가 있었고, 선종이 8월부터 11월 초순까지 서경(西京)에 머무르는 동안 서경의 흥국사에서 연등도량(燃燈道場)이 열렸고 거리에도 등을 달았다. 1102년(숙종 7) 9월에도 궁궐에서 신호사(神濩寺)까지의 길에 수만 개의 등을 달았고, 1296년(충렬왕 22) 5월에는 공주가 신호사에 가서 연등을 하였는데, 주옥(珠玉)으로 등을 만들어 매우 화려하였다고 한다. 1314년(충숙왕 1) 2월에는 묘련사(妙蓮寺)에서, 3월에는 왕륜사(王輪寺)에서, 1319년 2월에는 강안전(康安殿)에서 공주가 연등하였고, 1324년에는 상왕이 정경궁(廷慶宮)에서 5일 동안 점등하였다고 한다. 12월에는 정경궁에서, 1331년(충혜왕 1) 정월에는 연복사(演福寺)에서 각각 승려 2,000명을 공양함과 동시에 2,000개의 등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만등회도 열렸다고 한다. 만등회는 등 1만 개를 점등하여 공양하는 의식으로, 이 만등회는 이미 1166년(의종 20)에 열린 기록이 있다. 또한 공민왕도 문수법회(文殊法會) 때 성대하게 연등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연등 외에도 고려에는 사월 초파일의 연등이 있었다. 이날은 석가탄신일로서 매우 성대하게 행해져 인도(印道: India)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널리 행해졌다. 고려의 경우에는 4월 8일부터 3일 밤낮 동안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월 초파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의종 때 백선연(白善淵)이 4월 8일에 점등하였다는 것이며, 그 후 궁중에서도 사월 초파일연등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은 직접 초파일에 연등행사를 열었고, 이때부터 초파일연등은 일반 서민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내용

연등은 고려시대에 본격화되어 어린이들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어린이들이 연등 비용을 만들기 위하여 한 달 전부터 종이를 오려서 대나무에 기를 달고 성중(城中)을 다니면서 쌀과 베를 구하는 호기풍속(呼旗風俗)이 생겨났고, 공민왕도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들에게 쌀을 하사한 적이 있다.

이 호기풍속은 연등행사에 따르는 결정적인 민속으로 변하여 조선시대 연등행사에 영향을 주었다. 그와 같은 연등 의식과 행례는 왕이 봉은사 행향(行香)에 따르는 원칙에 준해서 총 1,500명이 넘는 대규모로 베풀어졌고, 대회(大會)와 소회(小會)로 나누어 의식을 거행하였다. 연등회 날은 공휴일이었고 이 연등회의 모든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연등도감(燃燈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언제부터 설치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초기에는 상원연등과 초파일연등이 계속되었으나 1415년(태조 15)에 초파일연등을 중지시켰고, 1416년 이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상원연등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414년부터는 정월연등을 대신하는 수륙재(水陸齋)가 열렸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사는 유주(有主), 무주(無主)의 고혼(孤魂)을 천도하는 의식이다. 조선 태조는 이 수륙재를 2월과 10월에 열었다. 이는 불교에 신심(信心)이 두터웠던 태조가 유생(儒生)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호국신앙의 성격을 띤 봄과 가을의 수륙재를 통하여 연등회와 팔관회를 정기적 행사로 합리화시킨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정월 15일 연등은 조선시대에 와서 수륙재라는 이질적인 현상을 나타내었지만, 초파일연등은 많은 기복을 겪으면서도 꾸준하게 전승되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상에서 보면 초파일은 석가탄신일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이날의 중요행사로 지혜와 광명을 밝힌다는 신앙적 의미가 부각되어 연등행사를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이 같은 연등행사는 고대부터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의 농경의례 등에 자연스럽게 뒷받침되고 습합되면서 고려시대까지는 이 세 가지 연등행사가 국가적 행사로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 연등회의 국가적 행사로서의 의미가 사라지자 점차 쇠퇴일로에 이르지만, 사월 초파일연등만은 불교교단과 신도들에 의해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초파일연등이 석가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계속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여기에는 고려시대까지 계속 성행해 온 민속적 의미가 강한 정월연등, 2월 연등의 행사까지 아울러 행하게 됨으로써 초파일은 단순히 불교적 의미만이 아닌 우리 민족 고유의 세시풍속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월 초파일은 불교인이 아니라도 우리 민족에게 세시명절의 하나로 깊이 자리잡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적 세시명절인 사월 초파일이 절대적인 석가모니의 탄신일은 아니다. 그것은 석가의 탄신일로 상징적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왜냐하면 석가탄신일을 4월 8일로 하는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뿐이며, 일본은 음력 4월 8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고 양력 4월 8일로 바꾸었고, 동남아 불교국가에서는 5월과 6월로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이 탄생을 상징하고 있는 데서 석가의 탄생일이 정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이날은 불교인만의 명절이 아니라 보편성을 지닌 만인의 명절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사월 초파일은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명절로 정착되어 온 것이다. 그것은 서양인들에 의한 성탄절이 기독교인만의 명절이 아니라 만인의 명절이 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초파일에 신도들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관불회(灌佛會), 연등행사, 탑돌이를 한다. 초파일 행사 중 연등행사가 가장 성대하게 행해지고 초파일하면 너도나도 등을 다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석가탄신일인 초파일에 등을 단다는 것은 무명(無明)을 밝힌다는 불교적 의미가 일차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모든 민족의 명절로 선행하게 된 데에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보편적 의미와 그것을 농경의례화한 우리 민족의 지혜가 한데 어우러져 세시풍속으로 또는 민족의 명절로 오늘에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등행사에서 등(燈)을 만들 때에도 민속적 취향에 따라 수박등, 거북등, 오리등, 일월등, 학등, 배등, 연화등, 잉어등, 항아리등, 누각등, 가마등, 마늘등, 화분등, 방울등, 만세등, 태평등, 병등, 수복등을 만들어 연등에 민속신앙의 의미를 한층 더 덧붙였음이 『동국세시기』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등을 다는 데에도 등대(燈臺)를 세워서 각종 깃발로 장식을 하고 휘황찬란한 연등을 하며, 강에는 연등을 실은 배를 띄워 온 누리를 연등 일색으로 변화시킨다. 이와 같은 축제 분위기의 연등행사는 자연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이를 관등(觀燈)이라고 한다. 연등과 관등이 있는 곳에는 각종 민속놀이도 성행하였다. 초파일에 하는 놀이를 총칭하여 파일[八日]놀이라고 하는데, 그 중 형형색색의 등과 그 불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만석중놀이가 있다. 이를 영등(影燈)놀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영등 안에는 갈이틀을 만들어 놓고 종이에 개와 매를 데리고 말을 탄 사람이 호랑이, 이리, 사슴, 노루 등을 사냥하는 모습을 그려서 갈이틀에 붙이게 된다. 등이 바람에 의해 빙빙 돌아가면 여러 가지 그림자가 비친다. 그리고 호화찬란하게 장식한 등대에 많이 달 때에는 10여 개의 등을, 적게 달 때에는 3개 정도를 달았다. 이와 같은 등대를 고려시대에는 사찰뿐만 아니라 관청, 시장, 일반 민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았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찰과 민가로 제한된 듯하고, 오늘날에는 일가일등운동(一家一燈運動)을 전개하고 있으나 대개 사찰에서만 연등하고 있다. 그리고 등을 다는 숫자도 과거에는 식구 수만큼 달았으나, 오늘날에는 한 등에 식구들의 이름을 모두 써서 붙이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초파일 행사에 관민(官民)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민가에서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민속행사로 치러졌으나, 오늘날에는 불교인들만이 참여하는 행사로 제한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불교 이외에도 기독교 등 다른 종교가 수용되어 다른 종교에서는 불교적인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데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재래의 사월 초파일이 비단 불교적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민속적으로도 큰 명절이었음은 그날 즐기던 여러 가지 민속놀이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날 온 장안 사람들이 절을 찾아가서 등을 달아놓은 광경을 구경하였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면 관등의 즐거움과 더불어 각종 풍악을 울렸으며, 장안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다. 한편 이날 아이들은 등대 밑에 석남(石楠) 잎을 붙인 송편과 검은콩, 미나리, 나물 등을 벌여 놓는데, 이는 석가탄신일에 간소한 음식물로 손님을 맞이하여 즐기는 뜻의 놀이라고 한다. 그리고 등대 밑에 자리를 깔고 느티떡과 소금에 볶은 콩을 먹으며 동이에다 물을 담아 바가지를 엎어놓은 채 돌아가면서 두드리는데, 이 놀이를 수부(물장구)놀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민가의 놀이와 함께 사찰에서는 초파일을 기념하는 법회를 비롯하여 신도들은 성불도(成佛圖)놀이와 탑돌이 등 불교민속적 놀이를 행하였다. 특히 어린이날이 따로 없었던 때에는 이날이 어린이날 구실을 하였다.

초파일이 되면 절 앞에는 성대한 장이 섰는데, 대부분 어린이 용품이었다.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절에 가서 예불을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진기한 장난감을 얻어들고 오는 즐거운 날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가 제등행렬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이전의 관등놀이가 일제강점기에 폐지되었는데, 광복 후에 새롭게 변용된 행사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등행렬에서 각양각색의 등(燈)과 코끼리, 가면과 풍물패가 어우러져 현대적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음은 지난날의 축제 분위기를 전승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등(燃燈)의 의미도 많이 변하고 있다. 연등이란 등불을 밝히는 것을 말하는데, 오늘날에는 연등한다는 어원이 변용되어 ‘연등을 단다’로 바뀌었다. 따라서 종전의 연등행사는 연등을 다는 행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등(燈)도 연등(蓮燈)으로 통일되고 있는 추세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는 깨끗한 꽃이란 불교적 의미가 강조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초파일이라 하면 욕불행사(浴佛行事)를 빼놓을 수 없다. 욕불행사란 석가모니가 태어나자 구룡(九龍)이 와서 목욕시켰다는 전설에 따라, 이날이 되면 탄생불(誕生佛)을 욕불기(浴佛器) 안에 모셔놓고 신도들이 돌아가면서 바가지로 물을 끼얹어 목욕시키는 의례를 행한다. 이 욕불행사는 초파일에 행하는 연등행사와 함께 2대 행사의 하나로 매우 중요하다.

의의

사월 초파일은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와서 중생들에게 자비와 광명을 준 날이란 뜻에 일차적 의미가 있고, 그와 같은 의미가 민중의 구체적인 관심사와 결합하여 민중의 축제가 된 것이다.

따라서 초파일에 행하는 연등행사와 욕불행사의 불교적 의미는 지혜를 밝힌다는 상징성이 담겨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민중문화와 습합되면서 오랜 역사를 통하여 민중의 축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이날을 공휴일로 제정하여 초파일의 역사성과 문화적 의미를 국민 모두가 되새기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東國歲時記, 東國李相國集, 世祖實錄, 朝鮮王朝實錄, 太祖實錄, 太宗實錄
朝鮮佛敎通史 (李能和 著, 慶熙出版社, 1968)
朝鮮金石文總覽 (朝鮮總督府 編, 亞細亞文化社, 1976)
佛敎와 民俗 (洪潤植, 東國大學校 附設 譯經院,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