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家禮)

한자명

家禮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자료

집필자 임민혁(任敏赫)

정의

성리학性理學을 완성한 주희朱熹의 저작으로 알려진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가례서.

내용

조선 태조太祖(재위 1392~1398)는 즉위교서卽位敎書의 네 번째 강령을 통해, 나라의 큰 법인 관혼상제를 실시하여 인륜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근거한 예제의 실천과 사당의 설치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예치사회에서는 가家에서 국國까지의 모든 질서와 권위가 사당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었다. 주자가 『가례家禮』에서 통례를 가장 앞에 둔 것도 이러한 인식에서 나왔다.

『주자가례』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시된 교화서이며, 모든 가례의 전범이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고려 말경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중국 송대宋代의 주희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권1부터 권5까지 모두 다섯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권1은 통례通禮이며, 관혼상제의 사례四禮가 그다음부터 차례로 수록되었다.

가례는 보통 관혼상제를 가리킨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면, ‘관례冠禮’는 성년에 이른 사람이 성인의 예를 책임지도록 하기 위한 성인식이다. 성인의 예를 책임지게 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아우로서, 신하로서, 연소자로서 예에 알맞게 행동하는 책임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례는 유교의 효제충순孝悌忠順이 반영된 의례임을 알 수 있다. 여자의 성인식은 ‘계례筓禮’라고 한다.

‘혼례婚禮’는 육례六禮를 간편화하여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사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는 친영이었다. 조선 초기의 혼속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서류부가제壻留婦家制)이었다. 유교 이념에 배치되는 이 혼속은 당연히 폐기하고 친영을 시행해야 했다. 그러나 친영을 시행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반친영半親迎의 형식이 행해지기 시작하여 점차 관행화하였다.

상장례喪葬禮’ 역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과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불교사회에서 유교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불교식 상장례는 쇠퇴하고 그 밖의 민간신앙은 음사淫祀로 규정되어 모두 배격당했다. 이러한 갈등과 충돌은 『주자가례』에 근거한 예제의 강요와 이를 기준으로 한 예제의 시행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상장례는 상례喪禮와 장례葬禮를 합성한 말이다. 상례는 3년의 복상 기간에 행하는 모든 의례이며, 장례는 그중에서 특히 시신을 땅에 묻어 무덤을 조성하는 일체의 의례를 가리킨다. 그 절차는 초종初終에서 시작하여 27개월 만에 행하는 담제禫祭를 마지막으로 탈상함으로써 끝이 난다. 상장례는 통과의례通過儀禮의 측면에서 이탈과 전이, 통합의 순환 모델을 갖추고 있다. 국가 통합 및 사회질서 확립에 일정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상장례는 그럼으로써 길례(제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주자가 가장 강조한 오복제도五服制度는 가계의 적장자 상속을 통해 수직적 질서의 원리인 종법宗法을 합리화·정당화하는 관념의 소산이었다.

‘제례祭禮’는 관혼상제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종법사회에서 제사보다 더 크고 중요한 예는 없었다. 제사는 시조를 비롯한 조상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제사의 종류로는 시조제始祖祭 혹은 초조제初祖祭부터 시작해서 사시제四時祭, 선조제先祖祭, 녜제禰祭, 기제忌祭, 묘제墓祭 등이 있다. 묘제를 제외한 나머지 제사의 거행 장소는 모두 사당이었다. 사당은 종법의 질서체계에 따라 조상을 모신 제사 공간이다. 사당에서 치르는 신성한 제사는 종자宗子의 일원적인 가족지배 질서를 상징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식이었다. 집안의 모든 사람이 이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유교 이념에 입각한 기초 질서를 확립하고 집안의 화목과 우의를 다질 수 있었다.

이러한 가례는 정부의 적극적인 교화정책으로 널리 보급되고 이해되면서, 조선 중기 이후에는 가례와 관련 있는 각종 주석서와 연구서가 쏟아져 나왔다. 16세기 중반 이래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은 고례의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임진왜란 직후의 무너진 사회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예의를 강조하였다. 그 과정에서 편찬된 가례서로는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봉선잡의奉先雜儀』를 비롯하여 신의경申義慶(1557∼1648)의 『상례비요喪禮備要』,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가례집람家禮輯覽』,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가례고증家禮考證』, 유계兪棨(1607∼1664)의 『가례원류家禮源流』,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 이재李縡(1680∼1746)의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가례의 연구와 보급은 예속이 사회와 가정생활의 준칙으로 보편화하면서 뚜렷한 전통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였다.

인간의 감정 중시에서 비롯된 사회의 여러 의식이 사회와 인정의 수요에 응하여 관례, 혼례, 상례, 제례 등 허다한 의절로 설계되어 하나의 제도로 정해진 『주자가례』는 예의를 통한 사회의 안정과 국가 흥성의 중요한 기초로 기능한 예서이다.

가례

가례
한자명

家禮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자료

집필자 임민혁(任敏赫)

정의

성리학性理學을 완성한 주희朱熹의 저작으로 알려진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가례서.

내용

조선 태조太祖(재위 1392~1398)는 즉위교서卽位敎書의 네 번째 강령을 통해, 나라의 큰 법인 관혼상제를 실시하여 인륜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근거한 예제의 실천과 사당의 설치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예치사회에서는 가家에서 국國까지의 모든 질서와 권위가 사당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었다. 주자가 『가례家禮』에서 통례를 가장 앞에 둔 것도 이러한 인식에서 나왔다.

『주자가례』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시된 교화서이며, 모든 가례의 전범이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고려 말경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중국 송대宋代의 주희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권1부터 권5까지 모두 다섯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권1은 통례通禮이며, 관혼상제의 사례四禮가 그다음부터 차례로 수록되었다.

가례는 보통 관혼상제를 가리킨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면, ‘관례冠禮’는 성년에 이른 사람이 성인의 예를 책임지도록 하기 위한 성인식이다. 성인의 예를 책임지게 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아우로서, 신하로서, 연소자로서 예에 알맞게 행동하는 책임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례는 유교의 효제충순孝悌忠順이 반영된 의례임을 알 수 있다. 여자의 성인식은 ‘계례筓禮’라고 한다.

‘혼례婚禮’는 육례六禮를 간편화하여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사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는 친영이었다. 조선 초기의 혼속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서류부가제壻留婦家制)이었다. 유교 이념에 배치되는 이 혼속은 당연히 폐기하고 친영을 시행해야 했다. 그러나 친영을 시행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반친영半親迎의 형식이 행해지기 시작하여 점차 관행화하였다.

‘상장례喪葬禮’ 역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과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불교사회에서 유교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불교식 상장례는 쇠퇴하고 그 밖의 민간신앙은 음사淫祀로 규정되어 모두 배격당했다. 이러한 갈등과 충돌은 『주자가례』에 근거한 예제의 강요와 이를 기준으로 한 예제의 시행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상장례는 상례喪禮와 장례葬禮를 합성한 말이다. 상례는 3년의 복상 기간에 행하는 모든 의례이며, 장례는 그중에서 특히 시신을 땅에 묻어 무덤을 조성하는 일체의 의례를 가리킨다. 그 절차는 초종初終에서 시작하여 27개월 만에 행하는 담제禫祭를 마지막으로 탈상함으로써 끝이 난다. 상장례는 통과의례通過儀禮의 측면에서 이탈과 전이, 통합의 순환 모델을 갖추고 있다. 국가 통합 및 사회질서 확립에 일정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상장례는 그럼으로써 길례(제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주자가 가장 강조한 오복제도五服制度는 가계의 적장자 상속을 통해 수직적 질서의 원리인 종법宗法을 합리화·정당화하는 관념의 소산이었다.

‘제례祭禮’는 관혼상제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종법사회에서 제사보다 더 크고 중요한 예는 없었다. 제사는 시조를 비롯한 조상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제사의 종류로는 시조제始祖祭 혹은 초조제初祖祭부터 시작해서 사시제四時祭, 선조제先祖祭, 녜제禰祭, 기제忌祭, 묘제墓祭 등이 있다. 묘제를 제외한 나머지 제사의 거행 장소는 모두 사당이었다. 사당은 종법의 질서체계에 따라 조상을 모신 제사 공간이다. 사당에서 치르는 신성한 제사는 종자宗子의 일원적인 가족지배 질서를 상징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식이었다. 집안의 모든 사람이 이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유교 이념에 입각한 기초 질서를 확립하고 집안의 화목과 우의를 다질 수 있었다.

이러한 가례는 정부의 적극적인 교화정책으로 널리 보급되고 이해되면서, 조선 중기 이후에는 가례와 관련 있는 각종 주석서와 연구서가 쏟아져 나왔다. 16세기 중반 이래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은 고례의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임진왜란 직후의 무너진 사회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예의를 강조하였다. 그 과정에서 편찬된 가례서로는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봉선잡의奉先雜儀』를 비롯하여 신의경申義慶(1557∼1648)의 『상례비요喪禮備要』,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가례집람家禮輯覽』,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가례고증家禮考證』, 유계兪棨(1607∼1664)의 『가례원류家禮源流』,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 이재李縡(1680∼1746)의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가례의 연구와 보급은 예속이 사회와 가정생활의 준칙으로 보편화하면서 뚜렷한 전통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였다.

인간의 감정 중시에서 비롯된 사회의 여러 의식이 사회와 인정의 수요에 응하여 관례, 혼례, 상례, 제례 등 허다한 의절로 설계되어 하나의 제도로 정해진 『주자가례』는 예의를 통한 사회의 안정과 국가 흥성의 중요한 기초로 기능한 예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