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양절(重陽節)

중양절

한자명

重陽節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9월 > 정일

집필자 정승모(鄭勝謨)

정의

음력 9월 9일을 가리키는 날로 날짜와 달의 숫자가 같은 중일(重日) 명절(名節)의 하나. 중일 명절은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 같이 홀수 곧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에만 해당하므로 이날들이 모두 중양(重陽)이지만 특히 9월 9일을 가리켜 중양이라고 하며 중구(重九)라고도 한다. 또 ‘귈’이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다. 음력 삼월 삼짇날 강남에서 온 제비가 이때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가을 하늘 높이 떠나가는 철새를 보며 한해의 수확을 마무리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유래

중양절은 중국에서 유래한 명절로, 그곳에서도 매년 음력 9월 9일에 행하는 한족의 전통 절일이다. 중양절은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당송(唐宋) 대에는 추석보다 더 큰 명절로 지켜졌다.

등고회(登高會)는 중양절의 중요한 행사인데 이날 우산(牛山)에 올라 눈물을 흘렸다는 제나라 경공(景公)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중국에서는 이미 전국시대부터 행해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내려오는 전설에 동한(東漢) 때 앞날을 잘 맞추는 비장방(費長房)이라는 도인(道人)이 어느 날 학생인 항경[恒景, 桓景]에게 “자네 집은 9월 9일에 큰 난리를 만나게 될 터이니 집으로 돌아가 집사람들과 함께 수유(茱萸)를 담은 배낭을 메고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면 재난을 면할 수 있네.”라고 하였다. 항경이 이날 그가 시킨 대로 가족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다가 집에 돌아오자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고 한다. 중양절에 수유 주머니를 차고 국화주를 마시며 높은 산에 올라가는 등고 풍속은 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유 주머니를 차는 것은 나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해서이고, 국화주를 마시는 것은 노화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기능적인 해석도 있다.

내용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래로 군신들의 연례 모임이 이날 행해졌으며, 특히 고려 때는 국가적인 향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 세종 때에는 중삼 곧 3월 3일과 중구를 명절로 공인하고 중구를 무척 중요하게 여겨 늙은 대신들을 위한 잔치인 기로연(耆老宴)을 추석에서 중구로 옮겼으며, 또 중양절에 특별히 과거시험을 실시하여 이날을 기리기도 하였다.

중양절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벌어지는데, 국가에서는 고려 이래로 정조(正朝),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임금이 참석하는 제사를 올렸고, 사가(私家)에서도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省墓)를 하였다. 또 양(陽)이 가득한 날이라고 하여 수유 주머니를 차고 국화주를 마시며 높은 산에 올라가 모자를 떨어뜨리는 등고의 풍속이 있었고 국화를 감상하는 상국(賞菊), 장수(長壽)에 좋다는 국화주를 마시거나 혹은 술잔에 국화를 띄우는 범국(泛菊) 또는 황화범주(黃花泛酒),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시주(詩酒)의 행사를 가졌다. 서울 사람들은 이날 남산과 북악에 올라가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놀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등고하는 풍습을 따른 것이다.

중양절에는 이와 같이 제사, 성묘, 등고 또는 각종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관리들에게 하루의 휴가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관리들이 자리에 없기도 하였지만 또한 명절이었으므로 이날은 형(刑) 집행을 금하는 금형(禁刑)의 날이기도 하였다.

한편 중양절은 농촌이 한창 바빠지는 때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그해 논농사를 결산하는 추수를 하고, 여자들은 마늘을 심거나 고구마수확한다. 퇴비만들기, 논물 빼기, 논 피사리 등은 남녀 공동작업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목화도 따야 하고, 또 콩, 팥, 조, 수수, 무, 배추 같은 밭작물의 파종과 수확이 겹친다. 그러므로 농촌에서는 중양절이라고 하여 특별한 행사를 벌이기보다는 평상 때와 똑같이 보내는 곳이 더 많다. 그러나 양수가 겹친 길일(吉日)이므로 여유가 있는 계층에서는 이날을 즐겼다. 등고 풍속이 그러하고 국화잎을 따서 찹쌀가루와 반죽하여 화전을 만들어 먹는 것도 그 예가 된다.

추석 때 햇곡식으로 제사를 올리지 못한 집안에서는 뒤늦게 조상에게 천신(薦新)을 한다. 떡을 하고 집안의 으뜸신인 성주신에게 밥을 올려 차례를 지내는 곳도 있다. 전남 고흥의 한 지역에서는 이때 시제(時祭)를 지내는데, 이를 ‘귈제’라고 한다.

과거에는 각 마을마다 또는 두세 개 마을에 한 명씩 동네 단골무당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연말에 이장에게 이세(里稅)를 내듯이 중양절이 되면 이들에게 시주를 하는데,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음에 탈이 있을 때 단골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중양절이 되면 나라에서 태학(太學)의 학생들에게 겨울옷을 하사하는 의식이 있었다. 중양절 무렵이 겨울을 준비하는 적절한 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구절의 국화술은 중국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과도 관련이 있다. 그가 이날 국화밭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데 흰옷을 정갈하게 입은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도연명의 친구가 보낸 술을 가지고 온 것이다. 연명은 국화꽃과 함께 온종일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의 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도 중양절에 술을 마시며 도연명의 운치를 깨달았는지 “우연히 울 밑의 국화를 대하니 낯이 붉어지네.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쏘아보는구나.”라는 글귀를 남겼다. 두목(杜牧)이 남긴 취미(翠微)의 시구에도 이날 좋은 안주와 술을 마련해놓고 친구들을 불러서 실솔시(蟋蟀詩)를 노래하고 무황계(無荒戒)를 익혔다고 한다.

의례

『고려사(高麗史)』에는 이날 중구연(重九宴) 또는 중양연(重陽宴)을 열었다는 기사가 있다. 국가가 규례를 정하여 내외의 신하들과 송나라, 탐라(耽羅), 흑수(黑水)의 외객들까지 축하연에 초대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임금이 사신(使臣)들에게 특별히 주연을 베풀었다. 또 탁주(濁酒)와 풍악을 기로(耆老)와 재추(宰樞)에게 내리고 보제원(普濟院)에 모여서 연회하게 하였다.

선조(宣祖) 때 예조에서 제향 절차에 대해 아뢰면서 중양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속절(俗節)로 열거되어 있지 않지만, 이날 시식(時食)으로써 천신하는 것이 고례(古禮)이므로 속절에 해당하는 제사가 행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은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 정조, 한식, 단오, 중추와 함께 중양을 속절로 여겨 아침 일찍 사당에 들러 천식(薦食)하고 이어 묘 앞에서 전배(奠拜)한다고 하였다.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黙齋日記)』를 보면 조선 중기까지 사가(私家)에서는 중양절은 등고 외에 간혹 간단한 천주과지례(薦酒果之禮) 곧 천신례가 있을 뿐 묘제를 행하는 한식에 비하면 속절로서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와 삼짇날과 중양일이 함께 또는 둘 중의 하나가 원래 중월(仲月)에 복일(卜日)하여 행하던 사시제(四時祭)의 한 축으로 설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조선 전기까지는 시제(時祭)보다 기제(忌祭)를 중요하게 여기다가 중엽에 이르러 사대부들이 시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일년 4회의 시제가 부담되었으므로 이를 춘추(春秋) 2회로 줄여 봄에는 삼짇날에, 가을에는 중양절에 지내는 자가 많아졌다고 하였다.

중양절의 시제는 조선 후기 이후 특히 영남지방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모신 집안들을 중심으로 행해져 왔다. 유교 제례에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4대가 지나면 사당에 모시던 신주를 묘에 묻게 되어 있으며, 나라에서 부조(不祧), 즉 묘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있어야 사당에 신주를 두고 계속 기제사로 모실 수 있다. 이 부조가 인정된 조상에 대한 시제는 각별히 중일을 택하여 삼월 삼짇날이나 구월 중양절에 제사를 지내는데, 특히 중양 때가 되어야 햇곡을 마련할 수 있었으므로 첫 수확물을 조상에게 드린다는 의미도 지닌다. 영남지방에는 중양절에 불천위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집안들이 간혹 있지만 날이 갈수록 더 귀해지고 있다.

절식

중양절은 국화가 만발할 때이므로 국화주, 화전을 만들어 먹는다. 국화주는 꽃을 따서 술 한 말에 꽃 두 되 꼴로 베주머니에 넣어 술독에 담아 뚜껑을 덮어둔다. 약주에 국화꽃을 띄워 국화주를 즐길 수도 있다. 화전, 화채, 술에 모두 쓰이는 국화는 재래종인 감국(甘鞠)이어야 향기도 좋고 오랫동안 싱싱하다.

국화전은 노란 국화꽃잎을 따서 국화 찹쌀떡을 만드는데, 그 방법은 삼월 삼짇날의 진달래떡을 만드는 방법과 같으며, 이름도 화전(花煎)이라고 한다. 봄의 진달래 화전은 율무를 많이 쓰는 반면 가을의 국화전은 찹쌀가루를 많이 쓴다. 중국 양나라 사람 오균(吳均)이 지은 『서경잡기(西京雜記)』에 “한나라 무제(武帝) 때 궁녀 가패란(賈佩蘭)이 9일에 이(餌) 떡을 먹었다.”라고 했는데, 이(餌)란 경단[餻]을 말하는 것이다. 송나라 사람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도시 사람들이 중구(重九)에 가루로 떡을 쪄서 서로 선물한다.”라고 했다. 잘게 썬 배와 유자(柚子)와 석류(石榴)와 잣 등을 꿀물에 탄 것을 화채(花菜)라고 하는데, 이것들도 모두 중양절 음식으로 제사에 쓴다.

의의

추석이 햇곡으로 제사 지내기 이른 계절이 되어감에 따라 추수가 마무리되는 중양절에 중구차례를 지내는 등 논농사의 발전에 따라 조상을 위하는 날의 의미를 더해갔다. 조선시대에 이날 기로연을 베풀었다는 사실은 장수에 좋다는 국화주를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에서는 물론 민간에서도 이날을 경로(敬老)의 날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擊蒙要訣, 京都雜志, 高麗史, 國朝五禮儀, 東京夢華錄, 東國歲時記, 黙齋日記, 奉先雜儀, 西京雜記, 宣祖實錄, 成宗實錄, 世祖實錄, 世宗實錄, 洌陽歲時記, 朝鮮常識-風俗 編 (崔南善, 1948), 韓國의 歲時風俗 (張籌根, 螢雪出版社, 1984), 中國民族節日大全 (高占祥 主編, 知識出版社, 1993), 歲時關聯 記錄들을 통해 본 조선시기 歲時風俗의 變化 (鄭勝謨, 역사민속학13, 한국역사민속학회, 2001)

중양절

중양절
한자명

重陽節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9월 > 정일

집필자 정승모(鄭勝謨)

정의

음력 9월 9일을 가리키는 날로 날짜와 달의 숫자가 같은 중일(重日) 명절(名節)의 하나. 중일 명절은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 같이 홀수 곧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에만 해당하므로 이날들이 모두 중양(重陽)이지만 특히 9월 9일을 가리켜 중양이라고 하며 중구(重九)라고도 한다. 또 ‘귈’이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다. 음력 삼월 삼짇날 강남에서 온 제비가 이때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가을 하늘 높이 떠나가는 철새를 보며 한해의 수확을 마무리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유래

중양절은 중국에서 유래한 명절로, 그곳에서도 매년 음력 9월 9일에 행하는 한족의 전통 절일이다. 중양절은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당송(唐宋) 대에는 추석보다 더 큰 명절로 지켜졌다.

등고회(登高會)는 중양절의 중요한 행사인데 이날 우산(牛山)에 올라 눈물을 흘렸다는 제나라 경공(景公)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중국에서는 이미 전국시대부터 행해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내려오는 전설에 동한(東漢) 때 앞날을 잘 맞추는 비장방(費長房)이라는 도인(道人)이 어느 날 학생인 항경[恒景, 桓景]에게 “자네 집은 9월 9일에 큰 난리를 만나게 될 터이니 집으로 돌아가 집사람들과 함께 수유(茱萸)를 담은 배낭을 메고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면 재난을 면할 수 있네.”라고 하였다. 항경이 이날 그가 시킨 대로 가족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다가 집에 돌아오자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고 한다. 중양절에 수유 주머니를 차고 국화주를 마시며 높은 산에 올라가는 등고 풍속은 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유 주머니를 차는 것은 나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해서이고, 국화주를 마시는 것은 노화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기능적인 해석도 있다.

내용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래로 군신들의 연례 모임이 이날 행해졌으며, 특히 고려 때는 국가적인 향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 세종 때에는 중삼 곧 3월 3일과 중구를 명절로 공인하고 중구를 무척 중요하게 여겨 늙은 대신들을 위한 잔치인 기로연(耆老宴)을 추석에서 중구로 옮겼으며, 또 중양절에 특별히 과거시험을 실시하여 이날을 기리기도 하였다.

중양절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벌어지는데, 국가에서는 고려 이래로 정조(正朝),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임금이 참석하는 제사를 올렸고, 사가(私家)에서도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省墓)를 하였다. 또 양(陽)이 가득한 날이라고 하여 수유 주머니를 차고 국화주를 마시며 높은 산에 올라가 모자를 떨어뜨리는 등고의 풍속이 있었고 국화를 감상하는 상국(賞菊), 장수(長壽)에 좋다는 국화주를 마시거나 혹은 술잔에 국화를 띄우는 범국(泛菊) 또는 황화범주(黃花泛酒),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시주(詩酒)의 행사를 가졌다. 서울 사람들은 이날 남산과 북악에 올라가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놀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등고하는 풍습을 따른 것이다.

중양절에는 이와 같이 제사, 성묘, 등고 또는 각종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관리들에게 하루의 휴가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관리들이 자리에 없기도 하였지만 또한 명절이었으므로 이날은 형(刑) 집행을 금하는 금형(禁刑)의 날이기도 하였다.

한편 중양절은 농촌이 한창 바빠지는 때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그해 논농사를 결산하는 추수를 하고, 여자들은 마늘을 심거나 고구마를 수확한다. 퇴비만들기, 논물 빼기, 논 피사리 등은 남녀 공동작업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목화도 따야 하고, 또 콩, 팥, 조, 수수, 무, 배추 같은 밭작물의 파종과 수확이 겹친다. 그러므로 농촌에서는 중양절이라고 하여 특별한 행사를 벌이기보다는 평상 때와 똑같이 보내는 곳이 더 많다. 그러나 양수가 겹친 길일(吉日)이므로 여유가 있는 계층에서는 이날을 즐겼다. 등고 풍속이 그러하고 국화잎을 따서 찹쌀가루와 반죽하여 국화전을 만들어 먹는 것도 그 예가 된다.

추석 때 햇곡식으로 제사를 올리지 못한 집안에서는 뒤늦게 조상에게 천신(薦新)을 한다. 떡을 하고 집안의 으뜸신인 성주신에게 밥을 올려 차례를 지내는 곳도 있다. 전남 고흥의 한 지역에서는 이때 시제(時祭)를 지내는데, 이를 ‘귈제’라고 한다.

과거에는 각 마을마다 또는 두세 개 마을에 한 명씩 동네 단골무당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연말에 이장에게 이세(里稅)를 내듯이 중양절이 되면 이들에게 시주를 하는데,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음에 탈이 있을 때 단골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중양절이 되면 나라에서 태학(太學)의 학생들에게 겨울옷을 하사하는 의식이 있었다. 중양절 무렵이 겨울을 준비하는 적절한 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구절의 국화술은 중국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과도 관련이 있다. 그가 이날 국화밭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데 흰옷을 정갈하게 입은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도연명의 친구가 보낸 술을 가지고 온 것이다. 연명은 국화꽃과 함께 온종일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의 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도 중양절에 술을 마시며 도연명의 운치를 깨달았는지 “우연히 울 밑의 국화를 대하니 낯이 붉어지네.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쏘아보는구나.”라는 글귀를 남겼다. 두목(杜牧)이 남긴 취미(翠微)의 시구에도 이날 좋은 안주와 술을 마련해놓고 친구들을 불러서 실솔시(蟋蟀詩)를 노래하고 무황계(無荒戒)를 익혔다고 한다.

의례

『고려사(高麗史)』에는 이날 중구연(重九宴) 또는 중양연(重陽宴)을 열었다는 기사가 있다. 국가가 규례를 정하여 내외의 신하들과 송나라, 탐라(耽羅), 흑수(黑水)의 외객들까지 축하연에 초대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임금이 사신(使臣)들에게 특별히 주연을 베풀었다. 또 탁주(濁酒)와 풍악을 기로(耆老)와 재추(宰樞)에게 내리고 보제원(普濟院)에 모여서 연회하게 하였다.

선조(宣祖) 때 예조에서 제향 절차에 대해 아뢰면서 중양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속절(俗節)로 열거되어 있지 않지만, 이날 시식(時食)으로써 천신하는 것이 고례(古禮)이므로 속절에 해당하는 제사가 행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은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 정조, 한식, 단오, 중추와 함께 중양을 속절로 여겨 아침 일찍 사당에 들러 천식(薦食)하고 이어 묘 앞에서 전배(奠拜)한다고 하였다.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黙齋日記)』를 보면 조선 중기까지 사가(私家)에서는 중양절은 등고 외에 간혹 간단한 천주과지례(薦酒果之禮) 곧 천신례가 있을 뿐 묘제를 행하는 한식에 비하면 속절로서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와 삼짇날과 중양일이 함께 또는 둘 중의 하나가 원래 중월(仲月)에 복일(卜日)하여 행하던 사시제(四時祭)의 한 축으로 설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조선 전기까지는 시제(時祭)보다 기제(忌祭)를 중요하게 여기다가 중엽에 이르러 사대부들이 시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일년 4회의 시제가 부담되었으므로 이를 춘추(春秋) 2회로 줄여 봄에는 삼짇날에, 가을에는 중양절에 지내는 자가 많아졌다고 하였다.

중양절의 시제는 조선 후기 이후 특히 영남지방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모신 집안들을 중심으로 행해져 왔다. 유교 제례에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4대가 지나면 사당에 모시던 신주를 묘에 묻게 되어 있으며, 나라에서 부조(不祧), 즉 묘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있어야 사당에 신주를 두고 계속 기제사로 모실 수 있다. 이 부조가 인정된 조상에 대한 시제는 각별히 중일을 택하여 삼월 삼짇날이나 구월 중양절에 제사를 지내는데, 특히 중양 때가 되어야 햇곡을 마련할 수 있었으므로 첫 수확물을 조상에게 드린다는 의미도 지닌다. 영남지방에는 중양절에 불천위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집안들이 간혹 있지만 날이 갈수록 더 귀해지고 있다.

절식

중양절은 국화가 만발할 때이므로 국화주, 국화전을 만들어 먹는다. 국화주는 꽃을 따서 술 한 말에 꽃 두 되 꼴로 베주머니에 넣어 술독에 담아 뚜껑을 덮어둔다. 약주에 국화꽃을 띄워 국화주를 즐길 수도 있다. 화전, 화채, 술에 모두 쓰이는 국화는 재래종인 감국(甘鞠)이어야 향기도 좋고 오랫동안 싱싱하다.

국화전은 노란 국화꽃잎을 따서 국화 찹쌀떡을 만드는데, 그 방법은 삼월 삼짇날의 진달래떡을 만드는 방법과 같으며, 이름도 화전(花煎)이라고 한다. 봄의 진달래 화전은 율무를 많이 쓰는 반면 가을의 국화전은 찹쌀가루를 많이 쓴다. 중국 양나라 사람 오균(吳均)이 지은 『서경잡기(西京雜記)』에 “한나라 무제(武帝) 때 궁녀 가패란(賈佩蘭)이 9일에 이(餌) 떡을 먹었다.”라고 했는데, 이(餌)란 경단[餻]을 말하는 것이다. 송나라 사람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도시 사람들이 중구(重九)에 가루로 떡을 쪄서 서로 선물한다.”라고 했다. 잘게 썬 배와 유자(柚子)와 석류(石榴)와 잣 등을 꿀물에 탄 것을 화채(花菜)라고 하는데, 이것들도 모두 중양절 음식으로 제사에 쓴다.

의의

추석이 햇곡으로 제사 지내기 이른 계절이 되어감에 따라 추수가 마무리되는 중양절에 중구차례를 지내는 등 논농사의 발전에 따라 조상을 위하는 날의 의미를 더해갔다. 조선시대에 이날 기로연을 베풀었다는 사실은 장수에 좋다는 국화주를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에서는 물론 민간에서도 이날을 경로(敬老)의 날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擊蒙要訣, 京都雜志, 高麗史, 國朝五禮儀, 東京夢華錄, 東國歲時記, 黙齋日記, 奉先雜儀, 西京雜記, 宣祖實錄, 成宗實錄, 世祖實錄, 世宗實錄, 洌陽歲時記
朝鮮常識-風俗 編 (崔南善, 1948)
韓國의 歲時風俗 (張籌根, 螢雪出版社, 1984)
中國民族節日大全 (高占祥 主編, 知識出版社, 1993)
歲時關聯 記錄들을 통해 본 조선시기 歲時風俗의 變化 (鄭勝謨, 역사민속학13, 한국역사민속학회, 2001)